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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李齊賢)은 자가 중사(仲思)이고, 초명(初名)은 이지공(李之公)이며,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진(李瑱)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의젓하여 성인 같았고 글을 지으면 이미 작자(作者)의 기풍이 있었다. 충렬왕(忠烈王) 27년(1301) 15살에 성균시(成均試)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다시 병과(丙科)에 적중하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것은 소소한 재주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경적(經籍)을 더욱 근면히 토론하였고 매우 넓고 깊으며[淹貫] 정밀하게 연구하였다. 이진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아마도 우리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하려는 구나.”라고 하였다. 〈충렬왕〉 34년(1308)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뽑혀 들어갔으며, 충선왕(忠宣王) 원년(1309)에 규정(糾正)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번 관직을 거쳐서 성균악정(成均樂正)이 되었다. 일찍이 풍저창(豊儲倉)과 내부시(內府寺)를 맡았을 때에는 곡식의 말[斗]과 섬[斛]을 살피고 아주 적은 양까지 감독하는데 어려운 기색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한계가 없는[不器] 군자로다.” 라고 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원(元)〉 인종(仁宗)을 도와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武宗)을 맞아들여 옹립하였으므로 〈황제의〉 총애와 대우가 상대할 것이 없었다. 마침내 충숙왕(忠肅王)에게 왕위를 전해주겠다고 요청하고 태위(太尉)로서 연경(燕京)의 사저에 머무르며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서사(書史)로 스스로 즐겼다. 이로 인하여 말하기를, “수도[京師]에서 문학하는 선비는 모두 천하에서 뽑혔는데 나의 부(府)에는 그런 사람이 없으니 이는 나의 부끄러움이다.”라고 하고는 이제현을 수도[都]로 불렀다. 그 때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頫) 등이 모두 왕의 문하에서 노닐었는데 이제현이 〈그들과〉 상종하면서 학문이 더욱 증진하였으므로 요수 등이 칭찬과 찬탄을 멈추지 않았다. 〈이후〉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옮겨서 서촉(西蜀)에 사신으로 갔는데, 도착하는 곳에서 지은 시[題詠]가 사람들 입에 회자되었으며, 그 후 선부전서(選部典書)로 뛰어 올랐다. 충선왕이 강향사(降香使)로 강남(江南)에 갈 때 이제현이 권한공(權漢功)과 함께 따랐는데, 왕은 누대(樓臺)가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만날 때마다 흥을 붙여 회포를 풀면서 말하기를, “이 사이에 이생(李生)이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충선왕이 일찍이 이제현에게 묻기를, “태조(太祖) 때에 거란(契丹)이 낙타를 보내었는데, 다리 아래에 매어두고 먹이를 주지 않아서 굶겨 죽게 하였다. 낙타가 비록 중국에서 생산되지는 않지만 중국에서도 일찍이 그것을 기르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나라의 임금이 수십 두의 낙타를 가지고 있다 한들 그 폐해가 백성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을 물리치면 그만이지 어찌하여 굶겨서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는가?”라고 하였다. 이제현이 대답하기를, “창업하여 자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임금은 그 식견이 원대하고 생각이 깊어서 후대 왕들이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송(宋)의 태조는 궁 안에서 돼지를 길렀는데 인종(仁宗)이 그것을 놓아주게 하였습니다. 뒤에 요망한 자를 만나 피를 취할 곳이 없게 되자 태조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정론(定論)이라고 할 수 없지만 태조가 돼지를 길렀던 뜻이 피를 얻는 것보다 더 큰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우리 태조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오랑캐들의 간사한 꾀를 꺾어버리려 하신 것이며, 〈또한〉 후세의 사치스러운 마음을 막으려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반드시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공경히 생각하시고 힘써 행하여 본받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충선왕이〉 또 묻기를,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문물(文物)이 중화(中華)와 같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배우려는 자들이 모두 승려[釋子]들에게서 글[章句]을 익히는 것은 어찌된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제현이 대답하기를, “예전에 태조께서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실 때에 하루도 여유가 없는 데도 먼저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기르셨습니다. 한번 서경[西都]에 행차하셔서 수재(秀才) 정악(廷鶚)을 박사(博士)로 임명하여 6부(部)의 생도들을 가르치게 하셨으며, 채색비단을 하사하시어 학업을 권장하셨고, 녹봉을 나누어주어 인재를 길렀으니 〈교육에 대해〉 마음을 쓰시는 것이 간절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광종(光宗) 이후로는 문교(文敎)를 더욱 정비하여 안으로는 국학(國學)을 숭상하고 지방에는 향교(鄕校)를 설치하여 동리마다 학교[庠序]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리니 이른바 문물이 중화와 같다는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종(毅宗) 말년에 무인(武人)이 변란을 일으키니 옥석(玉石)을 〈가리지 않고〉 모두 타버렸으며, 요행히 호구(虎口)에서 벗어난 자들은 깊은 산으로 도망가서 관복을 벗고 가사[伽梨]를 입은 채 여생을 마쳤으니 신준(神駿)과 오생(悟生)의 무리가 이러한 자들입니다. 그 뒤에 나라에서 차츰 문치(文治)를 회복하였지만 비록 학문에 뜻을 둔 선비는 있어도 배울 곳이 없어서 모두 이 무리들을 따르며 공부하게 되었으므로, 신(臣)은 공부하는 자들이 승려들을 좇아 공부하게 된 것은 그 기원이 이런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전하께서 학교를 확충하고 향교[庠序]를 돌아보며 6예(六藝)를 존중하고 오륜(五倫)을 밝힘으로써 선왕(先王)의 도를 천명하시면 누가 참된 유가(儒家)를 배반하고 승려를 따르겠습니까?”라고 하니, 충선왕이 기꺼이 그 말을 받아들였으며,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옮겨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칭호를 하사하고 또 토지와 노비를 하사함으로써 강남[燕吳]에서 호종한 공로를 포상하고, 황제에게 주청하여 고려왕부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을 제수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뒤에 다시 원(元)으로 갔는데,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이 원(元)의 도성(都省)에 글을 올려 고려에 성(省)을 설치하여 원의 내지(內地)와 같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이제현이 글을 써서 도당(都堂)에 올려 말하기를, “『중용(中庸)』에서 말하기를, ‘무릇 천하의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아홉 가지 원칙이 있지만 행하는 까닭은 하나이다. 끊어진 세상을 이어주고 망하는 나라를 일으켜주며, 어지러운 것을 다스려주고 위태로운 것을 붙들어주며, 후하게 보내주고 박하게 받는 것은 제후들을 포용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해설하는 자가 말하기를, ‘후사가 없는 자는 이어주고 이미 멸망한 자는 봉해 주어 상국(上國)과 하국(下國)이 서로 편안하고 대국(大國)과 소국(小國)이 서로 돕게 한다면, 천하가 모두 그 충성과 힘을 다하여 울타리처럼 왕실을 지킨다.’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제(齊) 환공(桓公)이 형후(邢候)를 옮기되 〈고국으로〉 돌아간 것처럼 해주었고, 위후(衛候)를 봉하여 위가 망(亡)한 것을 잊어버리게 하였으니, 이렇게 함으로써 〈제 환공이 제후를〉 규합하고 천하를 한번 바로잡아서 5패(五覇)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패자(覇者)도 오히려 이를 힘쓸 줄 알았는데, 하물며 세상[域中]에서 대국(大國)〈의 자리를〉 차지하고 천하[四海]를 집으로 삼은 천자이겠습니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는 시조 왕씨가 개국한지 어언 400여 년이 되었습니다. 〈또〉 신복(臣服)하여 성조(聖朝)에 해마다 공물[職貢]을 바친 지도 또 100여년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덕이 있는 것이 깊지 않은 것이 아니며, 〈원의〉 조정에 공이 있는 것도 두텁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무인년(1218)에 요민(遼民) 금산왕자(金山王子)라는 자가 중원(中原)의 민을 노략질하고 동쪽으로 〈본국의〉 도서(島嶼)로 들어와 제멋대로 날뛰었습니다. 태조성무(太祖聖武) 황제께서 합진(哈眞, 카치운)과 찰랄(札刺, 차라) 두 원수를 보내어 토벌하도록 하셨는데, 때마침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려 양식[餽餉]이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 충헌왕(忠憲王)께서 조충(趙冲)과 김취려(金就礪)에게 명하여 양식[資粮]을 공급하고 무기[器仗]를 원조하도록 하여 미친 듯한 도적들을 사로잡고 죽였으니, 빠르기가 대나무를 깨뜨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에 두 원수는 조충 등과 맹세하여 형제가 되어 만세토록 잊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또한 세조황제(世祖皇帝)께서 강남(江南)에서 기를 돌리실 때[返旆] 우리 충경왕(忠敬王)은 천명이 돌아가는 곳과 인심이 복종하는 바를 알아서 5,000여 리를 건너 양초(梁楚)의 교외에서 맞이하였습니다. 충렬왕(忠烈王)은 또한 몸소 조근(朝覲)하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고, 일본을 정벌할 때는 모든 병장기[敝賦]를 〈보급하고〉 선봉[前驅]이 되었으며, 합단(哈丹, 카다안)을 추격하여 토벌할 때는 〈상국의〉 관군을 도와 괴수를 섬멸하는 등 왕에게 부지런히 한 공로[勤王之效]는 낱낱이 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주를 시집보내시어 대대로 사위와 장인의 우호를 돈독히 하고 옛 풍속을 고치지 않음으로써 그 종묘와 사직을 보전한 것은 세조황제께서 내리신 조서에 힘입은 것입니다.
지금 들으니, 조정에서는 우리나라에 행성(行省)을 세워서 제로(諸路)와 같게 하려고 한다 합니다. 만약 과연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공은 논하지 않더라도 세조〈황제〉의 조지(詔旨)는 어떻게 합니까? 삼가 몇 해 전 11월에 새로 내려주신 조서의 조목을 읽어보건대, ‘사특한 것과 올바른 것에 대해 다른 길을 〈가서〉 사해 안[海宇]을 편안하게 함으로써 중통(中統)과 지원(至元) 연간의 정치를 회복시키고자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상(聖上)께서 이러한 덕스러운 말씀[德音]을 해 주신 것은 실로 온 사해(四海)의 복인데 오직 우리나라의 일에만 세조〈황제〉의 조지(詔旨)를 본받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까? 『중용(中庸)』이란 책은 공자(孔子)의 문하에서 후세에 교훈을 전하는 것으로 헛된 말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말한 것을 살펴보면 ‘〈왕통을〉 계승한 나라는 내가 또 다스릴 것이고, 망한 나라는 내가 또 일으킬 것이며, 어지러운 것은 다스리고 위태로운 것은 안정시킬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아무 이유도 없이 작은 나라[蕞爾之國]의 400년 왕업을 하루아침에 끊어버려, 사직에는 주인이 없게 하고 종묘[宗祧]에 바치는 제사조차 없어지게 하는 것은 이치로써 헤아려보아도 반드시 합당하지 않을 뿐입니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우리나라는 땅이 1,000리를 넘지 않으며 산림과 냇물과 습지와 같이 쓸모없는 땅이 7/10이나 됩니다. 그 땅에서 세를 거두어도 조운(漕運)에도 충당하지 못하고 그 민에게 조세를 부과해도 봉록(俸祿)을 지급하지 못할 정도이니, 〈상국〉 조정의 용도(用度)에 견준다면 구우일모(九牛一毛)일 뿐입니다. 더구나 땅이 멀고 백성은 어리석은데다가 언어는 상국과 같지 않고 취하거나 버리는[趨舍] 것이 중화(中華)와는 절대로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이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의구심을 품게 되어 집집마다 가서 깨우쳐주어도 안심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또한 왜민(倭民)들과 바다를 두고 마주보고 있으니, 만일 왜가 이를 듣는다면 우리의 일을 경계로 삼아 스스로 〈잘〉 대처하였다고 여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집사각하(執事閣下)께서는 세조께서 〈우리의〉 공을 생각한 뜻을 돌이켜보시고 『중용』에서 세상을 가르친 말씀을 기억하시어 국가는 그 국가대로, 사람은 그 사람대로 자신의 정치와 재정을 닦아 중국의 울타리가 되게 하여 우리가 끝없는[無疆] 기쁨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어찌 삼한(三韓)의 민이 집집마다 서로 경하하고 〈황제의〉 성덕을 노래할 뿐이겠습니까? 그 종묘사직의 영령들도 아득한 사이에서 감격하여 울 것입니다.”라고 하니, 마침내 그 논의가 잦아들었다.
충선왕(忠宣王)이 참소를 당해 티벳[吐蕃]으로 유배되자 이제현(李齊賢)이 다시 최성지(崔誠之)와 함께 원(元)의 낭중(郞中)에게 글을 바쳐 말하기를, “삼가 엎드려, 바닷가[海濱]에서 아름다운 명성을 흠모하고 낮은 풍속[下風]을 높인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당신의〉 고고한 풍모[梧竹之標]를 뵙고 고담준론[秋陽之論]을 듣기를 생각하였지만, 돌아보건대 소개받을 〈일〉 없이 인하여 세월만 따르며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갑자기 제 속마음[肝膽]을 피력하여 〈그대〉 앞에 펴보려 하지만, 교분이 얕고 할 말은 깊어서 들으시는 분의 마음[尊聽]을 감동시켜 움직이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족하의 고국[恭桑]으로, 비록 새가 깊은 골짜기를 떠나 큰 나무로 〈둥지를〉 옮기고 〈용이〉 진흙 속에 서려 있다가 구름 속으로 날아오르듯이 지금은 중국에서 살며 상국(上國)에서 벼슬하고 있지만 조상의 분묘(墳墓)와 친척은 그대로 우리나라에 있으니, 저희들이 말하려고 하는 것에 어찌 무정하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성천자(聖天子)께서는 힘을 다하여[勵精] 다스림을 도모하고 계신데 대승상(大丞相)은 재주와 지략이 세상에 다시없는 분이어서, 〈그 분의〉 말은 들으시고 계책은 따르셔서 조정에는 실책[遺算]이 없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제 살 곳을 찾지 못하고 하나의 사물이라도 안정을 얻지 못하면, 반드시 진휼[振拔]하여 안도하게 한 뒤에야 그만 둘 것입니다. 족하는 단정하고 성실하며 웅대하고 깊은 자질을 예악(禮樂)과 시서(詩書)로 빛내시고 높은 관모와 넓은 허리띠[高冠博帶]로 동각(東閣)에서 여유 있게 지내면서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을 빛나게 하고,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를 돕고 있으니, 또한 청운(靑雲)의 지기(知己)를 얻어 그 도(道)를 행하는 분이라고 이를 만 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나라가 대국을 섬긴 이래 100여 년 동안 해마다 공물[職貢]을 바치는 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날 요민(遼民)의 유종(遺種)인 금산왕자(金山王子)라는 자가 중원(中原)의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해도(海島)에 병사를 일으키자[弄兵] 〈상국〉 조정에서는 합진(哈眞, 카치운)과 찰랄(札刺, 차라)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죄를 토벌하도록 하셨습니다. 날씨는 춥고 눈은 깊이 쌓여 보급로[甬道]가 이어지지 않자 군대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도리어 흉악한 무리에게 비웃음 당했습니다. 〈이 때〉 우리 충헌왕(忠憲王)은 배신(陪臣) 조충(趙冲)과 김취려(金就礪)에게 명하여 군량을 수송하고 군사를 돕게 해 함께 공격[掎角]하여 그들을 몰살시켰습니다. 양국(兩國)의 장수가 서로 형제가 되자고 약속하고 만세토록 서로 잊지 말자고 맹세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가 태조(太祖) 황제 때부터 힘을 다한 것입니다. 세조(世祖) 황제께서 남쪽을 정벌하고 군사를 되돌려 장차 대통(大統)을 이으려 하실 때 〈그〉 동생이 북방[朔方]에서 변란을 부채질하여 제후들이 근심하고 의심하였으며 도로도 심하게 막혔습니다. 〈그 때〉 우리 충경왕(忠敬王)은 세자(世子)로서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양초(梁楚)의 교외에서 예로 맞이하니[拜迎], 천하가 이에 먼 나라조차도 기쁘게 복종하는 것을 보고 천명(天命)이 〈세조께〉 돌아갈 것을 알았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나라가 세조 황제께 충성을 다한 것입니다. 충경왕이 작위를 이어받아 귀국한 후 충렬왕(忠烈王)이 다시 세자로서 황제[輦轂]께 입시(入侍)하였으므로 세조께서는 그 공을 생각하고 그 의로움을 가상히 여겨 공주에게 장가들게 함으로써 특별한 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또〉 여러 번 조서를 반포하여 옛 풍속을 고치지 않도록 해주시니 사해(四海)가 미담(美談)이라고 칭송하였습니다.
우리 연로한 심왕(瀋王: 충선왕)께서는 바로 〈제국대장(齊國大長)〉공주의 아들이며 세조(世祖)의 친 외손자입니다. 세조 때부터 지금의 황제[盛代]에 이르기까지 다섯 황제[五朝]를 대대로 섬겼으므로 친하면서도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공을 이루고 물러나지 않았다가 방심한 탓에 변고가 생겨서 형체를 무너뜨리고 〈죄인의〉 의복으로 바꿔 입고 멀리 티벳[吐蕃] 땅으로 유배가게 되었습니다. 고국에서 10,000여 리나 떨어진 곳인데, 깎아 세운 듯 한 벼랑이 몹시 험하여 열 걸음에 아홉 번 굽이치고 겹겹이 쌓인 얼음과 눈이 사시사철 한결같으며, 안개같이 피어오르는 독기는 찌는 듯하고 도적들은 몰래 나타났습니다. 가죽배로 강을 건너고 외양간에서 노숙하며 〈험한 길을 간 지〉 반 년만에야 그 지역에 도착하였습니다. 보릿가루를 먹고 토담집에 거처하니 모진 고통이 만 가지 형상이라 다 적을 수조차 없습니다. 길 가던 사람들도 듣고 오히려 슬퍼[於邑]하는데, 하물며 그에게 이름을 올리고[策名] 몸을 맡긴[委質] 〈신하들〉이겠습니까? 대궐 문[閶闔]에는 천자께 하소연하는 부르짖음[排雲之叫]이 막히고 조정[廊廟]에는 동쪽 고려에서 온 객[蟠木之客]들을 거절해버리니, 비록 근심을 머금고 원통하게 울며 큰 소리로 부르짖은들 누가 들어줄 것이며 누가 가련하게 여기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밥을 먹어도 맛을 잃어버리고 누웠다가는 다시 일어나 허둥대다가 눈물이 다하여 피가 흘러내리는 까닭입니다. 대개 먼 지방을 편안하게 하고 친족과 돈독했던 것은 선왕(先王)의 정치이며, 공로로써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춘추(春秋)의 법입니다. 족하께서는 어찌하여 조용히 승상에게 말하여 〈우리 왕이〉 예전에 다른 〈마음이〉 없었다는 것과 지금 스스로 뉘우치고 있다는 것을 밝히지 않습니까? 누대에 걸친 충성과 근실함[忠勤]은 저버릴 수 없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그가〉 세조황제의 피붙이[肺腑]에 속한다는 사실도 또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아! 〈이 말을 황제께〉 아뢰어 사면의 은택[金雞之澤]을 크게 내려 죄를 용서하여[賜環] 고려로 돌아오게 하셔서 다시 하늘의 해를 볼 수 있게 하심으로써 성스러운 천자의 치세에 구석을 바라보고 우는 자가 없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대승상의 아름다운 덕이 멀고 가까운 데[遐邇] 더욱 드러날 것이며, 〈족하께서〉 근본의 의리를 잊지 않으며 만물의 어짊을 잘 구원한다면 천하가 모두 족하를 칭송할 것입니다. 어찌 오직 우리나라의 군신(君臣)들만 골수에 새겨서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는 데 그칠 뿐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 승상(丞相) 배주(拜住, 바이주)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작은 나라의 낮은 관리가 감히 비루한 말로 존귀하신 분의 귀를 더럽히니 아마도 경솔하고 외람됨이 큰 듯합니다. 그러나 큰 강의 도량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물이 없고 꼴을 베는 나무꾼의 말에도 반드시 취할 만한 것이 있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 절박한 마음을 가련히 여기셔서 먼저 그 죄를 용서해주시고 작지만 가련한 마음으로 살펴주십시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우(禹) 임금은 천하에 물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마치 자기가 빠진 것처럼 생각하고, 후직[稷]은 천하에 굶주린 사람이 있으면 마치 자기가 굶주린 것처럼 생각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천하의 물에 빠진 사람과 굶주린 사람이 우 임금이 손으로 밀어 물에 빠뜨리거나 후직이 먹는 것을 막은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두 분은〉 단연 스스로 〈자기의〉 책임으로 여기고 핑계대지 않았겠습니까? 하늘이 대인(大人)에게 임무를 내린 것은 본래 그로 하여금 이러한 사람들을 구제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만일 곤궁하면서도 고할 데가 없는 사람을 보고도 태연히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어찌 하늘이 소임을 내린 뜻이겠습니까? 이것은 손발이 부르트는 고통을 잊고 친히 씨 뿌리고 심는 수고를 하며, 온 나라[九土]에 집을 짓고 뭇 백성[蒸民]들을 먹임으로써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을 도와 은택이 후세에 미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설령 한 사람이라도 불행히도 소용돌이치는 여울에 빠지거나 구덩이에서 구르는데 우 임금과 후직이 그것을 본다면 그 잠깐 동안만 살리고자 생각하겠습니까? 저는 〈이들이〉 반드시 계책을 세워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굶주림을 근심하거나 물에 빠질 것을 걱정하지 않도록 한 연후에야 그만둘 것임을 압니다.
삼가 생각해보건대, 승상 집사(丞相執事)께서는 성천자(聖天子)를 보필하시면서 목소리와 얼굴빛을 움직이지 않고도 천하를 태산 같은 안정에 놓아두었으며, 기후[玉燭]는 청명하고 해마다 곡식은 누차 익어 백발의 노인들이 다시 중통(中統)과 지원(至元) 연간의 정치를 보았다고 여기니 사람들이 이러한 때에 태어난 것도 또한 다행이라고 이를 만 합니다. 이와 같은 때에 어떤 한 사람이 곤궁한 형세가 굶주림과 물에 빠진 것보다 심하다면, 집사께서는 이를 어떻게 처리하실 것입니까? 지난해에 우리 연로하신 심왕(瀋王)이 천자의 진노를 만나 몸 둘 곳이 없었을 때, 집사께서 애처롭고 가련하게 여기셔서 황제의 격노 아래[雷霆之下]에서도 큰 은혜[生死肉骨]〈를 베풀어〉 가벼운 법[輕典]을 따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심왕이〉 먼 나라로 유배되었으니, 다시 살려 주신[再造] 은혜는 부모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그 땅이 너무나 멀고 또한 궁벽하며, 말은 통하지 않고 풍토와 기후는 전혀 다릅니다. 도적은 갑자기 튀어나오고 굶주림과 목마름이 번갈아 핍박하여 몸은 파리하게 수척해지고 머리털은 모두 희어져 고통스러운 상태는 말만 해도 눈물이 흐를 만 합니다. 그 친함으로 말하자면 〈그는〉 세조(世祖) 〈황제의〉 친 외손자이고, 그 공로로 말하면 선제(先帝)의 공신입니다. 또한 그 조부[祖考]는 성무(聖武) 〈황제〉께서 흥기하실 때부터 의로움을 사모하여 먼저 복속하고 대대로 충성을 다하는 공을 드러냈으니 전(傳)에서 이른바 오히려 10대에 걸쳐서라도 용서해야 할 것입니다. 귀양[竄謫]간 지 이미 4년이 되었으니 마음을 고치고 허물을 뉘우친 것도 또한 이미 많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집사께서는 처음에 힘써 구해주시었으니 끝까지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잊지 마시고 황제의 귀에[黈聰] 들리도록 아뢰어 두터운 은혜[睿渥]를 베풀도록 이끌어주십시오. 〈그리하여〉 본국으로 돌아가서 천수[天年]를 마치도록 해주신다면 그 감동과 행복이 어찌 소용돌이치는 여울에 빠진 자가 탄탄한 땅을 밟고 구덩이에서 구르는 자가 좋은 음식을 먹는 기쁨에 그치겠습니까? 만약 때가 좋지 못하다고 하여 서서히 할 것이라 하시면서 일월(日月)을 끌다가 어질고 힘 있는 사람이 먼저 그를 구하게 된다면 천하의 선비들은 집사의 일처리가 유독 더디다고 할 것이며 우리나라의 백성들은 집사께서 덕을 베푸셨으나 끝을 맺지 못하였다고 할 것이며, 마음속으로는 집사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뒤 황제가 명하여 충선왕을 도스마(朶思麻, 타사마) 땅으로 양이(量移)하도록 하였는데, 배주가 아뢴 바에 따른 것이다. 이제현이 충선왕을 알현하러 가는 길에 시를 읊었는데, 충정과 울분이 가득 찬 듯하였다. 이후 〈이제현에게〉 밀직사사(密直司使)를 더하였고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으며, 다시 첨의평리 정당문학(僉議評理 政堂文學)으로 옮겼고 또 김해군(金海君)으로 봉하였다.
충숙왕(忠肅王)이 훙서(薨逝)한 뒤 조적(曹頔)이 난을 일으키자 충혜왕(忠惠王)이 그들을 격살하였다. 그러나 그 무리로 대도(大都)에 있는 자들이 매우 많아서 기필코 왕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였다. 원이 사신을 보내어 왕을 소환하자 인심(人心)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재앙을 또한 헤아릴 수 없었다. 〈이 때〉 이제현이 분연히 일어나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기를, “나는 우리 왕의 아드님을 알 뿐이다.”라고 하며 왕을 따라 수도[京師]로 가서 일이 분별되고 밝혀질 수 있었다. 공로는 일등이었으며 〈이제현에게〉 철권(鐵券)을 하사하였다. 〈고려로〉 귀국한 후에 군소배(群小輩)들이 더욱 날뛰자 이제현은 은거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으면서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하였다.
충혜왕(忠惠王)이 원(元)에 잡혀가자 재상과 나라의 원로[國老]들이 민천사(旻天寺)에 모여서 왕의 죄를 사면해달라고 〈원에〉 글을 올리자고 의논하였다. 이제현이 그 글을 기초하였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고려국의 원로[耆老]와 여러 관리들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정동성(征東省)의 상공 집사(相公執事)들께 글을 올립니다. 〈원(元)〉 조정의 사신 타적(朶赤, 도치) 등이 하늘에 제사하고 대사령을 내린다는 황제의 조서[欽奉]를 받들고 앞서 개경[王京]으로 왔습니다. 우리 보탑실리(寶塔實憐, 부다시리)왕이 관료[僚吏]들을 이끌고 의장(儀仗)을 갖추어 성 밖에서 맞이하여 본성(本省)으로 들어와 조서 듣기를 마치자 사신들이 바로 왕을 잡아 말에 태우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일이 창졸(倉卒)간에 일어났으므로 무릇 배신(陪臣)으로 있는 자들은 몸 둘 바를 몰랐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생각하건대 왕은 연소(年少)하고 경험이 없어[不更事] 솔직한 마음으로 바로 행하기 때문에 여기에 이른 것이지, 그 본뜻을 살펴보면 대개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하늘의 해가 밝게 비추는데 어찌 속이겠습니까? 또한 생각하건대, 우리나라는 시조 왕씨(王氏)가 바다 귀퉁이[海隅]에서 개국한지 426년이고 자손이 서로 이어 온 것이 28대입니다. 송(宋)·요(遼)·금(金)을 거치며 사신을 통하고 왕래하였으나 기미(羈縻)하였을 뿐입니다. 우리 태조성무황제(太祖聖武皇帝)께서 나라를 일으키실 때 금산왕자(金山王子)라는 자가 있었는데, 중원(中原)의 민을 노략질하며 망한 요의 왕업을 회복하려고 도모하다가 세력이 다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도서(島嶼)에서 날뛰었습니다[陸梁]. 태조께서 합진(哈眞, 카치운)과 찰랄(札刺, 차라) 두 장수에게 명하여 그 죄를 토벌하라고 하셨는데, 날씨는 춥고 눈이 깊이 쌓여 보급로가 이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충헌왕(忠憲王)이 조충(趙冲)과 김취려(金就礪) 등을 보내어 병사를 원조하고 군량을 주어서 일거에 적을 격파하였습니다. 이에 두 나라가 동맹을 맺어 만세에 이르는 자손까지 오늘날을 잊지 말자고 하고서 인하여 잡은 포로[生口]를 나누어 신표로 삼으니,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거란장(契丹場)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조문무황제(世祖文武皇帝)께서 양양(襄陽)에서 군대를 살피실 때 아리발가(阿里孛哥, 아릭부케)가 막북(漠北)에서 변란을 부채질하였습니다. 〈그러자〉 제후(諸侯)들이 의심하면서 각각 거취를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충경왕(忠敬王)은 그때 세자로서 서리와 이슬을 무릅쓰고 바로 변량(汴梁)에 도착하여 도중에 〈세조를〉 영접하였습니다. 세조께서 바라보고 놀라고 기뻐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고려는 황원(荒遠)의 변방으로, 지금 내가 북쪽으로 돌아가 장차 대통(大統)을 이으려고 하는데 저 세자가 스스로 귀부하니 하늘이 나를 도우시도다.’라고 기뻐하셨습니다.
충경왕(忠敬王)이 나라를 맡자, 배신(陪臣)인 임유무(林維茂) 부자(父子)가 〈원(元)에〉 내속(內屬)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아서 멋대로 〈국왕을〉 폐립(廢立)하고 강화(江華)에서 〈몽고의〉 병사를 막았습니다. 세자인 충렬왕(忠烈王)이 급히 〈원(元)〉 조정에 가서 〈이를〉 알리자 세조(世祖)께서 크게 노하셔서 조서를 내려 왕을 복위(復位)하게 하고 역마를 타고 와 입조하라고 하셨습니다. 왕과 세자가 〈원(元)의〉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여 반역한 무리들을 사로잡아 죽이고, 〈강화도〉 바다를 떠나 육지로 와서 오직 한 마음으로 직무에 이바지하였습니다. 충렬왕대 들어 세조께서 일본을 두 번 정벌하셨는데 왕이 김방경(金方慶) 등을 보내어 그 전함을 건조하였으며 매번 선봉이 되었습니다. 또한 내안대왕(乃顔大王, 나얀대왕)의 일당인 합단(哈丹, 카다안)이 수달달(水達達)과 여진(女眞)의 땅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우리 강토까지 침략하여 천위(天威)에 항거하려고 하자 왕이 출병하여 〈그들을〉 격파함으로써 수레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대덕(大德) 말에는 익지례보화(益知禮不花, 이지르부카) 왕이 인종(仁宗) 황제의 좌우(左右)가 되어 난을 평정하고 궁궐을 맑게 하였으며 무종(武宗) 황제를 받들어 모신 공로로 1등공신이 되었으니 이것은 왕씨가 조정에 오랫동안 충성한지 오래된 것입니다. 또한 생각하건대 세조황제께서 홀독겁미사(忽篤㤼迷思, 쿠투루칼리미시) 공주를 우리나라에 시집보내셨는데, 이 분이 익지례보화왕을 낳았고 익지례보화왕이 아납특실리(阿納忒室利, 아라트나시리) 왕을 낳고 아납특실리왕이 보탑실리(寶塔實里, 부다시리) 왕을 낳았으니, 보탑실리 왕은 비록 소원하고 또 멀지만 세조에게는 실로 폐부(肺腑)와 같은 친척입니다. 또 황후 기씨(奇氏)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서 위로 지존(至尊)의 배필이 되어 황태자를 낳으심으로써 천하가 기뻐하고 의지하게 되었으니, 상국에서 우리나라를 볼 때 응당 다른 번국들과 같이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가 일본과 바다를 사이로 이웃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원(元)으로부터〉 복을 입으면 저들은 자신들이 귀화가 늦어진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우리나라가 죄를 얻으면 저들이 〈우리의〉 비루한 고집[執迷之陋]을 달게 여길 것은 세력 상 당연합니다. 옛날 주(周)는 위후(衛侯) 간(衎)을 잡았다가 결국 〈그를〉 복위시켰고, 한(漢)은 양왕(梁王) 무(武)를 불러들였다가 역시 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는데, 〈이는〉 왕[王者]으로서의 큰 법도를 보인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원(元)〉 조정은 열성(列聖) 이래로 살리는 덕을 좋아함이 주나 한보다 매우[萬萬] 지나칩니다. 이번에는 친히 남쪽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조상을 높이고 하늘에 배향하셨습니다. 대례(大禮)가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황제의〉 덕음(德音)을 널리 펴서 밖으로는 사해(四海)에 이르기까지 춤추며 환호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한 개의 사물이라도 그 어진 은택을 입지 못한다면 마땅히 마음 아파해야 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스러운 천자께서는 더없이 큰 인자함으로 허물을 용서하시되 이제 한 번 마음을 돌리시어 우리 보탑실리 왕으로 하여금 죄의 그물에서 벗어나 은혜의 바다에서 헤엄치게 하시고, 또 왕씨의 군신(君臣)과 사직으로 하여금 그 이름을 바꾸지 않도록 하시며, 의관(衣冠)과 풍속(風俗)도 아울러 그 제도에 인하도록 하셔서 산해(山海)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옛 생업에 편안히 종사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태조와 세조께서 우리나라를 애틋하게 여기신 뜻이 어찌 더욱 명백해지지 않겠습니까? 〈또〉 세조께서 공주를 시집보내 자손을 낳아서 먼 나라의 마음을 이으려 하신 그 계획이 어찌 더욱 멀리 내다보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황후가 황태자[元良]를 낳으시어 천하가 기뻐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어찌 더욱 위대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가 황제께 충성하고 적을 미워하는 마음이 어찌 더욱 단단해지지 아니하겠습니까? 아직 복속하지 않고 있는 일본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고집을 버리고 즐거이 귀화하려는 뜻이 어찌 더욱 돈독해지지 않겠습니까? 426년, 28대를 이어온 고려의 영령들이 어찌 더욱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조정에서 어느 것보다 더 큰 덕으로 허물을 용서하시는 것이 어찌 더욱 천하 후세에 전파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집사께서는 저의 하잘 것 없는 말씀을 굽어 살피시어 천자께 아뢰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뒤에 서명하여 성(省)에 올리려고 하였으나 나라의 원로들 중에 오지 않은 자들이 많아 일이 끝내 성사되지 못하였다.
충목왕(忠穆王)이 왕위를 계승하자 이제현(李齊賢)은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승진하고 부원군(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이때 〈이제현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지금 우리 국왕 전하(殿下)께서는 옛날 원자(元子)가 학문을 시작하는 나이에 천자의 밝은 명령을 받들어 조상의 중대한 왕업을 이었으나 전왕(前王)이 실패한 뒤를 감당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공경과 근신으로써 언행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공경하고 근신하기 위해서는 덕을 닦는 것 만한 것이 없고 덕을 닦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학문하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 좨주(祭酒) 전숙몽(田淑蒙)이 이미 스승으로 이름이 올라 있으니, 다시 현명한 유학자 2명을 선택하여 전숙몽과 함께 『효경(孝經)』과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강의하게 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道)를 익히시고, 양반가문의 자제들 가운데 정직하고 신중하며 중후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예를 아끼는 사람 10명을 뽑아 시학(侍學)으로 삼아 측근에서 보좌하고 이끌게 하십시오. 사서(四書)에 이미 익숙하게 되어 차례로 육경(六經)을 강의하여 교만과 사치, 음란과 안일, 음악과 여색, 개와 말 따위가 눈과 귀에 닿지 못하게 하면 습관과 성품이 이루어지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덕이 이루어질 것이니, 이것이 당면한 일 가운데 가장 급한 것입니다. 임금과 신하는 의리상 한 몸이니 머리와 팔다리가 서로 가깝지 않다면 그것이 옳습니까? 지금 재상들은 잔치 자리가 아니면 〈임금과〉 만날 수 없으며 비단 〈임금이〉 불러도 나아가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이치입니까? 마땅히 날마다 편전(便殿)에 앉아 재상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며 혹은 날을 나누어 〈재상을〉 나와 대하게 하도록 청합니다. 비록 일이 없더라도 이러한 예를 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신들은 날마다 멀어지고 환관들은 날마다 친해져서 생민(生民)의 기쁨과 근심[休戚], 종사(宗社)의 안위를 〈상에게〉 보고드릴 수 없게 될까 걱정됩니다.
정방(政房)이란 이름은 권신(權臣)의 시대에 일어난 것으로서 옛 제도가 아닙니다. 〈그러니〉 마땅히 정방을 혁파하여 〈인사행정을〉 전리사(典理司)와 군부사(軍簿司)로 돌려야 합니다. 〈또한〉 고공사(考功司)를 설치하여 관리들의 공로와 과실을 드러내고 그 재능 여부를 논하여 매년 6월과 12월에 도목(都目)을 받아서 정안(政案)을 고과하여 출척(黜陟)에 활용하여 항구적인 법규[恒規]로 삼는다면, 청탁하는 무리들을 근절하고 요행을 바라는 무리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머뭇거리면서[因循] 옛 제도를 회복하지 못하면 장래에 양장(梁將)이나 조륜(祖倫), 박인수(朴仁壽), 고겸(高謙) 같은 무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인사 서류가〉 흑책(黑冊)이라는 비방을 막을 수 없을까 매우 걱정됩니다. 응방(鷹坊)과 내승(內乘)은 민에게 해 끼치는 것이 더욱 심하기 때문에, 전에 이미 혁파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뒤에 다시 지체되어[遷延] 중외(中外)가 실망하였으며 고용보(高龍普)가 말을 달려 나오다가 책망 받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덕녕창(德寧倉)과 보흥고(寶興庫) 등의 창고는 무릇 옛 제도가 아니면 일체 혁파하신다면 황제의 뜻[聖旨]이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뜻을 오래도록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자사(刺史)와 수령(守令)은 적합한 사람을 얻으면 민이 그 복을 받을 것이고,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민은 그 해로움을 만날 것입니다. 관직이 높은 자를 직책을 낮추어 시키면 교만하여 법을 따르지 않으며, 나이가 많이 들어 〈관직을〉 얻은 자는 정신이 흐릿하고 게을러서 일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간혹 청탁으로 시골[壟畝]에서 일어나 벼슬하여 금어(金魚)를 늘어뜨리고 다니는 자들 또한 말할 것도 없습니다. 청컨대 옛 제도와 같이 조정의 관리로서 아직 참직(叅職)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반드시 감무(監務)와 현령(縣令)을 거치게 하고, 4품에 이르면 관례대로 목사(牧使)와 태수(太守)로 삼고, 감찰사(監察司)와 안렴사(安廉使)가 반드시 포폄(褒貶)을 행하여 상과 벌을 주도록 하십시오. 소위 관직이 높은 자, 나이가 많은 자, 청탁으로 시골에서 벼슬한 자를 부득이 기용해야 한다면 차라리 중앙 관직[京官]을 줄지언정 민에게 친밀한 〈지방관의〉 직임은 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식으로〉 20년 동안 〈인사를〉 시행하고도 유망(流亡)〈하는 백성〉이 돌아오지 않거나 공부(貢賦)가 부족했던 적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금은과 비단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선배 공경들도 피복은 다만 흰 포목[素段子]과 명주[紬布]를 사용하였고 기명(器皿)은 놋쇠[鍮銅]와 질그릇[甕瓦]만 사용하였습니다. 덕릉(德陵)께서 옷 한 벌을 지으려고 값을 물었다가 비싸니 포기하고 짓지 않으셨으며, 의릉(毅陵)께서도 일찍이 전왕(前王: 충혜왕)을 책망하시기를, ‘금실로 수놓은 옷과 새 깃으로 장식한 갓은 우리 조상의 옛 법도가 아니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국가가 400여 년 동안 능히 사직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검소한 덕[儉德]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근래에 풍속이 사치를 극도로 다하니, 민생이 곤궁하고 국가 재정이 궁핍한 것은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청컨대 재상들은 지금부터 비단으로 옷을 짓거나 금과 옥으로 그릇을 만들지 말고, 또 좋은 옷[袨服]을 입은 말 탄 사람으로 그 뒤를 옹위하게 하는 것을 금하소서. 각자 검약에 힘써서 위로는 〈임금께〉 풍간(諷諫)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교화하면 풍속은 다시 순박하게 돌아갈 것입니다.
예전에 포악하게 거두어들인 포(布)는 바로 납부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관리들이 이를 틈타 농간을 부릴 경우 힘없는 민[細民]은 실질적인 은혜를 받지 못할까 우려되므로, 응당 여러 관청에 분부하여 그것으로써 내년의 잡공(雜貢)에 충당함으로써, 〈백성들이〉 선납(先納)하거나 차대(借貸)하는 폐단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행성(行省)에서 이미 문서를 보냈으니 응당 빨리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3개의 식읍(食邑)이 이미 설치된 뒤에 모든 관료들의 봉록(俸祿)이 갖추어지지 못하였습니다. 무릇 한 나라의 군주로서 군신(群臣)들이 염치를 기를 수 있는 비용을 취해서 자기 창고를 채운다면 어찌 후세에 비웃음을 남기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양궁(兩宮)에 문의하여 식읍(食邑)을 혁파하고 〈그것을〉 광흥창(廣興倉)으로 다시 귀속시켜서 그 봉록에 충당하게 해 주십시오.
경기(京畿)의 토전(土田)에서 조업전(祖業田)과 구분전(口分田)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나누어 지급하여 녹과전(祿科田)으로 한 것을 시행한지 거의 50년이 되었습니다. 근자에 권세 있는 가문에서 거의 모두를 점탈해 버렸습니다. 중간에 누차 개혁 방안을 논의하였지만 번번이 위태로운 말로 임금을 협박하고 속이는 바람에 끝내 실행할 수 없었으니, 이것은 대신(大臣)들이 굳건하게 버티지 못한 까닭입니다. 과연 개혁할 수 있다면 기뻐할 사람은 너무나 많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은 권세가 수십 명뿐일 것인데 무엇을 꺼려 과감하게 시행하지 않는 것입니까?
주(州)와 군(郡)에서 오랫동안 포흠(逋欠)하였던 공물과 조세를 유사(有司)에서 온갖 방법으로 독촉하여 징수하였으나 그 십 분의 일도 거두지 못하고 다만 원망만 거둘 뿐이었습니다. 바라건대 명령을 내리셔서 지정(至正) 3년(1343) 이전에 포흠했던 공물과 조세는 일체 면제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이 몇 년 동안 마구 조세를 거두어들인 결과 궁핍한 백성들이 자녀[男女]를 전매(典賣)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청컨대 각 도(道)의 존무사(存撫使)와 안무사(安撫使)로 하여금 방(榜)을 내걸어서 그들이 개경으로 와서 스스로 신고하는 것을 허락하시고, 이어서 관청의 비용으로 속전을 지급하여 〈원래의 신분으로〉 회복하도록 해주소서. 자녀를 사들인 자들도 자수하라고 명하시고, 만약 자수하지 않고 뒤에야 신고하는 자가 있으면 그 속전을 지급하지 말고 강제로 그들의 부모에게 돌려주도록 하시고, 심한 자는 죄를 다스리소서.”라고 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은〉 뒤에 안축(安軸)과 이곡(李穀)·안진(安震)·이인복(李仁復)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했던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증수(增修)하였고 충렬왕(忠烈王)·충선왕(忠宣王)·충숙왕(忠肅王) 등 3대의 실록(實錄)을 수찬(修撰)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고도 고려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므로, 이제현에게 명하여 정승(政丞)을 대리하게 하고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일을 임시로 처리하게 하자, 이제현이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엎드려 성지(聖旨)를 듣자오니, 전하께서 국왕과 승상으로 한꺼번에 임명받았다고 하니 위로는 덕경부(德慶府)로부터 아래로는 소민(小民)에 이르기까지 기뻐서 날뛰는 모습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전하의〉 왕지(王旨)를 받드니, 한 나라에 있어서 긴요한 민을 이롭게 하고 나라에 이로운 일을 맡아서 모두 실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보고 듣는 자들이 모두 갱생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신(臣)은 재주가 없고 나이가 늙어서 만사가 다른 사람보다 못 한데도 갑자기 중한 명령을 받들어 권성정승(權省政丞)이 되었으니, 감격하는 정성이야 위로 하늘에 해가 있습니다만 임무를 제대로 감당할지 두려워 몸 둘 바가 없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임명하는〉 인보(印寶)가 이미 도착하였으므로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서 서관(庶官)에 대비하게 하니 조속히 새로운 명령을 내려주소서.”라고 하였다. 이어서 〈이제현이〉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임명되자 이제현은 정동행성의 이문(理問) 배전(裴佺)과 박수명(朴守命)을 정동행성에 하옥하고, 직성군(直城君) 노영서(盧英瑞)를 가덕도(可德島)로, 찬성사(贊成事) 윤시우(尹時遇)를 각산(角山)으로 유배 보냈으며, 찬성사(贊成事) 정천기(鄭天起)를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한대순(韓大淳)을 기장감무(機張監務)로 좌천시켰다. 그때에 왕이 원(元)에 있기 때문에 나라가 비어 있었으나 이제현의 조치가 적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신뢰하고 안도하였다. 일찍이 〈원에 보내는〉 표문(表文)에 절을 할 때 계단[陛] 위에 올라가서 예를 행하였는데 그 의장과 호위가 왕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비난하였다.
조일신(趙日新)이 왕을 수행한 공을 내세워 교만 방자하게 횡포를 부리면서 이제현이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을 깊이 시기하여 서로 힐난하였다. 이제현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은 감히 남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굳이 사직하려 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이제현이〉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친 것을 이유로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고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의 호칭을 더해주었다. 이제현이 다시 세 번이나 글을 올려 계속 사양하였으므로 드디어 치사(致仕)를 허락하였다. 조일신이 불량배들을 규합해 밤에 궁궐로 난입하여 자기가 꺼리던 사람들을 해치고 군사를 풀어 살육을 감행하였지만 이제현은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으므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조일신이 처형된 후 왕은 이제현을 기용하여 우정승(右政丞)으로 삼고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誠直節同德贊化功臣)의 칭호를 주었다. 이듬해에 우정승을 사임한 후 부원군(府院君)으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색(李穡) 등을 선발하였다. 다시 우정승이 되었으나 사임하자 김해후(金海侯)로 봉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바꿔 임명하였다. 이제현은 다시 사양하였지만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공민왕 6년(1357)에 본직으로서 치사를 간청하자 허락하였다. 국제(國制)에 군(君)으로 봉해져 은퇴하면 〈본직으로 은퇴하는 것과〉 녹봉에 차이가 있었다. 〈이제현은〉 이미 늙었으면서도 오히려 후한 녹봉을 받는 것이 의리상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런 청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본직으로 치사하게 하는 것은 대신(大臣)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는 논의가 있어 다시 계림부원군(雞林府院君)으로 봉하였다. 기철(奇轍) 등이 처형당한 후 왕은 기철 등의 의복과 무늬 있는 비단을 환시(宦寺) 및 양부(兩府)에 내려주었으나 이제현은 공이 없다고 사양하며 받지 않았으며, 다시 글을 올려 늙었으니 물러가겠다고 요청하자 〈그를〉 치사하게 하였다.
『국사(國史)』를 그의 집에서 편찬하게 되자 사관(史官) 및 삼관(三館)이 모두 모였다. 왕이 일찍이 이제현에게 명하여 소목(昭穆)의 차례를 의논하여 정하라고 하였는데, 그 내용은 「예지(禮志)」에 있다. 왕이 또 개경의 성곽을 수축하는 일에 대하여 대신과 원로[耆老]들에게 자문을 구하자, 이제현이 말씀을 올려 이르기를, “삼대(三代) 이전의 일은 알 수 없지만 삼대 이후로는 〈나라가〉 도읍을 세우고도 성곽이 없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사방을 정벌하시고 참람하게 소란을 피우는 자들을 평정하여 삼국(三國)을 통일한 뒤 7년 만에 훙서(薨逝)하셨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민을 동원하여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일을 차마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송경(松京)에 성을 쌓지 않았던 것이니 일부러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형편상 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 후로 그냥 지내오다가 현종(顯宗) 초에 이르러 거란(契丹)이 개경을 유린하고 궁실(宮室)을 불태우자 현종께서는 허둥지둥 남쪽으로 피난하였습니다. 당시에 만약 성곽이 견고했더라면 거란이 그렇게 심하게 또 쉽게 도성을 처참하게 유린하고 불태워버리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현종 20년(1029)에 비로소 이가도(李可道)에게 명하여 개경(開京)의 성곽을 쌓게 하였는데, 뒤에 금산왕자(金山王子)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서해도(西海道)와 충청도(忠淸道) 사평진(沙平津)의 북쪽까지 도달하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개경에는 입성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여고(餘古, 저고여)와 차라대(車羅大, 쟈릴타이)가 황교(黃橋)에 진을 쳤지만 역시 개경에는 침입할 수 없었던 것도 성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곽을 당연히 수축하여야 한다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축하면서 농번기를 빼앗아서는 안 되며 양식과 건자재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단〉 일을 시작하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일 터이니 궁성과 성문은 반드시 수비하도록 하는 것이 가합니다. 〈그리고〉 이 의논을 정하면 음양술에서 기피하는 것이 있더라도 절대 변경하지 않아야 공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홍건적[紅巾]의 난 때 왕이 남쪽으로 피난하였는데, 이제현이 상주(尙州)에서 〈왕을〉 알현하고 일찍이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기를, “오늘 왕께서 피난가시는 것이 〈당(唐)〉 현종(玄宗)의 안록산(安祿山)의 난 때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적이 물러가자 〈이제현이〉 또한 홍언박에게 말하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장하구나, 산과 물이여! 이것이 바로 위국(魏國)의 보물이로다’라고 하였소. 처음에 험한 곳에 요새를 설치해 수비했더라면 기필코 승리하였을 터인데 진작 도모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소. 적이 만약 들판에서 싸웠으면 우리 군사는 반드시 패했을 것이오. 단지 비와 눈이 와서 적이 뜻밖에 재난을 입은 틈을 타 이긴 것이니 이것은 종묘사직과 산천의 도움에 힘입은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은 공민왕(恭愍王) 16년(1367)에 죽었으며 나이는 81세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제현은〉 타고난 자질이 중후한데다 학문으로 도왔으므로 그가 의논을 제시한 것이나 사업을 조치한 것이 모두 볼 만 하였다. 처음에 이제현이 사서(史書)를 읽다가 「측천기(則天紀)」에 이르자 말하기를, “어찌 주(周)의 잔손(殘孫)으로 당(唐)의 천하를 이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는데, 뒤에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구해보고는 스스로 자신의 학문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작은 착한 일이라도 있으면 칭송을 하며 그 사실이 알려지지 못할까 염려하였고, 선배가 남긴 사적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은 미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평생 한 번이라도 성급히 말하거나 얼굴빛이 갑자기 변한 적이 없었으며, 또한 음란한 말을 입에 담지도 않았다. 만년에 한가하게 보내면서 손님을 접대하면서 술을 차려놓고 고금의 일을 평가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최해(崔瀣)가 〈이를 보고〉 일찍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선비는 헤어진 지 3일 만에 눈을 닦고 서로 상대한다고 했는데[刮目相待], 나는 익재(益齋)에게서 그것을 보았다.” 라고 하였다.
이제현은 힘써 옛 법을 준수하였으며 경장(更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말하기를, “나의 뜻이 어찌 옛 사람만 못하겠는가. 다만 나의 재주가 오늘날 사람에게 미치지 못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제현의 손자들이 연달아 기씨(奇氏)와 혼인하였는데, 이제현은 기씨가 너무 번성한 것을 꺼렸다. 〈이제현이〉 평장사(平章事)로 임명되자 공민왕(恭愍王)이 양제(兩制)에 명하여 시를 지어 하례하라고 하고 또 이제현에게 명하여 그 일의 전말을 기록하라고 하였지만 이제현은 사양하고 하지 않았다.
공민왕이 신돈(辛旽)을 총애하자 이제현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臣)이 전에 신돈을 한 번 본적이 있는데 그 골격이 옛날 흉악한 사람과 비슷하여 반드시 후환을 끼칠 것이니 가까이 하지 마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신돈이 〈그에게〉 깊이 원한을 품고는 온갖 방법으로 그를 헐뜯었지만 이미 연로했기에 해를 끼칠 수 없었다. 그러자 왕에게 말하기를, “유생들은 좌주(座主)니 문생(門生)이라고 부르면서 온 나라에 깔려서 서로 청탁하면서 하고 싶은 바를 함부로 하는 이들이 이제현의 문생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 문하에서 문생을 보아 드디어 온 나라에 도적이 가득 찼으니, 유자(儒者)들의 해악이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신돈이 패망하게 되자 왕이 말하기를, “익재(益齋)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따를 수가 없구나.”라고 하였다. 〈이제현은〉 젊을 때부터 동년배들이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익재’라고 불렀으며 재상이 되고 나서는 귀천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익재’라고 불렀으니, 그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중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성리학(性理學)을 즐기지 않아서 힘써 공부하지 않았으며,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에 대해 공허한 담론만 하였다. 심술(心術)이 단정하지 않아서 일을 할 때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았으므로 식자들에게 단점으로 여겨졌다. 〈이제현은〉 뒤에 공민왕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그가 지은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이제현은 일찍이 『국사(國史)』가 갖춰지지 못한 것을 근심하여 백문보(白文寶), 이달충(李達忠)과 함께 기년(紀年)과 전(傳), 지(志)를 편찬하기로 하였다. 이제현이 태조(太祖) 때부터 숙종(肅宗)까지, 백문보와 이달충이 예종(睿宗) 이하를 맡기로 하였는데, 백문보는 겨우 예종과 인종(仁宗) 2대의 초고를 작성하였고 이달충은 아직 원고 작성에 착수조차 못하였는데, 남쪽으로 피난할 때 〈그 원고들은〉 모두 흩어져 없어졌고 오직 이제현이 편찬한 「태조기년(太祖紀年)」이 남아 있다. 아들은 셋인데 이서종(李瑞種), 이달존(李達尊), 이창로(李彰路)이다. 이서종의 아들은 이보림(李寶林)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