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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원문보기 글쓴이: 하얀밤
부석사 (浮石寺)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소재 )
소백산 줄기의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부석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송고승전 宋高僧傳〉 의상전(義湘傳)에는 의상과 선묘, 부석사 창건에 관한 설화가 자세히 적혀 있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 불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 부석의 향음(鄕音)으로 보기도 한다. 의상을 부석존자(浮石尊者)라 하고 그가 창시한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 하는 것은 이 절의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의상 이후 혜철(惠哲)을 비롯하여 신라 무열왕의 8대손인 무염(無染)과 징효(澄曉)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만년에 이곳에 머문 원융(圓融)은 대장경을 인쇄했는데 지금 부석사에 전하고 있는 화엄경판은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372년(공민왕 21) 원응(圓應)국사가 주지로 임명되어 가람을 크게 중창했다. 경내에는 고려시대의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조사당(국보 제19호)을 비롯하여 원각전·응진전·안양루·선묘각·범종루·자인당 등 조선시대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무량수전앞석등(국보 제17호)·소조불좌상(국보 제45호)·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3층석탑(보물 제249호)·당간지주(보물 제255호)·고려판각(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등이 있다. 이밖에도 이 절의 창건설화와 관련있는 석룡(石龍)· 대석단(大石壇)·선묘정(善妙井)·녹유전(綠釉塼)·선비화(禪扉花) 등이 전해지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09/05/05)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 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배흘림, 항아리형 보 등의 의장 수법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고안된 고도의 기법들이다.
짧은 시간에 돌아 보는 부석사 경내는 다른 사찰과는 다른 느낌이였습니다. 역사적인 의미를 더하지 않아도 고즈넉한 분위기의 사찰 분위기가 발길을 잡았지만 일정에 쫓겨 부지런히 발길을 돌려아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머지 않은날에 여유로움의 시간에 다시 찾아 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남기며 부지런히 다음 일정을 따라 발길을 재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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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봤니더 !!! 영주 문화재는 경주서 올리고 불국사 설명은 영주팀에서 해주실랑가???? ㅎㅎㅎ 마이 기대해 봄시더 (^&^)
바꿔서 해보는것도 괞찮을것도 같고...해 볼까나요..
5월에 부석사 다녀 가셨나요? 이제 저 푸르름 짙어져서 검 푸른빛 발하고 있나이다... 영주에서 불국사 설명 하려면 공부 열씸히 해야 긋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