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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溪全漢淑 書藝硏究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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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우리나라 서예의 조종, 김생
時丁 추천 0 조회 404 16.12.02 12:53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지난 해 연말 충북학연구소에서 펴낸 <2011 충북의 역사문화인물>에 김생 편을 썼다. 잊고 있었는데, 생각난 김에 기록 삼아 올려둔다. 처음 써보는 형식이라 힘겨웠지만 김생의 기록을 찾고 인터뷰를 하며 만났던 충주의 몇몇 분들이 지금 일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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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서예의 조종(祖宗)

해동서성(海東書聖) 김생(金生)

 

서예는 수 천 년 전 한자와 함께 생겨나 동양 예술을 대표해 왔다. 글쓰기가 실생활의 절박한 필요에 의해 생겨나 심미적 영역으로 발달해 왔듯 서예 또한 의사전달의 일차적 목표를 넘어 높은 경지의 예술로 자리잡았다. 서예는 문자의 뜻과 형태를 동시에 전달하는 세계 유일의 예술로써 실용성과 심미성, 의미론과 형식론이 결합한 드문 예가 될 것인데 서예를 예()인 동시에 학()이고 법()인 동시에 도()라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서예는 창작 주체의 심미적 정신 세계와 시대적 미학을 압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양의 건축에 비견되곤 한다. 서양 문화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건축이라면 동양 예술의 핵심은 서예에 있기 때문이다. 서예는 점과 선만으로 구성된 글자를 조형성의 기초로 삼는다. 그 단순한 표현 요소만으로 서예는 글씨란 그 사람과 같다(書如其人)”는 관념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글씨의 기품이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려면 삶이 곧 예술이자 예술이 곧 삶인 존재미학의 길을 걷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내세울 것 없는 출신이었지만 독창적인 서체미학을 완성하며 우리나라 서예사의 시조(始祖)로 불리우는 신라인, 김생!

그의 족적을 거슬러 오르는 길은, ()와 도()의 경계를 넘나들며 삶과 예술이 하나의 거대한 혼불로 타올랐던 한 거장과 만나는 길이거니와 뿌리을 잃고 떠도는 이 시대, 우리가 찾아야할 진지한 고민과 마주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득한 세월, 흐릿한 기록 속에 빛나는 삶


중국 서예에 왕희지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누가 있을까? 멀리 신라의 김생과 최치원을 떠올릴 수도 있고 고려의 탄연이나 조선의 한호, 추사를 떠올릴 수도 있다. 안평대군, 양사언, 이광사를 꼽을 수도 있을 것인데 그 누군들 글씨 하나로 시대를 풍미하지 않았고 어느 누군들 후대에 아름다운 서풍(書風)을 남기지 않았겠는가?

새로움은 언제나 옛 것을 넘어서는 법, 일찍이 중국의 글씨를 넘어 우리의 혼을 담아 독특한 서체미학을 만들어낸 최초의 선각자가 있으니, 바로 김생(金生 711?)이다. 문자는 곧 정신일진대, ()의 힘을 업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통일신라에서 한자는 곧 정신이었고 당의 서법이 곧 정석(定石)이었을 것이다. 김생은 도도하게 밀려드는 당의 문화적 침투에도 불구하고 삼국의 기상이 하나로 뭉쳐진 자유롭고 힘있는 서체를 세워 중국을 놀라게 한 장본인이다.

김생의 법고창신이 있었기에 송설체(조맹부체)가 안평대군과 한호를 거치는 동안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우리 글씨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로 말미암아 표암 강세황이 우리의 행서, 초서를 표현할 수 있었으며 추사 김정희가 명청(明淸)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고유의 추사체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우리 서체의 물길은 늘 그렇게 우리의 땅을 적시며 새로움을 찾아 흘렀다. 따라서 중국의 왕희지를 서성(書聖)으로 부르고 김생을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일컫는 것은 한자문화권 종주국인 중국에 대한 동방예의지국의 예우라기보다 오히려 우리 글씨를 낮추는 오랜 관행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이 천 년 서예사에 스스로 큰 획을 그어 우뚝하고 후대 서예가들이 한결같이 우러러 그 앞에 자신을 높이는 자가 없으니, 김생이야말로 우리나라 서예의 맥을 찾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김생의 삶을 전하는 기록이 간략하고 남겨진 서예의 흔적이 흐릿하여 그의 전기적 행적과 예술적 총체를 밝히는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부족한대로 김생을 사모한 수많은 문인들의 기록과 후대 연구자들의 업적을 더듬어, 충주를 우리나라 서예사의 원점(原點)으로 만들어준 김생의 삶을 따라가 보자.

김생에 관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 김생조에 있다.


김생은 부모가 가난하고 신분이 낮아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 경운(京雲) 2(711, 신라 성덕왕 10)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다. 평생에 다른 재주()로 공부하지 않고 나이 80이 넘도록 붓을 잡고 쉬지 않았다. 예서와 행서, 그리고 초서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지금도 이따금 그가 직접 쓴 글씨(眞蹟)를 볼 수 있는데 배우는 자들이 전하여 보물로 여긴다.

숭년(崇年) 연간(11021106)에 고려의 문신 홍관(洪灌, ?1126)이 진봉사를 따라 송()나라에 들어가서 변경(지금의 하남성)에 묵고 있을 때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와 객관에 들렀다. 이때 홍관이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 권을 보이니 두 사람은 크게 놀라며, “오늘 뜻밖에 우군(友軍, 왕희지의 벼슬이름)의 글씨를 보게 되는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이에 홍관이 말하기를 이 글씨는 우군이 아니라 신라 사람 김생이 쓴 것이요하니, 두 사람이 웃으며 천하에 우군이 아니면 어찌 이처럼 신묘한 글씨를 쓸 수 있으랴!” 하였다. 이에 홍관이 여러 번 김생의 글씨라고 말하였으나 끝내 믿지 아니 하였다.


김생의 글씨가 왕희지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신필이었다는 후대의 일화를 빼면 부모가 미천하여 신분이 낮고 711년 태어나 80이 넘도록 서예에 힘써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삼국사기가 전하는 김생열전의 전부이다. 최초의 기사가 빈약하기에 이후의 수많은 기록 또한 삼국사기의 내용을 거듭 인용하는 데 그치고 만다. 비교적 상세한 김생의 행적은 조선 중기의 학자 노수신(盧守愼, 15141590)예성야록(?城野錄)에 실려 있다.

 

김생은 5세 때부터 풍월(風月) 두 글자를 배우면서 굵직한 싸리나무로 모래밭 위에다 글씨를 썼고 67세 적부터는 불경 2권을 부지런히 쓰기 시작하여 20세에 서법을 대성하였다. 그때 일본의 중 혜담(惠曇)도 글씨에 능하였는데 신라에 와서 김생의 글씨를 보고 매우 기이하게 여기면서 우군(右軍, 왕희지)이 강북(江北)에 건너가 있을 때 썼던 진적(眞蹟)을 주었다.

김생은 그 뒤부터 우군의 글씨에만 진력하여 밤에는 큰 글자를 쓰고 낮에는 작은 글자를 써서 명성이 이웃나라에까지 진동하였고 또 불교를 좋아하여 재소(齋素, 고기 등을 먹지 않는 것)를 지켰다. 그 손과 발은 가늘고 작아서 부인의 것고 같았고 나이 90이 되어서도 눈빛이 전광과 같아 붓을 손에서 떼지 않다가 나이 아흔일곱(당 헌종 원화 2(807), 신라 애장왕 10)에 죽었다. 일찍이 창림사비를 썼는데, 조맹부가 그 탁본을 보고 한 획과 한 글자가 다 왕씨의 서법에서 나왔으니, 당나라 사람의 명각도 이보다 나을 수 없을 것이다하였으므로 그 뒤부터 이름이 온 천하에 알려져서 원나라 사신이 올 적마다 으레 그 탁본을 얻어가곤 하였다.

 

이 글로 인해 삼국사기의 소략한 기록에 몇가지 행적들이 덧대어지며 1300년 전 김생의 흐릿한 삶이 조금이나마 선명해진다. 당의 영향과 일본과의 교류 등 당시 통일신라의 대외 문화교류사를 짐작할 수 있을 뿐더러 불교문화의 영향력 아래 서예가 하나의 완전한 예술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인 노수신은 명종 원년(1545) 을사사화로 파직되어 충주로 돌아왔는데 아마 이 무렵 충주지역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수집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기록은 김생이 태어난 시점을 밝히지 않는 대신 졸년(卒年)을 당 헌종 원화 2(807), 김생의 나이 97세라고 명시하고 있어 주목된다. 711년에 태어나 ‘80이 넘도록 붓을 잡고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몇몇 사전류는 김생의 생몰연대를 711791년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에 반해 1476년 간행된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는 원성왕 14(798) 말미에 김생의 행적과 사실을 수습하여 87세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는 편년체(編年體) 서술에 있어서 인물은 졸년에 기록하는 관행에 따른 것이긴 하나 이도 믿기는 어렵다.

하물며 노수신의 계산에 따르면 김생의 졸년은 807년이 된다. 이는 ‘80이 넘도록이라 한 것을 90으로 잘못 본 것으로 생각되며, 원성왕 14년인 87세로 이해하려한 것을 10년을 더해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외에 김생의 행적에 관한 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충주목 김생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김생사(金生寺)는 충주의 북쪽 나루 언덕(北津崖)에 있다고 하고 삼국사기김생전의 내용을 옮겨 놓은 뒤에 이곳에서 김생이 두타행(頭陀行)을 닦아 김생사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개의 김생 관련 기록과 김생의 글씨로 전해지는 작품들이 모두 사찰 또는 불교와 관련된 점으로 보아 호불불취(好佛不娶 불교에 귀의하여 장가를 들지 않음)’하였다는 그의 생을 짐작할 뿐이었지만 이 기록을 통해 김생의 생활 본거지가 충주였고 그가 승려였다는 사실이 명확해진 것이다.

 

 

김생의 숨결을 따라서

김생이 일시 거주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은 여러 군데이다. 일찍이 이인로(李仁老, 11521220)파한집(破閑集)에서 김생을 계림인이라 했으며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이계집(耳溪集)에서 김생은 계림석굴(鷄林石窟)에 들어가서 나뭇잎에 글씨 쓰기를 40여년 간, 바깥 세상에 나오지 않고 글씨에 신통했다고 하였다. 이는 김생이 경주에서 나서 반생은 그곳에서 보내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하지만 그가 경주 태생이라는 구체적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경북 봉화군 문필봉 청량사 경내의 김생굴도 김생의 흔적이 역력한 곳이다. 안축(安軸, 12871348)은 김생이 이 산방에서 글씨를 배웠다 하였고 이후 성근묵(成近?, 17841852)제김생굴시서(題金生窟詩書)를 남겼으며 이황(李滉 15011570)퇴계집김생굴시(金生窟詩)를 남겼다.

경주와 봉화 이외에 충북 곳곳에서도 김생의 자취가 발견되고 있다. 보은군 삼년산 경내의 암각자가 김생의 글씨라 전해지고 있으며 음성군 감곡리 상평리 원통산에 김생암(金生庵)이 있는데 김생이 글씨를 써서 먹물이 흘러 내를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또한 청원군 문의면 유덕리에 김생사지가 있었는데 이 절은 김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전한다. 대청댐 조성으로 수몰되었으나 수몰 직전 발굴에 의해 태평흥국’(984) 글자와 김생사강당초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김생이 죽은 후 2백년이 지난 984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寺誌, 충청북도, 1982충북에서 김생의 족적이 가장 분명한 곳은 충주지역이다.

 

1. 김생사지


김생사지(金生寺址, 충청북도기념물 제114)는 충주시 금가면 남한강변 언덕인 유송리에 있으니 일명 반송마을이라 불린다. 남한강변을 휘돌며 수행교부터 조정지댐을 거쳐 북부로로 이어지는 한적한 김생로(金生路)를 따라 가다보면 2011년 완공 예정인 용두-금가간 교량도로가 14미터 높이 머리 위로 까마득하게 횡단하고 있다. 교량도로 아래가 바로 김생사지가 있는 반송마을이다.

금가면은 본래 김생면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김생면(金生面)과 가차면(加次面)을 합하여 금가면(金加面)이라 하였다.

김생면은 김생사와 관련하여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금가면은 애초에 김생이 살았던 곳이라는 지명을 품고 있는 셈이다.

그 외에도 김생으로 인하여 생긴 강이름으로는 김생탄(金生灘)이 있어 세속에서는 김곶(金串)이라 부른다고 전해진다. 김생사지를 중심으로 휘도는 남한강 줄기를 바라보면 바로 이곳이 김생이 절을 짓고 살았다는 북진애(北津崖 충주의 북쪽 나루 언덕)이자 김곶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앞으로 시원하게 보이는 남한강은 김생탄이고 강물에 우묵하게 패인 김생사지 인근이 김곶이었을 것이다.


마을 앞에 자리한 반송슈퍼에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전정환 씨(75,오른쪽)가 역시 그 마을에서 5대 째 살아오고 있는 이영욱 씨(75)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평생지기로 살아온 두 사람은 충주호가 생기며 물이 차오른 남한강과 마을 뒷산 너머 들어온 비행장, 마을 앞을 지나는 교량도로까지 반송마을의 풍경을 바꾸던 일들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충주댐이 생기기 전 남한강을 건너다녔던 마을 앞 부창나루와 거대한 돌로 만들어져 마을 앞을 에두르고 있던 김생제방의 모습도 생생하게 회상했다.

제방 돌이 엄청 컸지. 어떤 건 사람 키를 넘어서 김생제방 돌로 마을 사람들이 멧돌도 만들고 연자방아도 만들고 그랬어.”

젊었을 적만 해도 70가구에 달했던 마을은 지금 30여 가구로 줄었다. 김생사지에도 여러 집들이 있었는데 다 헐렸고 전쟁 후에 외지 사람들이 트럭을 끌고와 며칠동안 김생사터를 헤집어 수많은 놋쇠와 기와를 실어 갔다고 증언했다. 그때는 문화재 불법도굴이니 하는 개념이 없을 때라 마을 사람 아무도 간섭하지 못했단다. 당시만 해도 절의 탑을 쌓았던 돌이 여러 개 남아 있고 주변에는 장대석과 석탑재 등을 비롯하여 삼국시대의 기와 조각이 널려 있어 이곳을 와당밭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김생사지는 1999년 봄에 충청대학교 박물관이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충주김생사지를 펴냈고 2002년 봄에는 발굴조사를 벌였다. 발굴 결과 김생사지로 단정할 만한 충분한 자료는 수습되지 않았으나 절터의 일부로 추정되는 건물지에서 길이 12.4의 석축과 항아리 형태의 석조물을 비롯해 판석재, 탑신석으로 추정되는 석재들이 확인되었으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기와편이 나왔다. 수습된 유물로 보아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했던 사찰로 추정된다.

특히 함통 13년 임진(咸通 13年 壬辰, 873, 신라 경문왕 11)’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김생사와의 일정한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존 건물을 제외한 일부 구역에 한해 실시한 발굴이라는 점에서 김생사의 전모를 밝히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김생사는 세종 8(1426)에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가신들에 의해 마구 침탈당한 기록이 있어 조선 전기까지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폐사된 기록이 없으며 순조 3(1803)에 간행된 이종휘의 수산집(修山集)김생사중수기(金生寺重修記)가 실려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도 법맥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김생사지에는 김생의 유필을 보존하기 위해 김생의 글자를 집자한 서성김생선생숭모비(1998년 건립)가 세워져 이곳이 김생의 유허지임을 알리고 있다. 충청북도 문화재 지정과 함께 보호구역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향후 충주시는 이곳에 김생사를 복원하고 김생기념관을 건립하는 등 국민역사교육장으로 가꿀 계획이다.

이곳에는 김생사와 중앙탑의 인과관계를 다룬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중원탑평리칠층석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 국보 제6)은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인데, 김생사의 책을 보관하기 위하여 쌓았다는 이야기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김생이 반송산에 절을 지은 후 탑을 세우고 그 탑 속에 고대의 전적(典籍)을 감추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중앙탑, 혹은 칠층석탑이라고 불렀으며 그 후 풍수설에 따라 물길을 이용해 현재 위치로 옮겼다는 것인데 신필과 도인의 풍모를 지녔던 김생에 대한 전설이 다양하게 변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2. 김생제방























절터 아래로 흐르는 남한강 서쪽 강가에는 김생이 땅의 침식을 예방하고 절터의 대지를 조성하기 위해 자연석으로 쌓은 김생제방(金生堤防)이 있으나 충주호 보조댐(조정지댐) 건설로 물에 잠겨 자취를 찾기 힘들다.


김생제방에도 역시 김생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신라 공혜왕 2년에 많은 비가 와서 강물이 범람해 반송마을을 휩쓸었다. 큰 고통을 겪은 마을 사람들은 이후 홍수를 대비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제방공사를 벌였지만 비만 오면 번번이 무너졌다.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이사를 떠나는 사람이 생겨나자 김생은 마침내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내일부터 제방을 쌓겠다고 하고는 법당으로 들어가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밤이 오래 되자 키가 9척이나 되고 깍짓동 같은 몸을 한 거한 두 사람이 나타나서 김생과 밀담을 나누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음날 날이 밝아 마을 사람들이 현장에 모여 들었을 때는 이미 방축공사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고 마침 김생은 쉬고 있었다. 강변에 놓여 있는 돌덩이를 보니 어마어마하게 커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이런 돌은 어디서 어떻게 운반했고 어떻게 혼자서 쌓았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김생은 마을 사람들에게 멀리 떨어져 달라고 당부한 뒤 일어서 또 주문을 외고 나서 마지막 제방을 쌓기 시작했다. 바위를 공깃돌 다루듯 하고 동작이 빨라서 바라보기조차 힘들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김생이 도승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는 김생사에서 공부하던 학동들이 제방 쪽의 여울물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 방해가 되므로 김생이 도술을 써서 여울물을 돌리고 제방을 쌓았다는 전설이다. 제방을 쌓은 후 여울물 소리가 끊어졌다고 하여 벙어리 여울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옛 기록에 김생제방의 길이가 550척에 달했다고 했는데 이는 김생사지 왼편 경사지에서 오른쪽 산기슭까지 대략 150170미터 길이로 이어져 있었다는 마을 사람들의 증언과 일치했다.

 

3. 김생굴

 

김생이 글씨를 배우는 과정을 기록한 문헌과 전설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곳이 산과 동굴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여러 곳에 전하지만 산 또는 동굴이라는 점은 같다.

우선 신증동국여지승람안동부의 문필산(文筆山) 조에 세상에 전하는 말에 신라의 김생이 여기에서 글씨를 배워 산 이름을 문필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문인인 안축(安軸)은 김생굴에 이르러 신라 때의 김생은 글씨 쓰는 법이 신기하였는데 이 산방에서 글씨를 배우던 일이 이미 천 년이 지났네라는 시를 남겼다.

허목(許穆, 15951682)김생은 신라 원성왕 때 사람으로 산중에 들어가 나무를 꺾어 땅에 글씨를 썼는데 왕희지의 글씨를 배워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며 또한 나는 청량산에 놀러갔다가 김생의 굴을 보았다고 하여 청량산의 김생굴을 전하고 있다.

청량산은 경북 봉화군에 있는 870m의 높은 산으로 경북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명산이다. 12개의 봉우리에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었으며 김생굴을 비롯해 수많은 명승유적이 산재해 있다. 원효대사의 유적인 원효정(元曉井), 최치원이 책을 읽었다는 치원봉(致遠峯), 의상대사의 유적인 의상봉(義湘峯), 퇴계 이황이 수도하였다는 오산당(吾山堂),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한 왕궁사(王宮寺)와 오마대(五馬臺) 등 선인들과 관련된 수많은 유적이 있다.

청량산에는 글씨와 관련된 지명이 많은데 탁필봉과 연적봉 또한 김생과 관련된 지명이 아닌가 짐작되지만 근거를 찾을 수는 없다.

김생굴에 대해서는 성근묵(成近?)김생이 여기에서 글씨를 익혔다. 단풍잎을 따서 글씨를 쓰니 샘물이 모두 검어졌다 한다. 김생굴 밑에 흰 구름은 나는데, 단풍잎 어지럽고 비탈이 가파라 아득하구나. 먹못(墨池) 물이 아직도 똑똑 떨어져 우리들의 붓에 찍어 필제(筆題)를 기다리네라고 하였다.

이황(李滉)도 이곳에서 창힐의 유서 왕희지도 묵은 체 못하리. 우리나라 천년 전에 한 사람 솟아 났도다. 괴기한 필법이 바위와 폭포에 머물러 있거니와 어허 사람에게 핍박한다고 탄식할 일이 없으리라고 시를 남기고 있다.

홍양호(洪良浩 17241802)김생은 우리나라 서예의 조종(祖宗)이다. 일찍이 계림의 석굴로 들어가 나뭇잎을 따서 글씨를 쓰며 40년을 나오지 않았으므로 글씨가 신에 통하였다라고 하였다.

조선환여승람(朝鮮?輿勝覽)음성군 고적조에 김생암(金生庵)이 원통산 아래에 있는데 신라의 중 김생이 이곳에서 나뭇잎에 글씨 연습을 하였기 때문에 시내가 막히고 물이 검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보아 김생이 글씨를 익히기 위해 처소를 둔 곳은 안동의 문필산과 봉화군의 청량산 김생굴이 있으며 계림의 석굴과 충북 음성의 김생암 등 네 곳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동의 문필산은 청량산을 잘못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문필산과 김생에 관한 사실은 이후 여러 지리지에 같은 내용으로 실려 있지만 조선 후기의 안동부읍지(安東府邑誌) 이후에는 청량산에 김생굴이 있다는 내용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홍양호의 계림석굴도 청량산 김생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안동의 백월서운탑비를 설명하는 가운데서 나온 말이고 지금 경주지방의 석굴에 김생에 관하여 전해오는 바도 없기 때문이다.

 

 

김생이 충주로 온 까닭은?

이상에서 살핀 김생의 족적은 경주의 석굴, 봉화의 김생굴, 음성의 김생암에 걸쳐 있는데 이는 김생이 글씨를 익혀가던 곳이었다. 또한 그의 글씨가 있거나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전남 강진, 경남 합천 해인사, 경북 봉화 태화사 및 백율사, 강원도 금강산 유점사, 충남 공주시 마곡사 등이며 이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의 족적이 직접 미친 곳이라 할 것이다.


김생은 신라의 곳곳을 자유롭게 누비며 살았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기록에 의거해 대략의 족적과 경로를 재구성해볼 수 있다. 비록 출생지가 어디인지, 언제 승적에 들었는지, 어디서 얼마동안 기거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아마도 젊을 적 경주를 출발해 40여 년의 세월을 안동과 봉화 지역에서 서예에 전념하다가 중장년이 되어 충주 지역으로 거처를 옮겨 여생을 보낸 게 아닐까 유추해 보는 것이다.

경주에서 충주에 이르는 길은 신라가 한강으로 진출하는 지름길이었다. 진흥왕이 551년 신라의 전역을 순수하면서 경주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을 때 영천의성/안동예천/영주단양충주로 이어지는 길을 택했을 것으로 전해진다. 예천을 지나 벌재를 넘어 단양에 이르거나 영주를 지나 죽령을 넘어 단양에 이르러 이곳부터는 남한강 물길을 이용해 청풍을 거쳐 충주에 닿았을 것이고 6세기 말 이미 이 길은 신라인들이 빈번하게 이용하던 교통로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김생의 족적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확보(552)하기 위해 택한 길과 자연스럽게 중첩된다. 이처럼 지리적으로 신라의 영향력이 확장되는 만큼 김생의 발자취도 넓어지는데 이는 김생이라는 한 뛰어난 천재를 통해 통일신라의 문화적 우월감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했던 정치적 요구는 아니었을까? 또는 내세울 것 없는 신분으로 태어난 한 예술가가 골품제에 막혀있던 터전을 떠나 신분보다는 자신의 예술을 더 알아주는 포용력있는 지역, 즉 대륙문화 수용의 관문이었던 충주로 옮겨 온 자연스러운 궤적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서예의 높은 경지를 이룬 한 독학자가 걸어온 길은 충주지역에서 멈추는데, 일찍이 우륵이 멸망하는 조국 가야를 등지고 이 길을 걸어 충주에 이르렀듯이 김생 또한 신라의 가야인 이주정책에 따라 국원(충주)으로 이동해온 가야계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김생을 가야계의 인물로 보려는 경향은 가야 출신으로 통일신라 초기 유학자로서 명성을 날린 강수(强首, ?692)와의 비교를 통해 탄력을 받는다.

강수는 태종무열왕 즉위 당시 당()나라의 사신이 가져온 어려운 내용의 외교문서를 왕 앞에서 막힘 없이 풀이함으로써 그 학식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장력으로 당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답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 뒤 무열왕이 당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할 때 외교문서를 작성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삼국이 통일된 뒤 그 공을 인정받아 문무왕으로부터 사찬(沙飡)의 관등을 받게 된다.

김생의 관직명을 혹자는 지서원사(知瑞阮事)라 추정한다. ‘그 부모가 한미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왕이나 고위직을 독식한 성골과 진골이 아니었을 뿐 글과 글씨 공부를 결심할 정도의 신분은 되었으리라는 추측이다. 골품제도에 막혀 꿈을 펼칠 수 없었던 당대의 많은 6두품들이 당으로 유학을 떠났던 점을 감안하면 잘 해야 중간관료를 담당했던 6두품 이하의 신분은 한미하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강수 또한 6두품 출신이었고 더욱이 백월탑비문을 찬술한 최인곤이 지서원사로 6두품이었던 사실은 비문을 쓴 김생 또한 6두품 출신일 가능성을 더해준다. 신라의 직급체계에서 기술직이 5두품, 문한직(文翰職)6두품이었던 점을 염두에 둔다면 김생이 여러 사찰에서 필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신분적 기반 위에서 가능했으리라는 추정이다.

강수와 김생의 비교에서 또 하나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이름의 유래이다.

강수는 본명이 자두(字頭)’인데 무열왕이 강수선생이라고 부른 것을 삼국사기에서 채택함으로써 본명이 돼버린 경우이다. 태종무열왕이 그의 머리 생김새가 특이하여 강수선생이라 불렀고, 심지어 이름은 부르지 않고 단지 임생(任生, 임나가라 출신의 사람이라는 뜻)이라고만 부를 정도로 총애하였다. 그에 대한 존칭으로 본래의 출신지(임나가야)에 생(, 선생의 의미)을 붙여 임생(任生)이라 부르기도 한 것인데 이는 강수가 임나가야 출신으로 충주에 사민된 것이라는 기록을 입증하고 있다.

김생의 경우도 강수와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 우선 신경준(申景濬 17121781)동문휘고(同文彙考)에서 김생의 이름은 구()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김생이 본래 이름이 아니고 애칭이거나 존칭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언제부터 김생이라 부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김생이 생존 시 글씨로 유명해지면서 김생이라 부르게 되자 본인 스스로도 김생이라 자처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생이 최후의 주처를 충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도 역시 김생이 가야 출신으로 충주지역에 사민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과 불교와 서예에 평생을 바친, 탈속한 승려이자 자유로운 예술가로써 김생을 조명하려는 관점이 양립하고 있다.

6세기 중엽 신라의 진흥왕은 전 한강유역을 확보(552)하고 국원(충주)에 소경을 설치(557)한다. 다음 해인 558년에는 경주 왕가의 인척 자제와 6부의 호족세력을 소경으로 이주시켜 중원경을 튼실하게 했고 임나가야인을 사민시켰다. 뿐만 아니라 8, 9세기는 거대한 중앙탑을 건립하는 등 중원소경을 중시했는데 이는 충주가 대륙으로 진출하는 거점인 동시에 대륙 문화를 받아들이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충주는 우륵의 가야곡과 가야춤이 흥청대던 문화도시이자 대외교류가 활발한 국제도시였다. 강수가 자유롭게 중국고전을 배우며 수준높은 학풍을 이어가고 우륵의 음악이 왕이 베푼 연희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국제자유구역중원소경(충주)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때문에 미천한 가계에서 태어난 김생도 고도로 발달한 문화도시, 충주에서 신분의 한계를 넘어 자신의 글씨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조건 속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중원소경에 가야인이 많이 살았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더 나아가 김생이 진흥왕 19년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왕 김구해(金仇亥, 521532)의 후손일 가능성도 제기한다.

반대로 가야출신에 대한 신분 상승의 제약을 추론하는 경우도 있다. 중국 왕희지를 능가할 명필임에도 김생이 벼슬을 하지 않고, 충주의 조그만 암자에 머물렀다는 데 의문을 품는 것이다. 즉 가야계 출신 인물로서 신분적 한계에 부딪혀 결국 일생을 초야에서 보낸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생이 가야의 유민이었다는 가설은 순수한 추측일 뿐 어떠한 기록이나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또한 김생이 가야계의 왕족이나 귀족이었다면 출신이 미미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우륵의 경우 가야 출신의 투항 예술가로서 음악적 성취도 성취였지만 통일 이후 어수선한 민심을 하나로 묶을 정치적 이유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강수 또한 고구려, 백제와의 흡수통일과 당과의 협력외교 등 격동기에 그의 학문적 실력이 절박하게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김생의 경우 그러한 시대적 요청이나 운명이 그를 비껴갔거나 스스로 외면함으로써 평생 출세의 길을 버린 채 붓과 함께 서예의 외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김생 서예의 탄생과 시대적 배경

통일신라시대(676918) 김생의 서예가 완성되기 이전까지 서예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의 도움으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여과없이 당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학술, 문화, 정치, 제도 등 거의 전 분야에서 당의 색채를 띠게 된다. 또한 당으로 유학을 가는 승려나 귀족의 자제들이 많았고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당시 중국에서는 초당(初唐) 3대가로 불리우는 구양순(歐陽詢, 557641), 우세남(虞世南, 558638), 저수량(?遂良, 596658)의 서풍이 성행했다. 자형이 근엄하고 규칙적이며 결구상에 있어 완벽에 가깝다는 점이 당시의 정치적 관점과 맞아떨어진 결과일 것이다. 서예는 시대적 배경과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 서풍도 변해왔는데 당태종은 강건하고 힘찬 북조의 기상과 부드럽고 세련된 남조의 기운이 결합된 수나라의 서예 전통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를 더욱 융합시켜 남북의 서예를 하나로 묶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서예에 뛰어났던 당태종은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승화시킨 왕희지(307365)의 글씨를 널리 수집하며 당대에 새롭게 복고시킨다. 난정서(蘭亭序)를 무덤에 순장시켜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왕희지 글씨를 끔찍이 아꼈던 당태종에 의해 왕희지 서법은 화려하게 부활한다.

통일 초기의 질서 안정이 절실했던 통일신라에서는 당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굳건하면서도 세련된 구양순의 글씨와 왕희지의 글씨가 유행했다. 이는 이전 삼국시대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통일신라가 얼마나 발빠르게 당의 문화를 받아들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삼국시대의 서풍은 각기 독특한 서체미를 형성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비(414), 평양성각석(589) 등에서 보이듯 남북조시대의 굳센 해서(楷書) 풍이 유행하였고, 백제는 무령왕릉매지권(525), 사택지적비(654) 등에서 보이듯 남조의 세련된 해서의 영향을 받고 있다. 신라는 지리적 영향으로 비교적 한자가 늦게 전래되었는데 냉수리비(503), 진흥왕순수비(561568) 등과 같은 고박한 서풍을 유지하고 있다.

통일신라는 고구려의 굳건함과 백제의 세련미, 신라의 고박함을 계승하면서 해서의 전형을 확립시킨 초당 3대가와 왕희지 서풍을 재해석함으로써 우리 서예사에 있어서 절정의 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이 때 해서는 주로 구양순법이, 행서는 왕희지법이 주류를 이루게 되는데 이런 흐름은 고려까지 이어진다.

김생의 위대함은 이처럼 통일신라 초기를 풍미하며 정형화된 서체를 완성한 데 있지 않고 이를 딛고 일어서 김생만의 독창적인 서예미학을 창조한 데 있다.

 

 

필적으로 살펴본 김생의 묵흔

김생은 고려시대 이후 수많은 문인들에 의하여 해동제일의 서예가로 추앙받았다.

고려 때 이인로(11521220)는 김생에 대해 용필이 신과 같아 초서도 아닌 듯 행서도 아닌 듯한데, 멀리 57종의 제가체세(諸家體勢)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 순화각첩(淳化閣帖)에 실린 한···남조의 명서가 57명의 필적의 특장을 김생이 제대로 소화했다는 뜻이다.

이규보(11681241)는 왕희지와 짝하여 신품제일(神品第一)’로 극찬하면서 서결평론서(書訣評論序)에 쓰기를 우리 동국의 제일인으로 왕희지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이는 바로 김생이다하였다.

조선에서도 서거정, 이황, 허목, 홍양호, 이규경, 정약용 등 문인들의 평이 줄을 이었다.

조선 성종 때의 문인 성현(成俔, 14391504)이 쓴 용재총화(傭齋叢話)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글씨 공부하는 이는 많으나 김생의 글씨를 본받아 쓰는 이는 적다. 그러나 학사 홍관은 김생의 필법을 본받아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남겼다고 하였다.

허목(許穆, 15951682)미수기언(眉首記言)에서 그는 나뭇가지로 땅을 긁으며 운필법을 익혔지만 신묘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였고, 조선 후기의 학자 성근묵(成近默, 17841852)과재집(果齋集)에서 김생이 토굴 속에서 나뭇잎에 마구 글씨를 썼기 때문에 낙엽과 시냇물이 새까맣게 변했다고 하였다.

김생의 진적은 물론 금석문의 탁본이라도 얻어 간직하고자 했던 선인들은 김생의 글씨를 후대에 남기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 김생 글씨를 모사하여 간행하려 한 일화(1524)가 있고 연이어 그 다음 해에 김생의 글씨를 돌에 새긴 판본을 인출하다가 한쪽 귀가 떨어져나가는 바람에 다시 돌에 새겼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생의 글씨를 오래도록 완전하게 보존하고자 했던 선인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선인들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김생 글씨에 대한 관성적인 감탄에서 벗어나 점차 김생 글씨의 미학적 성취에 대해 구체적인 비평을 가하기 시작한다.

그 중 조선 중후기 추사와 함께 서예의 쌍벽을 이뤘던 이광사(17051777)탑본 역시 기위(奇偉)하고 법이 있다고 하였고, 성대중(17321812)은 백월비 글씨에 대해 그 획이 마치 삼만 근의 활을 당겨서 한 발에 가히 수많은 군사를 쓰러뜨릴 것 같다고 하면서 김생 글씨에 대한 구체적인 감정과 평가를 덧붙이고 있다.

김생 필적에 대한 역대 평가를 빌린다면 김생은 당시 시대 서풍인 왕희지법을 체득했고, 이를 토대로 당나라 해서(楷書)의 전형을 수용하되 이와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글씨를 변화무쌍한 필획과 짜임새로 구사해냈던 것이다.

이것은 동시대 여타 글씨에서 보기 어려운 독보적 경지인데, 김생 글씨의 가치는 외래문화를 수용하되 그것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미의식에 맞게 재해석하고 실천해낸 데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묵흔이 서린 진적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김생의 주요 필적은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명’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 해동명적의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 대동서법의 망려산폭포시(望廬山瀑布詩)’ 등 금석문과 서첩, 편액을 합쳐 십 수 편에 불과하다. 이미 조선시대에도 그의 진적이 귀해져 이광사(李匡師)원교서결(圓嶠書訣)에서 그의 진적은 맥이 끊겨 거의 없다고 할 정도였다.

이제 나라 안팎의 뭇 선비들과 서예가들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었던 김생의 묵흔이 1300년의 세월을 건너와 성성하게 서려있는 대표적인 글씨들을 만나보자.

 

1.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그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필적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가 있다. 통일신라 고승으로 효공왕과 신덕왕의 스승인 낭공대사(832917)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이다.


비문은 신라말 고려초 문장가이자 명서가인 최인연(868944)이 지었고, 김생의 해서와 행서 글자를 낭공대사의 문인인 단목스님이 집자(集字)하였다. 비음기는 낭공대사 법손(法孫)인 순백(純白)이 짓고 썼는데, 비는 고려 광종 5(954)에 가서야 세워졌다.

백월비는 처음 경북 봉화군 하남면 태자사에 세워졌지만 폐사된 후 방치되었다가 조선 중종 때인 1509년 영천군수 이항(李沆)이 자민루로 옮겼다. 그리고 1918년 비신(碑身)만이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져 해방 후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두었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이 탑비가 청량산 부근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김생이 청량산에 들어와 글씨공부를 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김생의 필적이 담긴 금석문 중에 유일한 것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유행한 왕희지, 구양순류의 단정하고 미려한 글씨와 달리 활동적인 운필로 서가(書家)의 개성을 잘 표출시키고 있다. 한 획을 긋는데도 굵기가 단조롭지 않아 반드시 변화를 일으키며, 선은 곡선과 직선의 미묘한 운율을 구사하여 과거 어떤 사람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서법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도 백월비를 탁본했는데 정교한 추사의 탁본 솜씨도 솜씨지만 탁본에 찍힌 추사의 도장이 압권이다. 추사는 백월비 탁본에 정희수탁(正喜手拓)’이라는 도장을 찍었는데 호를 사용하여 추사수탁이나 완당수탁이라 하지 않고 이름을 넣어 정희수탁이라 한 것은 김생 앞에서 자신을 극도로 낮춘 것이다. 김생과 추사의 천년 해후에도 멋스러움이 배어 있다.

 

2. 전유암산가서

김생의 글씨 중에서 유일하게 독립된 서첩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이다. 산가서 말미에 보덕사 김생서라 한 것으로 보아 한때 보덕사에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현재 전하고 있는 인본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각자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어 자획이 다른 것이 많다.

전유암산가서는 당나라 때 은사(隱士) 전유암이 산가(山家)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쓴 글이다. 일찍이 홍양호(洪良浩, 17241802)도 이 서첩을 얻어 귀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작은 글씨로 쓰인 전유암산가서는 파격적인 짜임과 자유로운 운필로 남성적이면서도 장쾌한 맛을 낸다는 평가받고 있다. 당시 중국은 물론 삼국의 서법을 통섭한 자료로서 외래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이를 모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추구해간 김생의 진면목을 느끼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20104월 충주 석종사 경내에 김생이 쓴 전유암산가서의 서체를 집자한 아담한 비가 세워졌다. 비문과 글씨에 조예가 깊은 석종사 선원장 혜국스님이 금석문 연구가 박영돈 씨(75)의 도움을 얻어 세운 것이다.

특히 박씨는 지난 2006년 경북 군위 인각사에 복원된 일연선사비(보물 제428) 복원에도 큰 역할을 했으며, 2009년에는 고려 광종 때 건립된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의 원형을 거의 완벽하게 되살림으로써 탑비 복원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김생 글씨의 원형을 찾기 위해 버클리대 아사미문고까지 찾아가는 등 30년 간 수집한 여러 탁본 중 글씨가 잘 살아있는 부분을 골라 짜맞춰 백월비의 원형을 되살렸다. 박 씨는 지금까지 김생 서체 3,374자를 집자해 복원했다.

 

3. 백율사 석당기


백율사(栢栗寺)는 경주시 동천동 금강산 기슭에 있는 절이다. 삼국통일의 전후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절에 있던 금강 약사여래상(국보 28)과 석당(石幢)1927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 석당은 이차돈 순교비로 더욱 알려져 있다. 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얕은 부조로 새겨져 있다. 527(신법흥왕 14) 이차돈이 불사(佛事)를 일으키다 왕명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했는데 그의 목을 베자 흰 젖이 수십 장()이나 치솟아 올랐으며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더니 하늘에서 꽃이 떨어지고 땅이 크게 진동하여 왕과 군신들이 마침내 불교를 공인했다는 내용이다.

26면 사이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해독이 어렵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3 원종흥법염촉멸신(原宗興法厭觸滅身)조에 의하면 이 비의 건립 연대는 817(헌덕왕 9)으로 추정된다. 이 기문이 김생의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다. 불교의 순교상으로 유일한 예로서 한국 불교사뿐만 아니라 9세기 초 불교 조각사 및 복식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4. 창림사비


창림사비(昌林寺碑)’는 경주시 배동 남산 기슭에 있었던 절이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쌍두귀부(雙頭龜趺), 석등연화대좌(石燈蓮花臺座) 등이 남아 있다. 최하단 건물터 민묘 앞에 몸통만 남아있는 귀부가 있다. 쌍두귀부다. 즉 두 마리의 거북을 하나로 붙여 나란히 조각해 놓은 것이다. 머리 부분이 없어도 엉금엉금 기어가는 모습이 익살스럽고 생동감 넘친다. 이 쌍귀부 중 머리 하나는 경주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귀부 위의 비신은 파손되어 없어 졌으나 이 비가 당대 명필인 김생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부 창림사조에는 금오산 기슭에 신라 때 궁전의 옛터가 있었는데, 후인들이 그 자리에 이 절을 세웠다. 지금은 사라져 없다. 옛 비석이 있으나 글자는 없다. 원나라의 최고 명필 조맹부(1254~1322)가 창림사비 발문에 이르기를 이것은 당나라 시대 신라 중 김생이 쓴 그 나라의 창림사비로 자획이 매우 법도가 있으니, 비록 당나라의 이름난 조각가라도 그보다 훨씬 나을 수는 없다. 옛말에 어디인들 재주있는 사람이 태어나지 않으랴 하더니 참말로 그렇구나하였다란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세종 때 시작(1432)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 중종 때 완성(1530)한 인문지리서인데 창림사조가 언제 최초로 쓰여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기에 이미 창림사는 폐사가 되었고 비석은 남아 있었지만 글자는 세월의 풍파로 지워져 있었던 모양이다. 탁본만 전해지다가 그마저도 전하지 않는다.

 

5. 화엄경 석경


화엄경 석경(華嚴經 石經)’은 보물 제104호로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에 있다. 석경(石經)은 경전의 원문을 돌판에 새긴 것인데, 화엄석경은 화엄경을 엷은 청색의 돌에 새긴 것이다. 통일신라 문무왕 17(677)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화엄사에 각황전을 세우고 이곳에 화엄석경을 보관하였다. 각황전의 안쪽 벽에는 현재 그림이 걸려 있으나, 원래는 여기에 화엄석경이 벽을 이루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경에는 네모진 돌들을 서로 맞추어 끼웠던 듯 모서리에 연결을 위한 홈이 파여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석경들이 파손되었고, 색깔도 회갈색 등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파손된 것을 모아 지금은 약 9천여 점이 남아 있다. 글씨체는 해서체로 최치원이 정강왕 2(887)에 쓴 쌍계사 진감국사비문과 비슷한데, 김생이 썼다고 전해지며 당시의 글씨체를 잘 보여주고 있어 희귀한 석경의 대표적인 예로 주목되고 있다. 이 화엄석경은 우리나라 화엄종 사찰의 상징적 유물로서 비록 파편이기는 하나 신라 후기의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6. 보은 삼년산성 안의 암각자(岩刻字)


충청북도 보은군 어암리 삼년산성 안의 바위에 아미지(蛾眉池), 유사암(有似巖), 옥필(玉筆) 등을 새긴 암각자가 있다. 이것이 김생의 글씨라고 전하여 오고 있다. 글씨가 좋아 탁본 자국으로 바위가 검게 되어 있을 정도이다.

 

7. 대로원 편액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대로원(大魯院)은 경주의 남쪽 6리에 있으며, 김생의 글 대로원 석 자(3)가 있다고 하였다.

홍양호는 제백월사비(題白月寺碑)에서 내가 일찍이 김생의 글씨를 탐하여 계림에서 대로원의 작은 편액과 강진에서 만덕산 백련사(萬德山 白蓮寺)여섯 큰 글자를 보았고, 또 전유암서 및 흥인거(興隣居)의 인본을 얻어서 집에 간직하고 있다고 한 데서 이 편액이 근세에까지 전하여 왔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 현재에는 전하지 않는다.

선조(宣祖)의 별자(別子)인 이영(李瑛, 16041651)김생이 쓴 경주 대로원 석 자는 추녀 끝에 걸면 집이 기울어지고 고쳐서 기울어진 곳에 걸면 도로 반듯해진다 한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또한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도 김생이 안양사의 액자를 썼는데 수 년이 지나 그 액자를 건 집이 남쪽으로 기울었다. 그러자 그 집 북쪽에도 써 붙였더니 집이 도로 반듯해졌다. 또 청룡사에 액자를 썼는데 항상 구름과 안개에 싸여 있었다라는 비슷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다소 황당한 이 이야기는 김생의 글씨가 신필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그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다.

 

8. 만덕산 백련사 편액


전남 강진군 만덕산에 있는 백련사는 신라 문성왕 원년(839)에 무염(無染)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조선 후기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은 문집에서 서쪽 뜰의 1500그루 동백나무와 신라 때 잡석으로 쌓은 남쪽 돌계단, 그리고 김생의 글씨를 합하여 백련사의 삼절(三絶)이라 한다는 승려의 말을 전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그는 김생의 글씨로 전해지는 편액에 대해 세상에 전하기로 김생이 사찰의 건물에 제액(題額)을 하였지만 결구법이 백월비와 다르므로, 아마도 김생의 진적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필세가 맑고 굳세니 또한 신라와 고려 무렵의 명필이다라는 감정을 남겼다. 조심스럽게 김생의 글씨라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홍양호(17241802)는 이 편액의 글씨를 김생의 필적에 포함시켰다.

강진에 유배된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다산초당에서 가까운 백련사를 자주 찾았는데 이무렵 쓴 시에 문의 주련은 김생의 글씨이고 누각의 현판은 이광사가 쓴 것이니 시대가 멀어 가짜일까 의심하지만 무게 있는 그 이름 허망하지 아니하네라고 써서 김생의 글씨를 기렸다.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정약용마저 만덕산백련사가 김생의 필적이라 하였으니 19세기의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이후에는 많은 선비들이 별다른 의심없이 이 편액을 김생의 필적으로 보게 된다.

조선시대 내내 이 현판이 과연 김생의 필적인지에 대한 여러 논란이 있어 왔고 그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만덕산 백련사 편액은 이 절의 대웅전 안 벽에 높이 걸려 있다.

 

9. 마곡사 대웅전 편액


마곡사(麻谷寺)는 충남 공주시 태화산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신라 선덕여왕 9(640)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절의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자장이 절을 완공한 후 설법했을 때 사람들이 삼()과 같이 빽빽하게 모여들었다고 해서 마곡사라 했다는 설과 신라 무선(無禪)대사가 당나라 마곡보철(麻谷普澈)선사에게 배웠기 때문에 스승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마곡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항일독립운동가 김구가 일본 헌병 중위를 죽이고 피신해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 절의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801)의 편액이 김생의 글씨라고 전하여 오고 있다.

 

10. 금자사경(金字寫經)

불상 속에 넣어둔 보물 중에 간혹 금자사경(金字寫經)이 나오는데 이를 흔히 김생의 글씨라 한다. 이에 대해 조선 후기 실학자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이 저술한 해동역사(海東繹史)에도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사찰에서 가끔 검은 바탕에 금자(金字)로 쓴 경서를 김생의 글씨라 하지만, 대개 거짓으로 믿을 수 없다. 고려의 종이는 지금의 아청지(雅靑紙), 불상의 뱃속에 가끔 금자로 쓴 불경이 간직되어 있다. 김생의 글씨라고 칭하는 것은 모두 이 종이이다.”

김생의 글씨로 일컬어지는 것이 모두 고려의 종이에 쓰인 것이니 믿기 어렵다는 말이다. 하지만 김생이 쓴 경서를 보았다는 허묵(許?, 15951682)의 글은 관심을 끈다.

내가 젊어서 해인사에 놀러 가서 처음으로 김생이 쓴 고경(古經)을 보았다. 그 뒤로도 많이 보았으나 모두 인본(印本)이라 고경의 진묵(眞墨)만 못했다.”

김생은 신라 원성왕 때 사람으로 가장 오랜 분이다. 그가 불경을 썼는데 지금 천년이 되었어도 그 진적이 많이 전해 온다.”

이상으로 보아 금자사경에는 김생의 글씨도 있으나 사경이 모두 김생의 글씨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김생 글씨로 알려진 대표적인 금자사경(金字寫經)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47면으로 된 1첩으로 19.3×10.2이다. 해서체로 매우 정교하고 당시의 필법을 엿볼 수 있는 활달한 필체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채수황(대전시)이 소장한 김생봉서 금자사경(金生奉書 金字寫經)도 있다. 명주에 옻칠을 한 위에 해서체로 쓴 금자사경이다. 머리 부분에 불상을 그리고 그 옆에 신라국김생봉서상중하라고 쓰인 표지가 있는 세 편의 불경이다.

 

11. 서명구 묘비명

서명구(徐命九, 16921754)의 묘비(墓碑)는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송우리에 있다. 서명구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17(숙종 43)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서명구 묘비는 김생 집자비로 구전되어 오다가 1999년 봄에 동방서법대학원 정상옥 교수에 의해 밝혀졌다. 1791(정조 15)에 세워졌고, 묘갈명은 형조판서겸홍문관예문관대제학 남유용(南有容)이 지었다. 비신 전면은 석봉 한호의 글씨, 후면과 좌우 측면은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2000년 초 묘소 이장에 따라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곡천리 산숫날로 옮겨졌다.

 

12. 조계 묘비명

조계 묘비(趙棨 墓碑)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산북리에 있는 조계(17021754)의 묘비이다. 20004월에 김생연구회의 노력에 의해 김생 집자비로 확인되었다. 1789(정조 13)에 세워졌으며, 서명구 묘비와 2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에 보이는 서품보다 매우 선명하고 필획이 정교하여 김생체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비이다.

 

13. 이현서 묘비명

200411월 김생연구회와 가평문화원이 함께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소재 이현서 묘비명(李玄緖 墓碑銘)을 현지 조사하여 김생 집자비임을 확인했다. 이현서 묘비명은 종래 알려진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는 물론 조계묘비, 서명구 묘비와도 서체가 완전히 일치한다.

이는 적어도 19세기까지는 어떤 형태로든 매우 많은 김생의 글씨가 남아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현서 묘비명은 모두 1,480여 자이다. 아들 이근필(李根弼)1863년에 건립하였고, 1862년에 이현서 자신이 짓고 집자한 것이다. 이현서 묘비명은 조계 묘비, 서명구 묘비 등과 함께 글자 수가 매우 많아 김생의 서체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14. 사성절보(四聲絶寶)

한자의 발음에는 평성·상성·거성·입성의 네 가지가 있다. 이 사성절보는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에서 200자를 골라 같은 운자끼리 모아 놓은 것으로, 사성을 알기 위한 둘도 없는 보배란 뜻이다. 그러나 사성이나 운자를 알아보기 위한 체계적인 특성은 없으며, 다만 발음(종성 받침)이 같은 글자를 같은 운자에 속하는 것끼리 모아서 나열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성절보는 사성을 배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는 데 편리하도록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하겠다. 당시에는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여 비석을 새기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었기 때문에 이에 편리하도록 구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15. 사내문고 소장(寺內文庫 所藏)

일본 야마구치현 현립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데라우치 문고 중 한국 관련 희귀 전적류 등 135점이 1996년에 경남대학교에 기증된 바 있다. 이 중에 김생의 글씨가 한 점 있다. 한말에 3대 통감을 지내고 초대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게(18521919)가 강탈해간 수많은 전적 문화재를 그의 아들 데라우치 히사이치가 소장하고 있다가 19 46년에 야마구치현 현립대학에 기증·보관되어 오던 것 중 일부이다. 반환된 135점의 문화재는 주로 조선 후기인 1619세기의 작품인 간첩·시첩·서화첩 등 귀중한 전적류들로서 역사학·한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16. 원화첩(元和帖)

이 원화첩은 12자씩 28행인데 비문과 순서가 다르게 법첩으로 되어 있다. 특히 세 번째 장은 20021222일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된 김생 유허 집자비(충주시 금가면 유송리 65-5)의 전면에 복원되어 있다.

 

17. 해동명적, 대동서법

그 외에도 해동명적(海東名蹟), 대동서법(大東書法) 등에 김생의 글자 몇 점이 실려 있다. 특히 대동서법에 실린 망려산폭포시(望廬山瀑布詩)는 자유분방하면서 힘이 넘치는 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들은 모두 여러 종류의 인본(印本)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는 각자를 하는 과정에서 미세한 오차가 생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시 김생을 기다리며

서예는 점과 선의 배치, 기울어진 것과 바른 것의 균형, 길고 짧은 것의 차이, 고요함과 움직임의 조화로 변화를 꾀하지만 전체적으로 동일성을 유지해야 하는 예술이다.

회화나 조각처럼 사물의 외형을 본뜨는 것도 아니고 문학처럼 이야기를 서술하거나 감정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면서 서예는 이 모든 것을 관장한다. 이는 서예의 풍격(風格)이 붓의 운용만으로 빚어지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신성으로 완결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80 평생을 붓을 놓지 않은 집요함, 기존의 것을 답습하지 않은 고집스러움,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벗하지 않았던 초연함이 마침내 초탈한 듯 자유로운 필획과 더불어 살아나 김생 서체를 완성한 것이리라.

김생이 살았던 8세기 통일신라시대는 구양순을 비롯한 초당(初唐)의 서풍이 해서를 형성했고 왕희지의 고전 서풍이 행서와 초서를 주름잡던 시기였다. 김생 역시 처음에는 당시 서예의 관습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김생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얽매이지 않는 파격적인 필적을 남겼다. 왕희지, 구양순에 기반을 두었지만 이미 거기에서부터 멀리 벗어나 자유로운 짜임과 변화무쌍한 획법으로 김생만의 독자적인 서풍을 이룬 것이다.

 

                                                      서동형 해동연서회 충주지부장

 


                                                           전찬덕 충주문화원장

 

충주에서는 매년 김생을 기리고 김생 서법을 복원, 대중화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충주문화원은 벌써 30년 째 김생서예대전김생휘호대회를 열고 있으며 행단연서회는 김생학생휘호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해동연서회 충주지부 또한 김생서법반을 운영, 김생 필법을 오늘에 잇고자 노력하고 있다. 1995년 발족한 김생연구회는 그간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조계묘비, 서명구묘비, 창림사비, 화엄석경 등 김생의 글씨를 발굴하고 김생의 글씨를 모은 김생서법자전을 편찬하는 한편 김생사료전시회와 김생학술발표대회를 열었다.

 

우리나라의 중심에 충주가 있다면 우리나라 서예의 중심에는 김생이 있다. 충주에서 만난 서예인들은 한결같이 김생을 통해 한국 서예가 새롭게 출발하기를 꿈꾸고 있었다. 그들은 옛것과 새것을 버무려 새로움을 찾아야하는 오늘날, 우리만의 튼튼한 문화적 토대가 더욱 절실하다고 말했다. 우리 정서와 역사에 기초한 미의식이 없다면 그 어떤 뛰어난 경향과 기법을 수용하더라도 모방 이상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힘찬 필치처럼 김생사지를 휘돌며 흐르는 남한강 위로 석양이 내렸다. 아름다웠다. 그 풍경은 낡은 생각을 버려야만 새로운 차원을 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아득한 옛날 김생이 꼭꼭 감추어둔 비밀스런 상징처럼 보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김생연구회(1997·1998), 김생학술발표회 자료집, 김생연구회.

장준식, 김인한, 정제규(1999), 충주 김생사지 발굴조사보고서, 충청대학교박물관.

예성문화연구회·충주시(2003), 충주의 인물 2-우륵·김생·임경업, 충주신문사.

서동형(2001), 조계묘비, 이화문화출판사.

서동형(2006), 김생서법자전, 도서출판 석기시대.

정세근(2002), “김생의 서예와 그 집자비의 문제”,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김생연구회(2000), 김생서집성 1, 김생연구회.

김생연구회(2004), 김생서집성 2, 김생연구회.

이완우(1998), “통일신라 김생의 필적”, 선사와 고대 11.

이호영(1998), “김생의 묵흔과 족적에 대하여”, 선사와 고대 11.

서동형(1998), “김생서체의 변천과정-전유암산가서를 중심으로”, 선사와 고대 11.

이미경(2006), “김생 서예 연구”, 원광대 석사학위논문.

이동국(2006), “서예가 열전1-신라 해동서성 김생”, 경향신문.

박철상(2010), 세한도, 문학동네.

디지털충주문화대전(http://chungju.grandculture.net/)

 

(2012.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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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12.02 18:59

    첫댓글 얼마 전 김생서예대전/ 휘호대회에 응원하러갔다
    외지에서 온 어느 분께서 저한테 김생 호가 무엇인가고 묻는데 충주 산다면서, 소위 붓을 잡고
    글씨를 ... ㅎ 답변을 못하고 부끄러운 일을 당한 적이 있었어요.
    충주에서 서예를 한다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알아야했었는데
    올려주신 김생의 자료 등... 감사합니다.
    혹시, 저처럼 모르시는 분 계시면 꼭 기억하고 계세용~/김생 호 (自知)ㅡ

  • 16.12.02 20:00

    좋은 글 천천히 잘 읽어보겠습니다.
    시정 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필독 ; 김생 아호는 꼭 한자로만 쓰세요.

  • 16.12.03 07:28

    ㅋㅋ.. 지는~~~~ 한자 밖에 쓸 줄 몰라쓰~요~지송 함돠~

  • 16.12.14 10:13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정선생님^^
    윤슬님, 꼭.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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