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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모아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이름을 밝히지는 않지만 믿음의 시인이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시를 노래하는데 보십시오 시작이 할렐루야요 20절 마침도 할렐루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도 처음도 마침도 오직 할렐루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문에 등장한 이름모를 시인이 얼마나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지 1절 말씀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1절.....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 하도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누가 시키거나 누가 하라 하니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생이 반드시 해야 할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나이 많으신 어른들이 하시는 말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장 후회가 되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 하지 못하고 헛된 시간만 흘러 보냈다고 후회하신 어른들이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해야할 그 때에...... 마음을 표현했어야할 때 그 시기를 놓치고..... 떠난 후에 후회와 아쉬움만이 크게 남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위대하신 하나님을 왜 찬양해야 합니까? 그 이유를 본문말씀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3절입니다.....“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다시 회복시키겠다고 하셨습니다. 시인이 은혜의 시를 노래 할 때는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바벨론포로 생활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을 다시 재건할 때 노래한 시라고 그 배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역사적으로 많은 흔적이 있는 곳입니다. 단순히 정치적 중심도시가 아니라 거룩한 성전이 있는 곳으로 오랜 세월을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중심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은 해마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찾아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한 곳이기에 예루살렘을 민족의 자긍심을 가져도 된 그런 성지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역사속에서 볼 때 피로 얼룩진 곳 부패와 죄악이 만연한 곳 하나님을 섬기는 것 보다 우상을 섬기며 타락한 그런 곳이기도 했습니다.
철저히 패역하고 목이 곧은 백성으로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 한 것도 하나님의 진로 채찍을 드시고 아픔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등 돌리신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은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도 너무나 처참하여 도저히 회복 불가능하지만 포로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셨고, 흩어진 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상심한 자를 고쳐주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시며 아픔을 함께 공감하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이사야 30: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자리는 예루살렘이 곧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로 값을 치루시고 세운 교회를 통해 날마다 구원받는 자의 수를 더하시며, 흩어졌던 우리를 불러 모으시고, 성도들의 교회 공동체속으로 다시 이끌어 주시고,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들의 상한 마음을 고쳐주시고, 상처를 보듬어 주시며 위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할 곳이 교회입니다.
다니엘 기도회를 통해 은혜의 간증을 나누는 성도들마다 자신의 아픔을 통해 만져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였기에 치유 받고 열방의 모든 성도들이 은혜 받고 박수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았습니까?
교회 공동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치유하심의 역사를 경험하고 회복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위대하신 창조주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도 섬세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4-5절.....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어느 누가 우주공간에 있는 별들을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어렸을 때 밤에 하늘을 바라보며 보이는 별을 세워본 적이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깊어가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 유난히도 깨끗하고 맑습니다.
아침 출근길 집을 나와 차로 출근하여 업무공간에 매여 지내다가 퇴근 시간 되면 다시 차를 타고 집에 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다람쥐 체 바퀴 돌 듯 세상일에 힘쓰다 보면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일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한 주간 유난히 맑은 가을 하늘 공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앞에 저녁별은 딱 하나뿐이 보이지를 않는거예요 새벽기도시간 교회에 나오면 서해 쪽으로 바라보면 유난히도 밝은 새벽 별 한두 개 보일뿐입니다. 그져 하늘에 떠 있는 별 하나 보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이미지 두 장이 있습니다..........한 장의 이미지는 미국이 2021년 7월 4일 독립기념일을 맞아 허블우주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측한 사진입니다. 1990년 4월 NASA에서 천문학의 대부인 허블 이름을 따서 허블우주망원경을 쏘아올려 지구에서 550KM에서 떨어진 곳에서 우주의 아름다운 광경을 사진을 찍어 NASA에 보내는 역할을 하는데 수명이 30년이 된다고 합니다.
또 한 장의 사진 이미지입니다.......붉은 빛과 하얀 빛 마치 한강에서 불꽃놀이처럼 보입니다. 허물망원경으로 찍어 사진을 보내온 것들인데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 공간 안에 셀 수 없는 은하계들로 이루어져 있는 무수한 별들입니다.
은하계 안에는 몇 천 억 개 별들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학자는 별들의 수를 셀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별들의 거대한 공간의 거리를 빛의 속도로 계산하면 10만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우리기 알기로는 빛의 속도가 1초에 지구 둘레를 7바퀴 반은 돈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별을 볼 때 별과 별사이가 한 뺌 거리처럼 보일지 몰라도 10만년이 걸린다니 입이 짝 벌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구라는 작은 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다른 별에서 볼 때는 너무 작아 희미한 불빛 같습니다. 그런 은하를 통과하는데 몇 억년이 걸린다는 것인데 놀랍기만 합니다.
우리인생 수명을 일찍이 모세는 알았습니다. 시편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지금 조금 더 산다고 좋아할지 몰라도 우리인생은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처럼 하루살이 인생입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기독교로 회심하기 전에 촉망받던 과학자였습니다, 천문학에 조애가 깊었던 그는 밤하늘의 별들을 볼 때마다 너무 아름답게 느끼면서도 동시에 슬프고 우울한 감정을 가지곤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바라보는 별들의 빛이 지구까지 수천 년이 걸려야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지금 별에서 막 떠난 빛이 지구에 닿기도 전에 자신이 죽는 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맥그라스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밤하늘은 저에겐 저의 하잘 것 없음과 죽음의 강력한 상징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위대하신 하나님은 어떠습니까?..... 별들의 수효를 다 세셨습니다...... 그 별들의 이름대로 부르셨습니다. 어찌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지혜가 무궁 하지 않겠습니까?
조금전 불렀던 79장 1절만 부를까요!! ♪♬....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
이런 위대하신 하나님을 오늘 내가 믿고 있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러나 위대하신 우주의 하나님이 능력만 나타내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8-9절.....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지극히 섬세하시고 자상하셔서 풀이 자라도록 비를 주시고 먹을 것이 필요할 때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산에 사는 들짐승은 어떻게 먹고 지낼까?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먹을 것을 안주어도 산에 있는 들짐승과 까마귀 새끼까지 세밀하게 보시고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이십니다.(15-18절 참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잘못된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큰일을 하는 사람은 가정의 사소한 일에 매일 수 없다는" 생각을 심어 주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던 귀한 어른들이나 중요한 일을 하던 분들은 자신의 가족들이나 개인의 삶과 관련된 일들은 큰 일을 위해서는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동양적 미덕이고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뇌리에 심겨진 사상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더 빨리, 더 크게, 더 위대하게를 지향하는 나라와 민족들은 작고 사소한 일은 잠시 뒤로 미루어 두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0:29-30....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사람도 아닌 작은 미물, 참새 한 마리의 죽고 사는 것도 주관하시고 간섭하시며 우리 인간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세시고 아시는 분이라고 우리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80억 인구의 머리털 하나하나를 다 세시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세밀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에서 증거 합니다...... 우리가 잘아는 엘리야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제단에 불이 떨어지게 한 뒤 승리하여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다 진멸하고 난 뒤에도,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명령을 내리자 그 용기와 믿음이 다 어디로 갔는지 무서워서 도망가다가 기진맥진하여 로뎀 나무 밑에 누워서 “날 죽여주십시오.”하고 잠자고 있을 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어루만지며 떡과 물을 먹게 하고 기운을 차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40주야를 도망하여 호렙 산에 이르러 한 굴속에 들어가 유하며 원망스럽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큰 지진이 지나가고 지진 후에 큰 불이 지나갔습니다. 그 후에 세미한 소리가 들리면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섰느냐.”하시고 그가 행할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왕상 19:12).
섬세하시고 세밀하신 하나님은......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는 승리의 순간에만 함께 하신 것이 아니라 낙심하여 로뎀 나무 밑에 누워 있을 때에도 천사를 보내어 어루만지며 떡과 물을 공급하여 돌보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큰 지진과 큰 불과 바람소리 속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도리어 세미한 작은 소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섬세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3.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10-11절....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도다.”
10-11절 공동 번역성경이 더 또렷합니다. “힘센 말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힘 좋은 장정의 다리도 반기지 않으신다. 당신 두려운 줄 아는 사람, 당신 사랑 믿는 사람, 그들만을 반기신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고 잘 난체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실 때 힘들고 어려울 때 낙심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 사랑에 기대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목회현장에서 성도를 바라볼 때 하나님 앞에서 너무 뻔뻔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하면서도 너무 자기를 내세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떻 때는 안쓰러우면서도 불쌍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사람을 지적했습니다....... 요한 삼서 1:9절에 보면 의뜸 되기를 좋아한 디오드레베를 지적합니다. 그가 사도요한 일행을 영접하면 좋은데 그들이 더 대접받을까 봐 요한일행을 받아 드리지를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어도 자기를 들어내니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지만 얼마나 하나님을 들어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까? 자기만을 들어내 보이면 하나님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중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100명의 군인을 지휘하는 백부장으로 고넬료라는 사람입니다. 로마 군인이기에 유대인들이 봤을 때는 이방사람입니다. 이런 로마 군인이 철저한 로마황제숭배를 거절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 신앙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했습니다. 행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군인정신이 투철한 사람이기에 누구에게 복종해야하는 것을 철저히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고넬료가 황제숭배를 거절하고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쌓아왔던 집안가문이 하루아침에 끝나버리는 상황입니다. 그런 찬바람이 불수 있는 모든 환경에도 하나님 제일주의 은혜를 입었기에 고넬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고넬료가 당시 예루살렘교회 감독인 베드로를 초청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우리 집에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해주십시오 초청하는데 혼자가 아닌 일가친척을 다 불러 집회시간에 베드로 사도 오기만을 기다리는 고넬료 였습니다.
행10: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 정도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한 영혼이 주님앞에 돌아와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그 배후에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일하고 계셨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나의 삶이 내 의지로 내 노력으로 내 방법으로 열심히 살아왔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젠 그것 다 내려 놓으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지금까지 우리를 업기도 하셨고 끌어 안으시기도 하셨도 함께 울고 함께 웃고 우리를 지금 여기까지 오게 하셨음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노래해야 할 것은
저와 여러분을 그때마다 회복시켜 주셨기에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까지 섬세하시고 세밀하게 일하셨기에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인자하심을 고백하도록 역사하셨기에 위대하신 하나님을 마땅히 찬양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백하는 성도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