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vs 세밑 인심
새해 첫날
우리말에선 '풋'이란 접두사를 붙이면 뭐든지 싱그러워진다.
'풋내'는 상큼하고, '풋내기'는 싱싱하다.
'풋' 자를 좋아하는 정현종은 새벽을 '푸르른 풋시간'이라고 했다.
그는 어느 아침 파란 햇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곤
"그 풋맛에 고만/ 정신이 아득하여/ 마음은 당장 춤춘다/ 혀로 오는/ 풋풋함의/ 무한 에너지"라고 노래했다.
▶ 새해 첫날이다. 한 해가 시간의 풋내를 풍기는 때다.
플라톤은 "시간이란 움직이지 않는 영원성(永遠性)의 움직이는 이미지"라고 했다.
변화하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태초의 '푸르른 풋시간'을 선명하게 느낀다.
문정희가 신년시 '새옷 입고'에서
"하늘에서 목욕 나온 선녀들처럼/ 헌옷은 훌훌 벗어버리고/ 가뿐한 알몸 위에/ 새옷 하나 갈아입을까 보다"라고 했듯, 우리 영혼은 '알몸'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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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숙은 콩트
'어떤 새해 인사'에서 알몸이 된 영혼을 그렸다.
온 가족이 모여 살던 옛집을 찾아가는 사내 이야기다.
"새해 첫날 자정 무렵에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옛집이 있는 그 긴 골목을 나는 걸어갔어. 추억 속의 무쇠난로의 갈탄을 갈려고 내 걸음이 빨라졌던 것 같아."
오피스텔에서 홀로 사는 사내를 옛집으로 불러들인 추억의 힘은 봄·여름·가을이 아닌 한겨울에 온 가족이 둘러앉았던 따뜻한 난로가 피워낸 것이었다.
▶ 네덜란드 심리학자 다우베 드라이스마는 '나이가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라는 책에서 인생을 강물과의 달리기 시합에 비유했다.
젊은이는 강물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다고 믿기에 강물이 더디게 흐른다고 느낀다.
중년엔 강물과 비슷한 속도로 뛴다. 숨이 찬 노년엔 강물이 너무 빠르다고 한다.
새해 첫날엔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뛰고 싶어진다.
▶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편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붉은 여왕의 체스판에서 달리기를 한다.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다. 붉은 여왕은
"여기선 같은 장소에 있으려면 계속 달려야 한다.
다른 곳에 가려면 두 배 더 빨리 뛰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진화생물학에선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환경에 적응하려는 '종(種)의 경쟁'을
'붉은 여왕' 가설로 설명한다.
토끼를 따라 낯선 세계로 간 앨리스처럼 토끼의 해를 맞았다.
풋풋한 마음으로 다시 뛰기 위해 신들메를 고쳐 매자.
세밑 인심
"…컴컴한 부엌에서 늙은 홀아비 시아버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그 마을의 외딴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백석 '적경·寂境'). 외딴 산중 마을,
며느리가 아기를 낳자 혼자 된 시아버지가 미역국을 끓이는 정성이 애틋하다.
그 마을 다른 집도 이 집 산모를 위해 산국을 끓인다.
외지고 가난한 산속에서도 사람들은 내 일처럼 새 생명을 함께 기뻐하고 축복한다.
사람 사이에 오가는 따스한 인정이 겨울 산중을 덥힌다.
▶ 옛말에 "광에서 인심 난다"고 했지만 꼭 살림이 넉넉해야 남 도울 마음이 생기는 건 아니다.
낮고 어두운 곳으로 눈길이 가는 세밑, 어려운 사람이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주머니를 턴다는 소식이 잇따른다.
위안부 할머니 황금자씨는 정부 지원금과 연료비, 폐지 팔아 모은 돈을 아껴 장학금 3000만원을 내놓았다.
혼자 사는 노인들도 한 달 몇 십만원밖에 안 되는 생계급여를 쪼개 이웃을 돕는다.
▶ 서울 3호터널 입구 우리은행 본점 외벽에 나태주 시인의 '기도 1' 한 구절이 붙어 있다.
"내가 추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추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인천 중구 신흥동에 있는 대형 찜질방 '인스파월드'도 작년부터 추운 날을 보냈다.
하루 2000명에 이르던 손님이 신종플루가 번지면서 크게 줄었다.
누군가 불을 지르는 일까지 터져 한동안 장사를 못했다. 세금 1억4000여만원도 내지 못했다.
▶ 인스파월드가 겨우 정상 경영을 회복해 가던 지난달 북한이 연평도에 포탄을 퍼부었다.
박운규 대표는 인천으로 피란 나온 연평도 주민부터 떠올렸다.
연평도 사람들은 굴과 꽃게를 팔러 인천에 나올 때면 잘 곳이 마땅치 않아 인스파월드에 자주 묵었었다.
박 대표는 단골손님들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는 찜질방을 피란민 숙소로 내놓았다.
400여명을 먹이고 재우느라 한 달 넘게 영업이 중단됐다.
▶ 지난주 인천시가 인스파월드에 피란민 돌봐 준 비용 3억6000만원을 갚기로 했다.
그러자 인천세무서가 인스파월드에 밀린 세금을 받겠다며 이 돈에 압류신청을 냈다.
피란민 숙소는 당연히 정부나 지자체가 마련해야 했다.
정부가 허둥지둥할 때 한 찜질방이 대신 나서 피란민을 거뒀다.
속담에 "꽃밭에 불지른다"고 했다. 인정사정없는 짓을 이른다.
인천세무서의 찜질방 세금 압류가 딱 그 격이다.
하이든 - 바이올린 협주곡 제4번 G장조 Hob.VIIa:4
Haydn - Violin Concerto No. 4 in G major Hob. VIIa: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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