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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남녀의 신앙 법도
디모데전서 2:8~15
우리가 지난 주 수요일저녁 예배 때에 디모데전서 2:1~7 말씀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 내용을 잠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역자 디모데에게 성도들을 가르치기를,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특별히 임금들과 고위 관리들을 기도에 포함시키도록 덧붙여 권면합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교회가 기도하도록 권면하는 사도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의 백성들이 신앙 생활을 하되, 공권력에 의한 박해와 방해 없이 고요하고 평안하게 신앙 생활을 영위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교회가 공권력과 맞서 대항하며 대결적 자세를 계속 취한다면, 결국 교회와 성도들은 경건함과 단정함 중에 신앙 생활을 차분하고 안정적인 가운데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 네로가 집권하고 있으면서 점점 기독교회에 대하여 박해의 고삐를 쥐려고 하는 시점인데도, 사도 바울은 네로 황제와 고위 관리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교회는 주의 백성들을 위한 기도만 아니라 교회 밖의 모든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기도하며 특히 국가를 위한 기도도 늘 힘써 행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대표 기도자들도 기도할 때에 세속 국가와 위정자들을 위한 기도도 잊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교회의 합당한 예배 자세임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이렇게 교회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며, 차분하고 안정적인 가운데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으로 여기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과 더불어 원하시는 바가 그들이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진리를 아는 것’이라는 것을 원어를 살펴보면, 단순히 진리를 아는 정도가 아닙니다. 여기서 ‘아는 것’이라는 헬라어 단어 ‘에피그노시스’는 ‘정밀하고 정확히 아는 지식’을 가리킵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 내에 거짓 교사들이 일어나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복음을 알되 깊이 알고 분별력을 갖고 판단할 수 있도록 진리를 더욱 분명하고 치밀하게 아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도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복음의 핵심 진리를 여기서 잠깐 요약하여 이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하시니, 이는 복음이 증거되는 이방 세계 사람들이 여러 신들을 섬기는 것과 대조적인 점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신데 그분이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증언합니다. 당시 헬라 세계의 종교와 철학 사상에서는 신과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는데 그 중간에서 이어주는 영적 유출물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유출된 존재들이 신과 사람들 사이를 중보한다고 믿었는데, 사도는 여기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는 유일한 중보자가 계신데,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한분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사람이라고 밝힌 이유는 예수님의 인성을 특별히 말씀해주어야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이 어떤 철학적, 종교적 중간 중재자가 아니라, 복음의 내용대로 사도 바울이 전도할 당시 약 30년 전에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와 동일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줌으로써 우리의 대속물이 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대속물이라는 헬라어 단어 ‘안티루트론’이 노예나 포로의 몸값으로 지불된 대금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려고 자기의 목숨을 값으로 지불하셨음을 말씀합니다. 이로써 예수님 외에는 우리의 중보자가 없다고 사도는 다시 한번 복음의 핵심을 증언합니다. 이 복음을 이방 세계에 전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전파자와 사도와 스승으로 세우셨다고 말씀하면서, 이것은 참 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이는 당시에 에베소 교회 내부에 사도 바울을 사도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악한 자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사도가 말씀한 것입니다.
이렇듯 에베소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한 사도는 이제 구체적으로 누가 기도하며 어떤 자세로 기도하며 어떻게 예배 생활 및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8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8절에서 사도는 남자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기도하되 바른 자세로 기도하도록 권면합니다.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서 기도가 교회와 성도들의 우선적인 의무이자 특권임을 말씀한 것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예배와 성도들의 신앙 생활 중에 남자들은 무엇보다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자세에 대하여 각처에서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각처에서’라는 말은 당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독립된 대형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기보다는 성도들 중에 큰 집을 가진 성도들의 처소에서 흩어져서 예배를 드리곤 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예배의 처소를 가리킨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도는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한다’라고 하였는데, 이처럼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기도 자세를 사도가 연상하여 말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대체로 유대인들은 손을 펴고 손바닥을 위로 올리고 기도하곤 하였다고 합니다. 시편 63:4 말씀에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에서 제단 앞에서 이스라엘 회중과 마주하여 한르을 향하여 손을 펴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기도하는 모습이 여러 형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 봉헌식에 기도하던 중에 “무릎을 꿇고”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기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잡히시기 전날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과 교회를 위한 중보 기도하실 때에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기도하셨으며,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서는 그의 얼굴을 땅에 묻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세리는 성전에 와서 고개를 숙이고 자기 가슴을 치면서 기도했습니다. 사무엘의 모친 한나는 서서 기도하되 소리를 내지 않고 속으로 웅얼거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앞에 드리는 성도의 기도의 자세나 모양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기도의 모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자의 행실과 마음의 자세입니다. 8절에서 사도는 ‘거룩한 손’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손이라는 말은 기도자의 평소의 신앙과 삶에서 불결함과 불손함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모습을 가져야 함을 가리킵니다. 기도의 사람 다윗은 시편 24:3 이하에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서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시편 24:3~6)
그렇습니다. 손에 다른 사람의 피가 묻히지 않고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허망한 세상 야망 대신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자가 드리는 기도라야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드는 우리 손이 늘 정결하도록 자신을 돌아보고 늘 회개하며 주님의 보혈로 자신을 씻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사도는 기도하는 남자들에게 ‘분노와 다툼이 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분노란 누군가에 대한 미움, 원망, 파괴적인 감정을 가리킵니다. ‘다툼’이라는 말은 헬라어 ‘디알로기스모스’라는 말로서 무엇인가 논쟁하고 변론하고 시비를 거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불만이 가득하여 자꾸 시비를 걸고 싶고 티격태격 말싸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렇 그 마음에 누군가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여 마음속에 화가 잔뜩 나 있고 용서할 마음이 없다면, 먼저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나 그 사람 사이에서 해결하고 나야 제대로 된 기도가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가르치실 때에 그런 뜻으로 종종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복음 5:23,24)
기도하는 자는 마음 속에 분노감과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다른 이들과 평화롭고 안정된 마음을 가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온전히 상달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활 속에 거룩하고 정결하며 마음 속에 분노와 다툼이 없이 평화와 용서와 축복과 감사의 마음이 충만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사도는 남자 기독교인들 다음에 여자 기독교인들의 신앙 자세에 대하여 가르치고자 합니다. 이것이 9절로부터 15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먼저, 9절로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이와 같이’라는 말은 앞절의 남자들에게 요청한 기도에 대한 사도의 가르침과 같은 맥락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사도의 가르침은 기독교 여자 성도들이 외적인 단장보다 내적인 단장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정하게 옷을 입어야 한다’고 먼저 사도가 가르칩니다. ‘단정하다’라는 헬라어 단어 ‘코스미오스’라는 단어의 뜻은 ‘예의바르다, 우아하다, 공손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 여성들은 예배 드리러 올 때의 옷차림이 예의바르고 우아하고 공순해야 합니다. 교회에 출석할 때에 당시 노예 출신 성도들도 적지 않게 많았기 때문에 옷 차림새가 가난하고 초라한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대한 하나님의 집에 와서 만왕의 왕에게 경배를 드리는 예배자로서 여자로서 공순하고 예의바르게 자기를 단장하여 출석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자세임을 기억합시다.
그런데 그 당시에 땋은 머리에 값비싼 꾸밈 장신구들을 착용하는 것이 유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우 값진 화려한 옷으로 자기를 단장하는 귀부인들의 풍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렇게 외적으로 값비싼 옷이나 화려한 장신구들로 자기를 단장하여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성도 간에 위화감을 조성하며 신앙의 본령이 아름다운 내면 인격의 덕을 증진시키는 것이기에 여성도들에게 값비싼 옷과 화려한 장신구로 꾸며 입고 나오지 말라고 이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 여자 성도가 아름답게 단장해야 하는 내면의 덕은 무엇일까요? 사도는 9절과 10절에서 3가지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첫째, 소박함입니다.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소박함’으로 번역한 헬라어 단어 ‘아이도스’의 뜻은 ‘수줍어함’, ‘부끄러워함’입니다. 그래서 개역판 성경에서는 ‘염치’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성 기독교인들이 단장해야 할 덕목으로 염치와 겸손함이라 할 것입니다.
둘째, 정절입니다. 정절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소프로쉬네’는 ‘절제, 침착함, 정숙함’입니다. 특별히 남녀 간에 거리를 좀 두고 자기를 지키는 여자로서의 자기 절제를 가리킵니다. 남자들을 삼가지 않고 거리낌없이 주도적으로 함부로 나대지 않는 자세요 조용히 가정을 지키며 자기를 잘 다스리는 침착함과 절제의 모습이 여기서 말하는 정절이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여자 기독교인은 이처럼 침착하며 절제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셋째, 선행입니다. 여자 기독교인으로서 자기를 단장하는 것은 선한 일에 부지런한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돕고 나그네들을 선대하며 교회의 어르신들을 섬기며 헌신하는 수고에 앞장서는 것이 곧 여자 기독교인들의 아름다운 덕인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 시대에 늘 예수님과 제자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셔서 식사로 섬겼던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들과 같이 봉사하고 섬기는 수고를 기쁘게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끄러움과 수줍어함과 같은 모습과 침착하게 자기를 절제하며 다른 이들을 돕고 섬기고 교회와 교우들과 이웃들의 어려운 분들을 보면 땀 흘려 수고의 손길을 펴는 이들이 참으로 아름다운 분들이라고 사도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그의 편지 베드로전서 3:3,4 말씀에서 이렇게 가르친 바 있습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그러므로 옷 차림새나 행실에서 덕행 있는 행실과 단정한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집에서나 가정이나 사회 생활에서 여성 기독교인으로서 주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사도는 여자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주도권을 쥐고 가르치는 것을 말리고 있습니다. 11절로부터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여기서 사도는 여자 기독교인들에게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일들과 남자 기독교인들 위에 세도를 부리며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금하는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 기독교인들은 교회에서 조용하고 고요한 모습으로 신앙 생활을 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13절과 14절에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타락 사건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13절과 14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첫 사람 아담 이후에 하와가 지음받았는데, 이후 옛 뱀 마귀에게 하와가 먼저 속고서 남편 아담에게 권면함으로써 함께 넘어진 일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옛날 첫 사람의 넘어진 일까지 상기하면서, 여성 기독교인들의 한계를 여기서 지적하면서 교회 안에서 주도권에 한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사도의 이 가르침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여권 신장론자들에게 늘 사도 바울은 남녀 차별주의자라고 하는 비판을 받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상황에서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여성의 활동 무대는 오직 가정 안에 해당하였습니다. 여자가 밖에서 활동하는 것은 고린도 시의 유명한 아프로디테 신전 창기들이나 에베소의 아데미 창기들뿐이 대부분이었기에, 늘 여성들이 사회 참여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교회라고 하는 자유 속에서 지나친 여성들의 자유로운 발언과 행동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교회가 지탄을 받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가 이 지침에 담겨 있다 할 것입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여자들은 아예 사람으로 취급을 하지 않았는데, 교회 안에서 여자들이 가르치는 일을 맡아 행하고, 교회의 지도적인 입장에서 남자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쥐어 행사한다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수 있었을 것이기에 이 점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기독교 여성들에 대하여 꽉 막힌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1:11 말씀에 이르기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3:28 말씀에서도 선언하기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고 분명하게 남녀의 차별을 주 안에서 없애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남녀의 기능적 차이는 좀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차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에서 이 점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함께 15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들이 정숙하게 자기를 지키며 가정을 가꾸고 신앙의 본질인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한다면 이로써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첫 사람 하와처럼 분명 약점이 있지만 그러나 주 안에서 거듭난 영적 자녀로서 정숙하게 살며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계속 가꾸어 나간다면, 그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많은 제약을 벗어버릴 것이라는 격려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도 여성 사역자들로부터 사도 바울은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브르시길라와 아굴라는 부부인데, 부르스길라가 여자요 아굴라가 남편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부르스길라를 앞에 세우고 아굴라를 뒤에 부릅니다. 이는 영적 주도권을 아내가 쥐고 남편 아굴라가 아내를 도와 사도의 큰 힘이 되어준 것입니다. 로마서 편지를 써서 로마 형제들에게 보낼 때에 사도 바울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 집사 뵈뵈를 추천하여 그 편지를 보냅니다. 빌립보 교회의 기초를 놓은 분도 바로 자주 장사 루디아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에게는 담대한 폰 보라라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일으킨 경건한 학자요 목사인 요나단 에드워드 곁에는 그의 아내 사라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여자 없이 남자가 없다는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므로 남자 기독교인들과 여자 기독교인들 모두 각자 자기의 기능적 특징은 있을 수 있으나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일에 있어서 결코 높낮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한결같이 자기를 잘 단장하고 진실하고 단정하고 거룩하게 자기를 가꾸어 기도와 봉사에 헌신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가서 세상 가운데 주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복된 일꾼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