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일본에서의 원효
일본의 유서 깊은 화엄사찰 고산사. 이곳이 바로 원효의 일대기를 그린 <화엄연기>가 있던 절이다. 누가 무슨 이유로 화엄연기를 만들었을까. 중세 일본의 대표적인 고승이었던 이 절의 중건자, 묘에는 원효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이러한 원효의 영향은 일본 화엄종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는데...
2. 출가하기 전 원효
경산에서 태어난 6두품 출신의 청년, 원효. 삼국유사에 보면 원효의 속성은 설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 순창 설씨의 족보에는 원효의 이름이 나타난다. 기록에 의하면 원효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 사리사를 지었다고 한다. 지금의 제석사는 조선 인조 때 당시 인근에서 유일한 절터였던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이곳에 이전부터 유명한 사찰 사리사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3. 원효의 깨달음
원효가 당나라 유학을 가려던 길에 무덤 속에서 해골물을 달게 마시고 그 다음날 깨달음을 얻어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것이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기록으로는 어떻게 나타나 있을까? 정말로 원효는 해골물을 마신 뒤 깨달음을 얻었던 것일까.
4. 깨달음 이후의 원효의 삶
깨달음을 얻은 뒤 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분황사에 머문다. 깨달음에 도달한 그가 써낸 책들은 쉽고 명료했다. 이러한 원효의 책들은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이 당시 중국불교는 치열한 사상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때 원효는 서로 다른 종파간의 대립과 갈등도 부처의 가르침인 한마음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융화가 가능하다고 하는, 화쟁사상을 주장한다.
5. 귀족출신 승려가 민중 속으로 뛰어든 이유
한창 명성을 얻고 있던 원효는 어느 날 갑자기 붓을 던진다. 그리고 민중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그들 속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불법을 전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결국 원효는 승복까지 벗고 환속한 거사로서 아무런 계율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분방한 삶을 산다. 그 안엔 원효의 민중에 대한 깊은 사랑과 그의 높은 인격이 담겨 있다.
6. 원효에 대한 평가와 인식
원효에 대한 본격적인 인식전환의 계기는 일본에 의해서이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원효가 주를 단 금강삼매경론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원효의 손자인 설중업을 극진히 모셨다. 이 사건을 통해 신라에서도 원효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고 그를 기리는 서당화상비를 세운다. 원효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고려시대에 더욱 높아졌다. 여전히 남아있는 원효의 관련 설화들은 그가 민중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