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 고향에 가서
민 영
들국화 핀골짜기 길을 오르다가구멍 뚫린 철도 하나를 보았다.총소리와 함성이 뒤섞이던삼십오년 전 그날이 철모의 임자는 쓰러졌을까?(들고 간 술 한 잔을그 아래 부어 놓고가을 제사를 지낸다.)이름 없이 죽은 전사의 넋이여그대가 어느 편 사람이었든상관하지 않으마!아, 가을빛 짙은 철원 평야억새풀 흐느끼는 옛 싸움터에오늘은 국경 없는 바람이 분다.
용인 지나는 길에
저 산벚꽃 핀 등성이에
지친 몸을 쉴까
두고 온 고향 생각에
고개 젓는다.
도피안사(到彼岸寺)에 무리지던
연분홍빛 꽃너울.
먹어도 허기지던
삼춘(三春) 한나절.
밸에 역겨운
가구가락(可口可樂) 물 냄새.
구국구국 울어대는
멧비둘기 소리.
산벚꽃 진 등성이에
뼈를 묻을까.
소태같이 쓴 입술에
풀잎 씹힌다.
엉겅퀴꽃
엉겅퀴야 엉겅퀴야
철원평야 엉겅퀴야
난리통에 서방잃고
홀로사는 엉겅퀴야
갈퀴손에 호미잡고
머리위에 수건쓰고
콩밭머리 주저앉아
부르느니 님의이름
엉겅퀴야 엉겅퀴야
한탄강변 엉겅퀴야
나를두고 어디갔소
쑥국소리 목이메네
유사를 바라보며
내 마음 속의
푸른 연꽃은 시들고
검게 탄 줄거리와 구멍 뚫린
씨주머니만 남았습니다.
저 당홍빛 구름 위에
오롯이 자리하신 부처님
이몸이 떠나야 할
유사의 끝 보리수나무 그늘은
아직도 멀었습니까?
소리개 한마리
허공을 맴돕니다.
달밤
흩어진 구름이 틈서리로
내비치는 달은 아름답다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픈 사내 하나이
굴 찾아 돌아간다
- 이런 달밤에
단장(斷章)
외로울 때는
눈을 감는다,
바람에 삐걱이는
사립을 닫듯······
목마를 때는
돌아 눕는다,
눅눅한 바람벽에
허파를 대고······
하지만, 내연(內燃)의 피
독이 되어 거꾸러질 땐
뜨겠다, 죽어도 감지 못할
새파란 눈을!
고향생각
여기서 북쪽으로 천리를 가면
검은 강물 한 줄기 소리 없이 흐르고
우뚝 우뚝 거친 산 솟아 있는 곳
그 산밑이 내 고향 마을이라네.
참솔 같던 젊은이들 총 맞아 죽고
꽃다운 홀어미들 지쳐 잠든 곳
불에 탄 집터마다 쑥대풀 서걱이고
도깨비불 밤이면 펄럭인다네.
잿더미에 흩어진 뼈 벌레 되어 우나니
예 살던 살붙이들 어디로 갔나?
내가 자라 길 떠난 뿌리의 고샅
이 세상 일 마치거든 돌아가려네.
해지기 전의 사랑
해지기 전에
나 그대 보고 싶으면
산수유꽃 한 가지
귓등에 꽂고 찾아가리.
그대의 집 창문에는
황혼의 불빛 어른거리고
파도의 거친 숨결이
조약돌을 굴리리.
해지기 전에
나 그대 마음에 떠오르면
패랭이꽃 한 무더기
가슴에 안고 찾아가리.
그대와 나 사이에
모래톱이 솟을지라도
즈믄해의 사랑 그 꽃잎에
입술 대이려 찾아가리.
봄들에서
산벚꽃이 한창이야
높은 산에 눈 내린 것 같아.
가야 할 길이
십여 마장 더 남았지만,
이 눈부신 봄들에서
조금만 더 쉬어가야 할 것 같아.
괜찮겠지?
빗방울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하늘의 우물에서 떨어집니다.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한길 옆 웅덩이에 떨어집니다.
동그라미 그리는 빗방울은
우리가 사는 지구를 닮았습니다.
구정물 같은 검은 흙 속에서도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가 웁니다.
집
이 집에 등을 대고 산 지도
어느덧 일흔 해가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이 집에
둥지 틀고 살았으나
이제는 그 집을 내가
지고 사는 형국이 되었다,
달팽이가 껍질을 지고 살듯이.
그러는 동안에
가위눌린 한 시대가 지나가고
진달래꽃 도라지꽃 번갈아 피더니
억새꽃 바람에 휘날리는 세월이 돌아왔다.
수많은 국토와 바다를 다녔으나
꿈 깨어 돌아보면 언제나 그 집이었다.
어린 새들 자라서 저마다 날아가고
늙어서 뼈만 남은 쓸쓸한 집.
그 집을 이제
피안까지 지고 가야 하나?
만 리 밖 하늘에서 천둥이 운다.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늘 약골이라 놀림 받았다.
큰 아이한테는 떼밀려 쓰러지고
힘센 아이한테는 얻어맞았다.
어떤 아이는 나에게
아버지 담배를 가져오라 시키고
어떤 아이는 나에게
엄마 돈을 훔쳐오라고 시켰다.
그러 때마다 약골인 나는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갖다 주었다.
떼밀리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얻어맞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생각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떼밀리고 얻어맞으며 지내야 하나?
그래서 나는 약골들을 모았다.
모두 가랑잎 같은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비굴할 수 없다.
얻어맞고 떼밀리며 살 수는 없다.
어깨는 겨누고 힘을 모으자.
처음에 친구들은 주춤거렸다.
비실대며 꽁무니빼는 아이도 있었다.
일곱이 가고 셋이 남았다.
모두 가랑잎 같은 친그들이었다.
우리는 약골이다
떼밀리고 엊어맞는 약골들이다.
그러나 약골도 힘 뭉치면 힘이 커진다.
가랑잎도 모이면 산이 된다.
한 마리의 개미는 짓밟히지만,
열마리가 모이면 지렁이도 움직이고
십만 마리가 덤벼들면 쥐도 잡는다.
백만 마리가 달려들면 어떻게 될까?
코끼리도 그 앞에서는 뼈만 남는다.
떼밀리면 다시 일어나자!
맞더라도 울지 말자!
약골의 송곳 같은 가시를 보여주자!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우리 나라도 약골이라 불렸다
왜 놈을은 우리 겨레를 채찍질하고
나라 없는 노예라고 업신여겼다.
아내를 위한 자장가
아내가 몸져 누운 머리맡에는
알루미늄 주전자가 끓고 있었다.
아내 아내 아내여, 가엾은 아내
나흘 밤 나흘 낮을 꼬박 새워서
나흘 낮 나흘 밤을 열에 들떠서
아파서 할딱이는 너의 숨결은
쉬임없이 끓어 넘는 주전자 같구나.
빈 들을 달리는 기관차 같구나.
하지만 이 밤에는 잠이 들어라.
꽃밭 아닌 내 가슴에 머릴 묻고서
옛날도 그 옛날 먼 숲 속에
난쟁이 일곱이 사는 집에서
의붓어미 시샘에 꽃처럼 져 간
눈부시게 어여쁜 공주님처럼!
그러다 따뜻한 봄이 오거든
나뭇가지 가지마다 꽃이 피거든
아내여, 아내 아내, 어여쁜 아내
꿈 속에서 깨어나듯 피어나거라.
:: 민영-
1934 강원도 철원 출생
1957 <<현대문학>>에 시 <동안>이 추천되어 등단
1983 한국평론가 협회 문학상 수상
제6회 만해문학상 수상.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단장(斷章)> 유진문화사 1972
시집 <용인(龍仁)지나는 길에> 창작과비평사 1977
시집 <냉이를 캐며> 창원사 1983
시집 <엉겅퀴꽃> 창작사 1987
시집 <바람 부는 날> 1991
시집 <유사를 바라보며> 1996
시집 <해지기전의 사랑> 2001
시선집 <달밤> 창비 2004
민영 시인의 말
“ 시를 잘 읽지 않는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이 서글프다. 시는 만인을 위해 만인에게 보내는 시인의 메시지이지만, 그 무슨 특별한 보수나 대접을 받기 위해서 쓰는 글이 아니다. 이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고, 틈이 났을 때 곰곰이 읽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
- 시집 『방울새에게』 <시인의 말> 중에서 첫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