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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활동 원고 공모)
※ 제목“생애 마침표를‘웰다잉, 으로”
작성자: 김점란 (세례명 베네딕다 )본당: 삼덕 젊은이 성당 (연락처:010 2250 3032)
수정본
작년 12월 중순 B라는 상조회사에서. 웰다잉‘(well~dying)이란 주제로 강의가 있었다. 강의실은 꽤 넓은데도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겨우 자리를 차지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젊은이들은 그 수를 곱을 정도고, 대부분 70~80세의 연령대로, 짐작됐다.
오늘의 주제가‘웰 다잉’이라서 그런지 나이 든 분들이 많이 왔다. 나 또한 멀지 않아 필연코 다가올 과제라서 가끔은‘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보람됨일까’라고 염두에 둔 사항이기도 했다.
출연 강사는 조계종에서 온 스님이다. 스님은 오늘의 주제인‘웰 다잉’을“지난날을 미리 정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마무리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데도 의학적 기계장치에 의존해 연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환자를 더 괴롭게 하는가 하면, 임종 한두 달 동안 병원비 지출이 가장 많아 가족에게도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것, 그것이‘웰 다잉’이다. 라고 했다.
2시간 동안의 강의임에도 한 사람 졸거나 핸드폰 소리를 울리지 않았고, 공감이라고 생각이 들 때는 약속이나 한 듯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자세가 의아할 정도로 성숙해 보여 옆자리 한 젊은이에게“강의내용보다 강의 듣는 분들의 자세가 수준급이다”고 했더니 그는‘불교 신자 각 단체에서’라고 귀 띔 했다. 우리 성당에서도 가끔 덕망 있는 분을 초빙해서 강의를 듣기도 하지만, 비교를 하게 했다.
스님은 신앙에 대한 강의에도 쉽게 풀이하면서, 공감이 가도록 분위기를 이끌었기에 지루하지 않았다. 다른 종교지만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우리 신부님의 강론을 듣는 것 같았다.
“신앙이란 이성과 감성이 그리고 의지가 어우러질 때 진정한 신앙심이 우러난다며, 특히 신도라면 조금만 행동이 어긋나도 손가락질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며“늘 긍정적인 마인드로 주위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종교인의 자세며, 작은 일에도 늘 감사함을 습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자신에겐 에너지를 증가시키고 때로는 항암제와 방부제가 된다.”고 했다.
인내에도“어리석은 자가 화를 내며, 욕을 펴 부어도 침묵과 인내로 다스려라. 자기주장과 행동이 옮음에도 불구하고, 강요로 일관하는 사람 앞에서 참은 것은 그가 두렵기 때문만이 아니다. 동등한 힘을 가진 사람 앞에 참은 것은 싸우기 싫어서다. 그러므로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기꺼이 참은 것은 가장 훌륭한 인내다”라며, 참된 신앙인은 그러한 진리를 깨우치면서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상 또한‘덕망, 으로 바뀐다고 했다.
이어서“얼굴은 그 자신 전체를 대변한다. 그르므로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간다면 거울이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상대의 관계 속에서 내 모습이 비치는가하면, 각자의 기본 생김새에 그때마다 표정의 변화에 따라서 전연 다른 모습으로도 비쳐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늘 남에게 칭찬하는 습관을 지녀라 . 칭찬은 발이 달려있다면, 험담은 날개가 달려 있다. 백 명의 친구보다 한 사람의 적이 더 무섭다”고 역설했다.
“고령화 시대에 핵가족과 사회의 여러 요인으로 인하여 고독사가 늘어나는 추세”라며,“ 가족의 도움 없이도 죽음을 맞이하려면 자주 건강을 체크도 하고 유언장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하면서“어떻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는 가도 중요하다”고 했다.
스님은“여기 오신 어르신들은 시대 변화에 앞선 분들이다”라며, 웰 다잉에 관심이 많으신 걸 보니 100세 이상 사셔도 마지막 마무리를 잘하실 분들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연명 사전의향서에 대해서도 아직‘단어가 익숙하진 않지만,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다’며 그에 대한 설명도 아끼지 않았다.
연명 사전의향서란“본인의 의사를 문서로 밝혀 임종 과정에서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 투석, 등 의학적 치료로는 도저히 소생할 수 없다는 판단이 병원에서 내려졌는데도 임종 과정만, 연장하는 것을 법으로 중단시키는 것이다”라고 했다.
“환자가 사전의향서를 미리 작성하지 않고 병원으로부터 임종이 판정되었을 때는 환자가 직접 작성하기란 불가능할 뿐더러 지켜보는 가족 역시 연명치료 중단에 동의하는 것을 마치 안락사를 한다는 죄책감에 판단을 쉽게 못 내린다.”고 했다.
강의가 끝날 무렵 주체한 상조 회에서는 임종 체험을 미리 신청한 분들만 죽음에 대한 의식과 관례 따라 관으로 들어가는 체험행사도 병행했다. 나는 직접 참여 못 해 아쉬웠지만 의미가 있는 행사라고 생각했다.
강의를 들은 후 나는 사전의향서에 관해 알아보았다.“2009년‘식물인간 김 할머니”의 죽음을 크게 이슈가 된 후로 보건복지부에서는 연명법을 높이는 법안을 2018년 9월에 발의하여 2019년 3월 초에 연명치료’완화법이 통과되어 환자가 사전 준비 못 하고 임종을 맞이해서도 가족 2명 이상 일치된 진술서 또는 가족 전원의 합의로‘연명중단, 의향서를 작성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그런 제도를 알고 있어도 아직은 관심 밖으로 여기는 사람이 더 많지만, 2018년도에 10만 1,700명이나 신청했다는 통계를 보니 인식의 변화가 늘어나는 추세인 것 같다.
사전의향서를 본인이 작성해서도 언제든지 변경 또는 철회 할 수도 있으며, 신청은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의료기관으로 전국 94개 기관과 총 290개소가 있으며, 본인이 작성하면, 등록발급은 한 달 내에 우편으로 발송된다고 한다.
웰다잉,(2018말)을 수강한 나는 올해 초 임종필 주임신부님께“임종체험 실을 우리 성당에도 만들어 주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좋은 발상인데, 위원님들과 상의를 해 보겠다고”하시고는 몇 주가 지나서도 아무 말씀이 없기에 재차 주임신부님과 원장 수녀님께 같은 취지로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얼마 후 주임신부님은 타 본당에 이동으로 하여 지금껏 흐지부지한 상태다.
임종체험을 한 교우는“가상적 프로그램이지만 막상 영정 사진에 띠를 하고 유언장을 쓰고 관속에서 당장 죽는 다고 생각하니 지난날의 잘못된 삶들이 가슴을 짓눌러 전율을 느끼면서 내가 죽는 다면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다시 태어난다면, 후회 없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했다”라는 체험담을 들을 때 나 자신이 임종체험을 한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가상적인 체험이지만, 누구나 경험한다면, 앞서 체험자의 감정과 별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정 사진은 나이 많은 사람만 찍은 것으로 알지만 요즘은 젊은 사람들도 영정사진을 찍음으로‘젊은이’영정 사진관까지 생기고 거기에 관한 프로젝트로‘버킷리스트(죽기 전에 꼭해야할 일이나 달성해야할 목표)에도 참여한다니 놀랍다. 이유는 팍팍한 현실에 활력소를, 새로운 추억을, 그리고 일상생활에 재충전의 기회로 삼은 다는 젊은이들이야 말로 혁신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우리삼덕 성당을 2008년에 ,젊은이 성당, 으로 명칭을 바뀌었다. 배상희 신부님이 교구청 청년사무국장 업무를 수행하시다가 삼덕 성당주임신부로 임명을 받고 부임과 동시 젊은이 성당으로 명칭을 바꿨다.
‘얼핏, 들을 때‘젊은이, 를 주로 한 성당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성당에 비해 우리 본당은 고령자가 더 많다는 생각을 나는 가끔 했다, 그러한 터라서 임종 체험담을 들은 나는 우리 본당에 체험실의 필요성을 느꼈다. 누구나 죽음은 필연적이라고 하지만, 멀지 않아 세상을 이별해야 할 나이라면, 미리 임종체험을 하므로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나머지 인생도 더 보람되게 살아야겠다는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고 유추되기 때문이다.
우리 본당은 미사를 마치면 신자들의, 전용인 커피숍에서 모여 가끔 식사도 하고 차 마시는 시간도 가진다. 교우 간에 친목을 도모하는 장소라고 보면 된다. 본당 교우라 할지라도 그 많은 신자를 다 기억하기란‘물리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성당에서 자주 얼굴을 마주치는 교우 간에 묵례할 정도이지만, 어쩌다 1,000원 짜리 커피 한 잔을 같이 나누다 보면 어느 모임의 만남보다 친숙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혹한 평이라 할지 몰라도, 겉으론 흠잡을 때 없는 완벽한 신앙인으로 인식들 하고 있지만, 남을 습관적으로 폄훼하므로, 그로인해 교적을 옮기게도 하였고 그런가 하면, 냉담자로 전략케 한 사례도 있다.
옆에서 지켜볼 때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지적하면, 전연 잘못을 못 느끼고 연륜만, 내세운다. 그래서 고질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와 같이 신자로서 믿기 힘든 것은 본당에서 행사가 있을 때, 주로 식사를 한다. 극히 일부로서 일일이 설명하긴 어렵지만, 배려에는 너무 인색하듯이 하여 주위 분들에게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행위는 신자라는 신분을 떠나 연륜마저 무색케 하는 그런 분들을 보면, 같은 세대로서 바라볼 때 어떤 계도(啓導)를 해야 의식의 전환이 되느냐는 생각을 하게 한다.
“본당 교우 이엠마 씨는“묵주기도를 하루에 수십 단을 한들 근본을 바뀌지 않는 이상 오랜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나이를 먹었다고 다 어른이 아니다”며, 대중 앞에서 성모경을 받치면, 천주교인이라고 인식되며, 묵주는‘악세사리, 로 지니니 신자로서의 어긋난 모습은 다른 신자에게까지 영향을 준다.”라고 종종 말을 했다.
그는“임종체험을 한다고 굳어진 마음이 당장 바뀌기란”물감을 허공에 칠한들 물이 들릴 것이며, 물을 칼로 벤들 베어 지겠냐?”고 비유를 들면서”그러기에 용서하는데, 머리에서 내려놓은 데, 70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말이 있듯이 근본을 바뀌기란 쉽지 않겠지만, 그러나 인생의 끝자락에서 임종체험은 분명히 의식의 변화가 있을 거라”고 했다.
기관에 근무하는 P라는 복지 사는“대구에 임종 체험 실이 몇 곳에 있는데, 대부분 상조 회에서 무료로 운영하며, 그들은‘힐링센터’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는“지난 8월 한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들이 사전 장례를 치르는 것에 공감하여 죽은 뒤에 장례절차는 아무 의미가 없다며, 생전 장례식을 가족 지인만 초대해 이별 파티 분위기로 생전에 장례식을 한 사례도 있다”고 했다.
우리 본당에도 체험 실이 있다면, 체험 실에서 작성한 유언장을 성당에 보관하였다가 정말 돌아가셨을 때 유족에게 전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며, 삶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살아 있음에 감사를, 그리고 비신자라도 임종을 체험하게 된다면, 새 신자로 영입할 수 있는 계기도 되리라는 생각도 해 본다.
세상에 모든 사물은 영원불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생 또한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며, 그것이 자연의 이치며, 순리라고 한다.‘내가 죽으면,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건가, 라는 체험자의 말처럼 같은 세대라면 웰다잉, 을 고민해 보면, 좋겠다는 취지(趣旨)에서 이글을 쓰게 한 동기이기도 하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려는 개혁이야말로 혁명보다 어렵다는 것을, 현 시국의 양상을 볼 때 더욱 그렇다. 경제는 팽개치고 서로 정치 공방만 벌이는 자태는 정글에서 사자들의 왕자 난으로 비친다면 그들을 폄하하는 것일까? 아무튼 새로운 변화라는 개혁이야말로 이렇게나 힘이 든다는 것을 새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 성당에서 임종체험 실을 만든다는 것은 크게 봐서‘개혁, 이다. 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전통을 떠나 혁신적이며, 새로운 문화를 추구하려는‘모더니즘’사상에 버금가는 새로운 문화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위에서 열거한 것에 대해“냉담 교우 선교에 관한 실천사례”가 주제인데도 불구하고 주제는 물론 장르까지도 일치하지 않다‘아니면, 인간이기에 완벽은’불가능하다’며, 사소한 일이라고 일축할지 몰라도 앞서 밝힌 바대로, 같은 신자로서 같은 세대로서 소통은 고사하고 불통은 결코 신자의 자세는‘아니 다는, 생각을 늘 마음을 지배하듯이 하여 이 글을 쓰게 했다.
이 글을 쓰다가 보니“효학 반(斅學半,과 서자 서, 아자 아(書自書 我自我)”란 글귀가 떠올랐다. 왜냐면, 남을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배움의 지침과 자성(自省)의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낙조에 이르는 삶이라고 해도 시대 변화에 좇아가려고 불치하문(不恥下問)도 개의치 않은 나를 주위에선‘그 나이에, 라고 핀잔도 받는 것도 사실이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이 시대에 물질적인 문화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극한적 이념의 사고와 근본적인 생각에도 변화로 새롭게 태어나 진정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며, 나머지 인생도 보람 있는 삶으로, 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축복받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길 바라면서, 우리 본당이“젊은이 성당, 신앙심이 절로 솟구치는 성전으로”한층 더 승화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필자의 생각을 피력(披瀝)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