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수난의 역사로 얼룩진 나라다. 한때 중국과 프랑스 그리고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지난 1965년부터 1975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베트남 전쟁을 치뤘다. 식민 지배와 치열한 전쟁을 치룬 나라지만, 호치민 시는 한때 동양의 파리라 불렸을 만큼 그 풍경이
아름답다. 열대 몬순 기후가 이곳의 아름다움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이다.
휴멘 직업 기술학교는 호치민 시 깡남탕땀 거리에 있다. 학교 규모나 시설 또한 호치민 시에 있는 기술학교 중에서 최고를 자랑한다. 학생들
역시 스스로 공부하기 위해서 찾아온 만큼 미래에 대한 설계가 야무지다. 실업률이 심각한 베트남 사회에서 이 학교를 다니는 한인 2세의 취업률은
100%다. 휴멘 직업 기술학교의 이 같은 위상은 바로 김영관의 열린 교육관이 자양분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열린 교육의 목적은 베트남 한인
2세들에게 아버지의 나라를 정확히 알리는 데 있다.
베트남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 규모로 치러진 전쟁이다. 미국과 사이공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워 베트남을 지켜내려 했고 베트콩은
사회주의를 고수해서 남북 베트남을 통일시키려 했다. 한국과 베트남의 인연 역시 전쟁의 포화 속에서 맺어졌다. 약 35만 명에 달하는 한국군이
자유수호라는 이름으로 베트남 전쟁터에 파병됐다. 세계 최강의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막대한 화력과 병력을 쏟아부었다. 10년이나 계속됐던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패배로 끝났다. 그것은 곧 베트콩의 사회주의와 그들이 희망했던 민족 독립운동의 승리로 끝났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다. 10년 동안 35만 명의 군인이 파병됐고, 동시에 수많은 산업 전사들이 베트남 전쟁터에서 외화를
벌어들였다. 10년 동안 약70만 명의 한국 남성들이 베트남을 드나들었고, 수천 명의 한인 2세들이 태어났다. 한가지 주목할 건 한인 2세의
80%가 군인이 아닌 일반 근로자의 혈육이라는 사실이다. 종전 후 힘닿는 대로 자신들의 2세를 구했던 미국과 달리 한국은 그 어떤 대책도 없이
그들을 남겨두고 귀국길에 올랐다. 베트남 전쟁통에 태어난 한인 2세들은 어느새 30대 전후가 됐다.
김영관이 이들을 알게 된 건 10년 전이다. 말로만 듣던 라이따이한들과의 만남은 김 목사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예상외로 그 수가 많았고
그들 대다수가 곤궁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김영관도 아이를 낳아 키운 사람이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을 때, 어떤 책임이 따라야 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분명 아버지는 있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한인 2세들이다. 돕고 싶었다. 그래서 이들의 아버지가 돼서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 품에 보듬어 안고 내리 사랑을 나눴다. 누구를 도울 만큼 부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으로 건너와 한인 2세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친아버지와의 화해, 그 출발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김영관은 마흔이 넘도록 무역 회사를 다니며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다.
아무 불편도 불만도 없었지만 그 편안함이 오히려 숙제처럼 여겨졌다. 마흔 다섯 살이 되던 해에 그 좋아하던 술 담배를 끊고 신학 대학에
입학했다. '왜 사는가?', '다른 삶의 방식은 없는가?'라는 의문을 신앙으로 풀고 싶었다.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리고 우연치 않게 베트남에 왔다가 한인 2세들의 고단한 삶을 목격하게 됐다.
1990년 2월에 마침내 김영관은 아내와 함께 베트남으로 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남은 삶을 보내고
싶었다. 당시에 베트남과 한국은 국교정상화 전이었다. 더구나 사회주의 국가에서 선교 활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베트남 입국 목적은
선교 활동이 아니었다. 바로 방치된 듯 살아가는 한인 2세들을 돕고자 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김영관 부부는 그렇게
베트남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10년 전 베트남 호치민 시는 암흑의 세계였다. 세 시간 간격으로 전기가 나갔고, 휴지는 물론이고 비닐 생산조차
못했다. 한인 2세 가족들의 삶은 더욱 비참했다. 당장 오늘 하루의 끼니를 걱정하는 집이 대다수였다. 2세들의 교육은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김영관은 한국 선교 단체에 이 사실을 알리고 후원을 간절히 부탁했다.
한인 2세들을 찾기 위해서 베트남 남부 지역을 떠돌았다. 그렇게 해서 1,400명이나 되는 한인 2세들을 찾아냈고, 그 과정을 통해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누구를 돕는다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다. 돕는 자의 선의가 절대적이라 해도 받는 입장에선 쉽게 상처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발로 뛰어다니며 찾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리고 아직도 베트남 남부 지역 전화번호에
매년 빠지지 않고 한인 2세를 찾는 광고가 실리고 있다. 그리고 나서 한인 2세들을 찾아낼 때마다 족보를 만들었다. 한인 2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근거로 가족사와 생활 형편들을 파악해서 족보에 꼼꼼히 기록했다. 김영관의 이 같은 작업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도움을 요청하는 청원서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피붙이를 찾아달라는 아버지의 편지도 한국에서 날아왔다.
김영관은 학교 안에 교실 한 켠을 막아 살고 있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과분하다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옛날에는 부엌도 없는
방 한 칸을 얻어 생활했다. 밥은 숯불을 피워서 했으며 밥상이 없어 신문지를 깔아놓고 그날그날 끼니를 이어갔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게 훨씬
많았다. 마음고생에 몸 고생까지 겹쳐 아내는 병을 얻었다. 베트남에서 급한 대로 수술을 받았으나 병원 시설과 의료 수준의 낙후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그래서 응급처지를 하고 비행기를 타야 하는 목숨을 건 시련도 겪어야 했다.
악조건은 고루 다 갖춘 상태에서 김영관은 학교 건립을 추진해 나갔다. 처음엔 교실 하나 달랑 벌려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한편으로 학교
건립을 위해서 백방으로 뛰어 다녔으나 결과는 늘 똑같았다. '자선을 빙자한 돈벌이다.', 'cia의 스파이다.', 온갖 중상 모략이 뒤따랐다.
하루가 멀다하고 베트남 공안 당국에 불려 다니며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을 뛰어넘게 해준 건 세월이다. 오랜 시간동안 김영관을 지켜본 베트남 공안 당국은 결국 김영관을 돕기 시작했다. 우선 호치민
시 깡망탕땀 거리 700백여 평의 땅을 학교 부지로 기증했다. 베트남에선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반공립, 반사립 형태의 설립 허가도 내줬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런 일이 있으리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베트남은 외국인들에게 영주권을 내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3개월에 한번씩
비자를 재발급 받아야 체류가 가능하다. 그러한 베트남 당국이 김영관 부부에게 영주권을 발급해줬다. 영주권 발급은 김영관에 대한 베트남 당국의
믿음을 상징한다.
학교 부지는 호치민 시 재개발 예정 지역이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까지 지어서 이곳을 휴멘 복지타운으로 만들고자 했던 김영관의 장기적 계획이
이곳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된다. 호치민 시가 기증한 땅에 건평 600평 규모의 현대식 건물 5층 건물을 올렸다. 공사비는 한국에 있는 베트남
사회복지 선교회와 백문현 감독, 그리고 뜻을 함께 한 수많은 사람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김영관은 그 뜻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학교 이름을
인간적인 사랑을 뜻하는 휴멘이라고 지었다.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는 자유롭다. 개인마다 전공은 다르지만 모든 직업 과정을 고루 학습함으로써 사회
진출의 폭을 넓혀 놓았다. 열린교육을 통해서 한국계 베트남 2세들의 사회 진출을 보다 적극적으로 도왔다. 학교 생활은 사회주의식 교육의 특성인
엄격한 규율과 동시에 김영관이 추구하는 공동체 정신의 조화로 이루어진다. 끊임없는 인성교육을 통해서 학생들 모두에게 주인의식을 갖도록 한다. 그
교육을 통해서 후원자들에 대한 감사함과 희생 정신의 겸허함을 스스로 깨우치도록 한다.
김영관이 찾아낸 1,400여 명의 라이따이한이다. 친아버지가 못한다면 뜻 있는 민간인이라도 나서서 책임져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라이따이한이란 피가 섞인 한국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김영관 은 이들을 한국계 베트남 2세라고 부른다. 이들은 아버지의 책임,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가르친 김영관은 한국계 베트남 2세 1,400여 명 아이들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