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7. 추수감사주일예배설교
욥기 40장 1~5, 42장 1~6절
감사는 복원(復元)입니다.
■ 혹시 오늘 본문 때문에 여러분의 담임목사가 오늘을 사순절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염려하실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염려는 사랑이니까요!
저는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기쁘고 행복합니다. 지난 한 해 풍성함을 누렸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감사를 전제로 한 기쁨과 행복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욥기’를 오늘 본문으로 선택했으니, 여러분 모두에게 의아함을 살만합니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왜 이 본문을 선택했을까요? 더 정확히는, 왜 이 본문을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욥기가 고난의 의미를 알려주는 거룩한 문서이기는 합니다만, 메시지의 초점은 고난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섭리와 통치에 대한 믿음의 권고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섭리와 통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질수록, 더불어 확고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기쁨과 기도, 그리고 감사입니다. 특히 감사는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그러므로 욥기는 우리를 신비하고 광활한 감사의 세계로 안내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러한 거룩한 안내가 있게 될 것입니다.
■ 욥은 고난을 당한 자신을 위로하겠다며 찾아온 친구들의 우정과 사랑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들이라면 속에 있는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한 일에 대해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다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털어놓을수록 속상한 마음은 의도치 않게 점점 더 커졌습니다. 그렇지만 애써 억누르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의 기대는 빗나갔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원체 신앙적이고 긍정적이기에 불평과 불만을 모르는 욥인데, 이렇게 불평하고 불만을 터트리는 욥이 낯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딴엔 호된 충고와 권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게 할 요량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또한 빗나간 판단이었습니다. 대화가 깊어지고 길어질수록 우정과 사랑은 간데없어지고, 감정과 시비만 난무하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과 욥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점점 거칠어졌고, 결국 욥은 자신의 생을 저주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욥은 언제나 자신의 생을 축복받은 생이고, 감사한 생으로 고백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섭리와 통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과의 대화가 그의 이 믿음의 근간을 흔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섭리와 통치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친구들과의 우정과 사랑은 이미 깨졌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금이 갔습니다. 참으로 이럴 욥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욥만은 이럴 사람이 아닌데, 욥마저 이렇게 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난이 폭탄이긴 하지만, 고난 당한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폭탄이기 때문입니다. ‘왜 저렇게 됐을까?’라는 시선, ‘에고..ㅠ’하는 시선, ‘그렇게 될 줄 알았어!’라는 시선, ‘거봐!’라는 시선, 등등이 폭탄입니다.
이러한 폭탄은 <공감적 긍휼>이 사라지면서 나타납니다. <공감적 긍휼>이란, ‘상대방의 마음에 있는 슬픔과 기쁨을 공유하는 돌봄’입니다. 이 태도가 사라지면, 상대방에게 건네는 말과 제스처는 몽땅 폭탄이 됩니다. 결국 욥같이 큰 믿음의 사람마저도 힘들게 만드는 폭탄이 됩니다. 그러나 욥도 친구들에게 폭탄이 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결국, 욥의 표현에 의하면, 숨어 계시던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유는 분명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욥에 대해 속상하셨기 때문은 아니셨습니다. 친구들에 대해 속상하셨던 것은 사실이나, 욥에 대해서는 속상한 마음이 아니셨습니다. 욥을 누구보다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욥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욥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욥에게 호된 말씀을 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38장 2절입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욥을 지칭하시기를, ‘무지한 말을 하는 자’(무지하고 헛된 말을 하는 자, 부질없는 말을 하는 자)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40장 2절입니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을 무엇이라 지칭하시나요? ‘트집 잡는 자/탓하는 자’(다투는 자, 변론하는 자/비난하는 자)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호된 말을 하시고는, ‘네가 나의 하는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나 되느냐?’며 몰아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대해 여러 예를 드시면서 몰아치셨습니다. 그리고는 두 번째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하는 일을 얼마나 할 수 있느냐?’ 이것 역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대해 여러 예를 드시면서 몰아치셨습니다.
이 호된 질문에 욥은 그만 혼이 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했던 말들이 헛소리였음을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적처럼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 말로 트집 잡고 탓하던 자였는지를 깨달았습니다. 42장 1~6절입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드디어 욥이 욥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니 누구라도 돌아와야 하는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무지한 말로 트집 잡고 탓하던 자에서 회개하는 자로 돌아왔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42장 1~6절이 회개이기는 하지만, 이 회개가 신앙고백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이는 분명 신앙고백입니다. 어떤 신앙고백이냐 하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섭리와 통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무엇보다 이 위대한 신앙고백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담은 신앙고백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욥의 회개이지만, 그 이면은 욥의 감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섭리와 통치를 인정하고 그것에 삶을 드린다는 믿음이기에 감사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회개에서부터’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러므로 우리의 감사의 조건을 재산의 증식이나 재산의 보전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그러므로 욥의 재산이 이전보다 갑절이 되었다는 데는 박수를 쳐주지만, 관심을 두지는 말아야 합니다. ‘와~ 회개하면 욥처럼 두 배의 복이 오겠네~’라는 관심을 보이라고 욥을 소개하신 것이 아닙니다. 욥을 소개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섭리와 통치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이런 깨달음 가운데 우리가 가져야 할 관심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회개에서 이어지는 감사는 관계의 온전한 회복입니다. 복원(復元), 즉 원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섭리와 통치를 누리며 사는 삶이 얼마나 풍성한 삶인지를 감사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감사로 복원하라!’ 이것이 이번 추수감사절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