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의 어록(語錄)
임병식 rbs1144@daum.net
최근 보성읍내에 유서 깊은 누각이 중건되었다. 열선루(列仙樓)로서 조선 성종 때부터 존재한 것이다. 이것이 정유재란시 소실되었다가 나중 복원이 되었는데 1909년 철거되어 버렸다. 그게 한동안 흔적없이 지워졌는데 2009년 보성초등학교 신축 시 그 터에서 열선루 주춧돌이 발견되었다.
그걸 보고 누각을 복워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고, 마침내 본래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신흥리에 중건을 한 것이다. 누각은 웅장한 규모를 드러냈다. 규모는 조선 중기 대형누각의 전형을 따랐다. 진주 촉석루와 울산 태화루를 벤치마킹을 했다고 한다.
규모를 갖춰 지은 데는 그만한 당위성과 명분이 있다. 1597년, 이순신장군께서는 바로 이곳 열선루에서 무너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결의에 찬 역사적인 장계를 작성했던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며 널리 알려진 다음과 같은 글월이다.
“今臣戰船尙有十二 ”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날은 바로 정유년 음 8월 15일. 장군은 백의종군 길에서 원균의 참패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 직첩을 제수받고 병력과 군량미를 모으기 위해 보성에 이르러 잠시 열선루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이때 선전관 박천봉이 임금의 교서를 가지고 도착했다.
내용인즉슨 수군이 지리멸렬해 졌으니 즉시 폐하고 남은 전력을 이끌고 육군의 권율휘하로 들어가 싸우라는 것이었다. 장계는 이때 작성되었다. 장군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잖아도 항명을 했다는 이유로 왕이 죽이려고까지 했는데 또다시 명을 거역하는 것이어서 목숨을 내건 일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지만 그 명을 따를 수 없었다. 명령이 심히 부당한데다 장군은 필생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조가 보기에는 원균이 대패를 하는 바람에 수군과 함선을 거의 잃어버려서 바다에서 싸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지만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죽기를 각오하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런 바탕에는 경상우수가 배설이 구출해온 전선이 열 두 척이 있고, 보성에서 모은 수 백 명의 군사와 500석의 군량미, 두 수레의 병장기가 있었던 것이다.
장군은 장계를 올리고 나서 보성 회천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해남 울돌목으로 출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열 두 척의 함선에다 현지에서 한척을 보탠 열세척의 함선으로 적선 133척을 물리친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전사에 길이 빛나는 명량대첩이다.
장군은 전투 중 많은 어록을 남겼다. ‘若無湖南 是無國家’도 그중 하나이다. 이것은 영암출신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어록은 기록을 남긴 것이 아니라 급박한 전투상황과 최후에 죽어가면서 남긴 말이 기록으로 전해진 것이다.
첫째로 ‘死卽生, 生卽死’이 그것이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戰方急,愼勿言我死‘, 는 싸움이 급하다,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마라.’라는 것이다. 전장에서 했던 말이 기록으로 옮겨져서 전해진 것이다.
알고보면 성인이나 유명 인사들이 남긴 어록은 많다. 공자님이나 석가모니, 예수도 그런 분 중의 하나다. 그런 분들이 아니고 여타의 인물 중에서 유명한 말을 남긴 분을 꼽으라면 그중에 이순신 장군도 들어가지 않는가 한다.
장군은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기울어져가는 가계에서 어렵게 자랐으며 과거시험에도 여러 번 낙방했다.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응시한 무과에서 낙마해 다친 다리를 버들가지로 동여매고서 가까스로 합격했다.
초급군관시절에는 함경도 녹둔도등 변방을 전전하였고 끝없는 시기와 무고를 당하였다. 그러면서 세 번의 파직과 두 차례 백의종군을 했다. 거기다가 건강도 좋지 않아 배앓이를 달고 살았다.
장군은 조정에 우군이 거의 없었다. 오직 유성룡대감과 정탁대감 정도가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과 임진왜란 때는 조정을 온통 서인들이 차지하여 장군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그런 분위기를 이용해 원균은 걸핏하면 해코지를 일삼았다.
오죽하면 체찰사로 내려온 윤두수는 장군을 폄훼하고 무능한 원균을 대놓고 추켜세웠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처음에 는 믿고서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7등급이나 올려준 선조도 나중에는 흔들리게 되었다. 종국에는 한양으로 끌어 올려 죽이려고까지 했다.
뿐인가. 나라에서는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둔전을 일구며 자급자족하면서 군선을 마련하고 병력을 스스로 보충하였다.
그랬으니 얼마나 열악한 조건인가. 그런 가운데 전장에 나아가 기막힌 전법으로 33전 33승이라는 전무후무한 전과를 올렸으니 얼마나 위대한 업적인가.
나는 장군이 마지막해인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은 1차는 적이 쏜 탄환이 원인이지만 장군 스스로도 죽을 자리를 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시 전투 중에 갑옷을 벗고서 북을 친 것이나, 스스로 나서서 노출을 시켰던 것이다.
당시 전투는 끝나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장군은 생각했을 것이다. 임금은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잃고 있었고, 백성들은 장군만을 따르고 있었으니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의심 많은 선조가 그대로 보고만 있을 턱이 있겠는가.
무슨 구실을 붙여서 다시 죽이려 할 것이다. 이를 잘 알기에 장군은 죽을 자리를 택했다고 생각한다. 생각하면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나 그렇다고 해서 장군은 한생을 잘못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증명이 되고 있다. 서울 광화문 복판에 동상이 우뚝 세워지고 통용되는 100원짜리 주화에도 모습이 선명한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열선루를 떠올려 본다. 복원된 열선루는 보성의 대표적 사적물이 되지 않을까 한다. 누구라도 이 누각에 올라 당시 목숨을 걸고 써 올린 그 장계를 생각한다면 가슴 뭉쿵한 역사적 의의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서 장군의 어록도 함께 되새겨보지 않을까.
보성을 들르면 무언가가 빠진 듯 한 허전함이 있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열선루를 되살려 놓아 기쁘다. 실로 흐뭇한 마음 금할 수 없다. (2025)
첫댓글 공이 보성과 인연을 맺은 건 아무래도 장인 방진이 한때 보성군수를 역임한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 봅니다
이순신은 장가를 잘 들어 성공한 케이스 같기도 합니다 장인 방진은 무인으로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는 데 뒷받침이 되었고 특히 방씨부인은 무예에 뛰어나 직접 낭군을 지도했다고 하지요 더구나 방씨가문은 대부호였는데 방씨부인이 무남독녀였기에 전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공의 전도는 우여곡절이 많았고 생사의 고비에 처하기도 했지만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전공을 거두었는바 구국충절의 표상입니다 장군의 명언 사즉생 샹즉사는 2천년 전 예수님의 말씀이었으니 참으로 기이합니다 배설이 도망치는 바람에 12척의 전함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기이하다 싶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약무호남 시무국가에 빠져듭니다
보성은 이순신장군과 실로 인연이 깊습니다. 이곳에서 군량미와 병사와 병장기를 모아서 명량대첩을 이끌 수 있었지요.
장인 방진(1515년생)이 보성군수를 지내기는 1558년, 32세에 난 딸 수진의 나이 12세 때임. 이준경의 중매로 결혼한 때는 19세에 했으니 한참 후 보성군수를 마친 뒤였지요.
장군이 나중 보성고을에 들러 장인의 발자취를 느끼기는 했겠으나, 다른 것을 연결짓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장군은 열선루에서 '금신전선..'장계를 올렸는데 그것이 폐허가 되어 그간 정확한 장소조차 모르고 있었지요.
나중에 주춧돌을 찾아낸 것을 계기로 누각을 복원했으니 다행한 일입니다.
이 누각은 앞으로 보성을 찾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임선생님이 충무공이순신장군의 일생일대와, 사는 동안의 天秋에 빛날 말들을 다 정리하셨습니다.
충무공이순신 장군은 세계 성인이라 일컫는 공자, 석가, 예수보다도 나라 사랑과 충절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습니다. 今臣戰船尙有十二, 即死生生即死, 죽으면서까지 나라 사랑하는 마음 戰方急愼勿言我死,
호남 지방을 예찬하는 ‘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을 제외한 타지역민들은 이말을 명심해야합니다.
세 번의 파직과 두 차례의 백의종군 이는 선조와 같은 무능하고 미련한 놈이 통치했기에
충무공공이순신장군은 더 위대한 역사의 師標로 남은 것입니다.
보성 열선루는 진주의 촉석루와 밀양의 영남루를 아우르는 누각이니 한 번 가 볼만 하겠습니다.
충무공이순신장군의 정신과 위대한 삶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순신장군의 위대한 업적은 만고에 빛날것입니다.
보성고을에서 명량대첩을 이끌 기반 (병력, 군량비, 장비)을 확보할 수 있었으니
보성은 장군과는 떼여야 떨 수 없는 인연이 있다 하겠습니다.
" 今臣戰船尙有十二"
실로 그 장계는 열선루에서 작성이 되었으니 복원작업은 늦었지만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한번 가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