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 데 베네디까뜨
전새벽
일 년이 무슨, 사촌조카 키 크는 속도로 훌쩍 지나가더니 12월 30일이 왔다. 회사는 휴무였다. 강아지와 산에 오르려고 단단히 준비를 했는데 초입부터 쌓인 눈이 문지기처럼 우리를 막는다. 나무로 된 계단을 트래킹화 바닥으로 비벼보니 여간 미끄러운 게 아니다. 등산은 입춘 뒤로 미뤄야겠다. 둘이서 공원에 간다.
한 바퀴를 걷고 들어가려는데 웬 할아버지가 혼자 공원 벤치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점심부터 혼자 밖에서 막걸리를 먹는 노인은 경계해야할 대상일지도 모르는데, 이상하게 친근감이 든다. 강아지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거침없이 그에게 다가간다. 이거 달라고? 그가 안주로 먹고 있는 튀김을 보면서 묻는다. 너 줄게 없네. 노인은 난감한 얼굴을 했다.
괜찮아요. 먹을 것 때문이 아니고, 얘가 사람을 좋아해서 그래요.
그리고 돌아서는데 노인이 우리를 다시 부른다. 자신이 너무 야박했노라고, 이거라도 먹으라면서 먹고 있던 튀김을 절반 쪼개 내민다.
얘는 그런 건 못 먹어요.
웃으면서 얘기하자 노인은 이제 강아지한테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본다. 투명한 눈. 노인이 아스따라바산타! 아니, 아라비아따 파스타였나, 아니면 아스타라 비스타였나 뭐 그런 알 수 없는 말을 외친다, 난데없이. 이게 뭐지, 라틴어인가. 순간 ‘검은 사제들’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막걸리를 먹으면서 구마의식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런데 노인이 갑자기, 종교가 있어요? 라고 묻는다. 아, 된통 잘못 걸렸다.
저 세례 받았는데, 세례자 요한이에요.
차마 리차드 도킨스를 즐겨 읽는다는 말은 못했다. 그러자 노인은 형제를 만났다는 듯이 기뻐하며 얘기한다.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보여주며.
요새는 말을 걸 때 자기가 누군지 먼저 밝혀야 되거든.
맞는 말씀입니다, 어르신. 구마의식을 할 때도 마찬가지죠...... 그런 생각을 하면서 노인이 꺼내 든 지갑을 보니 국가유공자다. 월남전에 다녀왔단다. 아, 악귀를 물리치는 신부님이 아니고 군인이셨군요. 1944년 생. 파병다녀온 라틴어를 구사하는 이 70대 노인은 딸이 서울대를 나와 케이티에 다닌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의 귓구멍을 가득 메운 노인의 털이 나이를 짐작케 한다. 모란시장에서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여기서 한잔 하고 있었다고.
집에 들어가셔서 드시지, 왜 추운데서 드세요.
그렇게 묻자 자기는 여길 참 좋아한단다. 아기자기한 태현공원의 풍경을. 아, 찾았다. 우리의 공통점. 어르신, 저도 말이죠, 여기를 참 좋아해요...... 말은 안했지만 막걸리도 참 좋아하고요.
우리는 담소를 나누다가 다음에 보기로 하고 헤어진다. 그는 돌아서려는 나를 붙잡고 거대한 포옹을 날린다. 월남에 다녀온, 요한 성당에 다니는, 딸을 서울대에 보낸, 70년의 세월이 품안에 들어온다. 그가 먼저 그렇게 하지 않다면 내가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제 정말 헤어지려는데, 그가 뒤에서 뭐라고 인사를 외친다. 라틴어로 된.
투명한 눈동자를 가진 막걸리를 사랑하는 김씨 아저씨. 이런 인연을 맞닥뜨릴 수 있는 인생을 나는 참 좋아한다. 다음에 만나면 나도 인사를 건네야지.
Deus te benedicat!
당신의 앞날에 신의 은총이 있기를!
첫댓글 좋은 시간이었군.
세례자 요한! 6일에 보자구~
태현공원을 검색하니 분당 주택가에 둘러싸인 아담한 공원이군요.
일상에서 우연히 접하는 한 편린 속에서 인간과 경계심 풀고 오롯이 교감하는 과정을 의미있게 풀어놓았군요.
잘 읽었습니다. 인연이 있으면 태현공원에서 의미있게 마주칠 수 있겠지요.
필력 일취월장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