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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하얀 밀가루 잔뜩 묻히고 창 하나 꼬나들고 말 타고 달려온 신라의 화랑 "반굴"이 백제진영 앞에 서서
고래고래 소함을 치는데 "내는 신라의 화랑 반굴이데이 계백이는 퍼뜩 나와 내 칼을 받으라카이"
백제병사:먼! 굴~~ 어린 노므 시끼가 식전부터 염병을 하네
반굴:난 신라의 상대등 겸 대장군인 김유신 장군의 조카이며 사위이며, 김유신의 아우이신 김흠순 장군의 아들인 신라의 반굴이라카이 -
거시기:아가 울지 말고 살살 얘기해 봐! 조카면 조카고 사위면 사위제 조카이자 사위는 어느 나라 *족보 얘기여...
반굴: 계백이 나오라 케라
-영화 황산벌 중에서...-
오늘 하천길은 660년 7월 9일 10일 만 하루 동안 벌어졌던 황산벌 전투지역을 지나는 논산시 연산면의 연산천으로 나가본다
새벽부터 동대구에서 첫 기차 타고 대전역에서 택시 타고 다시 서대전에서 기차 타고 계룡역에 내려 또다시 택시로 계룡시 엄사면으로 향한다.
엄사면 어느 동네에 내리니 전날 내린 눈이 수북하게 쌓여있고 등산로를 찾아 산행길은 향적산과 국사봉 중간지점인 향국암을 향해서 오른다.
바위가 애사롭지 않아 지나가는마을 어르신에게 여쭈어 보니 옛 이야기 한토막 건내주는데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다
정상의 바위봉은 고려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전설을 간직한 상여(행상) 바위로 알려주셨고
산아래 독가촌 마당으로 등산길이 표시되어 있는데 녹색 휀스로 등산로를 곱게 막아 두었지만
다행히 주인장이 없어 마당으로 들어가서 휀스 옆으로 조용히 오른다.
눈 쌓인 등로를 미끄러지지 않게 올라오니
바위아래 자리잡은 향적암이 눈에 들어온다
맑은 기운으로 기도하는 수행자들에게 부처님이 우선이겠으나 칠흑같이 어두운 밤 산아래를 내려다보거나 떠오르는 아침 일출이 함께한다면 정신이 더욱 맑아질 듯하다.
멀리 만인산이나 서대산이 우람하게 보이고
태양이 높이 올라올수록 가녀린 눈이 소리 없이 녹을듯하니 발걸음은 산으로 향한다
가운데 만인산이나 서대산이고
우측으로 천호산의 철탑이 보이고 그 뒤로 논산의 진산인 대둔산과 천등산이 함께 이어진다.
조망 구경하고 대웅전에 들어 합장하고 나와 향적산으로 오르는데
경사진 곳으로 눈이 쌓여 오르기가 쉽지 않아 비탈길에 설치한 줄을 잡고 두발 오르고 한발 미끄러진다.
능선에 올라오니 봄바람은 부여땅으로부터 불어오고 눈은 발목정도 깊이로 제법 많이 쌓여있다.
이 길은 용의 꼬리이며 황산벌 종주 코스이기에 예전에 한번 다녀갔던 적이 있으나 야간에 지났기에 어디가 어딘지...
향적산이 보이고
논산시 상월면 방향으로
저 넘어 고을은 부여와 보령땅이다
올해 마지막 눈길인 듯
오늘 내려갈 계곡길
철탑 있는 곳은 금남정맥길의 천호산, 깃대봉, 국사봉 879미터의 대둔과 천등산이 붙어있고
우측에 깃대봉이 외롭게 서있다
삶이 고단한가?
조금만 기다리면 봄바람에 소리 없이 녹을 듯
상여(행상) 바위와 향적산으로 눈이 많이 쌓여있어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고달픈 몸을 이끌고 팽달이처럼 기어간다
오래전 이야기 한토막하면
고려말 불사이군의 지조를 지키던 한 선비가 이 꼴 저 골 보기 싫다며 벼슬을 버리고 아들 셋과 함께 산아래 마을로 낙향하여
조용히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혹시나 해서 세 아들에게"이 나라는 올바른 나라가 아니니 절대 벼슬을 하지 말라"며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 한분이 찾아와 아들들을 훌륭하게 가르쳐 보겠다며 데리고 갔는데
세 아들들이 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왜 아버지가 벼슬에 나가지 말라고 하셨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고
결국 아버지 몰래 과거시험에 응시해서 급제를 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는 기가 막혀 "이제 두 임금을 섬겼구나"하면서 자결했다고 한다.
아들 삼 형제가 통곡하며 장지로 향하던 도중에 갑자기 벼락이 떨어져 아들 삼 형제가 죽었고
그래서 이곳에 상여를 닮은 바위가 생겼다는 전설이 있는데 불경스럽게 상여는 타 넘어 다니면 안 된다
논산천 1 지류인 노성천 유역에 자리 잡은 노성산이 보이는데 정상에는 백제시대 때 쌓은 산성이 있으며
노성산 넘어가면 부여이며 더 지나면 서해바다의 충남 보령시다
계룡의 꼬리 끝부분에 깃대봉이 보이고
백제군의 똘망한 눈으로 신라군을 바라보며 결전을 기다리던 곳이며 황산벌 종주시에 올라오는 마루금이다
상여바위나 그 외 바위봉은 우회하는 길이 있으나 눈이 쌓여 길을 찾지 못해 꾸역꾸역 기어 올라온 길이기도 하고
우측 멀리 삼각형의 산은 익산의 미륵산과 용화산이고 그 뒤에 미륵사지와 익산시이며 그 옆으로 천호산 줄기가 이어진다.
아침이라 조망은 그런대로 좋은 편이나 멀리서부터 조망은 점점 사라지거나 멀어진다.
향적산 조망안내도
어느, 누구나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세상이라
내일은 계룡 저곳에 올라야 하는데
천황(天皇)이냐 천왕(天王)이냐
지역에서 천황봉은 일제의 잔재이기에 천왕으로 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공주시에서 근거 없는 자료라고 해서 천황이라 부르고 군사보호 구역으로 묶여있어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용의 꼬리에서 깃대봉, 향적산, 천황, 관음봉, 신선봉, 장군봉,병사골까지 25km 계룡 종주하거나, 금남정맥을 걸음 하시는 분들이 가슴 졸이며 지나는 살 떨리는 길이건만 그걸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조선 태조께서 나라를 지키는 우두머리란 이름으로 호국백(護國伯)이란 작호를 내린 산이기도 하다.
국사봉 574m
태조 이성계께서 지리산, 삼각산 이외 몇몇 산들을 호국백(護國伯)이라 작호를 내리셨다는 계룡과 장군이 보이고
태조께서 신도안을 도읍으로 정하기 위해 함께 온 이들과 국사를 함께 논의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향적산
산길을 이어 북쪽으로 향하면 계룡이 있고 남쪽으로 가면 깃대봉이나 황산성 또는 연산향교가 있고
산길을 동, 남쪽으로 이어가면 대둔산이 나온다.
서쪽으로는 노성천이 흐르는 곳이며 그곳을 지나면 백제의 옛 수도인 부여 방향이다.
정상을 알리는 두 개의 비석(碑石) 중에서 키 작은 오행비에는 오(五), 화(火), 취(娶),일(一)가 쓰여있다
큰 비석은 천지창운비로 천계황지(天鷄黃地), 불(佛), 남두육성(南斗六星), 북두칠성(北斗七星)라 쓰여있는데
천지의 운세를 나타내는 비석으로 보이는데 단군성조의 깊은 뜻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두육성은 여름날 남쪽 밤하늘을 지키는 궁수자리의 별이며 무병장수(無病長壽)를 나타내는 별로 알려졌고
북두칠성은 절(寺) 뒤편 칠성각(七星閣)에 모셔져 있는 신(神)으로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별이며
삼신할미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이다.
인간이 죽으면 북두칠성을 그려 넣은 칠성판을 짊어지고 저승길로 간다고 하니...
그리고 예전에 할매나 지금도 어머니께서 가끔 정화수를 떠놓고 손자들을 위해 두 손 모아 빌던 모습을 본 적 있는데
이번 정월 대보름날 둥근달을 보시며 자식과 손자들을 위해 두 손 모으실 듯하다.
불(佛)은 부처님을 뜻하겠고...
이제 내려가야지
한번 방향이 틀어지면 굽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산꾼이라면 장화 정도는 신어줘야
향적산 누룩바위
어느 힘 좋은 사내가 올렸다는 전설이 있는데
영험한 기운이 있는지 바위 주위로 눈은 전혀 없는게 신기할 정도로 느껴진다.
계룡을 코앞에 두고
산행하면서 전국의 국립공원 공단직원에서 여러 번 걸렸지만 그럴 때마다 웃으며 봐주셨는데
계룡은 군사 보호구역이라 벌금이 가장 센 곳이라 하고 백수의 제왕인 호랭이라도 이곳 출입금지 안내판 앞에서 멈춰 설 것 같다.
이러함에도 정맥꾼들은 천황봉 넘어 관음봉 삼거리까지 피 같은 돈을 써서라도 진행하려고 애쓴다.
이곳에서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정맥길인 맨재로 내려간다.
지나간 경로
맨재에서 우측의 장재동골로 조금 더 내려가면 국사봉 샘터가 나오는데
그곳을 연산천 발원지로 삼아야 할 것 같다.
계곡에 자리하는 산신각
향적산 거사 김우산이 갑자년 3월 4일에 만든 비석 두기가 있었지만 생략하고
양쪽에 샘터가 두 곳이 있다.
물은 산신각을 사이에 두고 두 곳에서 흐르는데 모두 바위틈에서 흘러나온다.
산신각 내부의 산신 할배이며
100년 된 그림이란다.
근엄하게 생긴 산신님께 두 손 모아 빌며 무슨 소원이던 다 들어주실 것 같고
삼단 콤보형으로 된 샘터
물 맛은 차가운 날씨임에도 차갑지 않고
산신각의 안 먹어도 배부른 항아리 가족
맨재 오르는 초입의 산신각이며
한때는 이곳 계곡에 무당집이 아주 많았지만 지금은 두 곳만 있다고 한다.
산 넘어 용한 무당 찾아오셨다면...
금남정맥길에 벌금 내지 않으려면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새벽에 출발해야 했던곳이었건만
지금은 정맥하시는 분들이 잘 찾지 않으시고
토속 종교인들이 일정기간 동안 묵으며 기도하는 집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주인아주머니께서 주신 커피 한잔 얻어들고 밖으로 나와
물길 여행길로 이어간다.
멘재... 맨재
둘 중 하나겠고
둘레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길 알 길은 없으나
물 길은 그저 아래로 흐르고
물 맑은 향한리 저수지
물
자연에서 나는 물이 가장 좋고
자연에서 나는 물은 그대로 마실 수 있고
비만 오면 찌든 때는 깨끗이 씻어내 깨끗하던 시절
한국의 하천은 짧아서 장마 때는 전국 어느 하천이던 일주일 가량 깨끗해지는 걸 볼 수 있는데
그 이후는...
하천의 폭이 크지 않지만 아직 맑은 물이 흐른다.
안경다리를 지나
하천 한번 건너주고
연산면 천호리 마을 앞 화악교에서
인근에 자리하는 개태사로 걸음을 옮겨간다.
천호산 자락 앞 1번 국도가에 자리하는 옛 개태사지의 석조
정확한 용도는 모르겠으나 물을 받아서 사용하는 일종의 물통인데
여름에 물 받아놓고 운기조식하듯 누워있으면 시원할 듯하다
개태사는 고려 태종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승리를 기념하는 한편 후삼국을 통일시키고 지역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940년에 세웠던 국찰(國刹)이다.
태조 임금의 셋째 아들인 광종은 개태사에 아버지 영정을 모셔두고, 나라에 큰일이 생길 때마다 길흉을 물었다고 하는데,
고려말 왜구에 의해 절이 거의 전소되었다가 이후에 조선시대 때 정여립이 절에 와서 시(詩)를 쓴 것이 화근이 되어 몰락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잡초만 무성하고 찾는 이도 없는듯하다
어려웠던 시기에 농사를 짓던 땅으로 보존하다 지금은 문화재로 보호받으며 잡초만 키우는 사지다
옛 개태사지는 이렇고
아래로 내려가면
원래있던 개태사는 사지로써 남겨져 있고 그 아래 조선 세종 때 만든 개태사가 별도로 자리한다.
읽어보시고
조선시대 때 공자를 숭상하던 때 숭유억불 정책으로 거의 폐사 직전까지 갔던 개태사고려시대 때 만든 5층 석탑뒤로 대웅보전(大雄寶展)이 보이고
5층 석탑에는 신라 때 지리산 화엄사를 창건하셨고 화엄종의 시조이신 연기조사가 인도에서 가지고 온 부처님의 진신사리 16 과가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약 500년 동안 어느 절에 보관했다고 이곳으로 옮겨왔는지 알기 없다
읽어 보시고
고려 태조 왕건의 어진(御眞)이 모셔진 어진전(御眞展)
내부는 이런 모습이고
왕건이 황산에서 후백제의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는데 이 모든 게 부처님이 가피(加被)라 생각한 왕건이 황산을 천호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개태사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정면에 나체의 왕건 동상이 있고 뒤로 왕건의 어진이 있는데 2013년에 김종국 화백이 그린 것이고 우측에 단군 초상화와
좌측에 칼과 갈쿠리가 있다
청동 동상앞에 수건으로 아랫도리를 가려 놓아 궁금증이 생겨 수건을 들춰 보고 싶었지만
마른 하늘에 벼락 맞을까 겁나서 차마 그러지 못하고
좌측 어진전, 그다음은 극락보전, 가운데 대웅보전 우측으로 스님들이 거주하는 공간과 종무소가 있다
정면 5칸의 극락보전의 개태사 석조여래 삼존 입상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만든 석불이며
가운데는 주존불이며 양쪽은 협시불이다.
우측에 서있는 부처님은 흙속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했는지 흙빛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개태사 구경은 이것으로 마치고
다시 원래 하천이 흐르던 곳으로 나가서
길이 있건 없건 가다 보면
5천 결사대의 기상이 서린마을
황산벌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만나는
계백장군과 "나를 따르시오" 똑 닮은 6형제 병사들
연산면과 함박봉과 깃대봉 방향
깃대봉이며
관창이 이곳에서 죽었다는 관동리 마을로써
싸움판은 늙은이가 준비하고 죽음은 젊은이들이 하는 전쟁
원광법사의 세속오계(世俗五戒)중 임전무퇴(臨戰無退)이란 가르침일까?
김흠순의 아들 반굴이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가서 죽자 김품일의 아들 관창이 창들 들고 백제군 앞에 호기롭게 나섰다.
"계백이 나오라 카이"
그러나 계백은 정작 본인은 가족을 전부 죽이고 왔지만 어린 화랑을 차마 죽일 수 없어 살생유택(殺生有擇)을 택하여 관창을 몇 번 잡았다 놓아준다.
적진으로 죽으라 보낸 아비와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내준 적장
그 둘 사이의 관창
결국 목이 베여 말안장에 걸려 신라진영으로 돌아갔고 전쟁은 늙은이가 시작하고 피는 젊은이가 흘린다는 말을 실감한다
두 국가간에 전투를 살펴보면 554년 관산성 전투 때 신라군이 성왕의 목을
642년 대야성 전투때 백제군이 김품석의 목을
660년 이곳 황산에서 백제군 관창의 목과 계백장군의 목이 떨어졌고
목 베는 게 전통이 아닐 텐데 장군의 목이 너무 쉽게 떨어진 싸움들이다.
화랑 관창이 죽었다고 해서 붙여진 곳 관동리
황산벌 종주코스 들머리이기도 하다
호남선을 지나서
황산벌을 두고 정확한 장소가 어딘지 많은 이들이 찾아다니는데
관창이 죽었다는 관동리를 생각한다면 이곳 연산시장일대가 황산벌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되고
연산시장까지 왔으니 황산벌 인근으로 걸음을 옮겨 몇몇 곳을 찾아보고 다시 이곳에 서야겠다.
황산벌 종주 개념도
연산향교(관동리)-깃대봉-함지봉(386.5)-국사봉(442.3)-향적산-(금남정맥)-엄사리-천마산-천호산-황령재-
함박봉-깃대봉-(금남정맥)-국사봉-명암리-매봉산(매봉)-고정산-(계백장군묘역)-수락산-돈암서원 <45km>
연산면에서 697번 도로따라 2km정도 가다보면 4거리를 지키는 최후 격전지 표시석
저짜로 2km정도 더 들어가면
황산벌 계백장군 최후 격전지
백제는 내부사정으로 인해 전쟁임에도 전국 병력을 동원하지 못했으나
주력 부대는 대부분 서해 백강(금강)으로 가서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군대를 막으러 갔고
백제군은 강변에 방어진 치고 당나라를 기다렸는데 소정방이 백강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은 까맣게 몰려오는 적을 보고 어떠한 마음이 들었을지
결국 사비성 공격에서 1만 명이의 백제군이 전사하고...
계백의 5천 결사대는 이곳 황산벌에서 4번 싸워 이겼으나 마지막 다섯 번째 신라군의 총공격에 계백의 5천 결사대가 최선을 다했지만 모두 전사한다
전투가 끝나고 이틀뒤 김유신의 신라군은 당군과 합류 사비성을 포위했고, 의자왕은 웅진(공주)으로 달아났지만 믿었던 부하 예식진의 배신으로 잡혀 백제는 660년 31대 의자왕을 끝으로 멸망한다
지도에 표기된 사청벌(연산면 신양리)은 사천명이 죽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하며
위의 종주는 각자 알아서 해보시기 바란다.
계백장군 유적지
황산벌 전투 표시석에서 이곳 박물관까지 6km가량 나와
황산벌 격전지
신라군 이동 경로:금돌산성(백화산)-대전-금산을 넘어 진격이라 쓰여 있으니
아직 황산벌 전투의 정확한 장소나 신라군이 어디로 진격했는지 확인된 게 없다.
다만, 탄현(숯고개)으로 지명된 곳은 옥천 자모리 고개(식장산과 국사봉사이의 장고개), 옥천과 대전 경계인 4번국도의 마달령, 금산 두지리, 완주 용계산성, 진안 싸리재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어디로 와서 어디서 싸웠고 라는 궁금증은 각자가 생각해야 할 문제로 남겨둔다.
개인적인 생각은 금남정맥을 넘어 논산천 따라 황산벌로 왔을 것이라는 생각만
세 곳 방향으로 신라군이 진격했음을 알려주는데
지도가 오래되고 퇴색되어 관리하는 곳에서 좀 더 신경 썼으면 좋겠다.
계백장군
신라와 백제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때는 바야흐로 554년 백제 성왕 때이며, 신라의 가장 강력한 군권을 쥐었던 진흥왕 15년 때 백제와 대가야 그리고 왜의 연합으로 신라의 관산성 공격을 할 때 일이다.
충북 옥천의 관산성(삼성산) 전투는 신라와의 동맹 60년이 지나고 신라의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함으로써 동맹을 배신한 전투로써, 백제에서는 성왕의 아들 창과 젊은 신흥 세력의 강건파와 전쟁은 다소 무리가 따르니 신중하자는 나이 드신 분들의 온건파로 나누어졌지만 성왕은 아들 창의 손을 들어준다,
전쟁 초반은 백제의 태자 부여 창이 승기를 잡아, 신라가 위기에 빠지고 한강 유역에 있던 김무력을 불러 전투가 더욱 치열해지는데, 그 당시 성왕은 아들 창을 격려하기 위해 부하, 기병 50명 정도 거느리고 무주에서 금강을 따라 금산을 지나 이곳 구진벼루(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307-1번지)에 도착했으나 매복 중이던 신라군에 의해 잡혔으니 하필이면 노비 출신의 군사에게 죽음을 맞이한다.
금산땅에서 서하천 따라 내려오다가 그랬는지 아니면 금강에서 역으로 이곳까지 올라오셨는지 뭐가 그리 급한 일이 있어
이런 협곡에 들어와 잡히셨는지 왕으로써 노비출신 군졸에게 죽음을 당하는 치욕이 억울했던지 노비손에 죽기 싫으니
높은 놈 불러라 했으나 끝내 성왕의 청은 거절 당하고 "하늘을 우러러 너무 부끄러운 일이다" 라며 죽음을 맞는다.
이후에 몸은 백제로 돌려보내고 머리는 신라로 가져가 왕궁 계단 아래 묻어 문무백관 모두 밟고 다니게 하였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전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백제와 신라는 서로가 원수 대하듯 하였다)
성왕이 죽음을 맞이하자 아들 창과 2만 5천 이상의 백제 군사들은 대부분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아들 창은 겨우 살아 돌아가 백제 제27대 위덕왕이 되었다
이후에 백제의 대반격이 기다리는데 선덕여왕 11년인 642년 백제 의자왕이 즉위하자 신라로 침략해서 40개의 성을 빼앗고 그로부터 한 달 뒤 윤충장군이 합천 대야성으로 진격, 합천 황강변의 대야성(취적산 해발 90m) 전투에서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과 그 부인 (김춘추의 딸 고타소)이 백제군 윤충과 1만 군사에 의해 죽고 1천여 명이 포로가 된다
성왕이 목을 잘린것 처럼 대야성에서 항복한 김품석의 목을 잘라 신라로 보냈으니 이로 인해 김춘추와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17여 년간 끈질기게 도움을 청하게 되니 그로부터 수년뒤인 660년 당나라와 연합 결성이 되어 7월 백제 멸망의 꿈을 이룬다
대야성 함락은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이 부하 장수의 부인을 겁탈하면서 열받은 부하장수 검일이 백제군과 내통하여 무너진 계기가 되니 사위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춘추가 엄청 열받아 몇 날 며칠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고 한다.
대야성 전투 이후에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킬 동맹을 찾아 고구려로 찾아간다, 하지만 고구려의 협상 조건은 한강 이북의 신라땅을 다시 고구려에 되돌려주는 조건
결국 신라는 한강 이북의 신라땅은 절대 되돌려 주지 못한다고 입장만 내세우다가 협상이 결렬되자, 당나라 오랑캐를 찾아 무려 17년간 빌고 빌어(훗날 고구려를 칠 때 협조하겠다는 조건이다 이 무렵 645년 당나라 태종은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께 영혼까지 탈탈 털린다)
당나라에 17년간 공을 들인 끝에 나, 당 연합을 결성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백제가 멸망한다.
어찌 보면 대야성 전투가 백제 멸망의 주요한 사건이 아니었던가 생각 들고
신라의 대장군인 김품석이 부하 장수인 검일의 아내를 겁탈하여 이에 격분한 검일이 성문을 열어 신라군이 몰살했다는 이야기로 유명한데 이후에 김춘추는 검일을 잡아 목을 잘라버렸다.
문제의 계백 장군의 묘인데
이곳은 논산시 연산면이며 수락산 아래 광산김 씨(연산김 씨)분들이 많이 사는 문중산이다.
장군이 전사한 날 660년 7월 10일 부하들이 묘를 대충 만들었을 테고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조선 선조실록이나 광해 일기에
계백장군의 묘를 관리 보수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이후로는 불투명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인 1966년 어느 날 부여 박물관장 홍**이 수락산 기슭 광산김 씨 문중산에 버려진 어느 이름없는 무덤 하나를 두고 계백 장군의 무덤 발견이라며 뚜렷한 검증이나 절차없이 학계에 발표하며 생긴 일인데
지금은 계백 장군의 무덤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참고 자료:황산벌에서 진 백제의 혼 (KBS 1999년 7월 1일 방영)
읽어 보시고
이곳 수락산 자락에서 분명 계백장군께서 전사한 곳은 맞지만
1966년대에 어떠한 근거로 접근했는지 알길 없으니
충장사의 계백장군 영정
천년 만년 잘자며 장군의 품에 안겨 울음을 삼키며 사는게 왜 이리 힘드냐?며 한서린 여인의 눈물을 뒤로했던 장군
고립무원의 싸움을 앞두고 "지 자식들 안전한데 피신시키는 장수보다 자기 가족을 모두 죽이고 전쟁터로 향했던 장수"
김유신처럼 전쟁 영웅은 아니었지만 흩트러짐 없는 마음으로 남의 집 귀한 자식 5천 명에게 "죽어서라도 나라를 지켜라" 강요하기보다 "죽지 말고 싸워라" 했을 것 같은 장수
두 손 모아 합장드리고
이곳에서 멀리 않은 곳에 사육신과 계백의 위패가 모셔진 충곡서원이 있어 발길을 돌린다
충곡서원은 조선 숙종 때 세워진 건물이며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1천여 개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헐어졌다가 1935년에 다시 건립되었으며,입구에 잡인은 출입금지를 알리는 붉은 홍살문을 지나면 외삼문(外三門)인 태극무늬로 굳게 닫혀있다.
단종 복위 운동 하셨다가 죽음을 맞이한 사육신(死六臣)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의 위패를 모셔 육신서원으로 불리다가 이후 백제의 계백 장군과 이 고장의 선비 김익겸을 모시면서 팔덕서원으로 부르다가 지금은 충곡서원이라 부른다.
담장 안으로 동재 서재가 보이고 그 안으로 내삼문(內三門)이 보이는데 서원의 위패 모시는 곳은 내삼문안에 있는데 모든 건물은 한결 같이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이제 보이는 수락산 넘어 세계유산 돈암서원으로 향한다
돈암서원은 세계의 유산 한국의 서원이며
풍기의 죽계천 옆에 소수서원, 함양 남강변에 남계서원, 경주 안강 옥산천옆 옥계서원, 안동 낙동강가의 도산서원
장성 아곡천 옆 필암서원, 현풍 낙동강가의 도동서원, 안동 낙동강가의 병산서원, 정읍 동진강가의 무성서원, 그리고 이곳 연산의 돈암서원이 대표적이다.
다른 곳은 모두 강가를 배경으로 자리 잡았는데 돈암서원은 원래 자리에서 홍수 때 피해를 보자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들판을 마주 보며 자리 잡았다.
돈암서원을 대표하는 응도당(凝道堂)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만들었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나 양쪽 맞은편으로 비(雨) 피해가 있을 것 같아 지붕을 조금 더 살린 것으로 보인다.
응도당은 유생들 공부하는 곳이며 흥선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의 서원중 하나다
유경사 (惟敬祠)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길준 선현들께 제사 지내는 곳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에 부연 석가래를 했다
지금은 공사 중
양성당 앞에 돈암서원 원정비(院庭碑)
조선 중기 때 문인(文人) 김장생 선생의 문화생들이 돈암서원을 세운 사연과 그의 아들인 김집 부자(父子)의 학문과 업적을 적은 비(碑)가 가운데 보이고, 돈암서원의 대부분 건물은 맞배지붕을 했으나 응도당은 팔짝 지붕인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이제 둘러볼 것도 모두 둘러보았으니 내갈길 가야겠다.
연산천을 알리는 안내판
멀리 철탑 보이는 곳은 천호산이고 그 앞은 황산성과 깃대봉 방향
1970년대 아이들이 멱을 감고 아낙네들이 빨래하던 전형적인 시골스런 하천 모습이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하다
물속 풍경은 이렇다
논, 밭의 화학비료
인근 축사에 쌓인 가축 분뇨
가정집 하수도 구정물
자동차에서 흘린 도로의 기름
이 모든 걸 받아들이며 흐르다 보니
실제로 하천길을 걸으면 논밭에 뿌려진 거름냄새가 심하게 나는걸 맡을수 있다
이런 곳에 물고기가 살고 있다면
마치 "달고나"를 닮은 색이며
꼬순내가 날 것 같다
우유를 만들기 위해 태어난 젖소 한마리가 하루 동안 만들어낸 분뇨는 약 50kg
우유150ml가 하천에 흘러들었을때 정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물의 양은 3천리터(욕조 10개 분량)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루동안 쓰는 물의 양은 280리터 세계 최고수준으로 알려졌는데
작은 논산시의 면(面)이지만 주위에 논이 많은것도 사실이지만 물이 이렇다는건 생각해볼 문제인듯
하천 아래쪽 풍경이고
상류 앞으로는 깃대봉과 그뒤로 천호산
다슬기는 전혀 없을것 같고 물고기는 가끔 지나는걸 볼수 있었는데 언젠가는 물고기마져 사라질듯
가까이서 본 하천풍경
이러함에도 비 온 뒤 강물색이 깨끗하게 변하는 건
흙, 기름. 농약, 중금속 쓰레기가 빗물에 씻기고
흘러가기 때문인데 비 온 뒤 일주일이면 이와 같이 된다
바닥은 온통 이렇고
물!!!!
몸속을 순환하고 지구를 순환하는 물
지구표면의 75%
인체의 70%
혈액의 85%가 물
깨끗한 물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갯벌이 가득한 서해로 흐르는 물은 대부분 생각보다 더럽다.
아까운 것들
작은 것 하나 들고 먹으니 먹을만하다
논산시 부적면에 들어와 노성천에 합류되는 연산천을 끝으로...
노성천은 계룡산에서 금잔디 고개 방향으로 가다가 740봉에서 좌측 계곡에서 발원하며
갑사를 지나 논산시 부적면 왕덕리에서 논산천에 합류하는 29KM 하천이다.
멀리 계룡과 향적산이 보이고
내일은 저곳 계룡으로 올라가서 은선 폭포로 흐르는 용수천을 걸어야 할 것 같다.
향적산에서 깃대봉으로 이어지는 용의 꼬리능선
논산시와 모래 하천인 노성천을 끝으로
내일은 계룡산 남쪽아래 신원사로 가야겠다.
그동안 하천길 하나에 딱 하나만 배우자는 생각으로 231개의 하천 11,400KM 정도를 걸었고
많은분들의 후원에 힘을 얻어 한국의 하천을 걸었기에 그분들께 감사드린다
끝으로 여기저기 찾아보라며 등 떠밀어 주셨던 논산의 깽이님께 감사 드리며
논산역으로 걸어가서 대전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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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눈 내린 산야가
포근해 보이고요
아름답습니다.그러나 그길을 걷는 1인은 힘드시겠지요. ~~~~~♡♡
고생하셨고요.오늘도 출근
아마도 마지막 눈산행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번주에 갱주에서 뵙겠습니다
눈내린날 연산천을 찾아 갔네요
주변이 역사적인 사실을 많이 내포되는지역으로
주변에 기록되어 표시된곳이 많습니다.
장화신고 산을 오르면 힘들고 미끄러웠을텐데
그래도 잘진행 하셨네요.
암자와 절 역사적인 사실이 먼저 기억에 남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장화가 생각보다 접지력이 무척 좋고
편안합니다.
짧은 하천이지만 볼것도 많고 역사를 배우기 좋은 길이었습니다.
정맥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