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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강단-545 위엣 것을 찾으라(골로새서3장1-4절)
성경말씀은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4절까지 봉독합니다.
[골로새서 3장]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가 골로새서에 있는 말씀들은 어쩌면 너무 고차원적이어서 그냥 읽어갈 뿐이지, 실제로는 거의 실감나지 않는 그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지향하는 이 현재의 풍조와는 너무 거리가 멀어서 아예 근방에도 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어요.
여기 지금 사도바울이 그 당시 2천년 전에 골로새에 있는, 아직도 신앙 연조나 혹은 그 신앙의 어떤 경륜이나 깊이에 있어서 그렇게 수준이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골로새 교회 역사가 길어도 20년이 안 되었습니다.
한 15년 남짓, 20년도 채 안 되었을 텐데, 그런 아주 어리고 젊은 그런 교회이고, 수준도 아주 낮은 정도인데,
여기 말씀하시는 차원은 우리 한국교회에서 설교하기 어려운 내용이예요.
그 정도로 높은 수준의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대형교회 메시지를 들어보면 하늘나라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거의 이 땅에서 잘 되고 이 땅에서 성공하고 이 땅에서 복받고, 그런데 그 복받는게 전부 다 물질적인 것이고, 그 물질적인 것도 농사를 잘 지어가지고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거의 부동산 투기 해가지고 갑자기 가격이 올라서 이런 것들이예요.
이제는 부동산 거품이 빠질 때는 뭐라고 설교할 것인가 걱정이 돼요.
그것은 전혀 설교라고 할 수도 없고, 그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복과는 너무 거리가 먼 그런 얘기를 하는데도, 성도들은 그게 즐거워서 아멘 하고, 그런 것을 보면 우리 한국교회 수준이 그야말로 우려할 수준입니다.
여기 사도바울은 그런 것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거예요.
[골로새서 3장]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는 지금 가만히 있는데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는데, 그게 예수님 죽은 것이 곧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으니까 내가 죽은 것이요, 예수님께서 살아난 것이 곧 나와 연합해서 살아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좀 더 고차원적인 세계를 찾으라.
세상 사람이라 할지라도 조금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 돈 좀 많이 벌고 부동산 투기하는 것 이런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정도인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몰라요.
기독교가 아니고 옛 사람들이 동양에 공자나 맹자나 아니면 장자나 노자나 이런 사람들 수준도 안 됩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의 수준이라는게..
너무 어이 없을 정도로 타락을 했어요. 변질되고 타락을 했어요.
다 그러니까 몰라요.
그래서 오히려 성경을 이야기 하면 아주 생소해하고 낯설어하고 수용을 못해하고 이상한 목사 다 봤다 그런 소리 하면서..
자기들이 이상한 줄 모르고, 바르게 말하고 성경을 바로 말해주면 아주 이상한 사람 취급해요.
여기 지금,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렇게 한 것은, 생각은 할 수 있겠지만 추구하지 말라는 거예요. 추구..
사실은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느냐, 무엇을 추구하느냐 이렇게 추구하는 그것이 곧 생각이고, 그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이예요.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사람도 바로 그러한 거죠.
그 사람의 생각이 바로 그 사람이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왜냐하면,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여러분 죽은 사람은 욕심이 있어서도 안 되고 소원이 있어서도 안 되고,
오죽하면 사도바울이 ‘그러므로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예요.
자기 소원이나 자기 욕심이나 자기 목적이나 이런 것 다 내려놨다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교회가 개발한 이상한 프로그램을 보면 전혀 성경과 상관이 없는데, 온 한국교회가 전부 그렇게 물들어 가는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느냐?
욕심 때문이예요.
욕심과 소원과 목적이 순수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것은 안 죽어서 그래요.
여러분 안 죽었으면 산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산 것도 아니예요.
하나의 종교입니다. 종교..
아직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돈을 찾아가는 어떤 복을 찾아가는 기복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뭘 찾아가고 있는 단계이지,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 누리고 자유하고 이런 것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끝없이 추구하는 것들이 너무 세속적이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세상적이예요.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어떻게 감취었느냐?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연합되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께 세례받았다는 것은, 예수님 죽은 것이 곧 나의 죽음이요, 예수님께서 부활한 것이 곧 나의 부활이요, 또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 나도 연합되어 하나님 옆에 앉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재림할 때,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지금 여기 골로새에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예요. 살아있는 사람들을 보고..
그래서 우리가 위엣 것을 추구하는 고차원적인 세계를 두고 살아가야 될 근원을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죽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고린도후서 5장 13장 14절 공부할 때, 우리가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은 것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고 저희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이게 기독교였거든요. 이게..
그런데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말이 성경에 있는 줄도 몰라요. 이게 기독교 본질인데..
우리가 왜 자유할 수 있느냐 하면, 욕심을 내려놨기 때문에 자유할 수 있거든요.
끝없이 욕심에 매여버리면, 욕심이 잉태하면 순수하지 않은 것이 나와요.
그래서 성경 어떤 구절들을 기록된 원 목적대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먼저 만들어 놓고 그 목적에 맞는 구절을 빼다가 정당화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단이고 이게 바로 사이비입니다.
그런데 신비주의들까지도 전부 그렇게 합니다.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어떤 목적이 있어요.
거기다가 온갖 구절을 끌어다가 정당화 하는데, 성도들은 모르니까 그게 맞는 것 같거든요.
전부 성경을 인용하니까..
그래서 그런 목적을 위해서 성경도 이용하고 성도도 이용하고 하나님 이름도 이용하고 온갖 것을 다 그 목적이 우상이 되어가지고 그것을 위해서 만든 설교 신학들은 전부 다 잘못된 거예요.
그것을 성도들이 모릅니다.
성도들이 그러면 복받는 것 같고 잘 되는 것 같으니까 옳은 줄 알고 따라가는 거예요.
자, 그래서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우리는 옛 사람이라는 것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여러분 죽었어도 법상으로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욕망으로서는 우리 지체 속에 남아서 살아있는 것처럼 버퉁거린다는 거예요.
제가 한번 이야기 했죠.
지네의 머리를 잘랐는데, 밑에 다리가 이튿날까지 살아있는 것처럼 계속 꿈틀거린다니까..
그런 것처럼 우리가 확실히 법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신적 욕망이 살아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날마다 죽여야 돼요.
그 얘기가 5절 이하에 나옵니다.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죽었는데 죽이라 하느냐? 어렵죠?
머리는 법상으로는 죽었으나 실제로는 욕망이 여전히 살아 있어서 계속 추구를 합니다.
그것 따라가면 안 돼요.
그래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그 육신의 행위를 죽이면 살 것이다.’ 아주 역설적인 얘기죠.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그래서 여러분 요즈음 우리 교회에서는 별로 안 하는데, 옛날에는 이름도 갈아버렸어요.
세례받던 날 이름을 갈아버리자. 옛 사람은 죽었다는 거예요.
그 옛 사람이 살던 것과는 전혀 그렇게 살지 않겠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해서 카톨릭에는 지금도 그런 형식이 남아 있죠. 세례명이라고. 영세명이라고 이름을 새로 바꿔버리는 거죠.
그만큼 옛 사람이 정말 죽었다. 그런 의식이 하나도 교회에 안 심어졌어요.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그러니까 의식이나 지식이나 상식이나 모든 것을 다 바꿔야 돼요.
하여튼 예수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것은 좋은 것은 가지고 있어도 안 됩니까? 좋은게 뭐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싹 다 벗어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역사관 세계관 가치관부터 전체를 완전히 바꾸어서 지식에까지 새롭게 함을 받는 자다..
여러분 제가 학교다닐 때 어설프게 배웠어도 가만히 보면 전부 다 바꿉니다.
학교에서 이렇게 배웠지만 사실은 이런 것이다..
역사. 우리가 이렇게 배웠지만 사실은 이런 것이다..
과학. 과학이 이러하지만 사실은 이런 것이다..
식품. 식품 영양학도 학교에서 이렇게 배웠지만 사실은 이게 맞다..
위생. 여러분 무균실처럼 해서 살면 건강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전부 창조원리부터 모든 지식도 다 쏟아가지고 다 엎어버리고 새로 다 담아야 돼요. 전부 다..
모든 지식 상식까지 새롭게 함을 받는다..
서양 교회가, 태어나면 그냥 유아세례 주고 결혼식도 교회에서 하고, 교회 나오든 안 나오든 십일조만 내면 신자되고..
학교에 가서 순 엉터리로 배우니까 여러분 유럽교회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무너졌습니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어야 돼요.
지식 따로 신앙 따로 그렇게 안 돼요.
지식도 기술도 전부 다 창조원리에 맞게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아 나는 거기 들지 않는다.’ 그런 것 없어요.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당연히 마땅히 그렇게 해야 돼요.
범사에 세상에서 어떻게 배웠든지 간에 세상 따라가면 안 돼요.
세상에 무슨 말을 하든 옳든 옳지 않든 제쳐놔두고 성경대로 살아 보세요.
그러면 성경이 진리다 하는 것이 금방 증명이 됩니다.
여러분 제가 가끔 이야기 하는게 요즈음 이야기 하는게 아니거든요.
방금도 차에서 오면서 들어보니까 10여년 전에 하나님의 사람들 하면서 극동방송에서 한 것인데, 지금하는 것과 똑 같아요. 보니까..
벌써 세계관 역사관 가치관 전체가 달라져야 됩니다.
그래서 학생들도 세상 따라서 우쭐거릴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세상을 냉철하게 비평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줘야 됩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세상에 목말라서 세상에 숨 넘어가고 그러면 안 돼요.
그래서는 세상 이기지 못해요.
..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이런 옷이라고 하는 것은 겉에 이런 천으로 된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품의 옷을 말합니다. 성품..
그 안에 우리 영혼이라는 존재가 성품이라는 옷을 입게 됩니다. 성품..
성품의 옷이 뭐냐?
첫째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옷을 함부로 입지 못한다.
성품은 타고나는 것 아니냐?
그것도 거듭나야 됩니다. 타고났다 할지라도 거듭나야 돼요.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야 돼요.
여러분 옛날에 택함받기 전부터 준비하는 것 에스더서에 보면, 화장하는데 1년 걸려요. 1년.. 화장을 하는데..
택함 받기 위해서 1년 전부터 준비해요.
우리는 아무 것도 없이 있다가 택함받았는데, 택함받은 이후에는 택함받은 자처럼 또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그러니까 하나님처럼 이예요. 하나님처럼..
그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과 똑 같이 옷을 입어야 되는데, 그 옷이 뭐냐?
첫째 긍휼의 옷을 입으라.
마음 깊은 곳에 어려운 사람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이런 사람을 보면 긍휼히 여기는 그런 마음의 성품의 옷을 입으라. 그런 얘깁니다.
긍휼과 자비. 비슷한데 자비는 석가모니가 전매특허 낸 것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자비하게 자비롭게 하고, 겸손과 온유로..
예수님께서 맨 처음에 제자를 불러가지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여러분 세상이 얼마나 거칩니까?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거친지 겁나요.
오늘 잠깐 인터넷 신문을 보니까 젊은 사람 52%가 사회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거야.
그래서 학교다닐 때에는 학원폭력 때문에 학교가는게 겁나고, 사회에 나가면 사회폭력 때문에 겁나고.. 이것이 사회가 너무 거치니까..
그래서 온유와 겸손으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옷입고..
그러니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 이것이 다 하나님의 성품이예요.
그런 성품의 옷을 입도록 해야 돼요.
‘나는 타고난 성질이 그렇다 이해하라.’ 이게 아니고 성질 다 죽여야 됩니다.
.. 오래 참음을 옷입고
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러니까 전에도 한번 얘기한 것 같은데, 옷을 입는데 맨 속에 긍휼과 자비의 옷을 입고, 조금 바깥에 겸손과 온유의 옷을 입고, 오래참음으로 옷 입고, 그리고 그렇게 해도 사람들이 우리 앞에 실수도 하고 죄도 있고 허물도 있는 수가 있는데, 그럴 때 용서하고 용납해야 돼요.
우리도 다 옛날에 실수 했잖아요. 용서하고 용납해야 됩니다.
용서하고 용납하고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그 위에 사랑을 더해야 된다는 겁니다.
거기까지 하나님의 성품이예요.
아주 간단하게 우리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성품의 옷인데, 이런 것으로 옷 입으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이것도 항상 우리가 기도할 제목이죠.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평강 하나님의 평강이 강물같이 잔잔하게 흘러야 되는데, 무엇이 우리를 주장하느냐 하면, 평강이 우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 초조 공포 근심 걱정 염려 시기 질투 원망 불평 죄책 의심 12가지예요.
이런 것들이 항상 우리 마음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가지고 이것이 다 주장해버린다는 거예요.
이런 가시덤불이 많아 가지고는 여물이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이라는게 이런 가시덤불과 속에 돌짝밭이 있으면 자라지 못해요. 믿음의 뿌리가 안 내리는 거예요.
이런 돌들을 다 가려내고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평강이라고 해도 되지만, 평화. 제일 큰 개념이 평화죠.
조금 몇사람으로 더불어 하면 화목, 개인적일 때 평강이죠.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할 때는 화목.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말은 평화가 더 큰 개념이고, 화평이 조금 그 다음 개념이고, 화목이 조금 더 작은 개념이고, 평강은 아주 개인적인 개념인데,
평강이나 평화나 화목이나 화평이나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속에 항상 있어서 화평케 하는 자, 영어로는 ‘피스 메이커(peace maker)’라고 하죠.
어디가서 자꾸 평지풍파를 일으킬게 아니라, 화평케 해야 돼요.
..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찬양하고 그리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이런 생활이 성령충만의 생활이라는 거예요.
뭐 그냥 데굴데굴 구르고 넘어지고 이런게 성령충만이 아니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자기 이름 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리고 그런 기본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는 사람은 인간관계도 실제적으로 아름답게 이루어지는데, 18절 이하입니다.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에베소서에서 다 살펴본 거죠.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역시 남자들은 여자를 괴롭게 하는가 봐요.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아이들을 격노케 화나게 하지 말라는 거죠.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거기는 뇌물도 통하지 아니하고 1심 2심 3심 그런 것도 없어요. 항소도 안 되고, 한번 심판 받으면 끝장이야. 그냥..
그래서 우리가 사람에게 뭐 어떻게 한 것으로 사람에게 받는 보상은 별 것도 아니고, 우리가 제대로 잘 하는 사람은 상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잘할게 아니고 사람에게도 잘 해야 돼요.
또 주인들도 당시에 노예들에게도 잘 해야 돼요.
4장 1절은 3장 끝으로 있었으면 좋겠죠.
[골로새서 4장]
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이렇게 말하는데까지 3장으로 되었으면 좋을 뻔 했고, 4장 2절부터 1절이 되었으면 장 구분이 더 좋겠죠.
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기도하는 정신의 기본이 감사입니다.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매인게 아니라 갇힌 거죠.
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사도바울은 오나 가나 ‘내가 빨리 풀려날 수 있게 기도하라.’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디서든지 내가 입을 열어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바르게 전할 수 있게 해달라..’
나가든지 안 나가든지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간에 하나님 말씀을 잘 전할 수 있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거예요.
5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세월을 아끼라’는 말이 ‘기회를 사라, 기회를 속량하라’는 말인데, 외부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조금만 우리가 실수하거나 말 한마디만 삐끗 잘못해도 그분들이 교회에 오는 길을 한참 멀어지게 하는 수가 있습니다.
세월을 많이 허비하게 하는 거죠. 말 한마디 잘못해가지고..
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여러분 말을 하는데, 너무 내용이 없으면 허탈해요. 내용이 없으면..
그런데 말을 하는데, 해서는 안 될 말을 한다든지 그것도 곤란하다는 거야.
그런데 소금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음식에 들어가야 맛이 납니다.
여러분 혹시 고기가 맛있다고 생각합니까?
고기가 맛있는게 아니고 소금이 맛이 있는 거예요.
소금 빼고 먹어봐요.
세상 그 어떤 고기도 소금 빼고는 맛있는 고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기 안에 약간 맛이 있는데, 거기에 소금이 들어가면 바로 고기가 어떤 좋은 맛을 내죠.
단맛이 있는데 거기 약간의 소금을 넣으면 단맛이 훨씬 더 달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좋은 맛을 더 맛있게 그렇게 하는게 소금이라는 거예요.
사실 음식맛은 소금 맛이죠.
그렇다고 소금을 너무 많이 넣으면 씁니다. 써요. 그냥..
그리고 소금이 너무 적으면 안 되니까 골고루 적당하게 간간하게 이렇게 말도 좀 그렇게 너무 독하게 하지 말고, 우리 경상도 사람은 말을 독하게 하는 수가 있거든요.
독하게 하지 말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이 말을 잘 해야 돼요.
이게 유대인들의 지혜입니다.
세계에서 말을 제일 잘 하는 사람이 유대인인데, 말을 잘 해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이 유대인이야.
여러분 말을 잘 한다는 것은, 말을 잘 하고 싶지 않은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게 잘 안 되는게 머리나 마음에 든게 있어야, 진리가 들어 있어야 말을 잘 할 수 있는 거죠.
유대인들이 워낙 공부를 많이 합니다.
우리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공부를 해요.
지금부터 2천 2백년 전부터 국민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워낙 공부를 하니까 말을 잘 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공부를 주입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항상 이들은 토론식으로 공부를 합니다. 초등학교부터 토론식으로 공부를 해요.
학생들이 자기들이 하다가 모르는 것 막히는 것을 교사들이 지도를 하니까 아이들이 말을 잘 하는 거예요.
온 세계에서 유대인만큼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없고, 또 외국어 구사 능력도 유대인으로 태어나면 5개 국어를 기본으로 해요. 5개 국어를..
그렇게 말을 잘 해요.
그러니까 그 말 가지고 언어를 가지고 온 세계를 지배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대인들은 그런 면에서 탁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영적인 삶이 하나님과 대화인 기도, 사람에게 말하는 것, 하나님과 말하고 사람에게 말하고 그렇게 나와 있잖아요.
4장 2절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6절에는 사람에게 말조심하는 것으로 경건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나중에 야고보서를 우리가 볼 때 ‘스스로 경건하다 하면서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않는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다.’
아무리 기도하고 아무리 철야하고 아무리 찬양하고 해도 예배당 문 열고 나가서 말 몇마디 혀를 재갈물리지 않고 말을 함부로 해버리면 자기 경건 다 까먹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그래서 경건하다는 것은 말을 조심하는 겁니다.
사람 앞에나 하나님 앞에서 말을 조심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그래서 디엘 무디 같은 분도 ‘잠잠하라. 그리하면 듣게 될 것이요, 들으라. 그리하면 잠잠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 자꾸 성경을 공부하고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사람과 말할 것도 작아집니다.
별로 할 말이 없어져요.
하나님 앞에서 들을 것은 한없이 들어야 되지만 할 말이 없어집니다.
다윗도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위해서 집을 지어 주겠다’ 하니까, ‘종이 주님께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할 말이 없어지는 거야.
처음에는 그냥 뭐라고 뭐라고 막 떠들어대고 하는데, 제대로 은혜를 받게 되면 잠잠해지고 조용해집니다.
손으로 입을 가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 앞에도 할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은 말을 하면 안 돼요.
특히 인간관계 대인관계에서 ‘꼭 이 말만은 해야 되겠다’ 하는 그 말 하면 안 됩니다. 대개..
그래서 기도하는 것도 감사함으로 깨어 있는 것이고, 사람들에게도 말을 소금으로 고르게 함 같이 아껴야 되고 절제해야 됩니다.
야고보서 공부할 때 조금 더 연장하게 되겠습니다.
여기까지 최종적으로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의 주된 교훈은 4장 6절까지 해서 끝났습니다.
그리고 뒤에 있는 부분은 추신처럼 해서 보내는 것인데, 이 편지를 가지고 가는 두기고 소개를 합니다.
두기고가 에베소 출신인데,
7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역시 ‘사랑을 받는 종’이죠.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 사랑을 받는 오네시모.’ 사도바울 곁에 사랑을 받는 사람이 많아요.
사랑을 받는 두기고, 사랑을 받는 오네시모,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
사랑을 받는 사람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예요.
사랑하는 것도 해야 되는데, 더 위대한 사람들이 사랑 받는 거예요.
사랑받는 사람은 온갖 덕목을 다 갖추지 않으면 사랑을 못 받거든요.
이 두기고는 제가 볼 때 연락책을 맡기면 잘 가는 사람이야.
어떻게 가는지 그렇게 불편한 시대에, 교통이나 치안이나 신분보장이 안 되는 시대에 뭘 타고 가는지 구름타고 가는지 바람타고 가는지..
그래서 먼길 심부름은 거의 두기고가 맡았다고 봐도 괜찮아요.
그렇게 두기고는 잘 다니는 사람이예요.
이 사람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몸살을 할 것 같아..
그래서 이런 신실한 분에게 맡겨졌기 때문에,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라는 편지와 오네시모라는 종이 다 제대로 전달되고, 나중에 디모데후서에도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어디쯤에서 쓰면서 디도에게 편지쓸 때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낼 때 너는 그 일을 손 떼고 내게로 오라. 니고볼리로 오라.’ 할 때 두기고를 심부름 보냅니다.
바울이 연세가 들면서 사람을 쓰는 것, 인사 행정 이런 것들을 적재적소에 적임자를 배치하고 파송하고 보내고 맡기고 하는 것에 아주 달인이 됩니다. 그야말로 통달하게 됩니다.
저는 자신이 없어요.
사람들을 봐서 시키는 것을 잘 못하기 때문에 저는 보이는 대로 맡깁니다. 그냥..
자기가 뭘 할 수 있는지 스스로 써내라..
그러니까 불평 못하죠. 자기가 하고 싶어서 했으니까..
제가 보자마자 저 사람은 이런 일 시키면 되겠다 눈에 보이면 되겠는데, 잘 안 보여요.
그러니까 자기가 써내라고 하니까 훨씬 편리해요.
여러분 잘 모르거든 자기가 써내라고 해봐..
8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두기고가 가면서 9절에,
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오네시모는 골로새에 있는 가정교회를 하고 있는 빌레몬이라고 하는 그런 사역자의 집에서 도망나온 노예인데, 다음 주일에 이 빌레몬서 공부할 거예요.
빌레몬의 집에 노예였는데, 도망나와서 로마에서 바울을 만나가지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어요.
여러분 도망간 노예는 붙잡히면 십자가 사형입니다. 사형..
그런데 이 사람이 바울을 만나서 로마에서 어떻게 변화되었던지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로 거듭난 거예요.
저주를 받아 돌에 맞아 죽거나 십자가에 못박혀야 될 그런 오네시모가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로 거듭났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렇게 변해야 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삶은 완전히 변해야 됩니다.
‘오네시모’라는 말이 ‘유익한 자’라는 뜻인데, 전에는 아주 무익한 자였는데, 바울을 만나서, 바울을 만나면 뭐 합니까?
예수님을 만나버리고 나니까 그 이름대로 유익한 자로 변화된 거예요.
..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저희가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구두로, 말로 알게 할 것이다.
편지에 내가 내 개인적인 사소한 얘기는 안 쓴다.
왜냐? 이게 회람문서이기 때문에 그런 개인적인 사적인 정황은 두기고와 오네시모가 너희에게 구두로 전할 것이다. 그런 말이죠.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아리스다고라는 사람은 데살로니가 출신인데, 처음에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갈 때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연보한게 있었잖아요.
그것을 전달하러 예루살렘까지 같이 동행했는데, 나중에 바울이 체포되어서 로마로 호송될 때 따라가서 같이 가 줬어요.
아마도 모르긴 해도 아리스다고가 한 주먹 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꼭 이렇게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도 험한 세상에서 연세 많은 분이 체포되어가지고 무리하게 대우받으니까 자기가 노예처럼 가서 바울 곁에 있으면서, 사실은 노예도 아닌데 ‘나는 노예입니다.’ 하면서 ‘주인어른 가는데 계속 같이 가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함께 갇힌 자 되어가지고,
지금 4-5년 동안 바울이 어려운 생활을 하는데, 그 어려움에 함께 갇힌 자 되어서 따라갔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아리스다고는 별로 소문이 안 났는데, 저는 천국에 가면 사도바울이 받는 상이나 아리스다고가 받는 상이 비슷하다고 봅니다.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사람은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고,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
이런 사람이 아리스다고예요.
별로 이름도 안 알려진 것 같은데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나와 함께 갇힌 자 된..’ 아무도 이런 수식어를 쓰지 않았어요.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이 마가가 사도바울에게 다녀갔어요.
그리고 이 아리스다고도 지금 바울이 아마 돌려보낸 것 같거든요.
여기 지금 나와 함께 갇힌 자인데, 이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하면서,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원래 이 사람 이름이 예수인데, 주님의 이름이 예수님인데 자기가 예수라고 하면 황송해서 이름을 예수와 비슷하게 유스도라고 바꾼 것 같아요.
그래서,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옛날에 사도바울이 할례당 그러면 사람 딱 그냥 얼굴도 다시 안 볼려고 했어요.
얼마나 할례당에게 질렸든지..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할례당 가운데에서도 이렇게 좋은 사람이 있었다는 거야.
그래서 마가 유스도라고 하는 예수 이런 사람들은 할례당이었지만,
..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바울이 로마에서 지금 2년차 이렇게 연금되어 있었고, 가이샤랴에서 2년해서 4년 넘게 자유를 잃어버리고 갇혀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그 마가가 어디서부터 날아왔는지 모르지만, 바울이 로마 감옥에 연금되었다는 말을 듣고, 바울이 옛날에 자기를 그렇게 아주 홀대 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의 가슴이 넓은 사람이야.
사실은 어쩌면 그 때 그렇게 바울에게 버림받는 혼쭐이 났기 때문에 마가가 정신차리고 그때부터는 신실한 일꾼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 날에 호되게 꾸지람 받는 것 그렇게 기분나빠 할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래서 마가같은 분이 이렇게 바울에게 그 때 혼이 안 났으면 이런 신실한 일꾼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거죠.
하도 호되게 혼났기 때문에 마가가 깊이 새기고 그 다음부터는 절대 일하다가 중간에 어긋나는 그런 일 하지 않고 신실하게 했기 때문에 일꾼이 된 거예요.
그래서 그러한 바울이 그 동안에 자기를 불러주지도 않고 바나바와 같이 나갔다가 나중에 베드로의 통역관으로 나갔다가 지금 독자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어떻든 바울이 로마에 연금되었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거예요.
찾아왔을 때 바울이 아마 굉장히 감동을 받았을 거야.
‘나는 할례당 같으면 사람도 아닌 것 같았는데, 할례당 중에서도 이런 인물이 있구나..’
그래서 이 앞에도 아마 마가에 대해서 한번 다른 편으로 이야기를 전했는가 봐요.
‘이 마가에 대해서는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옛날 같으면 ‘그 집에 발도 못대게 하라.’ 이렇게 했을 텐데, ‘이르거든 영접하라.’ 이렇게 말하는 거죠.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 교역자로 일하던 분인데, 에바브라가 최종적으로 문안하니,
..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3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이 사람은 지금 안 보내는 것 같거든요.
에바브라는 지금 이 편지 가지고 가는게 아닌 것 같아요.
이 편지를 가지고 가는게 에바브라 같으면 두기고를 따로 보낼 필요가 없잖아요.
이 사람은 아마 바울 곁에 좀 더 있고 싶어 한다든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골로새 교회가 에바브라를 로마로 보낼 때 ‘우리를 대신해서 사도바울 선생님에게 가서 섬겨 주세요.’ 이렇게 부탁을 해서 왔는지 몰라요.
그래서 지금 이 편지 골로새서가 갈 때 에바브라가 같이 가는게 아니고, 바울에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남아 있지만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히에라폴리스. 제가 이야기 했죠. 세 지역이 삼각형처럼 되어 있다고..
그 세 지역을 위해서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14절에,
14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데마는 여기 한번 나오고, 나중에 빌레몬서에 나오고, 디모데후서에 나오고 이름이 세번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바울 곁에 있는 것처럼 나오지만, 나중에 디모데후서에 보면 ‘세상을 사랑해서 데살로니가로 가 버렸다.’ 하면서 데마의 이름으로 나와요.
역시 여기에도 누가를 소개하면서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는 이라고 하는 이름이 세번 나오죠.
두기고 오네시모 의원 누가. 다 사랑을 받는 사람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라오디게아는 당시에 굉장히 큰 도시였는데, 제가 한 10년전에 갔을 때는 돌무더기 조금 보이고 흔적만 희미하게 보였는데, 이번에 가서 보니까 얼마나 발굴을 많이 했는지 라오디게아가 굉장히 큰 도시예요.
굉장히 큰 유적이 발굴 되어가지고, 지금도 한창 발굴되고 있는 것을 봤어요.
큰 도시인데, 돈이 너무 많은 거예요.
라오디게아가 얼마나 돈이 많은지..
한번은 지진이 나서 도시 자체가 왕창 다 무너졌는데, 로마의 중앙정부가 그 라오디게아 재건을 위해서 재정적으로 지원을 한다고 했는데, 라오디게아 시민들이 사양을 합니다.
우리는 자력으로 충분히 도시를 재건합니다.
여기 유명한게 안약이 아주 유명합니다.
그리고 의복이 아주 유명했는데, ‘트리미타’라고 하는 의복이 있어요. 트리미타..
그래서 라오디게아의 다른 이름이 ‘트리미타리아’예요. 트리미타라고 하는 아주 고급 의상이 생산되는 곳이다 해서 돈이 너무 많아 가지고..
여러분 돈이 너무 많으니까 신앙이 아주 미온적이라는 거예요.
돈이 많으니까 별로 하나님까지도 필요하지 않는..
그래서 나중에 요한계시록 공부하겠습니다만, 라오디게아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뜨뜻미지근하다 그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 지금,
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그래서 이 라오디게아는 교회가 따로 무슨 큰 교회가 있는 것 같지 않고, 눔바라는 강력한 어떤 여인이 집이 여유가 있고 공간이 있어서 거기서 모임을 갖는 것 같아요.
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그래서 제가 회람문서라는 말씀을 드렸죠.
돌려가면서 읽는 편지..
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아킵보가 여기에서 나오고, 다음 주일에 공부할 빌레몬서에 보면 빌레몬 빌레몬의 아내 압비아, 그리고 그집 아들 아킵보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래서 이 아킵보라는 사람도 자기 아버지 빌레몬과 함께 사도바울 밑에서 두란노서원에서 같이 공부하고 함께 사역자로 부름을 받은 것 같은데,
라오디게아가 돈이 많고 그리고 아쉬운 게 없고 너무 돈이 많아서 하나님까지 필요하지 않는 그런 지역에서 젊고 나이 어린 아킵보가 가서 목회자라고 가서 일을 해봤자 별로 권위가 없는 거예요.
거기다가 배부르고 하니까, ‘야 너 몇 살이야?’ 하고 예사로 무시하고..
그래서 아킵보가 목회하다가 재미가 없어서 집에서 쉬고 있는 것 같아요.
나중에 빌레몬서에 보면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아킵보 이렇게 세 이름이 나옵니다. 첫머리에..
그래서 이 아킵보를 맨 나중에 바울이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다가 한마디 합니다.
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좋은 말이 아니죠.
뭔가 일이 재미가 없어서 일을 안 하고 있는 거야.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뜨뜻미지근하고 열심이 없으니까..
여러분 열심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도 어떻게 못해요.
하나님도 할려고 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지, 이렇게 열심도 없고 배불러서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뜨뜻미지근하고 ‘복을 주실테면 주시고 마실테면 마시고, 주셔도 그만 안 주셔도 그만..’ 이렇게 된 사람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잘 안 되는 이유가 돈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국민소득이 만불 이상 넘어가면 거의 그 교회는 정체에 들어간다. 이것이 세계 선교 역사상 공통적인 이야기예요.
우리나라도 만불정도까지 교회가 꽤 열심히 달려오더니, 그런데 그 달려온 열심이 뭐냐 하면 잘 살아 보겠다고 이렇게 했는데, 이제 살만큼 살아버리니까 그 때처럼 그렇게 갈급하지 않다는 거야.
그리고 적당히 핍박이 좀 있거나 위협이 있거나 위험이 있거나 하면 좀 열심이 있는데, 평안하고 아무 아쉬운 것도 없고 하니까 점점 나태해지는 것처럼..
그 대표적인 교회가 사데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 일곱교회 중에 제일 돈 많은 곳이 라오디게아와 사데였는데 교회가 제일 나태하고 책망을 제일 많이 받은 교회예요.
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조심해서 그렇게 나태하게 놀지 말고 일을 하라고 한마디 하는 거죠.
그리고 17절까지가 비서가 쓴 것이고, 18절 한절만 바울의 친필입니다.
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렇게 해서 골로새서가 기록되었는데, 내용의 총 주제는 그리스도의 신비죠.
그리스도가 얼마나 신비한 분이냐..
그래서 처음부터 한 것을 잠깐 정리하면,
모든 피조물이 있기 전부터 선재하셨던 그리스도,
그리고 선재하셨던 분이 창조하실 때 함께 하셨다.
창조주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구세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화목케 하시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
정사와 권세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하나님 우편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만유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다시 오실 그리스도,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 되시는 그리스도,
온갖 이야기가 사실 그리스도 이야기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분을 우리가 구세주로 믿고 그분 안에서 죽고 그분 안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이제는 항상 그분을 바라보라.
세상적인 것 그런 것 추구하지 말고, 땅엣 것을 추구하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
더 고차원적인 삶을 추구하라.
이런 말씀들이 골로새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의 생명을 연장해 주셔서 골로새에 보낸 편지까지 읽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이후에 남은 서신들 즉 빌레몬서와 목회서신과 일반서신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의 손을 빌어서, 또 여러 사도들과 종들의 손을 빌어서 그 편지에 담아서 보냈던 그런 은혜와 진리를 우리 마음속에 잘 정리하고 배워서, 우리가 땅에 있는 허탄한 것 하찮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항상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