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가네 /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 울며 우지 않으며 가는 / 우리 봉준이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안도현 시인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의 일부이다.
드넓은 전라도 벌판을 건너 서울로 가는 전봉준 장군은 다리를 다쳐 가마를 타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다리뿐만 아니라 체포 당시 매를 맞아 심한 타박상을 입고 있었다.
매천 황현(梅泉 黃玹)이 쓴 오하기문(梧下記聞)에는 전봉준이 서울로 끌려가며 죽력고를 찾았다고 한다. 죽력은 한의학에서 타박상을 치료하는 약으로 사용한다. 부상이 심했던 녹두장군은 죽력고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며 혁명의 기개를 조금도 잃지 않았던 것이다.
녹두장군과의 일화가 있는 죽력고는 오랫동안 명맥을 확인할 수 없는 술이었다.
예로부터 김치를 담아먹는 것처럼 술도 집에서 빚어 명절을 지내고 손님을 접대하였다. 근대적인 주세법이 도입되기 전까지 우리민족의 가정에는 전래의 전통가양주들이 수백수천가지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세법 도입이후 그 많은 가양주는 밀주로 몰려 긴 세월을 음지에서 떠돌았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전통 가양주가 사라졌다.
죽력고도 그렇게 사라진 술 가운데 하나였다.
죽력은 대나무즙이다. 죽력고는 죽력에 솔잎, 창포 등을 발효주와 함께 증류하여 만드는 높은 도수의 증류주다.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는 전라도 지역에서 죽력고는 많이 빚어졌고 전국적인 명주로 이름을 얻었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감홍로, 이강주와 함께 조선의 3대 명주로 죽력고를 꼽았다.
죽력고를 찾아서
죽력고는 문헌에만 등장하는 술이었다. 대나무의 고장 담양은 물론이고 전라도 고을마다 수소문해도 죽력고를 찾을 수 없었다. 수십 년간 죽력을 내려온 노인들에게 죽력고를 물어도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당시 전주전통술박물관에서 근무하던 필자는 죽력고가 없다면 문헌을 바탕으로 복원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행방을 찾지 못했던 죽력고가 전북 정읍 태인의 양조장에 살아있는 것이었다.
그길로 죽력고를 빚는 송명섭씨를 만나러 태인에 갔었다.
송명섭씨의 외할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했다고 한다. 한약방에서는 약으로 술을 빚기도 하였는데 죽력고는 물론이고 복분자주, 호마주 등이 전해 내려왔다. 이런 약술 빚는 법이 송명섭씨의 어머니에게 전해지고 양조장집으로 시집온 어머니에 의해서 송명섭씨에게 전수된 것이다. 오랫동안 밀주단속을 피해 한약방에서 약으로 그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
죽력고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후 송명섭씨는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결국 2003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상품화된 죽력고가 우리 곁으로까지 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죽력고는 연노란 빛깔이 고운 술이다. 죽력의 아릿한 맛과 높은 도수의 증류주가 주는 강렬함이 매우 인상 깊다.
죽력고를 빚는 일은 무척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술을 빚기 위해서는 먼저 죽력을 준비해야 한다. 죽력을 얻기 위해서는 대나무를 가득 채운 항아리에 3일 밤낮으로 불을 지펴 대나무의 진액을 뽑아낸다.
죽력과 함께 필요한 것이 잘 발효된 청주이다. 청주와 죽력, 솔잎, 창포 등을 소줏고리에 넣고 증류를 시켜서 죽력고를 만들어낸다. 송명섭씨는 지금도 현대화된 증류기를 사용하지 않고 조상들이 사용하던 소주 고리를 이용하여 죽력고를 내리고 있다.
청주를 만드는데도 재래누룩을 사용하는 전통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이처럼 전래의 방식으로 빚어지는 죽력고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오감(五感)으로 느끼는 관광자원으로도 육성
눈부신 5월에 전통주 만들기 동호회 회원들이 송명섭씨 댁에 다녀왔다. 전국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송명섭씨와 죽력고를 마시며 전통주 부흥에 대해 밤새 의견을 나누었다. 또한 송명섭씨와 함께 우리술을 함께 빚는 시간도 마련하였다.
죽력고가 있는 태인은 피향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는 곳이다. 술과 지역의 관광자원을 잇는 전통술기행은 우리술을 활성화할 수 있는 훌륭한 프로그램이다.
전통주에는 다섯 가지 맛이 있다고 한다. 맛을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지역의 풍물과 음식, 문화를 찾아 우리술이 다양한 영역과 결합을 하여 오감으로 느끼는 문화관광자원으로도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죽력고 양조장 : 063-534-4018
죽력고를 만드는 송명섭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