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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kbs10957
요11;32~37예수님 눈물
요11;32~37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그 중 어떤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20200405도곡교회 김백수목사 .................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요11;32~37말씀으로[예수님 눈물]이러한 제목으로 하나님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동행하여 주시는 축복으로 이 시간 이 자리에 이를 수 있도록 우리들을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날마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감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열광 돌리는 생활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성경본문 말씀을 듣기 전에 성령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요11장 본문은 언니 마르다의 전갈을 듣고 마리아는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마을로 들어가시지 않고 마르다를 맞았던 그곳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우는 모습과 그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사 자신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 눈물에는 인간의 죽음을 불쌍히 보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깃 들여 있었습니다. 이처럼 죄인을 불쌍히 보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났습니다.(롬5:7-8).
이 예수님의 눈물은 잠시 후에 주검의 권세를 말씀으로 이기심으로 무덤에서 나사로를 살려내신 일로 인하여 큰 기쁨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두 가지로 생명의 양식을 주십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둘째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도 큰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들은 무엇부터 생각하게 하는지요? 나사로 가정에 남은 자매 두 사람은 큰 슬픔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오시니 마리아는 예수님 여기 우리오빠 돌아기기 전에 오셨다는 너무 좋았을텐데요. 하니 예수님께서 이들을 생각하시면 우셨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음이 온 사실을 슬픔하시는 사랑 많은 구세주 예수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모든 인생의 문제를 주님께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의 도움으로 생활하여 하나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남은 인생 생활이 되어지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본문 말씀에 이끌려 따라가면 성령님 감동으로 하나님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32~34
본문성경 요11;32~34말씀에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다니 촌에 웬 초라한 장례행렬이 길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상여에 메고 나갔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여기 유대 장례식은 우리나라 장례풍습과 비슷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 장례식은 매우 쓸쓸하고 초라한 장례식입니다.
물론 눅16장의 나타난 이름이 같은 나사로의 장례식과 비교 할 때 베다니 나사로의 장례식은 화려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보기에는 초라한 장례식이지만 눅16장에 나사로의 장례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가 큰 행렬이었습니다.
장례식은 상제가 많이 따르고 백관들도 많이 따라야 구경하는 사람들이 복된 죽음이라느니 상제들이 덜 외롭다느니 하는데 이 장례식의 상여 뒤에는 남자라고는 없습니다.
여인 두 사람만이 따라갑니다. 창자가 끊어지듯이 울며 따라가니 보는 자로 하여금 마음이 아픈, 그야말로 불쌍한 장례식이었습니다.
이 장례식이 누구의 장례식이냐 하면 바로 나사로의 장례식입니다. 상여에 담겨 가는 시체는 나사로입니다. 상여 뒤에 애절하게 울면서 따라가는 두 여인은 그의 누이동생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이 장례식이 끝난 지 나흘 되던 날 우리 주님께서 나사로의 가정에 왔습니다. 이 나사로의 가정과 주님 사이에는 깊은 인연이 맺어져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일찍이 예루살렘에 오시면 나사로의 집에 가서 주무시고 예루살렘 가셨고 저녁이면 나사로의 집에서 쉬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나사로를 친구라(요11:11)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었습니다. 이들 가정에 가장인 나사로 죽어 자매의 슬픔은 너무도 크고 고통스런 순간을 맞이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이 가정에 슬픔을 가슴 아파 하시면 함께 우셨습니다.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의 눈물 울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본문성경 요11;32말씀에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의 이름은 히브리어는 미리암 헬라식은 마리아로 같은 이름입니다. 가장 사랑받는 이 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은 5명나옵니다.
1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2.그로바의 아내 3.막달라 4.본문의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 5.마가의 어머니가 나오고 있습니다.
본문의 마리아는 태도는 매우 겸손하고 온순했습니다. 분문에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 발 발 앞에 엎드리었다 합니다. 이런 모습은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 할 수 있었던 마르다가 취한 행동 보다 더 겸손한 모습입니다. 절망적인 상주로서 예수님께 꿇어 엎드렸습니다.
눅10;39말씀에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마리아는 겸손한간구자로 주님 앞에 말씀을 듣기 위하여 엎드렸습니다.
본문에서 전과는 다른 형편으로 무릎 꿇은 마리아 좋은 일에도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받기 위하여 무릎을 끊은 사람입니다. 고난의 때에도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문제를 바라는 믿음으로 무릎을 꿇을 때 주님의 기적과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마리아처럼 큰 문제이든지 작은 문제이든지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주님을 부르고 찾아야 합니다. 만나야 합니다.
마11;28말씀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문제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생 문제의 짐진자들은 누구든지 주님께 나와야 문제 해결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성경 요11;33말씀에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통분히 여기다’는 헬라어<엠브리마오마이>는 ‘크게 요동하다, 크게 상하다’는 뜻입니다.
‘민망하다’는 괴롭다는 뜻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왜 심령이 크게 상하시고 괴로우셨지요?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과 그 죽음을 인한 누이들의 슬픔의 눈물과 유대인들의 눈물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의미는 인간은 본래 영생할 수 있도록 창조된 인간이 범죄 함으로 죽게 된 불쌍한 처지를 슬퍼하시는 모습입니다.
본문성경 요11;34말씀에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슬픔 가운데 우시기 전에 마리아에게 “그를 어디 두었느냐?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나사로가 지금 어디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무덤 속에 싸늘한 시체로 누워 있는 것을 아셨지만 일부러 사람들이 듣도록 그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이 질문은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이 두려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과 일맥상통합니다.(창3:9).
주님께서는 지금 나사로의 죽음으로 우는 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어 있는 것을 다시한번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생은 예수님 만나지 못하면 죽음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나사로가 죽은 것을 모르는 이들이 없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으니 이곳에 그들이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처럼 말씀을 하고 있지 아니하지만 이 상황을 보고 깨달아 알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라 젊은 나사로도 무덤에 있다.
너희들도 저 나사로처럼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교훈을 하십니다. 그리고 인생들의 이러한 불행한 운명을 동정하여 함께 우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입니다.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추호의 동정심이 없는 법관과 같은 하나님입니다. 율법을 어기면 조금도 용서함이 없이 정죄만 하는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분만은 아닙니다.
참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구주 예수님은 죄인 된 인간의 처지를 크게 동정합니다. 인간의 슬픔과 고통에 함께 참여하는 분이십니다. 그 동정심 때문에 영광스런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동정심 때문에 친히 대속 제물이 되사 죄인들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그 동정심 때문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죄인들을 변호해 주는 영원한 중보자의 일을 하십니다(롬8:31-34).
우리가 섬기는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민망히 여기시고 동정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도 나의 믿음만 중요하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긍휼도 베풀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처럼 이 믿음을 전하며 성도의 본문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는 주님의 이러한 마음을 품지 않고는 참된 이웃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 이웃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열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부디 주님을 닮아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기도하며 죽어가는 이웃 멸망하여 저 지옥을 향하여 달려가는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이 되어지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사랑 받은 것을 감사함으로 생활하는지요?
늘 주님과 동행함으로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생활하고 있는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의 사랑하는 가족을 데려간다면 얼마나 불행한 슬픔일일까요?
죽음은 우리를 가장 슬프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가까운 사람, 부모, 형제, 자녀, 배우자, 친구 등의 죽음은 견디기 어려운 슬픔을 가져다줍니다.
또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만나는 가운데 지치고 삶에 대한 희망이 없어지기에 슬퍼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 천국에서 만남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먼저 간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천국을 주셨습니다. 대신 죽어 주셨기 때문에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소망 가운데 생활합니다.
이 믿음으로 예수 고난과 죽음은 나를 위한 죽음이요 지옥을 떠나 천국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놀라운 축복을 이 사실을 전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5~37
본문성경 요11;35-37말씀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며 우신 일은 예수님은 사람이신 우리와 같은 신체를 가지신 온전한 인성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면으로 생각하시면 우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잠시 후에 죽은 나사로를 자신이 살려내실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살리심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여 주십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신 일은 사람이신 예수님 모습을 보여주신 일입니다.
본문성경 요11;35말씀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우신 것이 세 번 기록되었습니다.
눅19:41과히5:7말씀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히5:7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 이다음에 멸망을 것을 내다보시면서 우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들려 주셨습니다.
본문에 있는 대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우신 것은 나사로의 죽음으로만 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눈물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그들 가운데 와서 계시는데 마리아와 우는 그들은 생명이 없다고 죽은 육신의 껍데기를 보고 나사로의 생명이 없다고 울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는 그들이 너무 가련하고 불쌍하여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습니다.
우는 그들은 무지몽매 하여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참 생명이신 예수님을 곁에 두고 예수님을 너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너무 속상하여 우셨습니다.
그들은 나사로를 위하여 울었지만 예수님은 그곳에 모여 슬픔에 빠진 믿음 없는 그들 때문에 우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신 것은 33말씀대로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하여 우신 것을 들려줍니다.
예수님은 죄가 죽음을 가져 온 것을 생각할 때 불쾌감을 느끼셨기에 우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인간을 창조 할 때는 동산에서 함께 친구로 벗으로 죽음이 없는 영생의 존재로 지었습니다. 인간이 죄가 들어옴으로 멸망을 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 주님은 불쾌감을 느끼시면 우셨습니다.
인간은 많은 욕심을 냄으로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가져온 것을 볼 때 주님은 인간의 불신앙과 욕심을 보고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고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기에 말씀으로 그들 제자들과 나사로가정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메시야 인 것을 증거 하였습니다. 믿지 못하여 지금 울고 있는 그들을 보실 때 큰 슬픔을 가지셨습니다.
죽음보다 슬픈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죽음은 이 세상에서 정리하는 것이기에 큰 슬픔을 줍니다. 그러나 죽음이란 관문을 통하여 저 천국 문이 예수 안에서 열리게 됩니다.
지금 울고 있는 이들은 인간적 정 때문에 슬픔을 가눌 길 없어 우는 조문객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진심으로 슬퍼하는 친지도 있었으나 돈 받고 울어주는 호곡 꾼들도 있었습니다. 저가 어릴 때 보니 대신 곡소리를 내면 울어 주는 호곡꾼들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인간들의 불신앙적인 모습입니다. 주님은 이런 모든 모습을 보시고 통분히 여기시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울기까지 하셨습니다.
히5장의 우셨다는 것은 인간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상에서 대신 죽음으로 구원 받는 사람들도 있지만 구원 받지 못하고 망하는 사람들을 보실 때 고통스럽고 아픈 가슴으로 간구와 소원으로 세상으로 가던 제자들 초대교회 일군들이 세워 진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기도로 지금도 하나님 백성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들은 예수님 눈물이 헛되지 아니하도록 주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위해 불신자들을 위해 목마름으로 타는 가슴으로 기도하면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심히 우리들 가슴에서 식어지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본문성경 요11;36말씀에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을 들려줍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라고 말한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나사로의 가정을 잘 아는 사람들 같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죽은 지 몇 시간 된 나일로의 딸을 찾아가심으로 살려 주신 사실도 알았습니다. 또한 장례식장에서 나가는 라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무덤 속에 있다 할찌라도 사랑하면 살려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수군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조금 후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신 사람이신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눈물을 보고 그들은 예수님의 생각과 눈물의 의미를 모르고 비방하면 자신들 나름대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인간들에게 판단 받지 아니하시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다만 섬기면 사랑해야 합니다. 잘못을 덮어줄 줄 알고 행동으로 품어주는 사랑의 붕대가 되어야 합니다. 상처를 싸매어 주는 붕대가 필요합니다.
본문성경 요11;37말씀에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비방하면서 예수님 하신 능력이 왜 이곳에는 나타나지 아니하고 이제 와서 우는 것이냐고 야유 합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그가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하지는 아니하고 지금에 와서 울면서 조문을 하고 있느냐고 예수님을 비웃고 있습니다. 일종의 비판이요 비방으로써, 나사로의 죽음을 예수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죽은 사람의 원인을 산 사람에게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지나치게 많이 울 경우, "저 애가 저렇게 우니까 자기 엄마가 죽었지" 하고 죽은 엄마의 원인을 살아 있는 아이에게 돌려버리는, 즉 누구 탓으로 돌리는 일을 쉽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도 나사로가 죽은 책임을 예수님께 돌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를 위하여 우시며 지금 오셨는데, 이곳 상가 집에 남은 유대인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원망합니다.
이 불쌍한 가정에 가장을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느냐고 예수님을 비웃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들 때문에 통분히 여기시면 우신 사실 지금 이곳에 마음이 굳어 회개할 줄 모르고 누구 탓만 하고 있는 이들을 볼 때 예수님은 가슴이 아파 우셨습니다.
우리들은 나 때문에 예수님께 슬픔을 드리고 아픔을 안겨 드리는 불효자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예수님 원하시는 생명 살리는 복음 전달자의 사명을 감당함으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들 삶이되어지길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예수님께 눈물을 드리는 성도로 살아가는 날이 많은지요?
아니면 기쁨을 주는 생명 살리는 전도자로 살아가는 날이 많은지요?
각자가 대답할 문제입니다. 이제부터 남은 인생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자로 살아가는 우리들 생활이 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오늘 본문을 통하여 두 가지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둘째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예수님 눈물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죄 때문에 망하는 영혼들을 위하여 우셨습니다. 죄로 강팍한 사람들을 위하여 우셨습니다. 예수님 사랑을 받아 드리지 아니하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 눈물과 죽음으로 구원받고 놀라운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나라가 이 땅위에 임하도록 힘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시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십니다.
마16;24말씀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의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실 때 늘 가슴이 아픈 마음으로 그들을 보았습니다. 때로는 눈물을 머금고 책망하며 말씀을 전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같다고 까지 했습니다.
우리들은 십자가상의 복음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들이 사는 삶이다. 라고 들려주시니 우리들도 주님 가신 길을 갈 수 있는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004005도곡교회 김백수 목사
요11;32~37예수님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