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 나에게 준 선물 허 열 웅 사람은 늘 자기 안에서 외로움이라는 체내 시계가 끊이지 않고 똑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다. 정호승 시인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라고 쓴 시 속에서 외로움이 인간의 원초적 본능임을 표현했다. 헌데 우리 사회는 외로움이나 고독을 인정하지 않고 항상 바쁘고 사교적인 삶을 사는 것을 원하고 있다. 남들에게 외롭게 보이면 자존심 상하는 부끄러운 인생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를 감추기 위해 별 의미도 없이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확대시켜나가고 있다. 심층 깊이에 쌓여있는 고독을 외면한 채 군중 속에 파묻혀 퍼소나(persona)의 얼굴로 실재적 자아와 갈등을 겪으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나도 한때는 고독한 것을 남한테 들키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며 행복하고 분주한 척 살아왔다. 각종 친목모임에 가입하여 사람들을 만나고 술 마시고 떠들다가 밤늦게 귀가 하는 것이 남자의 멋이자 남자다움이라고 생각한 세월이 있었다. 첫 직장을 조용한 군청소재지 부여에서 시작한 나는 직원들의 가족 같은 분위기와 오백년 역사와 문화의 흔적이 강변과 성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아늑함에 빠져 15년이 넘도록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시골에 묻혀있으면 진급도 늦어지고 나 자신도 정체된다는 것을 깨달아 본사 근무를 희망했고 그 꿈이 이루어졌다. 한 울타리 안에 담배제조공장, 기계정비공장, 교육원 등 2천 여 명에 가까운 직원들이 얽기고 설긴 지연, 학연의 경쟁 속에 근무하고 있어 인간관계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인간관계란 내가 남을 위해 시간을 내어주고 어려운 일도 함께해주는 것인데 나는 그저 많은 사람들과 사귀어 웃고 떠들고 술 마시며 함께 보내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의 정체성을 생각하기보다는 함께 어울리는 동질성을 느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각종 동아리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등산, 테니스, 볼링 등 취미가 있는 분야는 물론 내 성격과 잘 맞지 않는 서예, 바둑, 낚시 등에도 참석하여 어울리려고 노력했다. 삶 속에 나는 없었고 친구나 직장 동료들만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시절엔 퇴근 후에 집에 일찍 들어가는 가정적인 사람보다는 밖에서 동료들과 어울려 보내다가 늦게 들어가는 것이 당연시 되던 남자 사회의 풍토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내가 조금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보냈더라면 나를 계발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을 좀 더 많이 읽고 학창시절에 꿈꾸던 작가의 길을 가기 위해 퇴근 후 전공분야 과정에 등록하여 공부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직장 내외의 명성 있는 사람들을 폭 넓게 사귄다는 명목아래 대학원에서 경영자과정과 관리자과정등 만을 수료한 것이 큰 후회로 남는다. 그러다가 40여년에 가까운 직장생활이 끝나고 나서 고독의 의미를 깨닫고 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각 종 모임 참석을 줄이고 열심히 찾아다니던 애경사에도 꼭 참석해야할 곳에만 가고 경조금을 송금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친구들과의 잦은 술좌석도 줄이고 동창회 사무실이나 퇴직사원들이 모이는 장소의 출입을 자제하기 시작했다. 그런 시간에 여행을 떠나고, 고궁과 박물관을 찾고 미술전람회를 관람했다. 스토리가 있는 영화를 관람하고 뮤지컬과 오페라를 감상했다. 친구들과 함께 하기보다는 주로 혼자 행동했다. 나 스스로 선택한 고립의 시간을 그런대로 잘 활용하다보니 겁도 없이 시집 두 권과 수필집 다섯 권을 냈고, 금년 말쯤에는 수필집과 시집을 동시에 출간할 예정으로 열심히 작품을 쓰며 퇴고를 하고 있는 중이다. 고맙고 감사한 것은 예술인복지재단에서 창작지원금의 혜택을 받아 출판에 도움을 받은 것이다. 사실 고독은 개인이 인류역사에 처음 등장 할 때 함께 나타난 현상이다. 근대적 개인의 탄생은 데카르트의 사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를 심리학적으로 번역하면 ‘나는 고독하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실 외로움은 양날의 칼과 같아서 잘 다스리면 사유의 폭과 깊이를 안겨 심오한 경지에 들게 하지만, 회피하려하거나 잘 못 저항하면 타락하거나 우울증에 빠지는 등 인간을 망가지게 만들 수도 있다. 오늘 날 고독한 개인의 구원은 역설적으로 개인 내면에 대한 더 깊은 성찰로 가능하다고 본다. 고독 할수록 더 고독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게 예술적 몰입일 수 있고, 자기 취미에 함몰일 수 있으며, 종교적 깊은 명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의 몰입에 있어서는 함께 어울려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혼자 가는 길이다. 고독의 길이고 기도하는 행위다. 도스토예프스키나 세잔느, 반 고흐는 물론 추사, 정약용, 이중섭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고독 속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고독은 그들의 불행이자 축복이었다. 작가들의 성공은 자유와 고독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센터에서 시 강좌를 하고 있는 L교수는 대부분인 여자 수강생을 향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처절한 고독을 권한다. 부부싸움이 있는 날은 보따리를 싸 친구 집에서 하룻밤도 새워보고, 훌쩍 여행도 떠나보고, 실연도 당해보고, 홀로 끙끙 앓는 시간이 많아야 시가 나온다며 평범하게 밥하고 청소 하고 연속극 보고 수다 떨다보면 언제 시상이 떠오르냐고 힐책을 한다. 이제 나는 고독을 두렵고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기고 있다. 고독을 실존적 숙명으로 수락한지 이미 오래다. 고독이란 단어와 친숙하다보니 세상을, 사물을, 인간을 냉정하게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 투명한 고독이 음악을 들려주고, 추억을 떠오르게 하여 고독이 고독을 위로해 준다. 내가 받아들이는 고독이 수동적이 아니라 자발적인 고독일 때 깊은 영혼의 상처를 스스로 육화할 수 있다고 본다. 가끔 고독은 불편하고 고통스럽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 고통의 선물로 한 편의 시나 수필이 탄생된다면 얼마나 축복인가, 그러기에 김현승 시인은 ‘고독은 신의 영역도. 인간의 영역도 아닌 제3의 영역’이라고 했다.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자기를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인간을 냉정하게 볼 수 있고, 정직하게 미워할 수도 있으며, 진실로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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