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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91) 알 수 없는 이존창
수차례 배교한 이존창, 마지막 선택은 순교였다
- 이존창 루도비코는 조선에 있어서의 복음전파에 가장 많은 활동을 한 인물이었지만 감옥에 잡혀갈 때마다 배교를 맹세해 석방을 거듭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림은 형의 반대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이존창이 가족들을 데리고 한겨울에 고향을 떠나고 있는 장면. 그림=탁희성 화백.
초기 교회사의 특별하고 특이한 존재
이존창의 존재는 초기 교회사에서 특별하고 특이하다. 그는 ‘내포의 사도’로 불리며 충청도 교회를 견인했던 거물이었다. 「송담유록」을 보면, 선대의 신분이 노비였으나 면천되었고, 뛰어난 두뇌로 권철신의 강학에 참여하여 당당히 인정받았다. 1787년 그가 신앙 활동 중에 체포되자 이기양의 아우 이기성이 천안까지 찾아와 감옥에 갇힌 그에게 큰절을 올리고 군수에게 석방을 탄원한 일까지 있었다. 노비 출신임에도 딸을 사대부 명문가의 며느리로 시집 보냈다. 천주교가 신분을 타파했음을 알리는 일종의 상징적 퍼포먼스였다. 이 일은 앞서 여사울 교회를 소개하며 자세하게 얘기했으니, 여기서는 할애한다.
그가 진심과 성심으로 개종시킨 사람은 손꼽을 수 없을 정도다. 이들은 모두 내포 교회의 주축으로 성장하였다. 이존창의 일상은 전교 그 자체였다. 그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사람들의 가슴 속에 뜨거운 믿음이 샘솟았다. 그는 지치지 않은 열정의 소유자였다. 달레가 그를 두고 위대한 재능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별한 재주를 지녔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그는 윤유일과 황심과 김유산을 북경 밀사로 파견하는 데 관여하였고, 신부 영입을 설계하고 주도했다. 천안에서의 군교 노릇은 어찌 보면 신분 세탁과 안전한 활동을 보장받기 위한 설계로 여겨질 정도다. 그는 이 같은 역량과 영향력으로 내포 교회를 조선 교회의 못자리로 만들었다.
그가 최초로 관에 의해 체포된 것이 1787년이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787년 예산 현감 신사원이 천안 군수 조정옥에게 공문을 보내 천주교 문제로 이존창을 체포케 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검거였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교회, 신분의 벽을 허물다」에서 상세하게 살핀 바 있다.
신사원은 1791년 진산 사건 당시에는 진산 군수로 있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부처님 같은 분이란 말을 들었을 만큼 백성을 위하는 어진 성품의 소유자였다. 신사원은 본의 아니게 천주교 문제와 깊게 얽혔다. 진산 사건 당시 평소 성품대로 문제를 온건하게 처리하려 했던 그의 태도가 홍낙안에게 항의 편지를 받게 만들었고, 이후 이 때문에 일이 더 커졌다.
달레는 이렇게 썼다. “이존창 루도비코는 첫 번 박해 때 나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있어서의 복음 전파에 가장 많이 활동한 이들 중 한 사람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오늘 우리 교우들 대부분이 그때 그가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내포와 그 이웃 여러 고을에서는 그에 대한 기억을 우러르고 있다.”
조선 최초의 신부 두 사람이 그의 집안이었으니,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그의 조카딸의 손자요,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그의 조카의 손자였다. 이 밖에도 김광옥, 김성옥, 인언민, 이성례, 홍지영, 원백돌, 양재, 김만득, 한봉이, 이개봉, 황유복, 최관복, 김명복, 유복철, 이취한, 최거두금, 이복돌, 김유산, 유가, 안성교, 최억명, 최필제, 홍필주, 황일광, 최여겸, 김순재, 유순철, 김명주, 김홍철, 김인철, 고윤득 등 수많은 초기 교회 신앙인들과 순교자들이 모두 그를 통해 입교했던 인물들이다.
가장 슬프고 창피스러운 배교
그는 여러 번 잡혀가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때마다 그는 적극적으로 배교를 맹세하고, 개전의 정을 보여 석방되었다. 달레는 그의 이같은 반복된 배교를 ‘내포 천주교 신자들의 가장 슬프고 창피스러운 일’으로 규정했다. 1791년 공주 감영에 체포되어 배교할 당시의 사정은 충청도관찰사 박종악의 수기에 거의 날짜별로 중계방송되고 있다.
1791년 11월 13일의 보고에 이존창을 잡아와 형벌을 가하고 칼을 씌워 옥에 가두었다고 했다. 처음에 버티던 이존창은 11월 20일의 보고에서는 서학을 배척하여 요술이라 하며 바른길로 돌아오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으로 바뀐다. 11월 29일에는 한결 명확한 태도로 배교를 선언했다. “이존창은 날마다 타이르고 부지런히 인도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고 그의 모습을 보니, 얼굴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어 사학을 떠나 정도로 돌아올 것을 전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제 입으로 예수를 배척하고 모욕하며 소라 하고 말이라 하였으니, 그가 진심으로 잘못을 고친 것이 이처럼 분명합니다.”
또 「수기」 1792년 1월 3일자 공문에 이 같은 표현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 학문을 배척하여 극구 모욕하며 자신을 소, 말, 개, 돼지에 비유한 뒤에는 정말로 할 수 없다고 합니다”라 하였다. 이때 이존창은 배교의 진정성을 강조하며 자신이 신앙을 계속 유지할 경우 스스로를 소나 말이라고 하겠다고까지 말했던 것 같다. 정조는 이 말을 듣고 12월 1일에 이존창을 석방하라는 밀지를 내려보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존창은 12월 15일쯤 천안에서 또 체포되었다가 20일 이후에 다시 석방되었다. 이때는 배교의 증거로 사학서를 모두 모아 바치겠노라는 다짐을 함께 냈다. 이때 그를 다시 체포한 것은 충청도 사학 조직이 생각 외로 덩굴이 크게 번져있었기 때문이었다.
12월 20일경 배교를 거듭 맹세하고 재차 석방된 이존창은 신앙을 버리는 대신 고향을 버렸다. 12월 30일 밤 그는 여사울을 떠났다. 새해를 새로운 곳에서 새로 맞이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가 떠날 때 300가구가 넘는 동네 주민들이 일제히 나와 아버지나 형, 친구를 잃는 심정으로 그를 전별하는 광경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에 대한 그곳 주민들의 신뢰가 절대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그 길로 홍산(鴻山)으로 넘어가서 새로운 포교의 거점을 세웠다.
조건부 체포와 군교 노릇
네 해 뒤인 1795년 7월 29일에 정약용이 사학 세력 근절의 밀명을 받고 금정찰방으로 내려왔다. 당시 정약용은 주문모 신부 실포 사건 이후 사학 세력 검거를 통해 비등하던 서학에 대한 자신의 혐의를 벗어야 하는 곤혹스런 처지에 놓여있었다. 검거망이 좁혀오자 이존창은 보령 땅 성거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성거산에 숨어든 이존창을 붙잡은 것은 정약용이었다.
이때의 체포는 사전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797년 2월 23일 「일성록」의 다음 기록 외에도 여러 증거들이 남아 있다. “이존창은 재작년에 금정 찰방(金井察訪)의 염찰(廉察)에 걸려, 충청도관찰사에게 말해 감영의 감옥에 붙잡아 가두었습니다. 그가 바친 공초를 보니, 전날에 뉘우쳐 깨달은 것과 하나하나가 상반되었고, 심지어 다만 빨리 죽기를 원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난날 공초를 바친 것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풀려나 돌아온 뒤에 옛 습관을 고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재작년, 즉 1795년 당시의 금정찰방은 정약용이었고, 이존창이 당시 정약용의 염찰에 걸려서 체포되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하지만 뜻밖에도 1795년 당시 이존창은 배교를 거부한 채 빨리 죽여달라고까지 말했다.
그는 처형을 면하고 공주 감영의 감옥에 갇혀 지냈다. 그러다가 1797년 충청도 일원에 사학 검거 선풍이 불자 그는 다시 문초를 받았고, 이번에도 죽음을 면했다. 그 와중에 1796년과 1797년 황심을 북경 밀사로 보내는 데 관여했고, 1798년과 1799년에도 김유산을 북경으로 보내는 일을 주도했다.
1799년 6월경, 이존창은 도내를 순시 중이던 충청감사 이태영 앞에 다시 공개적으로 배교를 선언했다. 이에 그는 공주 감영에서 천안으로 이송되었고, 이후 그는 1801년 체포 때까지 행수 군관 노릇을 하며 천안 읍내에 머물렀다. 그는 매달 1일과 15일에 보고를 올려야 했고, 특유의 친화력으로 아전의 존경을 받았다. 1801년에 다시 공주로 이송되었고, 이후 서울로 이송되었다가 2월 28일에 공주에서 참수되었다. 처형 당시 42세로, 그는 중병을 앓아 신문이 어려운 상태였다.
그를 통해 서학을 받아들인 황일광이나 박취득 같은 민초들이, 내게는 두 개의 천국이 있고, 인생은 아침 이슬이요, 삶은 나그넷길이며, 죽음이 본향으로 돌아감이라고 하면서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기쁘게 순교의 길에 나섰던 것과 달리, 이존창은 여러 번 습관적으로 배교 행동을 반복했다. 자신을 소나 말에 견주고도, 돌아 나와서는 교회 재건의 선봉에 서곤 했다. 그의 배교가 일신의 안위보다 교회를 수호코자 하는 열망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이승훈의 배교와는 구분해야 할 점이 있긴 하나, 씁쓸함은 남는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이렇게 썼다. “이존창은 충청도에 전교한 죄로 공주에서 참형에 처해졌다. 이 사람은 여전히 배교한 가운데 있었기에, 죽음에 임하여서 어떠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떤 이는 그가 좋게 죽었다고 전하지만 감히 갑작스레 믿지는 못하겠다.” 황사영조차 그의 회두(回頭)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고산을 찾았을 때도, 신부는 이존창에게 “그렇게 많은 죄를 범하고 자격도 없이 성사를 행하고 그대의 배교로 교우들에게 나쁜 본을 보였으니 어떻게 넉넉히 보속을 하겠는가? 순교만이 그대를 용서받게 할 것이오”라고 한 것을 보면, 그의 배교는 당시 교회 내부에 두고두고 많은 논란을 불러왔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죽음 장면 또한 특별히 거룩한 징표는 없었다. 그의 머리는 여섯 번 칼질 끝에야 땅 위로 굴렀다. 희광이가 사형수의 고통을 가중시키려고 고의로 장난친 결과였다. 「추안급국안」에 사형선고문이 실려 있다. “오래 감옥에 갇혀 선처가 불가능한 처지에서도 풀어주었는데 새로워지기를 약속하고도 고쳐먹지 않았다. 만 번 죽여도 아깝지 않다.” 우리는 그의 어느 쪽을 보아야 하는가? 배교의 나약함인가? 배교를 약속해놓고도 끝내 고쳐먹지 않았던 마음인가?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92) 가짜 책 「만천유고」
이승훈이 직접 쓴 글 하나 없는 「만천유고」는 엉터리
- 「만천시고」 중 홍석기의 「만주유집」과 양헌수의 「하거집」에서 베껴온 부분을 표시한 내용. 베껴 쓰는 과정에서 이 한 면에서만 본문에 표시한 것처럼 5자의 오자를 냈다. 옮겨 쓴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만천 이승훈과 「만천유고」
만천(蔓川)은 한국 교회 첫 영세자인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의 호다. 만천은 무악재에서 발원해 독립문과 염초교를 지나 서소문 성지를 거쳐 청파동 남쪽으로 흐르던 샛강의 이름이다. 덩굴풀이 많이 자라 덩굴내로도 불렸다. 이승훈의 집이 만천 인근에 있었으므로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만천유고(蔓川遺稿)」는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소장된 이승훈의 문집이다. 「만천유고」는 1967년 8월 27일 자 「가톨릭시보」 제582호 기사를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이는 김양선 목사가 수집해 숭실대에 기증한 12종의 이른바 초기 천주교회 관련 자료 중 하나였다.
특별히 이 책이 교회사 연구자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만천유고」에 수록된 이벽의 「성교요지」 때문이었다. 이후 「성교요지」를 주제로 수많은 논문이 제출되었고, 이를 주해한 단행본만 해도 여러 종류가 출간되었다. 하지만 윤민구 신부의 본격적인 위작설 제기 이후 「성교요지」는 교계의 뜨거운 감자가 된 지 오래다.
이 논의는 길게 끌고 갈 문제가 아니고, 회피하거나 외면해서 판단을 미룬다고 상황이 바뀔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명백한 팩트에 의한 정리로 소모적 논란의 반복을 차단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대로 방치할 경우, 의혹과 분열이 가중되어 수습하기 힘든 상처만 남게 될 것이다. 사정이 이렇듯 난마와도 같이 얽힌 것은 이해 당사자들의 속사정과 무관치 않다. 무엇보다 당장 진행 중인 이벽과 이승훈의 시성시복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문제여서, 이 시점에서 명확하게 털고 넘어가는 것이 맞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감당 못 할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 글에서는 「만천유고」 중 「만천시고」에 실린 이승훈의 한시 31제 71수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이승훈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부분이기 때문이다. 실제 이승훈의 시는 앞서 살핀 「벽이시」 외에는 달리 알려진 것은 없다. 「만천시고」 속 한시 71수야말로 위작이 아닐 경우 이승훈의 저작으로 확인된 유일한 자료가 되는 셈이다.
「만천유고」는 「만천잡고」, 「만천시고」, 「만천초고」의 3부로 구분된다. 앞쪽 「만천잡고(蔓川雜藁)」에는 「농부사(農夫詞)」,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이 실려 있고, 이를 이어 「십계명가」, 「천주공경가」, 「경세가(警世歌)」 등의 천주 가사 3편을 수록했다. 각각 정약전과 이벽, 이가환이 지은 것으로 나온다. 이어 이벽이 지었다는 문제의 「성교요지」가 실렸다. 여기까지가 「만천잡고」다.
3부 「수의록(隨意錄)」에는 아래에 ‘만천초고(蔓川草藁)’라 적어, 이승훈의 적바림을 모은 것처럼 되어 있다. 각 분야의 최초를 모은 「창시(創始)」와 조선 왕계의 연대를 정리한 「본조년기(本朝年紀)」, 서울에서 북경까지의 노정을 정리한 「자아동지북경정도(自我東至北京程道)」와, 일본까지의 노정을 적은 「일본국정도(日本國程道)」, 오키나와까지의 일정을 쓴 「유리국정도(琉璃國程道)」, 그리고 서울의 성문과 궐내 전각 명칭을 적은 「도성(都城)」, 서울서 각 감영까지의 거리를 쓴 「행로거리정(行路去里程)」, 중국 각성(各省)의 이정을 기록한 「각성부현(各省府縣)」이 있다. 이 내용들은 모두 이 책 저 책에서 참고할만한 사항을 베껴 적은 적바림 모음이다. 이승훈의 글은 한편도 없다.
어이없는 「만천시고」
결국 이승훈의 문집 「만천유고」 중 이승훈이 직접 지은 글은 제2부 「만천시고」 뿐이다. 여기에는 이승훈이 25세 나던 1780년에서 27세 때인 1782년까지 3년간 지은 시를 모았다. 첫 번째 시에 ‘경자춘(庚子春)’의 간지가 보이고, 이후 ‘신축입춘(辛丑立春)’과 ‘임인년(壬寅年)’ 표시가 나와 이승훈이 북경으로 가기 4년 전부터 1년 전 사이에 지은 시를 연대순으로 배열해 놓았다.
막상 작품을 살펴보면, 이 역시 이승훈이 직접 지은 시가 단 한 수도 없다. 25세 때 지은 「선유대(仙遊臺)」 시에서는 서울에서 과거 공부에 한창 열중하고 있던 그가, “세상에서 떠나온 뒤 호연이 여기 와서, 몸과 마음 기르려고 이 누대에 올랐다네”라 하고 있고, 27세에 지었다는 「난화십절(蘭花十絶)」 시는 첫수 첫 구가 “40년 동안이나 집에 심겨 있었지만, 그저 잎만 보았지 꽃은 보지 못했네”로 시작되어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다.
그뿐 아니다. 수록 작품의 절반가량을 다른 사람의 시집에서 절취해왔다. 「등문장대(登文壯臺)」와 「경복궁구호(景福宮口呼)」 2수 등 3수는 홍석기(洪錫箕, 1606~1680)의 「만주유집(晩洲遺集)」에 버젓이 수록된 엄연한 남의 작품이다. 「등문장대」는 특별히 홍석기의 아시작(兒時作)으로 문집에 특기된 것을 이승훈의 27세 작으로 둔갑시켜 놓았다.
중간에 「밤에 이덕조(李德藻)와 함께 달구경을 하다가 당나라 절구시의 운자를 차운하다(夜與李德藻翫月, 次唐絶韻)」 2수가 실려 있다. 이덕조가 누구인가? 바로 이벽(李檗)이다. 이 작품을 한국고전번역원 DB로 검색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신미양요 때 강화도 전투에서 활약했던 양헌수(梁憲洙, 1816~1888) 장군의 「하거집(荷居集)」에 실린 작품이다. 제목 또한 「밤에 취정 이문경 복우와 함께 달구경을 하다가 당나라 절구시의 운자를 차운하다(夜與翠庭李聞慶德福愚藻翫月, 次唐絶韻)」였다. 문경 군수를 지낸 벗 취정(翠庭) 이복우(李福愚, 1811~?)와 달구경하면서 지은 시를 이벽으로 바꿔치기 한 것이다.
양헌수는 이승훈이 세상을 뜬 뒤 15년 후에 태어난 사람이다. 양헌수의 문집 「하거집」은 1888년 그가 사망한 뒤 1893년 이후에 정리된 책이다. 「만천유고」를 조작한 사람이 「하거집」의 시를 훔쳐 왔다면, 이를 엮은 당사자가 20세기의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만천시고」 뒤편에 수록된 「계상독좌(溪上獨坐)」에서부터 마지막 「양협노중(楊峽路中)」까지의 26수 또한 순서까지 그대로 양헌수의 「하거집」에서 통째로 베껴 왔다. 이렇게 「만천시고」에 수록된 71수 중 총 29수의 시가 홍석기와 양헌수 두 사람의 문집에서 베껴낸 것임이 확인되었다.
나머지 시 또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사람의 문집에서 베낀 것이 틀림없다. 앞쪽의 작품 중 「평천십이곡(平川十二曲)」 12수와 「원적산중팔경(元積山中八景)」 시 9수가 있다. 평천은 경기도 용인군 양진면 일원의 지명이고, 원적산은 경기도 이천과 광주 백사면에 위치한 산이다. 이들 작품 모두 이 지역에서 살고 있던 노경에 든 한 사람의 시집에서 베껴낸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 시기 이승훈은 서울을 떠나지 않았고, 과거 시험 준비에 골몰하던 때였으니, 시 속의 정황과 시인의 삶을 연결 지을 고리는 애초에 하나도 없다.
정리하면 이렇다. 「만천유고」 중 유일한 이승훈의 작품이랄 수 있는 「만천시고」 속 71수의 한시는 광주나 용인 근처에 살던 어떤 문인의 시와, 이승훈보다 100년도 훨씬 전에 살다간 홍석기의 시 3수, 그리고 이승훈이 죽고 15년 후에 태어난 양헌수의 시 28수를 짜깁기해서 앞뒤 없이 얽어둔 요령부득의 가짜 시집이다. 게다가 이승훈의 시집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중간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이벽으로 바꿔치기까지 하여, 엮은이의 불순한 의도까지 드러나는 교활한 악마의 편집이다.
무극관인(無極觀人)의 발문
책 끝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극관인이란 사람의 발문이 실려 있다. 그간 관련 연구자들은 입을 모아 이 글을 정약용이 지은 것으로 지목했다. 글의 전문은 이렇다. “평생 감옥에 갇혔다가 죽음을 면하고 세상에 나온 지 30여 성상이 되었다. 강산은 의구하고 푸른 허공과 흰 구름은 그림자가 변하지 않았건만, 선현(先賢)과 지구(知舊)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목석 같은 신세를 붙이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며 엎어져 지내는 중이다. 아! 뜻하지 않게 세상이 바뀌어 만천공의 행적과 여문(儷文)이 적지 않았지만, 불행히도 불에 타 없어져서 원고 하나도 볼 수가 없었더니, 천만 뜻밖에도 시고와 잡록과 조각 글이 남아 있었으므로 못 쓰는 글씨로 베껴 적고 「만천유고」라 하였다. 봄바람에 언 땅이 녹고 고목이 봄을 만나 새잎이 소생한 격이니, 이 또한 상주(上主)의 광대무변한 섭리일 것이다. 우주의 진리는 이와 같아서 태극이면서 무극이니, 깨어 깨달은 자는 주님의 뜻을 접할지어다. 무극관인.”이 글을 정말로 정약용이 썼다면 그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양헌수 장군의 시를, 그의 문집이 정리되기 70년 전에 정약용이 미리 보고 이승훈의 시로 알아 편집한 뒤 이 글을 썼다는 뜻이니 애초에 따지고 말고 할 가치도 없다. 다산은 ‘평생’ 감옥에 갇힌 일이 없었고, 설령 귀양지에 있었던 기간을 감옥이라 표현했다 하더라도, 해배된 뒤 18년 뒤에 세상을 떴으니 세상에 나온 지 30여 성상이란 말은 가당치 않다. 무엇보다 한문 문장의 수준이 명백하게 20세기 이후 사람이 한글 문장을 한문으로 얼기설기 옮겨놓은 실로 형편없는 하수(下手)의 조악한 수준이다. 도처에 비문(非文)에다 어거지로 얽은 글이어서, 앞선 연구자들이 이를 다산의 글로 본 것은 실로 아연할 노릇이다.
정리한다. 필사본 「만천시고」에는 이승훈의 시가 한 편도 없다. 「만천유고」 전체로도 그렇다. 「만천유고」는 남의 글을 거칠게 모아 불순한 의도를 지니고 짜깁기한 가짜 책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처럼 보이게 하려고 작품 속 이름을 바꿔치기하거나, 괴상한 발문을 끼워 넣는 성의를 보인 것을 그나마 가상타 해야 할 일일까? 이제 와 볼 때 이런 수준의 조악한 책자를 두고 초기의 교회사 연구자들이 열광하여 환호한 것은 무엇보다 이승훈과 이벽을 위해 민망하고 아쉬운 노릇이었다. 모든 사실이 명백히 밝혀진 지금까지도 논란이 마무리되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딱하고 낯이 붉어지는 일이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93) 「성교요지」와 「상자쌍천(常字雙千)」
“마틴 목사의 책 베낀 「성교요지」는 이벽의 저작일 수 없다”
- 윌리엄 마틴 목사의 「상자쌍천」 원본의 원문과 영문 번역 부분, 그리고 베드로의 둘째 서간을 ‘피득 후서’로 표기한 부분과 숭실대본 「성교요지」의 같은 대목을 비교하였다. 「상자쌍천」은 한자 습득을 위한 교재여서 매 낱글자에 대한 분석과 발음이 적혀있다.
서양 명사 및 인물 지명 표기에서 잡힌 발목
「성교요지(聖敎要旨)」는 이벽(李檗, 1754~ 1785)의 저술로 알려져 왔다. 초기 교회사의 어떤 기록에도 없던 이 책은 1967년 김양선 목사가 공개한 「만천유고」 속에 섞인 필사본으로 처음 알려졌다. 이벽이 세상을 뜬 지 무려 182년 뒤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앞서 본대로 「성교요지」가 수록된 「만천유고」는 이 책 저 책을 베껴 짜깁기한 조잡한 서적이었다. 다만 「성교요지」마저 가짜라고 단정할 근거가 명확지 않았다. 내용 또한 4언체의 한시 형식이어서 수준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윤민구 신부는 「성교요지」 속의 성경 용어나 인물 및 지명 표기가 거의 예외 없이 개신교 성경의 표기법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점에 의심을 품어,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 연구」(국학자료원, 2014)에서 「성교요지」가 개신교 쪽에서 지은 책이 분명하여 이벽의 저술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는 「성교요지」를 천주교 주요 문헌으로 믿어온 측의 큰 반발을 불러, 명백하고 타당한 논의였음에도 이후 끝없는 비방과 음해에 시달려야 했다.
예를 들어 「성교요지」 제4장의 주석 중에 “위 단락은 아래의 글을 총괄하는 이 장의 강령이다. 피득(彼得) 후서(後書)에 나온다.(右節總冒下文, 此章之綱領也. 見彼得後書)”라 한 대목이 있다. 여기 나오는 피득 후서는 신약성경 중 베드로의 둘째 서간을 가리킨다. 천주교에서는 베드로를 백다록(伯多祿)으로 적지, 피득이라고는 표기하지 않는다. 피득은 베드로를 영어식으로 ‘피터’라 읽을 때 적을 수 있는 표기다.
실제로 오늘날 중국에서 통용되는 성경에서 베드로의 첫째, 둘째 서간은 가톨릭 성경에서 지금도 ‘백다록 전후서’로 되어 있고, 개신교 성경에는 여전히 ‘피득(彼得) 전후서’로 나온다. 이것은 바오로를 ‘폴’이라 하고, 안드레아를 ‘앤드류’, 마태오를 ‘매튜’로 읽는 차이가 중국어 표기에 반영되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성경 편명으로 영어식 표기를 딴 ‘피득 후서’로 적는 것은 천주교에서는 결코 쓸 수 없는 표기다. 더구나 제대로 된 번역 성경을 본 적도 없는 이벽이었다면 말할 것도 없다.
윌리엄 마틴 목사의 「상자쌍천」과 「성교요지」
정작 「성교요지」가 이벽의 저작이 아니라는 결정적 한 방은 개신교 쪽에서 터져 나왔다. 2019년 5월, 김현우, 김석주 두 사람이 공동으로 발표한 「소위 이벽의 「성교요지」로 잘못 알려진 W.A.P. Martin(丁良)의 「The Analytical Reader(認字新法 常字雙千)」에 대한 연구 서설」이란 논문이 그것이다.
두 사람은 이 글에서 「성교요지」가 미국 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마틴(William A. P. Martin, 1827∼1916) 목사가 1863년 중국 선교사들에게 효율적 한자 교육을 위한 교재로 개발하여 간행한 「인자신법(認字新法) 상자쌍천(常字雙千)」이란 책을 주석까지 통째로 그대로 베낀 것임을 처음으로 밝혔다. 책 제목은, 상용한자 2천 자를 가지고 쓴 한자를 인식하는 새로운 방법이라는 뜻이다.
마틴 목사는 1854년, 개신교 선교사의 저작 중 가장 많은 독자와 만났던 「천도소원(天道溯源)」을 저술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이후 1862년 상하이에서 선교사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중국어 교육에 관심을 가져, 1863년에 이 책을 출간했다. 그는 중국어 단어의 사용 빈도를 꼼꼼히 계산해서 뽑은 윌리엄 갬블의 6000자의 상용한자 중에서 특별히 사용 빈도가 더 높은 2,016자를 뽑아, 4언체의 천자문 양식을 빌어 한 글자도 중복하지 않고 운자로 배열한 2천자문을 최종 완성했다. 당시 그는 남경의 학사(學士) 하사맹(何師孟)이란 중국인을 고용해 그의 도움을 받아 본문을 완성했다.(이에 관한 논의는 계명대 황재범 교수가 쓴 ‘「성교요지」의 원본 마틴 선교사의 「쌍천자문」 연구’(「신학사상」 190집(2020 가을)에 자세하다.)
본문은 4언체 한시가 소제목 아래 단락별로 나오고, 옆면에 영문 대역(對譯)을 실었다. 그런데 2천 자를 단 한 번의 중복을 허용하지 않은 채 엮다 보니, 구문이 비틀리고 억지로 채워 넣은 글자가 적지 않다. 중간중간 주석을 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오독과 무지
「성교요지」는 「만천유고」 본과 「당시초선」이란 표제로 된 책자에 필사된 「당시초선」본, 이와 별도로 한글본 「성교요지」 세 가지가 전한다. 모두 숭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하성래와 김동원의 번역은 마틴 목사의 영어 번역을 못 본 채 한문본만 보고 번역한 결과 숱한 오역이 발생하였다.
지면 관계상, 한두 가지 예만 들어본다. 제3장 「강구(降救)」 중에 “냉가성읍(冷迦城邑), 파미도로(巴米道路). 유태국야(猶太國也), 서내산호(西乃山乎)”의 대목이 있다. 한글본은 이 대목을 “냉가국 셩읍과 파미로 가는 길이 이르면 유태국이라 하나니, 셔내산이라 이르나니”로 풀었고, 하성래는 “냉가성읍과 파미 도로와 유태국과 시내산에서”로, 또 김동원은 “예루살렘 성읍에서, 파미도로 거쳐 가니, 온 유대를 다니시며, 시나이산 이르렀네”로 옮겼다. 영어 번역은 “Jerusalem and Capernaum, a city and town, To Babylon and Media were ways and roads, Judea was a kingdom, Sinai a mountain”이다.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다. “도시인 예루살렘과 시골 카파르나움엔, 바빌론과 메디아로 가는 길과 도로 있었네. 유다는 왕국이었고, 시나이는 산이었지.” 결국 원문의 ‘냉(冷)’은 예루살렘, ‘가(迦)’는 카파르나움을 가리키고, ‘파(巴)’는 바빌론(Babylon)을, ‘미(米)’는 메디아(Media: 옛 성서에서는 메대)를 나타내는 약호였다. 유태(猶太)는 유다 지방을 가리키는 개신교의 표기이고, 천주교 문헌과 안정복의 「천학문답」에는 여덕아(如德亞)로 나온다. 시나이 산은 시내(西乃)로 적었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냉가와 파미가 각각 고대 도시 지명을 한 글자만 따서 축약한 것인 줄을 미처 알지 못했다.
또 제10장 「시훈(施訓)」 조의 “학별파지(學別派支) 애전허치(埃田許置)”의 ‘애전(埃田)’은 번역본들이 풀이한 속세나 세상의 뜻이 아니라, 에덴의 음차이다. 「성경직해」에서는 에덴을 그냥 낙원으로 옮겼다. 고유 명사나 특수 용어를 일반적 사전 의미로 풀이한 데서 발생한 오역이다. 이밖에 세부적으로 원서의 영어 번역문과 대비해 보면, 현재 통용 번역에는 맥락을 놓친 오역이 상당히 많다.
표기법만 두고 볼 때, 예루살렘을 야로살냉(耶路撒冷), 카파르나움을 가백농(迦百農), 바빌론은 파비륜(巴比倫), 메대는 미태(米太), 유대를 유태(猶太), 시내를 서내(西乃), 에덴을 애전(埃田), 아벨을 아백(亞伯)이라고 동시에 표기한 것은 1854년에 중국에서 간행된 개신교의 이른바 위판역본(委辦譯本) 성경이 유일하다. 1635년에 알레니(艾儒略)가 펴낸 「천주강생언행기략(天主降生言行紀略)」이 예루살렘을 협로살릉(協露撒)으로, 카파르나움을 갈발옹(葛發翁)으로 적고 있는 것과 다르다. 이벽이 예루살렘과 카파르나움의 약호를 썼다면 ‘냉가(冷迦)’가 아닌 ‘릉갈(葛)’이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위판역본 성경은 그리스도교의 포교 활동이 공식 허용되기에 앞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성경번역위원회를 조직해 집체 작업으로 함께 번역한 것이다. 이후 개신교의 성경 속 명사 표기는 이 책의 표기로 통일되었다. 1863년에 「상자쌍천」을 펴낸 윌리엄 마틴 목사가 이 성경의 명사 표기를 따른 것은 당연하다. 「성교요지」 속 모든 고유명사 표기는 전적으로 1854년 위판역본, 즉 개신교 성경번역위원회가 마련한 번역본과 일치한다. 그러니 전체 성경, 특히 구약 성경의 온전한 번역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점에 살았던 이벽이, 그가 사망한 지 78년 뒤에 간행된 위판역본 성경의 표기체계를 그대로 받아 모든 명사 표기를 여기에 일치시킨다는 것은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론은 이렇다. 「만천유고」에 수록된 「성교요지」는 절대로 이벽의 저작일 수 없다. 사실 이 점은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이 모두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시성시복 자료집에서조차 「성교요지」 관련 사실을 뺀 것이 그 분명한 증거다. 이 책은 1863년 윌리엄 마틴 목사가 쓴 「인자신법 상자쌍천」을 베낀 것에 불과하다. 황재범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그마저도 1863년 초판본이 아닌 1897년 재판본을 베꼈다. 나란히 실린 「만천시고」가 1893년에 나온 양헌수의 「하거집」의 시 23수를 베낀 것으로 보아, 이 책 전체는 20세기 이후에 누군가가 불순한 의도로 베껴 쓴 것이 명백하고 확실하다.
이렇게 「성교요지」가 마틴 목사의 책으로 밝혀지자 최근 일각에서 다시 해괴한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다. 「당시초선」 본 「성교요지」에 손을 다쳐 왼손으로 이 글을 필사했다고 적혀 있는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중국 강남에 들어갈 때 이벽의 책을 베껴 가져갔고, 이것이 유통되다 마틴 목사에게 채집되어 「상자쌍천」이 되었다는 희한하고 놀라운 논리다. 기존의 잘못을 더 큰 거짓으로 덮으려는 궁여지책에서 나온 논리요 행동이다. 모르고 한 잘못은 인정하면 그뿐인데, 가짜 책 「성교요지」를 지키겠다고 진짜 저자인 윌리암 마틴 목사까지 도둑으로 내몰려 한다. 언어도단이다. 이는 천주교계를 위해서도 이벽을 위해서도 결코 득 될 일이 아니다.
「성교요지」는 이벽의 저술이 아니다. 차고 넘치는 증거를 외면하고, 독선의 외고집을 부리는 것은 한국 천주교회사의 정상적 흐름을 저해하는 최악의 선택이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이벽의 위상은 가짜 책 「성교요지」가 아니래도 우뚝하다. 이 책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이 재연되는 것을 교회가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최근 교구의 인준을 받아 간행된 김동원 신부의 「한국의 천학과 영성」이란 책자에서 「성교요지」가 변함없이 한국 천학 영성 자료의 첫머리에 놓인 것을 보고 나는 실로 경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