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순덕론
- 양자역학의 파동성, 중층구조의 예술성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열며
문학은 실제로 일어났을 수 있는,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를 쓴다. 그것은 추측이나 상상, 아니면 사건의 자초지종을 보고 당연히 이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추리와 당위성에 의거한 개연성과 핍진성을 갖는 서술을 말한다. 문체상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그럴듯하게, 실감나게 이야기하는 것이 문학이다. 따라서 문학은 역사보다 훨씬 진지하며 철학적인 진리성에 가까운 것을 추구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최순덕 수필의 가치성이란, 수필에 예술성을 주기 위해 중층구조를 활용한다는 점이다. 물론 순리적 운명관에서 나오는 이야기의 감동성도 최순덕 수필의 가치를 드높이는 인자다. 그것은 작가의 내심에 투영된 감정이나 정서가 세련되게 문학적 장치에 의해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문학으로서 수필이다. 문학이 보다 깊은 철학일 때 우리는 세계인과 만난다. 예술수필의 진수를 보여주는 최순덕의 수필에서 세련된 문학성의 향기가 세포 속으로 스며들어 오는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뉴턴 역학에 기초한 고전 물리학이 양자 물리학의 새로운 영역에 자리를 내준 양자혁명 동안 발생한 패러다임 전환을 ‘사실을 사실대로’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전통수필’에서 수필은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낭한다’는 본격수필로의 전환해서, 모든 물질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의 성질을 지닌다는 영자역학의 원리를 최순덕 수필 분석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이 전환은 오랜 결정론적 세계관에 도전하고 파동 입자 이중성, 불확실성 및 양자 중첩과 같은 개념을 양자역학이 도입했다. 닐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 여섯 가지, 양자도약, 양자얽힘, 양자중첩, 관찰자 효과, 불확정성 원리, 상보성 원리 등 양자 혁명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놀라운 과학적 발전과 기술 혁신의 발판을 마련했다. 본격수필이론도 양자역학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교술이라는 전통수필 이론에 도전하고, 기존 수필에 대한 개념에서 전환하여 수필적 허구와 중층구조와 존재론적 의미화라는 새로운 이론으로 현대수필의 옷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최순덕 수필집을 읽고 나면, 필마의 기운이 주는 뿌듯한 감동을 경험할 수 있다. 주제의식을 제재와 연결시켜내는 상관화 작업이 수필을 문예화하는 데 중요한데, 지금까지 최순덕은 이런 일을 잘 해내고 있다. 그녀의 인지시스템으로 들어온 제 물상은 의미화 작업을 거쳐 옹골찬 미학으로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내온 사십여 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중층구조미학의 토대 위에서 빛나는 수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순덕의 눈은 확실히 남다르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보아야 할 것을 찾아 조리개를 맞추는 데 남다른 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믿음직한 글쓰기를 수필의 문학성을 바로 세우려는 작업의 하나로 볼 때, 최순덕 수필집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II. 펼치며
인간이란 원래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 시대적 상황에 대해 일체 무관심하거나 초연한 상태로 살아가기가 어려운 존재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 그 자체가 역사적 시대적 상황의 한 부분이며, 그것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역사적 시대적 상황의 영향을 받으며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곧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항 속에 들어와 있는 물이 역사적 시대적 상황이라면 그 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와도 같은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최순덕의 수필은 바로 인간의 존재 조건, 실존을 겨냥하고 있다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최순덕은 2017년도 수필 부문 한국해양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작가다. 무엇보다도 수필의 문학적 성취는 문학적으로 가치 있는 재료를 선택하는 데서 좌우된다. 이런 차원에서 작가가 선택한 한 권 분량의 수필들은 모두 독자로 하여금 세상과 소통하는 존재방식에 대해 되짚어보게 하는 호소력이 짙은 작품이다. 작가의 시선은 이름도 빛도 없이 따스한 온기를 향기처럼 퍼뜨려 세상을 꽃피우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어, 더욱 이 수필의 가치를 드높이게 한다.
칸트에 의하면 예술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논의 또는 평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의 미학적 또는 심미적 취향은 극과 극의 중간쯤에 존재하는 것으로써, 제시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함에 있어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어떤 공통된 그리고 정당한 기준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가정 위에 성립한다. 이와 같은 가정 위에서 최순덕 수필의 즐거운 가치평가는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순명의식과 솔직함, 작품에 어떻게든 문학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문학정신에서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최순덕이 추구하는 가치는 매사에 최선을 다하자는 성실성이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이에 포커스를 맞추면 대충 최순덕의 세계관과 일상 철학을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이 해설을 통해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힘으로 최순덕 수필의 가치와 마주했으면 한다. 작품 속 화자나 주인공이 나에게 건네는 이야기에 솔직하게 귀 기울여 보기바란다. 한 편의 수필을 읽는 일은 작가의 수필적 서사를 거쳐 결국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여행이다. 수필이라는 기차를 타고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다 보면,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내가 사는 세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수필집이 멋진 기차여행을 선사하는 소중한 차표가 여러분을 양자의 세계로 안내햐 줄 것이다.
양자역학 이론에 따르면 물질은 작아지면 질수록 파동의 성질을 띤다. 공기 중의 산소 분자까지는 입자로 보면 되고, 산소 분자보다 더 작아지면 파동 성질이 더 강해진다. 원자 주변의 전자들은 파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전자 입자설을 깬 드 브로이는 모든 물질은 파동성을 지닌다는 연구로 노벨상을 받는다. 두 개의 슬릿에 전자를 쏘니 파동의 성질이 나타나는 입자간섭실험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아인슈타인도 양자역학을 인정하게 된다. 이를 수필시학에 적용하면, 일반화된 이야기나 소재들을 더 작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하나의 제재로 좁혀나가야 된다. 일반화하지 않고 특수화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결국 수필에 파동성을 주려면 작가는 마지막에 원소와 같은 제재소로 지배적 정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필의 파동성은 전이, 치환, 변용의 미학으로 빛나는 시적 언술의 양상에서 도출되는 성질이다. ‘이것’을 ‘저것’으로에서 ‘저것’에 해당하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에서 ‘보조관념’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감정’보다 ‘미적 정서’요, ‘이야기’보다 ‘플롯’에 해당하는 화자의 ‘전략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가. 파동으로 가는 양자 열차- 원자처럼
양자역학이 문학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지 그리고 양자의 이중성이 수필시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와 불확정성 원리는 원자 주변을 도는 전자의 파동성에서 온 것이다. 미시세계에서 원자는 파동처럼 행동하는데, 고전물리학의 법칙으로는 위치나 속도를 알면 운동량을 알 수가 있는데, 양자역학에서는 물질이 파동이 되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위치나 속도를 파악할 수가 없다. 산소도 알갱이로 돌아다니지만, 절대온도보다 더 세게 온도를 낮추면 운동이 느려지며 파장이 크지면서 파동의 성질을 나타낸다. 파동은 두 개의 상태로 존재하다가 측정하면 한 군데만 나타난다. 수필시학에 견주면, 이야기가 이중으로 나타나도 주제는 하나로 집약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미시세계의 원자 주위를 도는 전자가 하나로 나타나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서 주제가 하나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양자 영역의 비밀을 밝히고 이 매혹적인 과학 분야의 경이로움을 본격수필의 영역으로 치환해 최순덕 수필의 창작원리를 이해하는 이 여정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최순덕의 수필은 이러한 바슐라르의 이론처럼 상상력과 미의식의 관계를 통해 구축되고 있어 우리는 체험이 문학적으로 어떻게 변용되는지 그 과정을 행복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수필집을 통해 한 작가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과 더불어 참된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승화시켜내는 지혜를 함께 읽어나갈 수 있다. 특별한 체험이 특별한 언어로 형상화된 문학도 필요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을 통하여 오늘을 소중히 아낄 줄 알고, 그 어제를 부끄럼 없이 애기 나눌 수 있는 인간의 인정이 넘치는 사랑의 문학도 필요하다. 한국문학의 전통 속에서 인연은 흔히 삶 속에 운명을 끌어들이는 힘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대체로 운명이란 선험적으로 주어지고, 그 힘에 의해 생의 인연이 이끌린다는 믿음을 갖고 산다. 하지만 최순덕은 운명의 힘에 의해 인연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삶의 지혜를 발휘하여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 본다. 최순덕은 이런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작가다. 그녀의 수필적 테마의 한 축은 자신의 경험이 소비의 역사가 아니라 극복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
고통의 터널을 잘 통과해 온 나의 오십 세에게 칭찬해 주고 싶다. 육체의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한꺼번에 겪으며 짐승 같은 울음을 토했던 남편에게도 잘 참고 잘 이겨내 줘 고맙다고 토닥토닥 등 두드려준다. 미리 대처하지 못했던 건강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보여줬으니 자식들에게도 헛된 시간은 아닐 터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똘똘 뭉치는 가족의 힘도 간과할 수 없는 보배가 아니겠는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인간들의 군상도 속속들이 알게 되었으니 비싼 비용 치르며 인생 공부를 야무지게 한 셈이다. 한순간 꿈을 망각한 체 남편만 믿고 무턱대고 교단을 떠나와 대책 없이 놀다가 혼쭐이 났던 나의 오십 세, 철없는 세월을 살아내느라 정말 수고했어.
- <수고했어. 나의 오십세> 중에서
백세 인생에 비춰보면 오십 세는 인생의 변곡점이다. 이 지점에서 그녀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경험을 한다. 남편의 발병과 그로 인한 사업의 중단이 몰고 온 믿었던 선배의 배신 등 그 러나 작가는 사랑의 힘으로 어려움을 잘 극복해낸다. 부부의 연으로 이어진 인연 속 그 절절한 사연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최순덕 수필은 주로 인간을 둘러싼 끈끈한 삶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형상화시키는 것을 특색으로 한다. 인연을 축으로 하는 최순덕 수필의 한 특성은 <수고했어. 나의 우십 세>라는 수필에서, 그녀는 삶의 영역에서 갖는 사랑과 행복, 만남과 극복의 역사를 ‘수고했다’는 말로 위로하고자 한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극복의 역사를 역설적으로 말하는 전략은 성공적이다. ‘경험’을 ‘보배’로 전이시켜 언어를 순질이화하는 능력도 돋보이는 점이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주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남편이 암을 극복한 대 따른 보이지 않는 돌봄의 사랑을 ‘수고’이라는 어휘를 끌어와 간접화한 것이다. 남편은 힘들다는 항암을 잘 이겨낸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 ‘육체의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한꺼번에 겪으며 짐승 같은 울음을 토했던 남편에게도 잘 참고 잘 이겨내 줘 고맙다고 토닥토닥 등 두드려준다’라고 보이지 않게 도와준 남편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다. 작가는 살아가면서 있었던 남편의 발병과 그로 인한 고뇌의 단면을 ‘수고했어’ 한 마디에 담아 빛나는 사랑의 가치로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비싼 비용의 인생공부를 ‘보배’로 여기고 오히려 감사로 연결하는 통 큰 오십 세 여인의 인생 극복기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래시장이다. 대형 수퍼마켓이 근처에 생기기 전에는 그 세력이 대단했었다. 끊어질 듯 겨우 맥을 이어가는 전통시장이지만 동래시장은 그래도 현대화로 탈바꿈하여 살아남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감자수제비로 배를 채우고 동래시장을 훑어서 장도 본다. 그곳에 가면 ‘우리 며느리요’ 하며 일일이 소개해 주던 시어머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들린다. 제사 때면 필수적으로 거치는 생선 가게며 해산물 가게, 고깃집, 과일가게, 야채 가게, 전거리 가게, 잡화상까지 모르는 집이 없었다. 어머니에게서 딸이나 며느리에게로 세대교체의 물결이 조용히 흐르는데 아직도 어머님을 기억하는 가게가 있어 반갑기 그지없다.
- <수제비 한 그릇의 행복> 중에서
이 수필은 앞에서 소개한 수필과 마찬가지로 인연을 다루는 글인데, 이번에는 시어머니와의 인연을 시장보기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교직에 있으면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며 삶의 보람을 찾아가는 작가의 가슴에 살아생전 같이 시장 보러 가면 ‘우리 며느리요’하며 시장 사람들에게 일일이 며느리를 소개시켜주던 시어머니를 떠올리는 작가는 세대교체 속에서도 시어머니를 기억하는 가게가 있음에 반가워하는 모습에서 삶의 희열을 느낀다. 삶이 힘들 때면 시장통으로 달려가라는 말이 있다. 위기 극복을 향한 날갯짓을 시도한 것이 바로 장보기다.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주어진 운명에 굴복하고 나자빠지는 것이 아니라 극복의 서사를 통해 어려움을 통해서 헤어 나오려는 몸짓이다. 이겨내라는 ‘도전’에 따르는 것도 삶에 대한 순리다. 그녀가 이 수필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도전’요, ‘의지’다. 산다는 것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려는 원심력과 그것과 대치되는 구심력의 절묘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근저에는 스스로 낮추고 한없이 겸허해진 자아가 자리 잡게 된다. 그 겸허한 모습은 자신의 모습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진수이며 오늘의 작가를 있게 한 것이다. 이 수필 <수제비 한 그릇의 행복>은 무한한 원심적 탄력 속에서 가까이 존재하는 일상의 그작은 것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애정이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삶의 영역이며 우리의 지친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이 수필을 읽고 나면, 거친 열정의 파도를 넘어 우리의 영혼이 가장 낮은 자제로 임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수제비 한 그릇’과 같은 생활과 가까운 작은 일상 속 소품이라는 걸 알게 된다고 하겠다.
악을 바락바락 쓰며 울어대는 매미처럼 맹렬하게 일급 정교사가 되어 과연 훌륭한 교사가 되었던가. 정해진 코스대로 따라가는 거부할 수 없는 젊은 날의 한여름이었을 뿐이다. 여름의 태양을 흡수하여 튼실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으며 대를 잇는 초목처럼 뜨거웠던 한여름의 강습으로 나는 얼마나 알찬 열매를 맺었을까. 강습이 아무리 힘들었어도 그해 여름 한 번이라도 친정어머니를 뵈었더라면 이렇게 허무하지는 않으련만. 자지러질 듯 울어대던 매미처럼 애타게 자식의 손길을 기다렸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결국에는 중도에서 포기하고 홀연히 떠나온 교단이 아닌가. 어머니도 떠나보내고 헛발질만 한 꼴이다. .
- <매미의 울음소리> 중에서
인용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매미의 울음소리>에는 방학 중 1금정교사 취득을 위한 연수를 받느라고 잠시 시간을 내어 친정어머니를 뵙지 못한 회한이 새겨지는 후회의 자리에서, 유한한 삶 자체에 대한 고민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생활 속의 깨달음을 진리로 연결하는 그녀의 여유에 찬 삶이 주는 감동은 안식의 문학이라는 수필 고유의 특성을 전해준다. 지혜의 보고서라 할 만한 이 수필은 여기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생활수필을 한 단계 업그래이드시키고 있다.‘어머니도 떠나보내고 헛발질만 한 꼴이다. 매미가 벗어 던진 허물보다 못한 껍데기뿐인 딸이었다.’는 문장은 형상적 체험을 통해서 주제의식을 의미화하는 진술로서 비유의의 손맛을 느끼게 해서 문학 언어가 주는 미적 감동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통한 성찰의 가치를 전달해주기도 한다. ‘했어야 할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여유의 중요성을 관념적인 언어로 설명하지 않고 ‘매미가 벗어 던진 허물보다 못한 껍데기뿐인 딸이었다’라는 구체적 진술로 제시함으로써 수필언어가 도달해야 할 원형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독자와의 공감대 확보를 위해 작가는 결말부 의미화에 앞서 반드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런 설득적 논리는 공감과 감동을 위한 필수적 장치로서 기능한다고 하겠다.
나는 빨간 색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색과 나에게서 느껴지는 색감은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좋아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냐만 스스로 분석해보면 내 성격 탓이기도 하다. 나의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더욱더 분명하고 강렬한 색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밖으로 표출하지 못한 열정이 쌓여 핏빛 빨간색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겉과 속이 다른 내숭쟁이라 할지 모를 일이다.
남미의 페루에서 잉카인들이 자연에 얻어내는 천연의 색깔에 감탄했다. 민속 마을 친체로를 방문했었다. 두 볼이 발갛게 물든 전형적인 잉카의 후손인 아가씨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천연 염색 시범을 보여주었다. 기후적으로 사방 천지에 선인장이 풍성하고 큰 고목처럼 자란다. 그 선인장에서 기생하는 작은 벌레를 손바닥에 뭉개니 너무나 고운 붉은 색이 터져 나온다. 너무 신기하여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인공적으로 절대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찐한 붉은색을 바탕으로 섞는 물질에 따라 여러 가지 색이 손바닥 위에서 펼쳐졌다. 비트색보다 찐한 붉은 색이 강렬하게 시신경을 타고 뇌리에 박힌다.
- <나의 색깔> 중에서
수필을 읽는 여러 매력 중에서도 가장 큰 매력은 작가의 내면 풍경을 읽어내는 데서 나온다. ‘나의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더욱더 분명하고 강렬한 색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밖으로 표출하지 못한 열정이 쌓여 핏빛 빨간색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겉과 속이 다른 내숭쟁이라 할지 모를 일이다.’라는 작가의 진술은 솔직함의 보고다. 따라서 작가의 수필 쓰기는 생활 속에서의 모순된 삶의 방식에 대한 자기비판적 고백인 동시에 자기 한계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인 것은 이런 고백이 모두 치유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자신의 결점을 가감없이 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닌 데도 작가는 자신의 약점을 송두리째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 성품이다. 이 수필의 쾌미는 자신의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붉은 색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내적으로는 열정이 풍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과정을 문학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데서 느낄 수 있다. 예술의 가장 본질적 조건이 상상의 문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인지한 작가는 상상력에 의한 수필의 예술성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 수필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겉과 속이 다른 내숭쟁이라 할지 모를 일이다.’라는 진술은 잘 다듬어지지 않은 자신의 성정인 원관념을 ‘내숭쟁이’라 할지 모를 일이다는 말로 치환시킨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한다는 본격수필의 시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술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에 의한 유추와 상상의 기법을 극대화해 나가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발레리는 문학 속에서 사상이란 과일 속에 묻혀 있는 영양소와 같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엘리어트는 문학은 사상을 장미꽃 향기와 같이 감각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문학의 내용에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시도할지라도 그것이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사상의 정서화’, ‘이념의 감각화’, ‘내용의 형상화’가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사상 감정의 정서화는, 신선한 상징들이 신선한 미적 감각을 우려내어 감동을 전해준다고 하겠다. 물론 상상도 관념연상을 일으키지만 진폭이 다양하고 깊기 때문에 작가로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나의 색깔>은 위에서 말한 사상의 정서화나 이념의 감각화, 내용의 형상화가 아주 잘 된 작품이다. ‘붉은 색’과 ‘내숭쟁이’와 연결시켜 자신의 성향과 성격의 단점을 가장 강렬한 색깔로 치환한 변용의 기술이 이 수필의 문학적 성취를 크게 고조시켰다고 하겠다. 위의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최순덕 수필은 충분히 본격수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고백과 성찰의 보고- 그림자의 인격화
프로이트는 예술은 내적 불만의 승화라 하였다. 예술의 성격을 이처럼 적확하게 드러내는 말이 또 있을까싶다. 앤서니 엘리엇은 오늘의 자아가 형성되기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표현하는 글이 수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아의 형성 과정이 개개인마다 다르니 글도 사람에 따라서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또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자기규정을 하여야 한다고 했다. 최순덕 수필의 또 다른 한 축에는 성찰의 보고라 할 만큼 그림자의 인격화가 잘 드러난 자아실현의 과정이 펼쳐져 있다. 수필 <찬란한 추위>는 엘리엇이 말하는 자아이론의 핵심이 실린 작품이다. 성찰하는 과정은 삶의 궤적에 관하여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정보를 주시하고 되돌아보는 과정이다. 수필쓰기에는 자아 성찰이라는 과정이 들어간다. 수필의 개념에는 내면의 고백 못지않게 자아성찰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수필을 통하여 고백하는 동시에 자기 성찰을 하므로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 수필이다.
‘어린 시절 혹독한 추위가 나를 더 단단하게 키웠는지도 모른다.’는 고백에서 만들어지는 성찰과 자아발견의 세계는 수필의 고유한 예술적 기법이 된다. 왜냐하면 소설의 허구성이나 시의 압축적 언어와 달리 이것은 상상 아닌 실제적 사실의 세계를 전제로 하고 그 내면에서 또 하나의 상상의 세계를 상징적 연상으로 병행시켜 나가는 형태이며, 이는 오직 수필만이 가능한 특수한 상상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예술성은 물론 다양한 복합적인 조건에 의해서 형성되어야 한다. 수필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효율적으로 예술성을 나타내는 표현기법은 ‘겨울의 기억 속에 내 유년의 찬란한 추위가 빚은 눈물이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는 결말부 담론층의 주제의식이 의미화되고 있는 부분이다. 이런 함축에 의한 유추현상으로 만들어지는 상상력의 기법이은 최순덕 수필의 우월성을 확보해 나가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혹독한 추위가 나를 더 단단하게 키웠는지도 모른다. 별다른 병치레 하지 않고 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겨울다운 겨울의 추위 덕분이지 않을까. 모진 한파에 각종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인들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혹독한 겨울 추위가 자잘한 병균을 다 죽이고 자연적으로 환경정비를 해준 셈이다. 온실의 화초처럼 추위를 모르고 따뜻한 겨울을 나는 요즈음의 아이들이 더 많이 병원을 찾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의 재앙에 맞서야 할 손녀들의 미래가 걱정된다. 도망가고 싶을 만큼 끔찍했던 추위가 오히려 그립다. 겨울의 기억 속에 내 유년의 찬란한 추위가 빚은 눈물이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 <찬란한 추위> 중에서 -
수필문학이라고 하는 것에서 없어서는 안 될 두 가지가 ‘그리움’과 ‘반성적 성찰’이다. 인간에게 그리움과 성찰이 없다면 언제나 만족스럽고 꽉 있다는 오만한 느낌 때문에 행복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이러한 만족감을 오래 누리고 있지를 못한다. 편안하다는 느낌이 오래 지속될 때 권태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무언가 일거리를 만들고 소일할 거리를 만들고 싶어 한다. ‘도망가고 싶을 만큼 끔찍했던 추위가 오히려 그립다.’는 진술은 반성의 정서를 대동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병원을 자주 찾는 요즘 아이들을 온실의 화초에 비유하고, ‘끔찍했던 추위가 그립다’는 말로 지구온난화를 역설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부분이다. ‘추위가 빚은 눈물’라는 말은 중심사상을 뒷받침하고, 주제의식의 상상화를 도모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자기 생각이 전부고 최고의 가치라 여기지 않는다. 그것을 ‘보석’으로 전이한 것이다. 작가는 그리움을 소중한 깨달음과 자성의 기회로 삼는다. 부재를 거울로 삼고, 지나온 과정을 의미로 채우며 삶의 온당한 근거로 삼는 모습이 아름답다. 부제를 통해 얻은 게 있으니, 그것은 깨달음인 것 같다는 작가의 인식은 자신이 어떻게 세상에 기여할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고민하고 있다. 겸손한 반성적 성찰로 공감의 확대를 노린 전략이 좋다.
결론은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작 변화하는 세상을 인식하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오랜 습관을 긁어내는 일이 쉽지 않더라도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결국에는 쓰레기로 버려질 내 삶의 흔적들을 미리 지우고 싶다. 아프간을 떠나는 마지막 수송기에 오르는 장군처럼.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고 했다. 소임을 다하고 사라지는 모든 것에 거수경례를 올린다. 최후까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고 사라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퇴역 장군처럼 사라지는 어머님의 자개농에 한 세대의 마침표를 찍는다. 나를 새롭게 다듬는다.
- <퇴역장군> 중에서 -
한 작품의 서사구조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감동적인 플롯이 존재해야 하고, 공감과 보편성의 확대를 위해서는 전이의 미학이 구축되어야 한다. 이 수필은 발단부가 압권이다. “어머님의 유품인 자개농이 드디어 집을 나선다. 주인이 떠나고도 4년째 빈방을 지키고 있던 화장대와 문갑, 사방탁자를 포함한 12자 자개농이다. 상여가 나가듯 엄숙한 분위기다. 아쉬움인가, 후회인가, 그리움인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다. 어머님의 자존심을 지켜준 호위무사였던 거대한 자개장이 임무를 마치고 퇴역하는 노병처럼 사라지고 있다. 어머님 가시고도 차마 손을 대지 못했으니 20여 년을 한 곳에서 버틴 충직한 장군이 아닐 수 없다.”4년째 빈 방을 지키던 어머니의 자개농을 처분하면서 어머님의 삶을 칭송하는 작가의 수필은 문학성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작가는 이런 어머님을 ‘아프간을 떠나는 마지막 수송기에 오르는 장군처럼.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고 했다. 소임을 다하고 사라지는 모든 것에 거수경례를 올린다.’라고 적고 있다. 작가는 어머니의 자개농을 ‘최후까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고 사라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하며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온 어머님의 전생에 대한 찬사가 아닐 수 없다. 최순덕의 이 수필은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 인간미가 서려 있던 시간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머님의 자개농의 존재를 어머님의 삶과 견주어 그 가치를 빛내기 위해 동원된 비유항은 ‘퇴역장군’이다. 이런 비유는 매우 적절하고 인상적이다. 작가가 담고자 했던 메시지는 이런 비유들의 도움으로 선명하게 드러나고 맛있게 읽힌다.
내 몸의 팔할을 차지하는 수많은 ‘ 때문에’를 ‘덕분에’로 바꾸어 본다. 가난한 가정환경 덕분에 더욱 열심히 공부하였고 초년고생이라는 귀한 인생의 보약을 일찌감치 맛보았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덕분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무엇이나 잘 먹는 식습관이 생겼다. 산으로 들로, 마구 뛰어다니며 놀았던 덕분에 기초 체력도 튼튼하고 잔병도 없이 오늘을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모든 ‘덕분에’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 때문에’로 우울하고 슬프게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비로소 반성한다.
‘덕분에’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정말로 주변의 크고 작은 일에 ‘덕분에’가 가득하다. 무탈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덕분에’라는 고마움으로 다가온다. ‘덕분입니다.’라는 말에는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배려와 친절이 담겨 있는 이 말은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서로를 기분 좋게 한다. ‘덕분입니다’를 자주 쓰니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진다. 그 덕분에 초로의 허허로운 시간이 뿌듯한 보람으로 풍성해진다. 이 모든 기쁨이 손녀 덕분이다.
- <덕분입니다> 중에서 -
수필의 특성 중 하나가 자조적 성격이다.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는 거와 같다. 수필 <덕분입니다>에서 작가는 언어습관에 초점을 둔다.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 때문에’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의어를 손녀 덕분에 알게 되고 이 단어에 대해 긍정적 시선을 놓고, 그 ‘덕분에’의 속성과 기능에 탐닉해보는 데 재미를 느낀다. 작가는 ‘덕분에’ 위에 인간사를 투영하고, 자신의 삶까지도 포갠다. 그렇게 해서 건강하게 변한 자신을을 보여주고자 한다. 수필은 발견이어야 하고, 그 발견이 의미 부여로 나타날 때, 좋은 수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손녀 덕분으로 삶의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 자기 성찰을 할 때 투사는 오히려 자기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단초를 제공해준다. 그림자는 인격에서 제외된 부분이다. 그림자를 의식의 세계로 이끌고 나와서 자신의 인격으로 통합하는 것이 인격의 폭을 넓히고, 의식의 시야를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성찰의 바람직한 방법으로 수필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햇볕이 나도 그림자를 지울 수 없듯이 그림자도 우리 자아의식의 중요한 반려자가 되어 있다.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는 발견을 통해 작가는 말의 동역학이 주는 신비 앞에서 뿌듯해지는 자신을 느낀다. 언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결론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이 모든 기쁨이 손녀 덕분이다.’라고 한다. ‘덕분입니다’라는 말은 스스로의 눈으로 응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이 수필은 언어생활의 중요성의 부각을 통해 문학적 향취를 풍긴다고 하겠다.
다. 작은 것에 담긴 큰 세상- 시골의 진풍경
동양적 사고에 근거할 때 자연은 인간 그 자체이며, 모든 것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시골의 진풍경을 통해 인간사를 돌아보게 된다. 생태계나 자연의 순환에도 명암이 엄연히 존재한다. 현대인은 편리함을 보장받는 대신에 무수히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산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을 향해 떠나온 사람들이 오늘의 현대인이다. 자연적인 삶과 문명적인 삶의 과도기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기억에 남는 향수가 있다. 바로 우리와 하께 삶을 살아온 미물들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네 인간적인 삶에 대한 무의식적 관심인지도 모른다. 이것을 어찌 작가가 놓칠 수 있으랴. 작가는 날카로운 곤충학자의 눈 같은 응시의 작가다. 최순덕의 수필을 구성하는 다른 한 축에는 삶과 함께 했던 ‘도시락’이 놓여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삶에서 작은 행복을 기대하고 꿈꾸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결국 유년의 추억이란 문학의 온상만은 끝내 이탈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확증인 것이다. 이런 유년의 세계를 여유롭게 관조함으로써 작가는 생의 참된 의의나 조화의 필요성을 밝혀낸다. 이 수필의 요지는 인간의 삶과 밀착된 제재일수록 향기를 더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오늘날처럼 환경이 개발논리에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 하에서 문학이 추구해야 할 사명은 인간적 고뇌와 삶의 향방을 재단하는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작가는 ‘가장 한국적인 맛이 가장 세계적인 맛이라 일컫는다.’고 말한다. 덧붙여 작가는 ‘살다 보니 눈물 어린 고향이나마 고향이 있어서 좋고, 촌스러운 소울 푸드인 김치가 가장 한국적인 대표 음식으로 손꼽히니 그 또한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엄마의 도시락이 사라진 요즘이다.’며 사라져가는 것들에 아쉬움을 전한다. 작가는 희망의 땅으로 우리를 인도해 나갈 생성과 존재의 사람이란 의미다. 사라진 엄마표 도시락을 그리워함도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에 속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다. 그녀는 소울푸드를 통해 인간이 배우는 것은 무한함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삶의 가치를 소울을 통해 획득하려는 최순덕의 의지다. ‘도시락의 추억 속에서 맛있는 것 제대로 대접해 드리지 못하고 떠나보낸 그리운 어머니를 눈물로 만난다.’어머니에 대한 작가의 회한에는 안타까운 역설의 메시지가 더욱 가동을 안겨준다.
우리 음식이 ‘K-푸드’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맛이 가장 세계적인 맛이라 일컫는다. 나의 촌스러운 소울 푸드인 흰 쌀밥과 김치가 어느새 글로벌 음식이 된 게다. 살다 보니 눈물 어린 고향이나마 고향이 있어서 좋고, 촌스러운 소울 푸드인 김치가 가장 한국적인 대표 음식으로 손꼽히니 그 또한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엄마의 도시락이 사라진 요즘이다. 학교 급식의 정착으로 성장기 학생들에게 따뜻하고 영양가 좋은 점심을 먹이니 얼마나 바람직한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손녀가 급식 먹는 재미로 학교 간다고 해서 우습기도 했지만, 도시락과 엄마의 정이 연결되는 추억거리가 없어지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도시락의 추억 속에서 맛있는 것 제대로 대접해 드리지 못하고 떠나보낸 그리운 어머니를 눈물로 만난다.
- <도시락의 추억> 중에서 -
작가는 어머니가 싸주던 도시락을 먹고 함께 놀았던 유년시절 이야기로 들려주면서 손녀가 급식 먹는 재미로 학교에 간다는 말을 삽입한다. 세상의 급속한 변화에 밀려 도시락이 사라져간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 급식을 먹으러 학교로 가는 손녀의 모습을 보면서 ‘사라져 가는 것들’에 아쉬움을 놓는다. 이 수필에서 ‘사라져간 도시락’은 두 가지 의미로 파악된다. 하나는 도시락과 연결되는 엄마의 정이 없어진 것에서 오는 아쉬움이다. 인간 생명체는 소울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맛있는 것 제대로 해드리지 못하고 떠나보낸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이다. 그러나 ‘나의 촌스러운 소울 푸드인 흰 쌀밥과 김치가 어느새 글로벌 음식이 된 게다. 살다 보니 눈물 어린 고향이나마 고향이 있어서 좋고, 촌스러운 소울 푸드인 김치가 가장 한국적인 대표 음식으로 손꼽히니 그 또한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는 표현에 주목해 보면, 과거와 현재적 삶의 위기가 교차되면서 연륜을 쌓아가는 인생살이의 명암이 희노애락으로 잘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물화된 보조관념을 통해 작자가 숨긴 이면적 상징물에 도달함으로써 작품을 미학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발견은 도시락 역할이 소울푸드였을 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전령사였으며, 추억의 보고였다는 것이다. 삶이 지니고 있는 허위의 껍질을 벗기는 것이 수필의 소명이다. 작가는 사라지는 도시락에 손녀에 대한 애정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잘 버물어 향기가 나는 수필로 만들었다. 모두가 가슴으로 느끼는 사물과 사람의 교류를 통해서다.
빙하의 냉정함과 화산처럼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자연의 일부가 되는 삶이 부럽다. 잔혹한 흑야의 긴 겨울을 이겨내고 변화무쌍한 악천후에도 불평보다는 인내하고 순응하는 그들이 어쩌면 인류의 원시적인 미래의 모습이 아닐까.
아이슬란드의 빙하가 다 녹아내리면 지구는 엄청난 기후 재앙을 맞는다고 미래 과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무섭다. 어찌 살아야 할까, 재앙으로 되돌아오는 자연의 낭비를 줄이고 태초의 자세로 이끼처럼 세상과 마주할 일이다. 타인의 실수나 눈물을 이끼처럼 덮어줄 줄 아는 미덕이 내게 얼마나 있는지 되돌아본다. 아이슬란드의 거칠고 청정한 땅에서 경이롭게 만난 이끼는 초심을 잃지 말고 겸손해지라고 태곳적 신비한 언어로 말해준다.
- <이끼처럼> 중에서 -
이 수필에는 작가가 원시적 미래를 그리워하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잔혹한 흑야의 긴 겨울을 이겨내고 변화무쌍한 악천후에도 불평보다는 인내하고 순응하는 그들이 어쩌면 인류의 원시적인 미래의 모습이 아닐까.’하면서, 작가는 재앙으로 되돌아오는 자연의 낭비를 줄이고 변화무쌍한 악천후에도 불평보다는 인내하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생활관을 ‘이끼’에 견주어 잘 형상화하고 있다. 이 수필에는 환경오염에 대한 작가의 문명 비판이 넌지시 깔려 있다. 이 수필의 강점은 ‘이끼’란 제재를 통한 완곡하게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문학적 방식의 전개다. 또 다른 강점은 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질서정연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아이슬란드 여행을 통해 알게 된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타인의 실수나 눈물을 이끼처럼 덮어줄 줄 아는 미덕이 내게 얼마나 있는지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갖는다.‘아이슬란드의 거칠고 청정한 땅에서 경이롭게 만난 이끼는 초심을 잃지 말고 겸손해지라고 태곳적 신비한 언어로 말해준다.’는 말로 시선을 문명비판 쪽으로 향하는 수미상관 접근법의 활용은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철저한 주제의식의 간접화 전략으로 쓰여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본격수필의 매력에 빠지는 독자를 배려하겠다는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이런 이중층위의 구성이 질서 정연한 것은 이 수필이 가진 여러 장점 중에서 가장 빛난다.
그녀처럼 꿀벌도 다시 돌아오면 좋겠다. 고 작은 꿀벌이 감당해온 업무가 상당하지 않은가. 지구에서 열매 맺는 모든 열매의 70퍼센트 이상을 꿀벌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무심히 보고 있던 TV의 ‘한국인의 밥상’에서 깜짝 놀랄 말이 번개처럼 번쩍 귀에 들어 온다. 실제로 지구상에서 꿀벌이 사라진다면 4년 이내에 인간도 사라진다니 무섭고 섬뜩하다. 사라지고 난 뒤 비로소 그들의 막중한 임무를 알게 된다. 꿀벌이 아직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올봄의 일시적인 현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시골집 근처에 꿀벌을 판매한다고 붙여놓은 현수막이 반갑다. 낡은 색이 작년 것인지 의심스럽지만 봄꽃의 꿀을 모을 꿀벌들이 그래도 생존해있는 것 같아서 기쁘다.
- <땡벌> 중에서 -
수필은 자아와 그리움을 찾아 나서는 작업이다. 이런 차원에서 최순덕의 유년 시절에 함께 했던 꿀벌에 주목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작가는 꿀벌은 꿀을 제고해주는 것으로만 알았다. 여기서 ‘꿀벌’는 ‘생태의 파수꾼’으로 나타난다. ‘지구에서 열매 맺는 모든 열매의 70퍼센트 이상을 꿀벌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한국인의 밥상’이란 프그로램을 무심히 보고 있던 작가는 깜짝 놀란다. ‘지구상에서 꿀벌이 사라진다면 4년 이내에 인간도 사라진다’는 예를 든 것도 주제화 전략에서 매우 적절했다. 꿀벌에 얽힌 에피소드를 ‘지구생태보전’으로 연결한 것은 최순덕 작가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이런 이미지의 결합이 문학적 성과를 거두는 이유는 꿀벌이라는 미물이 갖는 노력의 궤적을 연상케 하면서 우리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과학적 근거를 인용해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문학성이란 말은 상당히 막연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주제의 구성 그리고 표현의 공감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시골집 근처에 꿀벌을 판매한다고 붙여놓은 현수막이 반갑다.’고 한 작가의 느낌은 공감의 지름길이라 하겠다. 수필적 삶의 진실이 그대로 투영되어져 나오기 때문에 더욱 최순덕 수필은 향기를 머금고 있다고 하겠다.
최순덕 수필의 가장 강한 특징은 솔직함이다. 고백문학이라는 수필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그녀는 문학의 쾌락성을 구축한다. 그녀는 재미있는 발상과 과감한 자기 노출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한다. 서양이 보는 것을 중시하는 시각문화라면, 우리 동양은 듣는 것을 중시하는 청각문화라 할 수 있다. 작가는 도시에 살면서도 시골에서 들려오는 미물의 발신음을 듣을 수 있는 영적 귀를 가졌다. 이 수필은 관계성을 중시하는 동양의 청각문화와 깊은 관련성을 가진다. 특히 주제의식의 상상화를 돕는 전략은 매우 적절하다. 발단부에 전개예고 기능을 중시하는 작가의 인식은 수필 감상의 흥미를 더한다. 무엇보다도 최순덕 수필을 읽는 매력은 날카로운 관찰을 통한 깊은 깨달음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오감을 이용하여 진리를 찾고, 그것을 현실의 삶에 투사시켜 내는 작가의 저력으로 그녀의 작품은 짙은 향기를 풍긴다고 하겠다. 즉 우리는 물화된 보조관념을 통해 작자가 숨긴 이면적 상징물에 도달함으로써 작품을 미학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문학은 이런 형태를 따른다.
문학은 빠르고 정확한 의미 전달만이 아니라 그 전달의 효율성을 따진다는 것이다. 얼마만큼 감동적이냐가 성패를 가르며 그래서 수사적 장치가 필요하다. 만일 감동이 없다면 문학이 아니다. 그런데 설명적인 글은 감흥을 주지 않는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아무런 흥미 유발이 안 되기 때문이다. 독자에게도 역할이 주어져야 한다. 수필 <땡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는 과연 한 가지 일에 땡벌처럼 매달렸던 적이 있었던가. 돌아보면 내 삶의 어느 한 구석에도 땡벌처럼 악착같은 근성은 없었다. 쓸데없는 욕심에 눈이 멀어 괜히 자식들만 힘들게 하고 스스로 미련의 올가미에 묶여 눈물지었던 날들을 어찌할까. 적당한 타협과 변명으로 길을 꺾고 주저앉기를 서슴치 않았으니 내 빈약한 의지 앞에서 나는 진정 ‘땡벌’이라는 별명조차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하면서 자신의 내면풍경을 찾아 끊임없이 생태적으로 사색하는 작가의 반성적 성찰을 따라가 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독자가 작품을 음미하며, 땡벌이 갖는 상징성의 메시지를 찾아내어 감상을 완성시켜 나간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라. 더 넓은 세상으로의 꿈 –혼자만의 공간에서
가치관이 너무나도 달라진 요즘 풍경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쓸쓸하게 한다. 작가는 우리 사회의 변화된 모습을 정조준하면서 인정과 전통적 가치를 그리워한다. 서경숙은 더 나은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꿈꾸는 작가다. 중년을 넘어선 사람이면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다. 좀 오래 산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현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공포일 수 있다. 잊혀진 현실의 메마름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는 바라 할 수 있으며, 이런 인식통로를 통해 인간은 때로 인간다운 자신과 만날 수 있다. 인정이란 객관적 자각의 결과이다. 신세대와 신자유주의 물결과의 만남이라는 이 절묘한 현실의 세계에서 어떻게 차이와 다름을 극복하고 이해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어찌하면 그 갈대밭 끝으로 사라지는 바람소리 같이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허망하지 않은 존치로 되돌려 놓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신세대의 다른 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인단 말인가. 어떻게 변화에 당황스러워 하고 있는 영혼을 위로해야 할 것인가. 이것 또한 문학의 세상이 변화에 두려워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자에게 마련해 주어야 하는 커다란 선물이어야 할 것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진정한 자유가 그리운 것이다. 며느리 역할은 최근에 끝이 났으니 아내, 어머니, 할머니의 자리도 훌훌 털어버리면 좋겠다.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을 잠시라도 살아보고 싶다. 옛날에 했던 연속극 ‘엄마가 뿔났다’에서 주인공 김혜자가 집을 뛰쳐나가 혼자만의 공간에서 자유를 만끽하던 딱 그만큼 나도 해 보고 싶다. 절대로 나를 변화시킬 수 없음을 잘 알기에 더욱 갈증이 나는 ‘자연을 살다’이다.
살면서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더 늙기 전에 해 보고 싶은 생각이 가슴에 들앉은 이유는 무엇일까. 뒤집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소원임을 이미 안다. 현실에 껌딱지처럼 찰싹 붙어있는 발바닥으로 어느 별에도 갈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할 뿐이다. 필요에 의해서든 아니든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의 세상을 과감히 깰 수 있는 용기가 아직 없다는 것이 헛나이만 먹은 것 같아 서글프다.
- <을 덕분에> 중에서 -
최순덕은 기존의 인식을 극복하고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여 황홀한 기적을 만나고 싶은 작가다. <을 덕분에>라는 제목만 봐도 대충 메시지가 다가온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진정한 자유가 그리운 것이다. 며느리 역할은 최근에 끝이 났으니 아내, 어머니, 할머니의 자리도 훌훌 털어버리면 좋겠다.’ 는 심정에 이어서 그녀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을 잠시라도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의 주체로 돌아온 작가는 변화하고 있는 세상에 한마디 꼭 하고 싶은 말을 남긴다. ‘옛날에 했던 연속극 엄마가 뿔났다에서 주인공 김혜자가 집을 뛰쳐나가 혼자만의 공간에서 자유를 만끽하던 딱 그만큼 나도 해 보고 싶다.’는 것이다. 시대도 사람도 변했다지만 역사 앞에서 자신도 즈체가 되고 싶다는 간절함의 표시다. 그러나 그 간절함은 ‘필요에 의해서든 아니든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의 세상을 과감히 깰 수 있는 용기가 아직 없다’는 인식에서 좌절되며, 곧바로 ‘헛나이만 먹은 것 같아 서글프다.’는 자조로 마무리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늙은이가 세대차이로 인해 보릿자루 신세가 되고 있는 현실이 아프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체념길에 오른 작가의 심정이 되어 본다. 하고 싶은 일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은 얼마나 좋을까.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하는 의도다. 상상의 나래 속에서 전통의 가치와 가족정신을 옹호하는 이 수필은 나를 응시하고 있는 나의 차가운 진실을 사랑하고, 나의 고통을 껴안아, 나를 배반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남게 하는 아름다운 예술이 수필임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나의 엔딩 크레딧을 마지막까지 앉아서 지켜봐 줄 이가 있을까. 엄숙하고 장엄했던 여왕의 장례식과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과연 어느 누가 나를 기리며 내 삶의 엔딩 크레딧을 훑어봐 줄까. 영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외면당하는 엔딩 크레딧이 아니면 좋겠다. 잘 알지 못하는 지인의 가족이 서먹하여 문상에 소홀하였던 나를 반성한다. 서로 스치듯 지난 작은 역할의 인연일지라도 진지하게 조문을 해야겠다. 불 꺼진 영화관에서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지켜보듯 누군가의 한 생에 닿았던 인연을 소중하게 지켜 봐줘야겠다. 내 인생의 영상에 출연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고 싶다. 다시 작은 것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엔딩 크레딧이다.
- <엔딩 크레딧> 중에서 -
‘영화가 끝이 나도 한참 동안 불이 켜지지 않는다. 영화의 전당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다른 상영관에서는 볼 수 없는 불편함이다. 일반 영화관에서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선다. 줄줄이 사탕처럼 화면을 타고 오르는 허옇게 탈색된 이름들을 굳이 끝까지 앉아서 보는 사람은 없다. 끝까지 앉아서 엔딩 크레딧을 눈으로 읽어내야 한다. 인내심을 요구하는 순간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 수필은 문학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서로 스치듯 지난 작은 역할의 인연일지라도 진지하게 조문을 해야겠다. 불 꺼진 영화관에서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지켜보듯 누군가의 한 생에 닿았던 인연을 소중하게 지켜 봐줘야겠다.’는 작은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부분이 감동을 준다. 마지막 순간의 중요성을 엔딩 크레딧이란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빈틈없이 묘사해내는 그녀의 형상화 능력은 문학적 가치를 드높인다. 수필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작가의 개성적 시각으로 발견하는 데서 가장 큰 매력이 있다. 여기에는 보편성의 공감대를 이루어주는 서정성이 도사리고 있다. 작은 것, 작은 인연에 대한 고마움과 따뜻한 연민과 동정이다. 이 수필을 보면,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환히 피어나는 피안의 세계를 가진 작가라는 걸 알 수 있다. 작가는 영화가 끝이 났지만 불이 꺼지지 않는 영화관에서 발견한 작은 깨달음으로 운명적 사슬이나 속성에 탐닉하며 인연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잘 드러내고 있다.
‘만 개가 넘는 부품이 조립되어 완성되는 자동차가 생각난다. 작은 소품 하나의 소중함이 영화에서도 보인다. 살짝 스치듯 등장하는 인물도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완성도 높은 영화의 제작을 위하여 결코 놓칠 수 없는 섬세한 인물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각 파트의 중심 역할부터 보조자 심부름꾼까지 막상 저 긴 명단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무명의 종사자도 얼마나 많을까. 실로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삶이 실핏줄처럼 얽혀 있는 게다.’에서 볼 수 있는 영화관 안의 자막 묘사는 작가의 감성과 비유를 잘 표현하여 영화관의 풍경을 자동차 내부로 만든다. 보이지 않는 곳을 내시경을 들고 파헤쳐보고자 하는 열정이 없다면 어찌 이런 최순덕 작가의 예술적인 심안을 감상할 수 있을까. 전개부로 이어지는 영화의 전당에서 영화와 자주 만나는 생활 속에서도 문화를 가까이 접하며 삶을 정결하게 지켜나갔던 작가의 품격이 드러난다. 그녀의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이 삶의 진통과 창작의 고뇌 속에서 태어난다.‘내 인생의 영상에 출연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고 싶다.’는 표현처럼, 언어도 맛있게 잘 부린다. 문장은 수필의 생명이다. 롤랑바르트의 말대로, 그녀는 말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어떤 언어적 물질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새로움의 생존 시간이 짧은 것이 서글프다. 내가 습득한 새로움은 잠시만 머뭇거려도 금방 망각의 늪으로 빠져버린다. 새로움은 까치발로 온 세상을 더듬는 10개월 손녀의 시선과 같다. 한시도 쉬지 않고 손가락을 놀리고 활용을 해야 신선도를 유지할 텐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쉬 피로를 느낀다. 골치 아픈 것은 피하고 단순한 시선으로만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속도가 느려도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도 실망하지 말고 나만의 더듬이로 천천히 배움의 기쁨을 누리는 한 마리 달팽이가 되어야겠다. 새로움은 아무래도 뾰족한 가지 끝에 다린 가시 돋은 열매다.
- <새로움에 대하여> 중에서 -
또 하나의 최순덕 수필의 중요한 내적 특성 중의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은 네오필리아를 향한 정신이다. 명작은 남달라야 하는 특수성을 갖는다. 예술의 영역 안에 있는 문학이라는 특성에 기초하여 수필의 존재이유는 새로움의 추구로 설정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즐수록 인지장해를 느낀다. 최순덕도 마찬가지다. 건망증의 도래다. 심리학 용어로는 ‘간섭현상’이다. 이런 경향성을 잘 파악하고, 작가는 안식의 문학, 영혼의 문학인 수필의 목적을 제대로 살려서 독자로 하여금 이런 부정적 사고로부터의 탈피를 도와주려고 한다. <새로움에 대하여>는 영안으로 우리 삶과 관계를 꿰뚫고 있는 작품이다. 느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수필이기도 하다. 그렇다. 살아가면서 ‘속도가 느려도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도 실망하지 말고 나만의 더듬이로 천천히 배움의 기쁨을 누리는 한 마리 달팽이가 되어야겠다.’는 자세는 얼마나 적절한 판단인가. 삶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인연이 시작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의 새로운 운명이 직조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불어닦친 건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쉬 피로해’지는 증상이다. 작가는 발단부에서 ‘너무나 빠른 변화의 속도에 어지럽다고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무딘 발걸음이라도 따라나설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라고 현실을 인정한다. 디지털시대에 노인은 뒤쳐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디지털과의 부적응을 ‘새로움은 까치발로 온 세상을 더듬는 10개월 손녀의 시선과 같다.’고 한 것이나, ‘새로움은 아무래도 뾰족한 가지 끝에 다린 가시 돋은 열매다.’는 표현은 느림의 미학에 대한 문학적 표현으로써 가속화되고 있는 디지털 세상에 대한 약간의 저항이 깔려 있다고 하겠다. 인간적인 삶의 길을 찾아가면서 겪는 낭패스런 모습이 재밌기만 한 수필이다.
문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양자역학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역학을 말해준다. 우리가 양자역학을 공부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가장 형상화가 잘된 부분을 도입부에 놓을 게 아니라 결말부로 돌리는 것이 더욱 지배적 정황을 강화할 뿐 더러 ‘인지장해’의 국면을 이미지로 재현해서 보다 더 울림이 큰 감동을 전달할 수가 있다. 만약에 얼굴에 난 ‘인지장해’를 1차원적인 이야기로 풀어내었거나, ‘인지장해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식의 직설적인 발화라면 우리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새로움’의 의미를 철학적인 의미에 얹어 ‘까치발’‘가시 돋힌 열매’의 이미지로 묘사했기에 미적 감각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의 우수성은 바로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주제의식을 하나로 형상화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지배적 정황으로 제시된 ‘가시 돋힌 열매’라는 보조 자료에 힘입어 기존의 언어가 제시하기 힘든 미적 사유와 감정을 이 수필은 잘 전달하고 있다고 하겠다.
III. 나가며
양자역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파동-입자 이중성이라면, 수필시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제와 제재의 이중층위다. 최순덕 수필은 입자와 파동이란 양자역학의 이중구조를 통하여 문학적 성취를 견인한 전략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보이는 것만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양자역학은 증명한다. 제재 속에 주제가 있고, 주제 속에 제재가 있다는 것은 닐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 여섯 가지 중 ‘양자 얽힘’에 해당한다. 수필은 주제와 제재를 나누어 생각하면 잡문이 된다. 최순덕의 수필은 주제와 제재가 얽혀 있다. 이는 수필이 주제나 제제재의 문학이 아니라 주제와 제재의 문학이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이 양자의 속성이 미시세계 물질의 속성이라는 것은 결국 모든 물질의 속성이 그러하다는 것이고, 우리 인생 또한 그런 원리로 풀어갈 수 있다는 것을 최순덕 수필을 잘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최순덕은 부드러운 곡선의 안식처가 있을 작가다. 최순덕 수필집을 읽고 나서 느낀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이분 글 참 잘 쓴다.’였다. 본격수필이론을 접한 후라서 그런지 수필의 발전이 눈에 두드러진다. 최순덕 수필들은 맑고 잔잔한 샘물에 비유될 수 있을 정도다. 수필 속에는 잔잔한 감동이 있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정감이 있다. 깊은 깨달음의 경지가 느껴질 뿐만 아니라 수수하면서도 소박하고, 은근하면서도 조용하고 은은한 향취가 풍겨나고 삶의 진솔한 모습이 꾸밈없이 담겨 있다. 그녀는 깊은 의식과 상념으로 감성을 체계적으로 정리 압축하고, 다양한 시각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인간의 삶에 농축된 비의를 예리하게 포착해서 살피고 있다. 이는 평소에 영혼과 마음을 늘상 갈고 닦은 까닭이다. 풍부한 인생 경험과 지혜가 좋은 수필집이 되도록 해서 다행스럽다는 생각도 덧붙인다.
자신이 수필가이기 때문에 수필을 쓰는 사람과 수필을 씀으로써 수필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다르다. 필자가 강의를 하면서 지켜본 바, 최순덕은 수필가이기 때문에 수필을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필을 씀으로써 수필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 중의 한 분이다. 수필을 씀으로써 자기를 위무하고, 나아가 수필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구원하려는 구도적인 자세로 인해 그녀의 수필은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다. 문학보다 깊은 철학적 사유와 순명주의사상 그리고 사람다운 사람-되기 정신 속에 생명의 참된 의미와 본격수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수필을 통해 최순덕은 우리에게 전해준다. 최순덕은 자신에게 주어진 제도적 기호체계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응하는 수필가가 결코 아니다. 수필이 문학이라는 것은 이해하고, 수필의 문학적 물음이 나를 넘어 사회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수필을 쓰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