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41] 김기영 (金基榮) - 나의 삶을 돌아보며 2. 출생과 어린 시절 1 나는 1937년 음력 7월 17일 서울특별시 중구 황금정 3정목(당시 을지로를 황금정이라고 하고 가를 정목이라고 하였으며 3정목은 명보 극장과 스칼라극장의 중간쯤 되는 곳임)에서 부친 김응준씨와 모친 김경자씨의 2남 2녀 중 차녀로 출생하였다.
2 위로는 오빠와 언니가 있고 아래로는 남동생이 하나 있다. 4대문 밖에는 친척뿐 아니라 아는 사람 하나 없을 정도로 순 서울 사람이어서 6.25사변이 날 때까지 서울 이외의 곳을 가본 적이 없었다. 3 아버지는 서울 상왕십리가 고향이시며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편모슬하에서 자라셨는데 고생 끝에 자수성가하신 분이다. 아버지는 장성하여 김경자씨와 결혼을 한 다음 황금정 3정목에 신방을 차리셨다.
4 아버지는 어린 시절 어렵게 지내셨으므로 밥에 대한 그리움이 많으셨나 보다. 그래서 항상 진지를 사발 가득히 눌러 담아 고봉으로 드려야 좋아하셨다. 식생활이 힘들 정도이니 학교는 문 앞에도 못 가보셨다고 한다.
5 12~13세에 칠판 만드는 일본인 공장에 취직을 하셨는데 그 회사 사장은 3년을 허드렛일만을 시키고 여러 면으로 다루어 본 후에야 기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6 아버지가 성실히 일하자 사장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결혼할 무렵에는 조그마한 공장을 차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래서 왕십리에서 황금정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신혼을 즐길 사이도 없이 일에 매진하였으며 그동안 어머니는 2남 2녀를 출산하셨다. 7 내가 4살 되던 해에 집에 불이 났다. 이유는 친할머니가 타계한 후 상청을 차려놓고 3년간 초하루와 보름날 상식을 올리며 정성을 들이는데, 어느 날 창틈으로 들어온 바람 때문에 상청에 켜 놓은 촛불이 커튼에 옮겨붙은 것이었다.
8 저녁 시간 아버지는 사업 관계로 나가시고 어머니 혼자였을 때여서 더욱 놀라셨다. 갈팡질팡하는 동안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껐고 그 일로 쇼크를 받은 어머니는 병을 얻어 몸이 점점 쇠약해지셨다고 한다.
9 그 사정을 안 일본 사장과 거래처 사람들이 도움을 주어 충무로 4가 14번지에 새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새 집으로 이사를 하였으나 어머니는 계속 아프셨고 병원에 입원하고 1년 남짓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10 당시 충무로(진고개) 일대는 일본인 촌이었는데 일본인 촌에 처음으로 한국인이 이사를 간 것이었다. 일본 사장 밑에서 잔뼈가 굵으셨던 아버지는 학벌은 없어도 일본 말이 유창하셨다. 일본 사람들과 함께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고 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11 그래서 어머니 장례식 때에는 가족 이외에는 모두 일본 사람들이었고 일본식으로 불교식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하였다.
12 그때 외할머니는 아이 넷을 키우는 일도 걱정이지만 30대 초반에 상처하고 홀아비가 된 사위가 안타깝고 불쌍하여 먼저 간 딸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사위를 빨리 장가보내려고 서두르셨다.
13 몇 달 후에 외할머니 호씨 가문의 26살의 노처녀를 데려와 부민관(현재 서울시의회 회관)에서 성대하게 신식으로 결혼을 시키셨다.
14 나는 4살의 어린 나이어서 생모에 대한 기억은 희미한 사진을 몇 장을 보는 듯한 기억뿐이다. 새어머니는 철없는 우리 4남매와 당신이 낳은 7남매(셋은 어릴 때 사망)를 키우면서 많은 곡절 속에 70여 평생을 열심히 사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