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눈 날리는 날
신동엽
지금은 어디 갔을까.
눈은 날리고
아흔 아홉 굽이 넘어
바람은 부는데
상여집 양달 아래
콧물 흘리며
국수 팔던 할멈.
그 논길을 타고
한 달을 가면, 지금도
일곱의 우는 딸들
걸레에 싸안고
대한(大寒)의 문 앞에 서서 있을
바람 소리여
하늘은 광란······
까치도 쉬어 넘던
동해 마루턱
보이는 건 눈에 묻은 나,
나와 빠알간 까치밥.
아랫도리 걷어올린
바람아,
머릿다발 이겨 붙여 산막(山幕) 뒤꼍
다숩던
얼음꽃
입술의 맛이여.
눈은 날리고
아흔 아홉 굽이 넘어
한(恨),
한은 쫓기는데
상여집 양달 아래
트렁크 끌르며
쉐탈 갈아입던 여인……
12.눈동자
신동엽
묻지 말고 이대로 보내 주옵소서
잊어버리고만 싶은 눈동자여
말곳 하면, 잘못
꿈 깨어져 버릴
깨끗한 얼굴
눈물 감추우며
제발 이대로 돌아가게
못본 척 해주소서
내 목숨 다 주고도
떠나기 싫은 눈동자여.
13.단풍아 산천
신동엽
즐거웁게 사람들은 웃고 있었지
네 마음은 열두 번 뒤집혔어도
즐거웁게 가을은 돌아오고 있었지
여보세요
신령님
말씀해 주세요
산과 난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울까요
그리고 그인
나와 인연이 있을까요
흐들갑스레 단풍은 피어나고 있었지
네 마음은 열두 번 둔갑 떨었어도
단풍은 내 산천 물들여 울었지
보세요
상천(上天)계신 한울님
만날 수 있을까요
옥(玉)으로 깎을
출렁일 가슴
보세요
새 배타고
목성(木星)에나 가면
우린 이 지구사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피 터지게 사람들은 웃고 있었지
한반도 대관령 주막집에서
입 가리고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지
14.둥구나무
신동엽
뿌리 늘인
나는 둥구나무.
남쪽 산 북쪽 고을
빨아들여서
좌정한
힘겨운 나는 둥구나무
다리 뻗은 밑으로
흰 길이 나고
동쪽 마을 서쪽 도시
등 갈린 전지(戰地)
바위도 무쇠고
투구고 증오고
빨아들여 한 솥밥
수액만드는
나는 둥구나무
15.마려운 사람들
신동엽
마려운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무서워 보이는 것이리
구름도 마려워서
저기 저 고개턱에 걸려 있나
고달픈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고요한 전날 밤
역사도 마려워서
내 금 그어진 가슴 위에 종종걸음 치나
구름을 쏟아라
역사의 하늘
벗겨져라
오줌을
미국 땅 살만큼의 돈만큼만
깔겨 봤으면
너도 사랑스런 얼굴이
16.미쳤던
신동엽
스카아트 밑으로
강 뚝에, 바람은
나부끼고 있었다.
안경을 낀
내 초여름
고샹 같은 여인이여.
허리 아래로 대낮,
꽃 구렝인
눙치고,
깊은 오뇌(懊惱) 감춘
미쳤던,
미쳤던,
꽃 사발이여.
스카아트 밑으로
천재는 흰 구원 빛내며.
한낮 꿀벌 뒤집혔다.
17.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신동엽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옆에는 네가 네 옆에는
또 다른 가슴들이
가슴 태우며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앞에는 사랑이 사랑 앞에는 죽음이
아우성 죽이며 억(億)진 나날
넘어갔음을.
우리는 이길 것이다
구두 밟힌 목덜미
생풀 뜯은 어머니
어둔 날 눈 빼앗겼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백년 한양
어리석은 자 떼 아직
몰려 있음을.
우리들 입은 다문다.
이 밤 함께 겪는
가난하고 서러운
안 죽을 젊은이.
눈은 포도 위
묘향산 기슭에도
속리산 동학골
나려 쌓일지라도
열 사람 만 사람의 주먹팔은
묵묵히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고을마다 사랑방 찌갯그릇 앞
우리들 두 쪽 난 조국의 운명을 입술 깨물며
오늘은 그들의 소굴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18.별 밭에
신동엽
바람이 불어요
눈보라 치어요 강 건너선.
우리들의 마을
지금 한창
꽃다운 합창연습 숨 높아가고 있는데요.
바람이 불어요.
안개가 흘러요 우리의 발 밑.
양달진 마당에선
지금 한창 새날의 신화 화창히
무르익어 가고 있는데요.
노래가 흘러요
입술이 빛나요 우리의 강기슭.
별 밭에선 지금 한창
영겁으로 문 열린 치렁 사랑이
빛나는 등불 마냥
오손도손 이야기되며 있는데요.
19.보리 밭
신동엽
건, 보리밭서
강의 물결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꿈이었지.
아무도 모를 무섬이었지
우리네 숨가쁜 몸짓은.
사랑하던 사람들은
기를 꽂고 달아나 버리었나,
버스 속선 검정구두 빛났고
우리 둘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
그건, 보리밭서
강의 물결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꿈이었지.
너의 눈동자엔
북부여 달빛
젖어 떨어지고,
조상쩍 사냥 다니던
태백줄기 옹달샘 물맛,
너의 입술 안에 담기어 있었지.
네 몸냥은 내 안에
보리밭과 함께
살아 움직이고,
맨 몸 채, 뙤약볕 아래
서해바다로 들어가던
넌 칡순 같은 짐승이었지.
20.봄은
신동엽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녹이듯 흐물흐물
녹여 버리겠지.
첫댓글 밤이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어리석은 국민들의 선택이 비록 안타까운 일일지라도...
우리 젊은 이들이 일깨워 갈 내일은 반드시 밝게 빛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