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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第二十二 (가이 얻을 법은 없다)
須菩提 白佛言 世尊 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爲無所得耶 佛言 如是如是 須菩提 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 乃至無有
小法可得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얻은 바가
없음이 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접함에 조그마한
법이라도 가히 얻은 것이 없으므로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느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다는 것은 밖에서 무엇인가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소득심(所得心)이 없는
마음을 증득한 보리심이다.
이 법계의 이치를 깨닫고자하면 밖에서 구하고자 하지 말고 자신을 깨달으면 그 안에 법계의 이치는 모두 있기 때문
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지 새롭게
무엇인가 얻은 것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얻은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실은 새롭게 얻은 것이
없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은행에 저금한 돈을 잊어먹고 있다가 10년 후에 우연히 그 저금통장을 발견하여 은행에 가보니 그
돈이 아직도 자기 이름으로 저금되어 있는 것을 알고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그 돈을 찾아 가지고 왔다.
없었던 돈이 생겨 기쁘지만 그 돈이 원래 자기 것이기 때문에 새로 얻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면, 강을 건너가던 배에 물이 세여 들어오고 있다. 배가 가라앉지 않게 하기 위하여 물을 계속 퍼내
어 더디어 물을 완전히 퍼내고 물이 세던 구멍도 막았다. 이 때 사공은 무엇인가 얻은 것이 있는가? 사공은 얻은 것이
없다. 배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이 우주의 이치를 깨닫고자 하면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안에서 구하여야 한다고 하여 밖에서 구하던 것을 멈추는
것을 우리는 밖에 것을 모두 비웠다고 한다.
마음 안에서도 구하는 마음 머무는 마음을 모두 비우기 위하여 우리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모두 비우는 수행
을 한다. 모든 집착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수행하여 아무 것도 구할 것도 머물 곳도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적막한 자리에 이르게 된다.
이 적막한 자리가 원래 우리들의 자리이기 때문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 온 것이지 얻은 것이 아니다.
이 적막한 원래의 자리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고 이 자리에 돌아 온 부처를 법신불이라고 부른다.
이 법신불은 모든 법의 성품을 가지고 있어 하지 못할 바가 없는 불가사의한 법력을 가지고 있는 부처이다.
이 부처의 성질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부처님은 설하고 계신다.
우리들의 마음의 내외에 있는 모든 집착을 놓아 버렸을 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므로 가히 얻을 만한 법이
없다고 제명(題名)을 붙인 것이다.
얻을 만한 법이 있다면 그 법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아공(我空) 법공(法空)이 되지 않으면 모든 집착을 놓아 버릴 수
없다.
우리들의 생활상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너무나 정반대의 일이다. 무엇이고 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의 21장과 이 22장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들이 이를 명심하도록 되풀이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들이 전혀 구하는 마음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하는 마음이 심하면 모든 마음의 갈등이 심
하게 일어나게 되고 남과 충돌하여 불쾌한 일도 많이 일어나게 된다. 우리는 무엇보다 남과 비교하여 살아가는 일을
경계하여야 한다. 남이 무엇을 가졌으니까 나도 가져야 한다는 마음은 갈등의 요인이 된다. 나는 나의 수준에 맞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담배 술 노름 등으로 가정의 화목을 깨고 가정의 순조로운 발전에 장애를 가져
오게 하는 경우들도 있다. 이것이 바로 집착이다. 담배를 구하고 술을 구하고 노름을 구하다가 담배 술 노름에 자기
마음을 빼앗기고 담배 술 노름에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뿐만 아리라 담배 술 노름으로 자기의 건강을 해치고
가정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경우들이 생기게 된다.
이 때 어떤 사람이 담배 술 노름을 끊는 법을 밖에서 구한다면 담배 나무를 생산하는 농장에서 담배 제조업, 담배를
판매하는 상점 등을 모두 폐쇄시켜야 할 것이다. 술도 술을 만드는 곡식을 제배하는 농장, 술 제조업, 술을 판매하는
상점 등을 패쇠하여야 할 것이다. 노름도 모든 노름 장을 없애야 한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대단히 어렵고 복합
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밖에서 구하는 것은 허망한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담배나 술 노름을 하고자 하는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담배 술 노름에
노예가 된 것을 깨닫고, 내 마음의 통제력을 회복하여 내 마음이 본래의 모습대로 나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새롭게 얻은 것은 없다. 다만 나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한 것이다.
담배에 집착할 때는 담배라는 경계 밖의 것을 볼 수 없게 하고, 술에 집착할 때는 술이라는 경계 밖의 것을 보지 못하
며, 노름에 집착할 때는 노름이라는 경계 밖의 것을 보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한계점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담
배 술 노름을 끊게 되면 나의 경계는 텅 빈 허공과 같이 넓어지는 것이다. 혹 뚱뚱한 여인을 싫어하는 총각은 뚱뚱한
것이 그 총각이 보는 여인의 경계가 되는 것이다. 일단 여인이 뚱뚱하지 않아야 하니까. 날씬한 여인을 좋아하는 총
각에게는 날씬하다는 것이 그 총각의 경계가 되는 것이다. 일단 여인이 날씬해야 하니까. 그러나 어떤 총각이 생각하
기를 여자는 뚱뚱해도 좋고 날씬해도 좋다면 이 총각이 보는 여자의 경계는 없는 것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여인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계를 두는 모든 분별심을 놓아 버리게 되면 우리들의 마음은 훨씬 가벼워지고 편안해지고 넓어져, 하고자
하는 일이 순조롭게 풀일 수 있다.
이러한 경계로부터 해탈하여 자유롭게 되었다고 하여 그가 새롭게 무엇을 얻은 것은 아니다. 원래 담배 술 노름을
하지 않았던 자기로 돌아왔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집안 식구들에게 기쁨을 주고 가정의 화목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뇩다라삼먁보리가 갖는 성품이다.
만일 조그마한 법이라도 얻은 것이 있다면 곧 구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이다. 가령 그 법이 돈이라고 하면 적은 돈
이라도 얻은 것이 되는 것이고, 그 법이 명예라고 하면 조그마한 명예라도 얻은 것이 되는 것이며, 그 법이 날씬한
여인의 모습이라면 조그마한 여인의 모습을 얻은 것이 되는 것이고, 그 법이 우주를 형성하는 이치라면 조그마한
우주를 형성하는 이치를 얻은 것이 되는 것이다.
법이라고 표현한 어떠한 것이라도 얻은 것이 있을 때는 바로 그것은 그 사람이 그것을 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고, 구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바로 그것이 그 사람의 한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설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에 한계를 짓지 말고 텅 빈 마음을 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第二十三 (청정한 마음으로 선(善)을 행하다)
復次 須菩提 是法 平等 無有高下 是名 阿耨多羅三藐三菩提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耨多羅三藐
三菩提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 卽非善法 是名善法
"그리고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 이것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아(我)도 없고 인(人)도 없고 중생(衆生)도 없고 수자(壽者)도 없는 마음으로 일체 선(善)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증득(證得)하리라.
수보리야, 선법(善法)이라고 말하는 바는 여래가 곧 선법이 아니라고 하시고 그 이름이 선법(善法)이다."라고 하셨다.
復次 須菩提 是法 平等 無有高下 是名 阿耨多羅三藐三菩提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 阿耨多羅三藐
三菩提
"그리고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 이것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아(我)도 없고 인(人)도 없고 중생(衆生)도 없고 수자(壽者)도 없는 마음으로 일체 선(善)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증득(證得)하리라.
앞 장의 문장을 다시 생각하여보면 이 장의 문장을 바르게 해석하는데 도움이 된다.
제 2l장에서 “여래가 설법할 것이 있다고 생각 한다”면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 된다고 하신 것은 체상용(體相用) 중 상
(相)을 설하는 것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증득하고 보면 중생이 곧 여래라는 것을 알게 된
다고 했다. 중생이 곧 여래인데 여래가 중생에게 설법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여래가 보는 중생이라는 이치에 어긋
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래가 중생에게 설법할만한 자료도 없다고 하신 것이다.
이 부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뒷밭침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피비중생(彼非衆生) 비불중생(非不衆生)”이라고 하셨다.
‘그들은 중생이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신 것이다.
중생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은 법신불이라는 뜻이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것은 법신불이 아니라는 것이니 보신
불과 화신불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설명하였다. 중생이 아니라는 것을 법신불로 해석하는 것은 아뇩다라삼먁
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있는 여래가 중생을 보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생이 법신불이라는 것은 곧 청정한 법신이라는 의미이고 청정한 법신을 인격화 하면 곧 법신불이기 때문이다.
이 장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을 생각하여 보면 이 제 21장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은 증도(證道) 게송이라고 생각된다.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되면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설하는 문장이다. 즉, 법신의 상(相)을 설명하는
구절이다.
그리고 제 22장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에서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다는 것이 아무런 소득이 될만한 것이 없
느냐’고 수보리가 묻고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조그마한 법도 얻은 것이 없다’고 하시며 수보리의 말을 인가하
시는 것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고 보니 중생의 원래의 자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자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는 것이다. 중생의 원래의 자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였다는 것이 무엇을 새롭게
얻었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 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체상용(體相用) 중 법신의 상(相)을 설명하는 것이다. 병으로 앓고 있던 사람이 병이 나았다고 하여 건강을
새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나쁜 습관으로 망쳐진 건강을 나쁜 습관을 버림으로서 원래의 건강한 자기
모습으로 회복하였다고 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건강한 몸의 상(相)으로 돌아온 것이다. 방 안에 물건이 가득 차 있어
갑갑하게 느껴 햇빛과 공기가 잘 통하도록 물건을 모두 치워버리고 햇빛과 공기가 잘 통하도록 하였다고 하여 햇빛이
나 공기를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햇빛과 공기가 원래 잘 통하던 것을 내가 물건을 갖다 놓음으로서 막았던
것이니 실로 새롭게 얻은 것이 없는 것이다.
이 22장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역시 증도(證道) 게송이라고 할 수 있다. 도를 증득하였을 때 어떠한 현상으로 나타
나는가를 설명하는 장이다.
이제 제 23장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에서도 “시법평등무유고하(是法平等無有高下)”라고 한 부분도 상(相)을 설명
하는 것인 동시에 증도 게송이라고 생각된다. 시법(是法)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법신불에 대한 법이다.
법신불은 평등하여 고하(高下)가 없다고 하는 것은 법신불의 상(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법평등무유고하(是法平等
無有高下)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한 것이다.
제 21장에서 여래가 중생에게 설할 법이 없다고 하신 것이 바로 여래와 중생이 평등한데 무엇을 설할 것이 있느냐고
하는 평등사상이다. 중생과 부처에 상하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평등사상이다.
이 불교의 평등사상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시법평등무유고하(是法平等無有高下)에서 시법(是法)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청정한 법신불이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므로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고 하는 상(相)이다.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일체
중생을 의미한다. 일체중생이란 미물에서 고등 동물에 이르는 일체 생명체에 법신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 법신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는 것이다. 모든 중생의 근본이 법신이고 그 법신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상(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법계가 더하고 덜함이 없듯이 모든 생명체에 내재한 법신의 입장에서는 축생이라고 하여 덜함이 없고 성인(聖人)
이라고 하여 더함이 없으며 어리석다고 하여 짧음이 없고, 예와 지금에 다름이 없고, 멀고 가까움도 차이가 없고, 옳고
그름도 없고, 남자와 여자도 없고, 귀하고 천한 것도 없으며, 선하고 악한 것도 없으며, 생과 멸도 없다. 얻음도 없고
함도 없으며, 얻을 수도 없고 닦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법신의 상(相)이다.
이는 관심법(觀心法)에 의하여 마음의 근본 체(體)를 깨달아 알게 되면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마음의 근본 체를 법신
이라고 말하고 법신이 가지는 성질을 상(相)이라고 한다. 이는 청정한 마음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체(體)의 입장에서
위와 같이 관하여 우리들의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 집착과 분별하는 마음을 모두 비웠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옛 선사들이 ‘처처가 법당이니 곳곳에 부처 아니 계신 곳이 없도다’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 체(體)의 입장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용적(用的)인 입장에서는 길고 짧음이 있고, 굵고 가는 것이 있으며, 멀고 가까운 것이 있고, 남자와 여자가
있다. 체(體)의 의미와 용(用)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여 항상 중도를 지켜가야 하는 것이 불교의 평등사상이다.
체와 용의 중도사상을 아래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수일체선법(修一切善法)하라는 것은 관심법(觀心法)에 의하여
깨달은 체(體),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를 하여 깨친 근본, 본각(本覺)을 실제 생활상에서
활용하라는 것이다. 즉 보림하라는 것이다.
수일체선법(修一切善法)이라고 하는 것은 병든 사람을 돕과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착한 법이지만 수 없이 많은 착
한 법 중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착한 법은 가정생활에서나 직장생활에서 자기가 맡은 바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인연
된 사람들을 편안하게 그리고 이익 되게 하는 것이 일체선법(一切善法)을 닦는 것이다. 이 맡은 바 책임과 의무가 곧
불사(佛事)이고 가정과 직장이 곧 수도도량이 되는 것이며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인연된 중생들을 편안하고 이익 되
게 하는 것이 불사행동(佛事行動)이요 불사행동이 곧 수행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맡은 바 책임과 의무를 다
하여 모든 중생을 편안하게 하고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평등한 것이다. 처처법당(處處法堂) 사사불공(事事佛供)
이라는 뜻이 이러한 것이다.
그 직분(職分)의 고하(高下)는 체(體)에서 볼 때 고하가 없다는 것이고 용(用)의 입장에서 고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체(體)의 입장에서 볼 때 누구나 천부적(天賦的) 지혜와 능력이 있지만 용(用)의 입장에서 보면 각자의 업에 따라 일
을 감당하는 지혜와 능력에 차별이 있다. 그러나 각자에게 천부적 지혜와 능력이 평등하게 있기 때문에 각자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일을 감당하는 지혜와 능력을 계발(啓發)할 수 있다는 것이 체(體)가 갖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연고로
각자가 속하는 가정과 직장을 각자의 수행도향으로 알고 지성으로 처처법당 사사불공에 임하여 행동하면 지혜와 능
력이 계발되어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혜는 이지불법(理智佛法)이 되고 능력은 행동불법(行動佛法)이 되는 것이다. 이 이지불법과 행동불법을
쌍으로 닦아야 최상승자(最上乘者)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최상승자(最上乘者)를 위하여 『금강경』이 설하여 진 것이니 최상승자는 항상 『금강경』을 수지독송하여 『금
강경』의 뜻에 따라 이지(理智)와 행동을 수행하여 수행이 활구수행이 되고 일용법(日用法)이 되고 보림법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여 『금강경』의 뜻에 따르는 것은 체적인 면에서나 용적(用的)인 면에서 사상(四相)을 여
의는데 있다.
사상을 여의기 위하여 『금강경』에서 무주(無住) 무상(無相) 무념(無念)을 설하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체의 면에서
이해되는 것이고 용의 면에서 보면, 남이 내가 하는 일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거나 남이 내가 할 일을 대신 하여주기를
바라는 것이나, 내가 잘못한 것을 숨겨주기를 바라는 등 자기중심적인 마음은 아상이다. 남이 자기 할 일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나 남을 속이는 것을 내가 알려고 하는 것이나, 남이 자기가 한 일이 잘 한 것이라고 과시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등 남의 허물을 잡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인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남을 속여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
하거나 정당한 방법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남은 다 잘사는데 우리만 못산다고 생각하거나 남에게 주는
것은 아깝고 받는 것을 좋아 하거나,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애욕에 집착하는 마음은 중생상이다.
이러한 사람들 보다 내가 인격자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이러한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거나 못하다고 생각하면 수
자상이 된다.
이러한 사상(四相)이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이행하는 지혜와 능력을 계발하는데 장애가 된다.
이러한 사상을 여읠 때 책임을 수행하는 지혜와 능력을 남김없이 발휘하여 자리와 이타를 할 줄 아는 수행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가 되는 길로 가는 것이다.
본문에서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수일체선법(修一切善法)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卽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하는 것은 앞 문장 시법평등무유고하(是法平等無有高下)가 관심법(觀心法)에 의하여 깨
침을 얻은 것이니 이것은 돈오(頓悟)라고 할 수 있다. 돈오하여 마음의 근본과 우주의 근본을 깨친 것이다.
이 근본인 체가 곧 용(用)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체(體)를 깨달았으니 그 체가 용(用)이 되도록 일체선법을 위와 같이
수행하는 것을 보림이라고 하는데 보림에서 관심법(觀心法)에서 여의었다고 생각되는 사상(四相)이 확실히 여의어
졌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많은 관심법 수행자의 경우 사상을 완전히 여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체선법을 수행함을 통하여 사상을 여의어 무주
(無住) 무상(無相) 무념(無念)이 되었는가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사상(四相)을 여의일 때 관심법 수행에서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다시 계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체의 입장에서 볼 때 법신불이라 하고, 용의 입장에서 볼 때 보신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을 점수
(漸修)라고 한다.
앞의 돈오(頓悟)와 합치면 돈오점수(頓悟漸修)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수하항마를 하였을 때 사상을 모두
여의었으므로 특별한 생활상의 보림이 없었다. 이것을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한다.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하는 것은 몰록 깨친후 즉시 깨친대로 행할수 있는 것이다. 깨친 것은 체(體)이고 행하는 것
은 용(用)이다.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하는 것은 깨치기는 했으나 깨친 대로 바로 행동이 되지 않을 경우 차츰차츰
깨친 바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문득 담배나 술이나 노름이 몸에 해롭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담배나 술이나 노름을 끊은 사람은 돈오돈수(頓悟頓修)
에 해당하고, 몸에 해롭다는 것은 깨달았으나 곧바로 끊지 못하고 점차 노력한 결과 끊은 사람은 돈오점수(頓悟漸修)
에 해당한다.
이 23장에서 시법평등무유고하(是法平等無有高下)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아뇩다라
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관심법(觀心法)에 의하여 시법평등무유고하(是法平等無有高下)라고 하는 체(體)
의 상(相)을 깨달았을 때 일어난 깨달음의 현상이고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수일체선법
(修一切善法)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일체선법(一切善法)을
행동으로 닦는 용(用)에서 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를 실제로 활용할 수 있었을 때 얻어진 깨달음의 현상이다.
사상이 없는 일체선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사상이 없는 일체선법이라고 하는 것은 가정생활
에서나 직장생활에서 자기가 맡은 바 일을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일하는 장소를 처처법당(處
處法堂)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와 인연된 모든 부처님들을 편안하게 하여드리고 이익 되게 하기 위하여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여래의 지혜와 능력을 모두 발휘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의 길로 가는 것이고 일체선법을 닦는 방법
이다.
우리나라 국민이 이와 같이 산다면 모는 부정부패를 씻은 듯이 없애고 편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불국정토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 卽非善法 是名善法
수보리야, 소위 선법(善法)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가 곧 선법이 아니라고 하시고 그 이름이 선법이니라"고 하셨다.
소언선법자(所言善法者) 여래설즉비선법(如來說卽非善法) 시명선법(是名善法)에서 소언선법자(所言善法者)라고
하는 것은 선한 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체(體)의 입장에서는 청정해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는 것인
데 선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곧 청정을 방해하는 원인이 된다.
즉 청정하지 못한 것이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체의 입장에서는 선하다 악하다고 하는 분별을
용납하지 않으니 선악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소언선법자(所言善法者) 여래설즉비선법(如來說卽非善法)이라고 하
여 부처님께서 선한 법이 아니라고 하신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용(用)의 입장에서 보면 선한 법을 닦으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름하여 선한 법이라고 한 것이다.
이 장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불교에서 체상용(體相用)의 설법이다.
이 체상용의 용법에 혼란이 있기 때문에 불교가 어렵기만 한 것이다. 사실 너무나 정확하게 질서 정연한 논법을 쓰고
있는 불법이다.
예를 들면 “부처님이 처처에 아니 계신 곳이 없다”고 하면 이는 근본, 즉 체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니 용(用)의 입장
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들의 근본이 그러하니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중생마다 부처로 생각하고 대하게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시명선법(是名善法) 이름하여 선법이라고 한다는 구절은 용(用)의 입장에서 선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용의 입장에서 선한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고정된 선법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인에게 빨간 장미꽃을 선물하여 주니 참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부인에게 빨간 장미꽃을 선물하는 것이
선한 법이라고 고정관념을 세우고 매일 빨간 장미꽃을 사 들고 가면 부인이 거부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남편이 국수를 좋아한다고 매일 국수를 해서 받치면 국수가 물리는 수가 있는 것이다.
선법이라는 것을 꽃이나 국수라는 물건에 두었기 때문이다. 선법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여 주고 이익 되게 하는 것
이니 어제는 꽃으로 편안하게 하여 주었지만 오늘은 무엇이 부인을 편안하게 하고 이익 되게 하는 지는 잘 알기 어려
운 것이다. 이것을 정확하게 알아 마치기 위하여 우리는 끝임 없이 우리에게 원래 존재하는 여래의 지혜와 능력을
인출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직장을 상대할 때나 남을 상대할 때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러할 때 사상을 여의어야 한다는 것은 내가 꽃을 선물했다는 상을 내려고 하거나 상대방에서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는 아직 사상을 여의지 못한 것이요, 꽃을 받을 때의 모습을 보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상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아상을 여의면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의 허물이 보이지 않고 허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책하려고 하지 않고 부인이 기뻐하는 것을 같이 기뻐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같이 괴로워하면 인상이 없는 것이다. 아상 인상이 없는 사람이 재물이나 명예욕이나 애욕이 있을리
없고, 혹 있다면 아상 인상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중생상도 있는 것이지만 아상 인상이 없는 사람에게는 중생상이
설 자리가 없다. 중생상이 없는 사람에게는 재물과 명예와 애욕이 선악을 분별하는 측도가 될 수 없고 선악의 분별심
이 없어진 사람은 수자상도 없어진 사람이다. 수자상을 여읜 사람은 선법이다 악법이다 하는 것을 여의지 아니하고도
자기의 청정한 자성을 나투게 된다. 청정자성이 나투게 되는 것은 곧 무상정등정각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접하게 되
는 것이다. 이것은 용의 입장에서 이 해안에서 저 해안으로 건너가는 방편인 것이다.
그리고 저 해안은 항상 편안하고 이익이 넘치는 곳이다.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第二十四 (복덕과 지혜에 비교할 수 없다)
須菩提 若三千大天世界中 所有諸須彌山王 如是等七寶聚 有人 持用布施 若人 以此般若波羅蜜經乃至四句偈等 受持讀
誦 爲他人說 於前福德 百分 不及一 百千萬億分 乃至算數譬喩 所不能及
"수보리야, 만일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있는 모든 수미산왕만한 칠보무더기를 어떤 사람이 가지고 보시하고, 만일 어
떤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 아니면 사구게 등만이라도 수지독송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하여 주므로 써 얻는 복덕은
앞의 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만억분 아니라 어떠한 수학의 수로 비유해도 능히 미치지 못하느니라."
대철위산(大鐵圍山)의 높이와 넓이가 224만 리요, 소철위산의 높이와 넓이는 120만 리이며 수미산의 높이와 넓이는
336만 리라고 하는데 이와 같이 높고 넓은 수미산이 삼천대천세계 각각에 하나 씩 있는 것을 모두 합친 만큼 많은
칠보의 덩어리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보시하는 공덕이 한량없이 많겠지만 이렇게 보시하는 사람의 마음이 삼천대천
세계에 있는 모든 수미산왕 만큼이나 큰 탐욕도 겸하여 있기 때문에 한 편으로 복을 짓고 한 편으로는 구멍 난 독에
물 붇듯이 복이 새버리니 복이 쌓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보시하는 목적이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면 아무리
보시를 많이 하여도 복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하니 복덕을 짓기 위해서는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남을
위해 설하여 줌으로서 『금강경』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깨쳐서 구멍 난 독에 물 붇는 복을 짓지 않고 지은 복은
영원히 자기 것이 될 수 있는 복을 지어라고 권하는 것이다.
설사 관심법(觀心法) 수행을 하여 깨쳤다고 하더라도 집착하는 마음이 가직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으면,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남을 위하여 설하여 줌으로서 그 공덕으로 자기 마음의 미세한 집착심마저 비울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어떤 처녀가 결혼할 대상을 만났을 때, 한 사람은 돈도 많고 직업도 안정된 사람이 있고, 한 사람은 돈도 없고 직업도
안정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이러한 경우 누구나 돈 있고 직업이 안정된 사람을 택할 것이다.
그런데 돈이 있는 사람은 기독교 신자이고 돈이 없는 사람은 특별한 종교가 없다고 하는데 어머니가 궁합을 보니 기
독교 신자하고 는 원진살이 있어 나쁘고 특별한 종교가 없는 사람과는 궁합이 맞는다고 어머니는 궁합이 맞는 쪽으로
딸이 선택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당사자인 딸은 어머니 따라 절에 몇 번 다니기는 했지만 기독교 신자인 남자가 조건도 훨씬 좋고 만나면 대화도 잘
되니 그 쪽을 택하고 싶어 했다.
이런 경우에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고 바른 선택일까?
이를 경우 선택하는 방법을 이 『금강경』, 제24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조건은 허망한 것이니 그것을 결혼 대상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큰일을 임하는 우리들의 마음 자세가 무엇인가 집착하는 마음이 있게 되면 그 집착에 가려서 전체를 볼 수 없고 전체
를 보지 못하면 일을 오히려 망치게 되는 이치를 우리는 알아야한다. 사업을 확장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돈에 집착하다보면 그 집착에 가리어 전체 사업계획이 바로서지 못하게 되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사업 확장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돈에 집착하여 사업을 확장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나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
다. 참선 수행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수행을 빨리 성취하겠다고 집착하면 수행이 오히려 잘 되지 않는다.
수행도 자연스러운 마음으로 꾸준하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무슨 일을 하던 우리가 편안하게 살아가며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흔히 몇 년 후에 잘살겠다고 현재 불편
한 것을 참아야 하는 수가 많다. 되도록이면 현재 편안하고 현재 이롭게 하는 삶으로 바꾸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는 미래를 위하여 살지만 삶 그 자체는 항상 현재 일어나는 것이다. 현재의 삶이 편안하고 이로워야 미래의 삶도
편안하고 이롭게 되지만 현재의 삶이 편안하지 못하고 이롭지 못하면 미래도 이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 편안하고 이로운 삶이 집착이 없는 삶이다. 내가 남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하고 실망을 가져
오게 된다. 남의 허물을 캐기를 좋아하고 흉보기를 좋아하는 한 현재 내가 편안할 수 없다. 욕심으로 돈을 벌려고 하
는 한 돈은 벌리지 않고 사람만 고달프다. 편안하지도 못하고 이롭지도 못하다. 내가 남보다 잘나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한 현재 내가 편안할 수 없다.
이러한 까닭에 『금강경』에서 『금강경』 전체, 아니면 사구게 만이라도 수지독송하고 남을 위하여 설하여 준다면
어떠한 다른 보시보다 더 큰 지혜와 복덕을 얻게 된다고 하신 것이다.
이 장에서는 소위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아상이나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가질까 부처님께서 두렵게 생각하시는 것이
다. 앞 장에서도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였다고 생각하면 즉시 보살이아니라고 하시고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였다고
생각하면 즉시 보살이 아니라고 하셨다. 이 장에서는 깨달은 사람이 아무리 중생을 위하여 큰 보시를 한다고 하더라
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깨달은 사람이 아니니 『금강경』을 더 열심히 수지독송하고 남을 위하여
설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살다보면 돈이 사람을 분별하는 측도가 되기 쉽다. 그러나 돈은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
지만 그 돈에 의지하여 다른 사람을 분별하는 것은 자기 복을 마치 수도꼭지에서 물이 세듯이 세게 만드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항상 하심 하라는 것이고 『금강경』에서는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이 되도록 『금강경』
을 항상 수지독송하거나 아니면 사구게만이라도 항상 수지독송하라는 것이다.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第二十五 (교화해도 교화를 받은 자가 없다)
須菩提 於意云何 汝等 勿謂如來作是念 我當度衆生 須菩提 莫作是念 何以故 實無有衆生 如來度者 若有衆生 如來度者
如來 卽有我人衆生壽者 須菩提 如來說 有我者 卽非有我 而凡夫之人 以爲有我 須菩提 凡夫者 如來說卽非凡夫 是名凡夫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너희들은 여래가 ‘내가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지 말라. 수보리야,
이런 생각을 하지 말지니라. 왜냐하면 중생 한 사람도 여래가 제도할 자가 실로 없기 때문이다. 만일 중생이 있어서
여래가 제도한다면 여래는 곧 아인중생수자가 있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내’가 있다고 설하는 것은 곧 ‘내’가 있음이 아니거늘 범부들이 ‘내’가 있다고 여기니 수보리야,
범부라는 것은 여래가 설한 범부가 아니라 그 이름이 범부니라.”
須菩提 於意云何 汝等 勿謂如來作是念 我當度衆生 須菩提 莫作是念 何以故 實無有衆生 如來度者 若有衆生 如來度者
如來 卽有我人衆生壽者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너희들은 여래가 ‘내가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지 말라. 수보리야,
이런 생각을 하지 말지니라. 왜냐하면 중생 한 사람도 여래가 제도할 자가 실로 없기 때문이다. 만일 중생이 있어서
여래가 제도한다면 여래는 곧 아인중생수자가 있는 것이 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자신에게 비유하여 앞 장에서 말씀드린 깨달은 사람에게 경계하는 말씀을 하신다고 생각한다.
깨달았다고 하여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깨달은 사람이 제도할 중생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제도할 중생이 있다면 능소(能所)를 아직 버리지 못하였
으니 그 깨달은 사람은 아직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중생을 제도하는 용(用)의 입장에 있으나 체(體)를 여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생을 제도하는 자는
화신(化身)이나, 화신이 법신(法身)에서 나왔음을 여읠 수 없다는 것이다. 법신의 입장에서는 일체중생이 평등하여
고하(高下)가 없다고 앞 장에서 말씀하셨으니, 화신이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면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
이다. 우리들의 입장으로 낮추어 말하면 자녀들이 다 커서 활동할 나이가 되면 자기들의 근본이 부모에 있었음을 망
각하기 쉬우나 그래서는 인간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녀들이 다 커서 부모 말씀을 잘 듣는다고
자기들은 부모 말을 잘 듣는다고 생각하거나, 부모의 어려움을 돌보아 드린다고 자기들이 부모를 돌본다는 상을 내면
근본을 무시하는 도리라고 하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이 중생을 교화하였다고 상을 내게 되면 곧 깨달은 사람이 되지
못하니 교화하였어도 교화하였다는 상을 내지 않는다는 생각조차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깨달은 사람은 육안(肉眼) 이상의 눈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최소한 천안이 열리기 시작하고 차례로
혜안 법안 불안이 열리게 된다. 천안이 열기기 시작한다는 것은 천안통뿐만이 아니라 천이통, 신족통, 타심통, 숙명통,
누진통 등 육통 삼명이 열린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기 시작하고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시작할 때 누구를 위해 무엇을 했다는 식으로 은근히 아상이나 인상을 세우고자 하는 생각을 내는 것을 경계하
는 것이다. 왜냐하면 체(體)의 입장에서 뿐만이 아니라 용(用)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일체가 연기하여 하나로 작용하고
있으므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일체가 하나로 성립되어 있는 이치를 직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일체가 하나로 연기하는 이치를 깨달았다면 자기가 하는 일이 특별히 유별할 것이 없는
것이고, 특히 상을 낼 것까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체가 하나로 성립되어 있는 관계로, 우주는 내 마음 안에 포섭되고 우주 안에 있는 일체 존재도
모두 나의 마음 안에 포섭되는 것이니 내 마음 안에서 일체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들이 학교에 갔을 때나 남편이 직장에 갔을 때 그들이 엄마 옆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의 마음 안에 있는 것
이다. 그들이 그 곳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엄마의 마음 안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설사 남편이 한국에 갔다고 하더라도 자녀들이 타주로 공부하러 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엄마의 마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직장에 간 남편 역시 부인이나 자녀들이 모두 남편의 마음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골 면장이 훌륭하신 분이라면 그 면에 살고 있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사정은 그 면장의 마음 안에 있
는 것이고, 군수이고 시장이고 도지사도 마찬가지이다. 한 국가의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국민의 안녕이 대통령
의 마음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의 마음은 국가의 개념을 초월하여 우주를 상대하는 마음으로 넓고 깊어지는 것이다.
그 범위에 한계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이 아프면 내 마음이 아픈 것이요, 중생이 둔하고 어리석어도 내 마음이
둔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반대로 중생이 기뻐하면 내 마음이 기쁜 것이요, 중생이 맑고 총명하면 내 마음도 맑고
총명한 것이다.
이치가 이와 같으니 누구를 기쁘게 하였다고 아상(我相)을 내거나 인상(人相)을 내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 체(體)와
용(用)의 도리와 능소(能所)의 도리에 통달하지 못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須菩提 如來說 有我者 卽非有我 而凡夫之人 以爲有我 須菩提 凡夫者 如來說卽非凡夫 是名凡夫
수보리야, 여래가 ‘내’가 있다고 설하는 것은 곧 ‘내’가 있음이 아니거늘 범부들이 ‘내’가 있다고 여기니 수보리야,
범부라는 것은 여래가 설한 범부가 아니라 그 이름이 범부니라.”
내 마음 안에 포섭되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중생이 내 마음 안에서 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우주관이다.
이는 마치 내 몸 안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세포를 우리들의 관념 속에서 ‘나’라고 보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깨달은 사람은 내 마음 안에 포섭되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내 마음 안에서 살고 있다고 보는 것
이다. 이 깨달은 사람이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다고 할 때 중생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내’가 있다고 설하는 것은 아
니다. 그러나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범부들은 범부 각각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여 상을 내
지만, 깨달은 사람에게는 범부가 곧 성인(聖人)으로 보이는 법이니, 이름하여 범부라고 한다는 것이다.
용(用)에 입장에서는 범부도 있고 성인도 있는 것이지만 체의 입장에서는 모든 범부나 성인이 모두 체에서 나왔으므
로 같은 근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 서로 간에 자만하거나 멸시하거나 하는 일 없이 공경하고 사랑하는 자비로서
대하여야 함을 설하고 있다.
달마대사는 위에서 설한 바와 같은 신통력이 있는 스님으로 유명하게 알려지니 수많은 수자들이 그를 찾아 와 법을
청하였다. 그 때마다 달마대사는 면벽하고 답을 하여주지 않으니 모두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면벽한지 9년 째 되는 해에 신광(神光)이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이가 찾아왔다.
신광은 달마대사가 조용히 앉아 계시는 모습을 방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기도 한 자리를 정하고 조용히 앉아 있
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밤이 되어 눈이 수북이 쌓이는데도 그는 달마대사와 같이 요지부동으로 앉아 있었다.
이윽고 달마대사가 그를 향해 묻는다. “왜 왔느냐?” “도를 얻으러 왔습니다.” “그런 얕은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도를
구할 수 있느냐?”이에 신광이 품에서 칼을 꺼내어 자기 한 쪽 팔을 서슴없이 탁 잘라 달마대사에게 던지었다.
신광은 대사에게 도를 얻으려는 자신의 진심은 몸 하나 버려도 추호도 아깝지 않다는 결의를 보인 것이다.
달마대사는 신광에게 질문을 계속하였다.
“그대는 무엇을 얻고자 하느냐?”
“마음이 편안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대의 마음이 어때서 그런가?”
“예,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대의 불안한 그 마음을 내 놓아 보라. 내가 편안히 해주겠다.”
이 물음에 신광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 했다. 그동안 불안하다고 생각해왔는데 막상 그 불안한 마음을 내 놓으라는
물음 앞에서 “그 불안한 마음”을 찾을 수 없으니 말문이 완전히 막혀버린 것이었다.
“그 불안한 마음을 내 놓아 보라는데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는 그 불안한 마음을 도저히 찾을 수 없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대사가 “그렇다면 내 이미 네 마음을 편안하게 했노라”고 말하자 신광은 번개처럼 스쳐가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리하여 달마대사는 신광이 깨달음의 길로 들어갈 근기가 있다고 판단하여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고 그의 법명을
혜가라고 명하였다.
내가 불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불안한 것이고, 내가 슬프다고 생각할 때 슬픈 것이다.
내가 불안하거나 슬플 때 문덕 기뻤던 일이 생각나면 기쁜 마음에 잠긴다.
내가 기뻐하고 있다가도 슬픈 생각이 들면 다시 슬퍼지는 것이다.
신광의 경우 어떠한 이유로 불안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달마대사가 그 불안한 마음을 내 놓으라고 하는 말을 듣고,
그 불안한 마음을 찾을 때는 그 불안한 마음을 찾는 마음이 일어났으므로 불안한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나에게 다시 불안한 마음이 일어나면 불안한 마음을 찾는 마음은 사라진다. 나에게 불안한 마음을 찾는 마음이 다시
일어나면 불안한 마음은 사라진다.
이와 같은 이유로 기쁘다 슬프다 불안하다 편안하다 좋다 나쁘다고 하는 것 등은 실체(實體)가 없다, 고정된 것이 없
다고 하는 것이다. 신광이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불안한 마음을 찾는 마음이 일어났으므로 불안한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역으로, 불안한 마음이 일어나면 불안한 마음을 찾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불안하다 불안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실체(實體)가 없다고 한다. 실체가 없다는 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가변
(可變)적이라는 것이다. 즉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변할 수 있는 것이므로 ‘불안한 마음’을
우리가 의지적으로 변화시키면 변화가 가능하다는 이치가 나오는 것이다.
이 이치가 바로 참선 수행법이고 염불 수행법인 것이다. 우리가 화두를 잡고 참선할 때 화두를 잡고 있는 동안에는
잡념이 안 생긴다. 그러나 잡념이 들어오면 화두를 놓지는 것이다. 화두를 다시 불러 오면 잡념이 사라진다.
그리고 화두를 잡고 있는 동안은 편안하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자기가 동작하는 발이나 손이나 호흡을 관
하게 한다. 동작이 움직이는 것을 관하고 있는 동안에는 잡념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잡념이 일어나면 동작을 관하는 마음은 사라진다. 동작을 관하는 마음을 다시 불어오면 잡념은 사라진다.
동작을 관하는 동안은 마음이 편안하다.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을 염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관
세음보살을 염하는 동안에는 잡념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잡념이 일어나면 관세음보살이 사라진다.
관세음보살을 다시 불러오면 잡념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동안에는 잡념이 일어나지 않으므
로 편안하다.
모든 수행이 바로 이 이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우리들의 생활상에 응용하여보자.
어떤 사람이 하루 일당으로 2백불을 벌었을 때 “야! 오늘은 2백불이나 벌었다”고 생각하면 기쁘고, “야! 오늘은 2백불
밖에 못 벌었다”고 생각하면 서운한 것이다. 이와 같이 그 때 그 순간 같은 조건에서 내 마음 가짐 여하에 따라 기쁘기
도 하고 슬프기도 한 것이다. 기쁜 것을 금방 슬프게도 할 수 있고 슬픈 일을 금방 기쁘게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긍정적인 사유를 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남의 잘못을 찾아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항상 남의 잘못을 찾아냈을 때 기쁘고 시원한 기분을 느낀다.
이런 맛에 남의 잘못을 꼬집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이와 같은 것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은 기쁜 마음을 가질 수는 있지
만 그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기보다 오히려 해가 된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그러한 잘 못에 점점 빠져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남이 잘하는 것을 잘한다고 칭찬하여주고 함께 기뻐하면 상대방은 더욱 잘하도록 노력할 것이니 이롭고 자기도 좋은
습을 쌓아가니 이로운 것이다. 이와 같이 기쁨과 이익이 함께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사유이다.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第二十六 (법신은 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觀如來不 須菩提言 如是如是 以三十二相 觀如來 佛言 須菩提 若以三十二相 觀如來
轉輪聖王 卽是如來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不應以三十二相 觀如來 爾時 世尊 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32상에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기를, “네, 그러합니다.
32상에서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만일 32상에서 여래를 본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에는 32상에서는 도저히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이때에 세존께서 게송을 설해 말씀하시기를, “만일 형상에서 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에서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함이니 도저히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여래가 수보리에게 32상을 한 모습에서 여래를 볼 수 있느냐고 묻고, 수보리가 네 그렀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대하여 여래께서 만일 32상에서 여래를 본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가 되지 않느냐고 하셨다.
이에 대하여 수보리가 곧 말을 바꾸어 32상에서는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부처님께서 부처님의 뜻을 요약하여 “내
육체적인 형상에서 나를 보려고 하거나 내 음성에서 나를 구하려고 하면 그 사람은 삿된 길로 가는 것이니 참 나를
도저히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32상 중에 잘 알려진 상은 이마에 있는 미간, 정수리에 있는 육계(肉髻), 긴 팔, 가는 손과 손 까락, 목에 세 개의 줄
등이다. 이러한 육체적인 모습은 다른 사람도 하고 있을 수 있으나 청정한 도에는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여 “육체적인 모습에서나 소리에서 나를 구하면 그 사람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요약하였다.
이 때, “아(我)”란 일체 중생의 몸 가운데 자성이 청정하고 무위(無爲)하고 무상(無相)한 진상(眞常)의 체(體)이니 높
은 소리로 염불해도 성취할 수 없고 모름지기 정견(正見)이 분명해야 바야흐로 해오(解悟)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형상(形相 색)과 소리(성) 두 가지 모습으로써 부처를 보려고 하거나 소리 가운데서 법(法)을 구한다면 마음에
생멸이 있어서 여래를 깨닫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사람을 겉모양을 보고 평가할 수 있느냐고 묻고 겉모양을 보고 사람을 평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가 겉모
양이 같은 사람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겉모양으로는 사람을 평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즉 사람을 겉모양이나 말과 소리로 평하고 판단하고 행하면 실수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참 마음을 직관하도록 하여
야 참된 그 사람을 볼 수 있고 실수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겉모양은 모든 것을 포섭할 수 없지만 마음은 모든 것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무설전에 관세음 보살님 상을 모시고 있다. 저러한 모습을 한 상을 꼭 관세음 보살님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고, 저러한 모습을 한 상을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고 대답하였다가 저러한 모습을 한 상을 꼭 관세음보살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저 모습에서 관세음보살을 보려고 하지 말고 마음에서 관세음보살을 봐
야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러한 모습을 한 관세음보살의 마음이 관세음보살이면 관세음보살이지만 마음이
지장보살과 같으면 지장보살이라는 것과 같다.
관세음보살이 고통 받는 중생의 소리를 듣고 제도하시다가 지옥중생의 고통 받는 소리를 듣고 너는 지옥 중생이니
지장보살의 소관이지 내 소관이 아니라고 지옥중생의 고통 받는 소리를 듣고 외면한다면 관세음보살이 될 수 없고,
외면하지 않고 고통 받는 지옥중생이라도 구제하실 마음을 가지고 지옥중생을 구제하신다면 지장보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지장보살이라도 고통 받는 중생의 소리를 듣고 자기는 지옥중생을 관할하는 보살이니 중생의 소리를
듣고 외면한다면 지장보살이라고 할 수 없고 지장보살의 마음이 고통 받는 중생의 소리를 듣고 구제할 마음을 일으
키고 중생을 구제한다면 관세음보살이 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이거나 지장보살이거나 그 마음이 한량없이 넓고 높고 깊어 어떠한 중생의 고통 받는 소리를 듣고 이것은
지장보살의 소관이다 저것은 관세음보살의 소관이라고 구별하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하니 한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고 있는 동안은 관세음보살이 되는 것이고 지옥중생을 제도하고 있는 동안에는
지장보살이 되는 것이지 실제로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관세음보살 상을 모시는 것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이요 지장보살 상을 모시는 것은 지옥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이지만
지옥 중생도 중생이니 관세음보살이건 지장보살이건 중생을 구제함에 있어 무슨 차별이 있겠는가?
영가를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부처님은 아미타불이고 아미타 부처님의 협시 보살은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이다.
여기에서 영가와 직접 관계있는 보살은 관세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지나치게 구별하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
아무리 옷을 잘 입고 잘생긴 사람이라도 거지와 같은 짓을 하면 거지가 되는 것이요 사기꾼과 같은 짓을 하면 사기꾼
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옷을 허술하게 입고 못생긴 사람이라도 대장부와 같은 행동을 하면 대장부요 영웅다운 짓을
하면 영웅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잘 생긴 사람을 좋아하거나 돈 많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탐욕심이 많은
사람으로 사기를 당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탐욕심이 많은 까닭이다.
자기에게 탐욕심이 없는 사람은 돈 많은 사람을 만나든 권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든 자기중심을 잃지 않고 상대방의
참모습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는다. 실수하지 않으니 이러한 사람이 긴 시간을 놓고 더 잘 살게 된다.
이 26장에서는 부처님께서 소위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허상을 버릴 것을 설하고 계신다.
이 허상을 버리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 불타사 신도님들이 그 동안 어떻게 하여왔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사시불공을 대웅전에서 모시지 않고 무설전에서 모시고 있다. 우리 전통적인 관례에는 없는 법이지만 우리 절
에는 노 보살님들이 많은 관계로 그 형편에 맞게 현재와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니 우리가 형식에 따르지 않고 주어진
형편에 맞게 하는 것이니 이 장의 설법에 맞는 것이다.
둘째 관음제일이나 신중기도일이나 지장기도일이 엄연히 정하여 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당일에 가까운 일
요일에 관음제일 신중기도 지장제일을 모시고 있다. 특히 일년에 한 번 밖에 없는 부처님 오신 날이 4월 초파일이지
만 우리는 이 날마저 현지 사정에 맞게 일요일에 초파일 행사를 하고 있다. 이것 역시 이곳 사정에 맞게 조정한 것이
니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도 중에나 끝날 때 『반야심경』을 하는 순서가 있는데 우리는 부처님을 향해서 『반야심경』을 독경한다.
이것도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무설전에 신중 탱화가 모셔져 있지 않는 관계로 부득이하게 하고 있는 것이니 잘
못이라고 할 수 없다.
전통적인 관례에 의하면 부처님 전에서 의자 놓고 앉아 사시불공하고 설법을 듣는 예는 없다. 그러나 노 보살님들이
많은 우리들의 사정에 맞추어 의자 놓고 법회 보는 것이 받아 질수 있는 것이다.
신도님들의 수준에서 예를 들어 말씀드리면 어떤 보살이 몸이 불편하여 절에 오지 못하여 집에서 기도한다고 할 때,
스님이 집에서라도 기도하고자 하는 보살의 마음을 고맙게 생각하고 집에서라도 기도를 잘하도록 도와드리고 빨리
완쾌하여 절에 오시도록 하라고 하는 것이 스님의 도리가 아닌가?
내가 10월에 한국에 가 숭산 큰스님을 만나 봤을 때 제가 “스님 제가 관절염이 있어 절을 하지 못합니다”고 하니 그럼
서서하라고 하시고 내가 자리에 앉기 어려워하는 것을 보시고 시자에게 좌복 다섯 개를 포개 놓으라고 하시고 그 위
에 앉으라고 하셨다. 상좌가 자기 은사스님에게 서서 인사하는 법이 아니고 자기 은사스님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 것
이 한국 법도에 어긋나는 짓이지만 사정에 따라 법은 수용되는 것이 이치이다.
법도를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고집하는 것은 형상에 끄달리지 말라는 『금강경』 설법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
이다. 그러나 모양과 소리에 집착하지 말라는 『금강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것이 이해되는 범위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도님들이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로 만들어서 자신이 고민하고 여론을 일으키고 시비를 삼으면 절이 시끄러워
진다는 것이다. 절밥을 십년 이십년 먹은 사람들도 아니고 30년 40년 이상 먹은 사람들이 지혜를 내서 절을 항상 조용
하게 편안한 반석 위에 올려놓아 새로 오는 신도님들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워갈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신도님들이 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폭 넓게 수용하고 주지스님의 뜻을 따르는 아량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第二十七 (끊을 것도 없고 멸할 것도 없다)
須菩提汝 若作是念 如來 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莫作是念 如來 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
三菩提 須菩提 汝 若作是念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說諸法 斷滅 莫作是念 何以故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於
法 不說斷滅相
"수보리야, 네가 만일 '여래가 구족한 상이 없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여래가 구족한
상이 없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수보리야, 네가 만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심한 사람은 모든 법이 단멸하다고 설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발심한 사람은 법에 대하여 단멸상을 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멸상(斷滅相): 단멸상이란 끊어서 끝내고 소멸해서 없어지는 모습이란 뜻이지만 사용하는 법을 모르면 그 뜻을 바
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단멸상은 무념(無念) 상태에서 일어나는 불생불멸의 상태에서 모든 번뇌를 끊고
소멸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차피 모든 상은 허무한 것이라 여의어야 한다면 구태여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노력할 생각을 단멸하는 상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재물에 욕심을 버리고, 있는 것은 모두 보시하라고 하니까 돈
벌어서 무엇 하나 어차피 남에게 다 주어야 할 탠 데하고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체념상태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리고 스스로를 소멸시켜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을 단멸상(斷滅相)이라고
한다.
제 26장에서 여래가 구족한 32상에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하고 육신에서나 겉모양에서나 소리에서 여래를 보려고
하는 사람은 삿된 길을 가는 사람이니 도저히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하니 모양에서도 여래를 볼 수 없고 소리
에서도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곧 여래의 가르침에서도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니 어차피 볼 수 없는
여래이니 수행을 더 해서 무엇 하나 하고 수행하는 마음에 흔들림이 있는 수행자들에게 경고하는 말씀으로, 여래가
32상을 구족하지 않았어도 아뇩다라삼먁삼리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신다.
앞 26장에서는 여래의 32상은 허망한 것이니 여래의 모습이나 소리에서 여래를 보려고 하지 말라고 하시고 이 장에
서는 여래가 32상을 구족하지 않았어도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32상 구족의 중요성
을 말씀하신다.
이 뜻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 사람은 동물이다. 개도 동물이다. 그러므로 개도 사람이 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
이다. 부처님은 32상을 가졌다. 그러므로 32상을 가진 사람은 모두 부처라고 할 수 없으니 앞 장에서는 32상에 집착
하지 말라하시고 이 장에서는 32상을 구족하지 않고 여래가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32상을 구족하기 위해서는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닦아야 하는데 32상에서 여래를 볼
수 없다면 수행해서 무엇하나하고 단멸상을 내는 수행자들에게 32상이 없어도 여래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앞
장의 말씀을 다시 부정 하시는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이 여래의 모습에 집착하여 자기도 그와 같은 모습을 갖겠다고 원을 세우고 수행하는 것은 좋지 만 지나
치면 그 집착에 가리어 수행이 잘 되지 않는 법이다. 이러한 수행자에게 여래의 32상에 집착하는 수행자는 삿된 길로
가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여래의 32상에서 여래를 볼 수 없으니 32상을 포기하고 무엇을 바라고
수행하느냐고 수행의 길을 잃은 수행자들에게 여래가 32상을 구족하지 않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즉 여래가 32상을 구족함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비치는 것이다.
이 말씀을 재확인하기 위하여, 수보리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겠다고 발심한 보살이 모든 법은 단멸(斷滅)
하는 것이라고 설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부처님이 묻고, 다시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사람은 법에 대하여 단멸상을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겉모양
안에 있는 부처님의 진신(眞身)을 보기를 원하기 때문에 겉모양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 신도님들의 수준에서 말하면 어느 곳이든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니 내 안 방에도 부처님이 계시
니 구태여 절에 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고 절에서 하는 법회에 나오려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단멸상이
다. 끊어져서 소멸되어가는 모습이다. 마치 나뭇가지가 원 줄기에서 끊어지면 소멸되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보시를 할 때 무주상보시를 하라고 하니 아무런 덕 볼 것이 없는데 무엇 하러 보시를 하느냐고 생각하기 쉽다.
덕 볼 것이 있어야 보시하는 사람의 마음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100불을 보시하였으면 100불 값만큼의 복
을 기대하는 사람이고, 하나는 100불을 보시하고 1000불 값만큼의 복을 기대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100
불의 복도 1000불의 복도 기대한 만큼의 복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또 높다. 이 100불 천불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점점 올라가게 되어 있는 것이 중생심이기 때문이다. 백 불에서 천불, 천불에서 만 불로 점점 올라가는
것이 중생심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크게 실망하고 남을 원망하는 단계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단멸상이다.
부부간의 사랑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사랑을 주고 그 이상으로 사랑을 받을 것을 기대하는 가정이 많아짐에 따라
실망도 커지고 실망이 커짐에 따라 가정이 파산하는 이혼율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단멸상이다.
형제지간에 서로 도와 주다보면 한 쪽에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 끝도 없이 커져가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경우 상대방
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도움의 요청을 끊지 않으려고 해도 끊지 않을 수 없는 사정에 직면하여 서로간의 관계가 끊어
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단멸상(斷滅相)이라고 한다.
자살하는 경우도 실망이 커짐에 따라 앞이 절망상태로 보이는 것이다. 이 절망상태로 보이는 앞이 자기의 생명을 끊
게 하는 동기가 되는 것이다. 이것 역시 단멸상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생활 주변에는 수많은 단멸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 불타사의 경우도 많은 신도들이 타 종교로 개종하거나 절에 다니는 것을 단념하신 분들이 많이 계신다.
이것 역시 모든 관계를 끊고 소멸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단멸상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왜 생기는 것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절에 다니는 목적이 무엇인가 구할 수 있고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절에 다녀보니 구할 것도 없고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될 때 이러한 사람들은 얻을 것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게 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구하는 마음, 얻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거나 비우면 편안해 진다고 하지만 이러한 사람
들은 그러한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무주상보시라고 하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가르
침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불교는 이러한 사람들을 제도하고 불교와 친화할 수 있는 활동이 전혀 없는 것이 사실이다.
불교에서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라고 서원하는 것을 제일 신조로 하면서도 막상 실천면에서는 너무나 미약하다.
유아 청소년 장년 노인 장애자 복지 문제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불교가 종교 단체로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체념하고 있는 것이니 일종의 단멸상에 가까운 현실이다.
이 27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단멸상을 설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많은 분들이 단멸상을 취하여 불타사를 떠났지만 이제 남아 있는 우리들이 힘을 모아 보리심을 발하여 이 단멸상을
깨고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익을 줄 수 있는 부처님의 집으로 성장시켜 나가야한다.
이것이 바로 상(相)을 여의라고 하지만 “여래가 32상을 구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
하지 말라”하신 말씀이다. 즉 상(相)을 여의라고 했지만 상(相)이란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상대방의 근기에 따라
법을 설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금강경』에서 구하는 마음을 버리고 무주상보시를 하라고 설하지만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굳이 구
하는 마음을 버리라고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아라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불타사로
성숙시켜나가야 한다. 현재 불타사에 나오시는 불자님들은 과거에 있었던 단멸상의 원인을 소멸하고 새 신도님들이
나오시면 따뜻하게 대하고 그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자비행이요 보살행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발심한 사람은 단멸상을 설하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의 뜻이다.
불교에서 구하는 마음이 없게 되면 마음이 편안하여지기 때문에 구하는 마음 없이 보시하라고 가르친다.
구하는 마음 없이 보시하는 것이 중생심을 가진 인간이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구하는 마음 없이 보시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물이 흐르면서 모든 생명들에게 물을 공급하지만 내가 너에게 생명을 유지하는데 빼 놓을 수 없는
물을 준다고 상을 내는 법이 없고, 공기가 모든 생명들에게 필요한 공기를 공급하면서도 공기를 공급한다고 상을 내는
법이 없다. 허공도 대지도 바다도 산도 어느 것 하나 그들이 수많은 생명들에게 은혜를 베풀지만 은혜를 베푼다는 상
을 내는 법이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부처님께서 무주상보시를 설하는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물건의 흐름에서 나에게 와 머물렀다는 뜻이고 내가 “내 것”을 남에게 준다고 하는 것은 나에
게 머물렀던 물건을 남에게 전달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므로 나라는 것은 이동하던 물질이 잠시 나에게서 쉬었다가 다
음 사람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의 이치 때문에 누구를 도와주었다는 상을 낼만한 일이 못되는 것이니 무주상보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주상보시는 불성을 가진 모든 존재를 공경하는 도리가 되는 것이니, 상(相)이 없이 “내 것”을 누구에게 준다는
모든 무주상보시는 바로 부처님에게 바치는 불공이 되기 때문에 불가 사량한 복덕을 짓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이 바로 불교의 평등사상이요, 자비사상이요, 보살사상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절 안에서부터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살려가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따뜻하고 온화한 분위기가 되어 오는 사람마다 평화를 얻어 갈 수 있게 하자. 이것이 바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발심
한 사람은 단멸상(斷滅相)을 설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 第二十八 (받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다)
須菩提 若菩薩 以滿恒河沙等 世界 七寶 持用布施 若復有人 知一切法無我 得成於忍 此菩薩 勝前菩薩 所得功德 何以故
須菩提 以諸菩薩 不受福德故 須菩提白佛言 世尊 云何菩薩 不受福德 須菩提 菩薩 所作福德 不應貪着 是故 說不受福德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항하강 모래수 만큼의 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하고,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일체
법이 무아임을 알아 인욕을 증득하여 이루면 이 보살은 앞의 보살이 얻는 공덕보다 수승하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모든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 까닭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습니까?” “수보리야, 보살이 짓는 복덕은 조금도 탐착함이 없이 짓기 때문에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느니라.”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복을 짓는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짓는 복은 순식간에 변할 수 있는 복이다.
예를 들면 정주영씨 아들 중에는 젊은 나이에 죽은 사람들이 있다. 젊은 나이에 죽는다고 하는 것은 불행 중에 불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돈 많고 돈으로 지을 수 있는 복이 많은데 왜 이른 일이 생기는 것인가?
돈으로 짓는 복은 상황에 따라 불행이 행복이 되고 행복이 불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가용 비행기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부자이고 자기 소유의 자가용 비행기를 가졌을 때, 남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자기가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또
하늘을 나를 수 있기 때문에 대단히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비행기 사고로 추락하여 죽게 되면 그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고 또 무모한 일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만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부부사이의 문제이고 자녀문
제이다. 영국의 찰스 왕세자는 영국 왕실의 전통을 깨고 다이애나와 이혼했고 이혼한 다이애나는 교통사고로 사망하
는 비운을 맞았다. 왕세자가 무엇이 부족하여 세자 비와 이혼까지 했어야 했을까? 우리는 돈이 없을 때 돈을 벌기
위하여 현재를 희생하여가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돈을 벌었다고 그 집이 반드시 더 행복한 것도 아니요 돈을 못 벌었
다고 그 집이 반드시 더 불행한 것도 아니다.
이러한 사례를 참고로 하고 우리들 스스로를 들여다보아도 재물이나 명예나 애욕이 행복의 측도인 것 같이 보이지만
그렇게 보는 사람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재물이나 명예나 애욕 등을 우리는 내 밖에 있는 경계라고 한다.
이러한 경계를 접촉할 때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우리들 중생의 마음이다. 돈이 남보다 더 있으면 좋겠고, 명예가
남보다 더 높았으면 좋겠고, 애인이 더 예쁘고 훌륭하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의 움직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중생의 마음의 착각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가진 돈이 많아도 남이 나보다 더 많은 돈
을 가지고 있으면 나는 불만인 것이다. 가령 나는 100만 불짜리 집에서 사는데 나의 친구들은 모두 200만 불짜리 집
에서 산다면 내가 사는데 불편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같은 100만 불짜리 집에서 사는데 나의 친구들은 모두 50만 불짜리 집에서 산다면 나는 자만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밖았 경계에 끄달리며 사는 것이 행복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어떤 보살이 항하
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한다고 하더라도 일체법이 무아이고 인욕바라밀을 성취한
보살보다 그 복덕이 수승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일체법이 무아라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 일체법이 무아라고 하는 말은 나의 밖았 경계에 있는 모든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무아의 반대인 유아(有我)는 변하지 않고 실재
(實在)하는 존재가 있다는 의미이고, 무아(無我)는 변하지 않고 실재하는 존재는 없다는 의미이다. 일체법무아(一切
法無我)는 모든 법이 변하지 않고 실재(實在)하는 존재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돈도 명예도 애욕도 부부사이도 자녀도 시간이 변함에 따라 모두 변하기 때문에 그에 의지해서 행복을 구하는 사람은
유아(有我)라고 착각하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녀들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이다. 그러나 노인이 된 사람들은 자식에게 의지해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흔히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
는 말을 한다. 이것이 바로 “일체법 무아”의 원리이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는 원리를 아는 사람은 곧
지일체법무아(知一切法無我)를 깨달은 사람이다.
돈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돈이 없을 때 일어나는 수치심이나 돈이 있을
때 일어나는 자만심이 일어나는 것을 자재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수치심이라든가 자만심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참고 지내지만 참는 것은 언젠가는 폭발할 시한폭탄인 것이다. 참지 않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수치심이나 자만심이 일어나지 않게 하도록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돈은 있다가도 없으니 있을 때 낭비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없다가도 있는 법이니 없다고 비열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이 일에 나쁜 면도 있을 거야하고 나쁜 면을 찾아보는 마음, 아무리 나쁜 일이 있어도 이 일
에 좋은 면도 있을 거야하고 좋은 면을 찾아보는 마음이 있는 한 가난하다고 수치스러운 마음이 일어나거나 부자라
고 자만심이 일어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있다면 그것은 수행이 잘 되지 않은 탓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여, 있고 없는 것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있고 없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있고 없는 것으
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은 돈을 벌어도 순리대로 벌지 무리하게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다. 무리하게 돈을 벌려고 하
지 않는다고 하여 게을러 거나 부지런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정성을 다하여 돈을 벌려고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돈을 버는 것이 자기도 위하고 남을 위하는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여 만사에 참으려야 참을
것이 없는 사람이 득성어인(得成於忍)한 사람이다.
이제보살(以諸菩薩) 불수복덕고(不受福德故)라고 하는 것은 지일체법무아(知一切法無我)하고 득성어인(得成於忍)한
보살은 남을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지만 그 과보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보살은 자기 마음 밖에 일체 사
물에 대하여 탐착하는 마음이 초월하고 자기 마음의 내에서 너와 나를 구별하는 분별심을 초월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과보도 구하는 마음이 없어진 것이다. 이러한 보살의 마음은 자기 내에 존재하는 불성과 계합하여 불성이 갖는 불가
사량한 복덕을 이용하는 보살이 된 것이다.
득성어인(得成於忍)은 인욕바라밀을 증득하여 이룬다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참는다는 말을 자주하지만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내가 헬스 스파(Health Spa) 입구에 왔을 때 어떤 노인 부부가 문 밖으로 나오면서 남자가 부인보고, 너 열쇄를 가졌
느냐? 부인이, 아니.
남자가, 너에게 주었는데. 부인이, 아니야, 나에게 주지 않았어.
‘너에게 주었다.’ ‘나에게 주지 않았다’를 되풀이 하면서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어 갔다. 부인의 목소리는 크고 날카롭
고 반항적이었고, 남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하지만 고집스러웠다.
어느 쪽도 자기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였지만 양보하거나 참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 내가 참아야지 하고 참는 것이 참는 것이다. 이것은 불법에서 말하는 참는 것은 아니다.
불법에서 말하는 인욕은 인욕바라밀을 의미한다. 참는 것은 자꾸 되풀이 하여 참다보면 참음이 쌓여서 골치가 아프게
되든지 소화불량증에 걸리든지 하는 신경성 질환에 원인이 된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위에서 예를 든 노부부가 서로 자기 주장이 옳다고 말다툼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짓이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어리석다고 한다. 이렇게 자기주장을 하다보면 서로가 화가 나게 되어 있다. 화가 나면 감정에
북받치게 되어 여러 가지 화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한다.
자기주장을 포기하고 참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이다. 왜냐 하면 이렇게 참음으로서 여러 가지 심적 육체적 병을 일
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참으라고 하는 것은 인욕바라밀을 하라는 뜻이다. 인욕바라밀을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
라 현명한 사람이다. 인욕바라밀을 하는 사람에게는 참으려야 참을 것이 없도록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
이라고 한다. 위의 예에서 남편이 부인에게 열쇄를 너에게 주었다고 하면 부인이 나에게 주지 않았다고 하면 남편이
반복하여 너에게 주었다 안주었다고 하며 목소리를 올릴 것이 아니라 그러면 열쇄가 어디 갔을까하고 남자도 부인도
열쇄를 찾아보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참을 것이 처음부터 생기지 않는 것이다. 참을 일이 처음부터 생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화낼 일도 생기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접하게 된다. 사람마다 다른 습관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앉은
자리를 잘 치워 놓지도 않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 일에 전혀 관계가 없는 일에 간섭하거나
훈수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남의 허물도 아닌 허물을 꼬집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남 잘되는
것을 보고 비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남의 말을 듣고 근거 없이 사람을 헐뜯고 다니는 사람
도 있다. 상대방의 기분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담배나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등등의 이유로 우리는 아무 실속 없이 자주 남과 부딪치게 되고 화나는 일이 생기게 된다.
화나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우리는 같이 다투거나 아니면 참아야 한다. 다투는 것도 어리석은 사람의 짓이요 참는 것
도 어리석은 사람의 짓이다. 이러한 경우에도 부딪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부딪치지 않는 마음은 내 마음에서 그러한 사람을 평을 하지 않는 마음이다. 내 마음에서 그러한 사람을 평을 하기
때문에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 하는 분별심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평을 할 것이 없
어져 버린다.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거나 평을 하지 않을 레면 각 사람마다 가진 버릇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하는데
서 끝이는 수련을 하여야 한다. 이러한 수련을 하게 되면 각 사람이 가지는 흠이 오히려 좋아 보일 수도 있고 재미있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처음부터 참을 것이 없는 인욕바라밀을 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목이 마른데 마실 물이 없다든지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는 때도 있다. 이를 때 목마른데 목마른데 하며 없
는 물 타령을 하거나 배고픈 타령을 하면 목이 더 마르고 배가 더 고프고, 참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러나 목마른데 물
이 없을 때 레몬이나 오렌지를 먹는 생각을 하면 목마른 것이 없어진다. 배고플 때도 진수성찬을 채려 놓고 자기가
밥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던지 자기가 좋아하는 바나나나 과일이나 떡을 먹고 있는 생각을 하면 배가 고프지 않다.
이렇게 하면 참을 것이 없게 되니 이렇게 하는 것이 인욕바라밀이다.
먼 길이나 산에 오르면서 다리가 아파 걸어가기 힘들다든지, 하기 어려운 공부를 해야 한다든지, 어려운 직장 일을
해야 한다든지, 힘겨운 사업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경우, 처음에는 참고 하다가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해
야 하는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그만 두는 경우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하는 일에 불평만 하고 아무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인욕바라밀은 말할 것도 없고 참을 줄도 모르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이 인욕바라밀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보시행을 해서 자기 마음에서 인색함을 소멸해야한다.
인색한 마음이나 탐내는 마음을 제거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복잡해지지 않기 때문에 하는 일이 어렵다는 생각이 적
게 든다.
둘째로 계를 지켜야 한다. 계를 지킨다는 것은 바르게 산다는 뜻이다.
아침에 일어날 시간에 일어나고 밥 먹을 때 밥 먹고, 모든 생명을 귀중하게 생각하여 자기 마음속에 잔인한 생각들을
소멸하고, 봉사활동을 하여 남의 물건에 탐을 내는 마음이나, 하는 일을 쉽게 성취 하려는 마음이나, 돈을 쉽게 벌려
는 엷은 마음들을 소멸하여야 한다. 사람이 일어날 시간에 일어나지 못하고, 밥을 먹을 시간에 먹지 못하면 생활이
무질서 하여지고, 남을 존중하지 않거나 물건을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경박하여 마음속이 항상 복잡하여
화가 자주 치밀어, 하는 일을 안정되게 할 수 없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소멸하는 수련을 하면 자기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화나는 일 조급한 일들이 소멸되게 되어 마음이 순일(純一)하여 진다.
셋째 자기가 할 일을 뒤로 미루거나 남이 해 주기를 바라는 게으른 마음을 소멸하여 부지런한 마음을 기르도록 수행
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가 게을러서 일을 성취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고 남이 자기를 도와주지 안에서
자기가 어려움을 당한다고 생각하여 옆에 사람들에게 화를 자주 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 노력하여 게으름이
소멸되고 부지런하여지면 하는 일에 집중력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세 가지 수행이 선행되면 자기가 하는 일을 다만 할 뿐인 사람으로 변신될 수 있다. 자기가 하는 일을 다만 할
뿐인 사람은 먼 길이든 높은 산이든 한 걸음 한 걸음 갈 뿐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갈 뿐인 사람은 아무리 먼 거리도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모두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직 할 뿐인 사람에게는 참을 내야 참을 일이 없으므로 인욕바라밀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은 신앙의 힘을 빌려야 한다.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 강한 사람은 부처님에게 맹세코
자기의 서원을 성취하겠다고 약속하여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보고 공경하는 마음을 기르고 모든
사물을 부처님의 재물로 보고 귀중하게 대하는 마음을 기르게 되면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사업장에서나 학업 장에
서나 하고자 하는 일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게 되고,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으니 성취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지일체법무아(知一切法無我)이고 득성어인(得成於忍)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 행하는 사람은 오직 할 뿐이므로 무엇에 탐착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이미 불가사량한 복을 구족하고 있으므로 복을 짓고자 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이 28장에서 설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第二十九 (위의가 적정하다)
須菩提 若有人 言 如來 若來若去若坐若臥 是人 不解我所說義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만약 오고, 가고, 앉고, 눕는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나의 설한 바 뜻을
알지 못함이니라, 왜냐하면 여래라는 것은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으며 또한 가는 바도 없으므로 여래라 이름 하느니라.”
설하신 맥을 이어 해석하기 위하여 앞 장의 설명을 다시 살펴보겠다.
제 26장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에서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라고 하여 부처님을 부처님의 형상이나 음성에서 보려고 하는 사람은 삿된 짓을 행하는 사람
이니 도저히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하여 형상이나 음성에서 여래를 찾지 않을 것을 당부하셨다. 이것은 마치
공부를 지나치게 열심히 하느라 자기 건강도 돌보지 않는 학생에게 공부는 그렇게 하는 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제 27장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에서 형상(形相)이나 음성에 집착하던 수자들이 형상이나 음성에서 여래를
볼 수 없다면 수행하는 것도 하나의 형상에 불과한 것이니 수행할 것도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여 단멸상(斷滅相)을
일으킴으로 깨달은 사람은 단멸상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형상 속에 여래가 있음을 설하였다.
이것은 건강을 해치며 공부하는 법이 아니라고 하니 아애 놀기 만하고 공부하지 않는 학생에게 공부는 해야 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제 26장에서 형상 속에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부정하시고 제 27장에서 그 부정한 형상 속에 여래가 있음을 설하셨다.
공부를 너무 지나치게 하는 것도 병이요 공부를 하지 않는 것도 병이라는 뜻이다. 너무 부지런한 것도 병 너무 게으른
것도 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 28장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에서 깨달은 사람의 행이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구하고자 하는 마
음에서나 탐착하는 마음에서 보살행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구하고자 하지
않는 마음이나 탐착하는 마음 없이 하는 보살행은 무아(無我)와 인욕바라밀을 증득한 지혜로운 행이기 때문에 무한한
복덕을 짓는다고 하는 의미이다. 제 26장에서 설하는 형상에 집착하는 마음도 없고, 제 27장에서 설하는 형상에 집착
하지 않는 마음도 없이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오직 자기 할 일을 행할 뿐임을 설하신다.
그리고 이 제 29장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에서 여래는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도 아니요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라고
하여 그 행이 고요하다고 하였다. 그 행이 고요하다고 하는 것은 오는 것도 아니요 가는 것도 아니요 앉는 것도 아니요
눕는 것도 아니라고 하여 여래의 행에서 여래를 볼 수 없음을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래자(如來者) 무소종래(無所從來) 역무소거(亦無所去) 여래라는 것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도 아니요 또한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라고 하여 그 행이 항상 고요하다고 하는 것은 만약 어디에서부터 온 곳이 있으면 반드시 가는 곳이 있
기 마련이다. 오는 곳이 있고 가는 곳이 있는 것이 약래약거약좌약와(若來若去若坐若臥)이다.
만약 왔으면 가야하는 것이고, 만약 갔으면 와야 하는 것이고, 만약 앉았으면 눕든지 서야하는 것이고, 만약 누었으면
앉든지 일어서야한다는 것이 약래약거약좌약와(若來若去若坐若臥)이다. 약래(若來)다음에 거(去)가 생략되고 약거
(若去) 다음에 래(來)가 생략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래서 오고 감이 있다는 것은 생과 멸이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약래약거약좌약와(若來若去若坐若臥)는 생멸법을 말하는 것이다.
생멸법을 행하는 것이 여래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여래의 뜻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는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도 아니요 가는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온 곳이 없으니 가는 곳도 없다는 이치이다.
온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고 하는 것은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는 불생불멸을 말하는 것이다.
불생불멸이니 여여부동(如如不動)하여 위의적멸(威儀寂滅)이라고 제명이 붙여지는 것이다. 즉 행(行)이나 상(相)이
적멸(寂滅)하다는 것이다.
행(行)이나 상(相)은 번뇌라고 할 수 있고 적멸은 고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번뇌가 오고 감이 없으니 고요하다는
것이다. 번뇌가 오고 감이 없어 고요하다는 뜻은 선정(禪定)의 정(定)을 의미하고 정은 곧 삼매이다.
삼매는 지혜 광명의 모체가 되는 것이다.
약래약거약좌약와(若來若去若坐若臥)라고 하는 것은 혹 오는 것은 가는 것이요, 가는 것은 오는 것이며, 앉은 것은
눕거나 서는 것이요, 누운 것은 앉거나 서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곧 생한 것은 반드시 죽는 것이라는 의미와 같다.
이를 생멸법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는 곧 슬픔이 오면 슬픔이 가는 것이요, 기쁨이 오면 기쁨이 가는 것이라는 의미
가 되는 동시에 슬픔이 가면 기쁨이 오는 법이요, 기쁨이 가면 슬픔이 오는 법이라는 의미도 된다. 기쁨과 슬픔이 오
고 가는 것은 반드시 번뇌의 자취를 남기고 윤회의 쇠사설이 된다.
이러한 기쁨과 슬픔의 윤회의 사설을 끊기 위하여 우리는 절에 보시도 하고 일요일에 절에 나와 기도도 하고 법문도
듣고, 수요일 저녁에 있는 강의도 듣고, 토요일 저녁에 절에 나와 참선도 하고 집에서 기도도 하고 염불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내 몸이 오고 가고 앉고 눕는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내 몸보다 내 마음이 이랬다가
저랬다하고, 이렇게 할까 저렀게 할까 망설이고, 자신이 없고 확신이 없고, 잘못 판단하여 이래야 할 것을 저렇게 하
거나 이렇게 해야 할 것을 저렇게 하여 잘 되 가는 일을 망쳐놓는 경우 등 우리들의 생활상이 모두 약래약거약좌약와
이다. 이러한 것을 모두 고쳐 무소종래역무소거(無所從來亦無所去)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오
는 곳 없이 오고 가는 곳 없이 가는 것이니 오는 것도 오는 것이 아니요 가는 것도 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왜냐 하면 와도 가도 항상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오는 곳이 없는 곳으로부터 오고 가는 곳이 없는 곳으로 간다고
하는 뜻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항상 있다는 뜻이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항상 있으니 오는 곳이 없는 곳으로부터 오고
가는 곳이 없는 곳으로 간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즉 오고감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들의 마음 중에서도 오고감이 있는 마음과 오고감이 없는 마음이 있다. 오고감이 있는 마음을 우리는 번뇌라고
한다고 앞에서 이미 말하였다. 우리들의 마음 중에 오고감이 없는 마음을 찾아보자. 우리는 이 오고감이 없는 마음을
앞에서 설한 선정에서 체험할 수 있으나 선정을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잠을 잔다. 잠에서 꿈도 없이 깊이 숙면(熟眠)하는 경험을 한다. 이 깊은 숙면에 잠겨 있을 때
우리들의 마음은 무엇으로부터 온 바도 없고 어느 곳으로 가는 바도 없는 것이다. 모든 오고 가는 망상이 모두 사라졌
을 때 그 마음속에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숙면은 내 몸과 마음이 가지고 있는 모든 병을 치유하는 대의왕(大醫王)이다.
누구도 치료할 수 없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대의왕(大醫王)인 것이다.
이 자리가 바로 법신불(法身佛)의 자리요, 우리 각자의 주인공(主人公)이 머무는 곳이다. 이 주인공 법신은 오고 감이
없는 것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아무리 미세한 번뇌나 생각이 일어나도 숨어버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에서 화두를 잡는다는 생각조차도 허용하지 않으며, 관세음보살을 염불한다,
아미타불을 염불한다는 생각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를 안 놓친다는 생각 염불을 한다는
생각마저 비워야 참다운 선정에 들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앞 장에서 형상에 집착하는 것도 버리고
집착하지 않는 마음도 버리고 오직 보살행을 할 뿐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수행을 위해 노력하면 수행 시에 선정에 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잠에서 숙면을 이루게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잠에서 숙면을 이룰 수 있으면 수행에서 선정에 드는 것보다 훨씬 유익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피로가 회복되고 정신이 맑아지고 하루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하는 것 등을 우리는 경험한다.
어떤 사람들은 숙면 중에 있었던 꿈이 용하게 맞는 사람도 있고 어지러운 사람도 있다.
숙면과 참선에서 말하는 선정과의 차이는 숙면에서 일어나는 일에 의식이 전혀 관여하지 못하고 또 숙면에서 일어
난 일을 의식에서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선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의식이 어느 정도 지배할 수 있고 선정에서 일어
난 일은 선정에서 나와도 우리들 의식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이 다르다고 보겠다. 몸을 치유하거나 마음을 편안하게 하
는 능력은 숙면 쪽이 훨씬 더 깊다고 본다.
이러한 숙면이나 선정을 잘 이루지 못하는 원인 중 가장 심한 것은 부부나 애인 사이에 애정에 대한 믿음이 깨어지고
의심이 생기기 시작할 때, 돈 거래가 있는 상대로부터 믿음에 금이 가고 돈을 받지 못할까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고,
저 돈을 받지 못하면 내가 갚아야 할 돈을 어떻게 갚을까 하는 경우이다. 믿음이 깨어지고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면
우리들의 머리 속에 오고가는 번뇌가 심하게 일어나게 된다. 생과 멸의 윤회가 심하게 일어나 고요함을 밤이고 낮이
고 얻지 못하고 방해 받게 되는 것이다.
신도님들 중에 이렇게 번뇌스러운 일이 생길 때 절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지만 절에서는 이러한 일이 처음부터 일어
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절에서 하는 일이고 부처님의 법이다.
어떻게 하면 믿음을 증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래(如來) 약래약거약좌약와(若來若去若坐若
臥)를 화신불과 보신불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화신불과 보신불은 상대에 따라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바르게 생각
하고 바르게 행하고자 기도를 열심히 하는 분에게는 화신불이나 보신불이 나타나 그를 수호하여주고 가피를 내린다.
그러나 그가 바르게 생각하지도 않고 바르게 행하지도 않고 바르게 기도하지도 않으면 화신불과 보신불은 나타나지
않거나 나타났다가도 가버린다. 예를 들면 스님이 바르게 살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보신불과 화신불이 그 절을 수호
하여 주시지만 그렇지 않고 기도도 잘하지 않고 술이나 마시러다니고 하면 보신불과 화신불이 절을 떠나고 절에는
불화가 생기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화신불고 보신불의 차이는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으나 화신불은 일반적인 소리에 응하는 부처님이고 보신불은 한
가지 일을 성취하게 하는 부처님이다. 예를 들면 학업 성취, 사업 성취, 불사 성취, 성불 등 꾸준한 노력 흔들리지 않
는 노력이 필요한 일을 성취하게 하는 부처님이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관세음보살님께서 화신불과 보신불의 역할
을 하시는 것으로 믿고 기도한다. 우리가 관세음보살님 기도를 하면 오시지만 기도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관세음보살
님도 가 버린다는 뜻이다. 즉 생멸이 있는 부처님이고 생멸이 있는 관세음보살님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에 생멸이 없는 부처님이 계시니 그 부처님이 법신불이고 이 장에서 무소종래(無所從來) 역무
소거(亦無所去)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법신불은 항상 우리들의 마음에 있으나 번뇌가 일어나면 그 번뇌에 가려지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번뇌가 일어나면 가려졌다가 번뇌가 사라지고 고요하여지면 우리가 그 법신불의 활동을 인식할 수 있는 경우들이 많다.
고요할 때 잊어버린 물건이 어디 있다고 가르쳐주시는 것이라든가, 학교에 갈수 있었는데 왜 안 갔느냐든가, 절에 가야
하지 않느냐든가, 누구를 만나보라든가 하는 등 우리는 내 마음이 고요할 때 긴요한 가르침을 받을 때가 많다.
특히 무엇 무엇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든가, 무엇 무엇을 안 하는 것이 바르지 않다든가 하는 등 가르침을 받게 된다.
이 가르침을 잘 받아 행하게 되면 화신불과 보신불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법신불은 내 마음의 상태와 관계없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항상 존재하는 부처님이므로 여래자(如來者)
무소종래(無所從來) 역무소거(亦無所去), 여래라는 것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고 하고, 불생불멸이라고도
하고, 참된 부처님 진불(眞佛)이라고 부르고, 화신불과 보신불은 우리들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오셨다가 가시기도 하
고 가셨다가 오시기도 함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생멸(生滅)함과 같이 생멸함으로 여래 약래약거약좌약와(若來若去若
坐若臥)라고 하고, 생멸하는 부처님임으로 참된 부처님이 아니라고 하여 비진(非眞)이라고 한다.
밖으로 뛰어나게 활동하시는 부처님은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응하여주시는 관세음보살님, 보신불 화신불이니,
내가 딴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관세음보살님, 보신불, 화신불은 가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법신불이 내재하여 있다가
고요한 기회를 타서 내가 그렇게 딴 생각을 하면 되느냐하고 일깨워주시는 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엉뚱한 생각을 했구나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또 관세음보살님, 보신불 화신불이 그 소리를 듣고 응하
여 주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어려울 때 부처님을 찾지 않고 오히려 부처님을 원망하며, 절에 가서 빌어라고 하
는 마음이 솟아오를 때마다 이를 억압하고 자기 식대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 마음 속 깊이 있는 여래의 소리를 무시하는 아집이 있기 때문에 점점 더 깊은 고통의 늪에 빠져
들어 가는 것이다. 이 법신불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을 견성(見性), 자기의 성품을 볼 수 있다고 하는 말로 통한
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부처님의 제자들은 염불을 하던 참선을 하던 자기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자하는 것
이다.
제 26, 27, 28장에서 이어지는 맥으로 보아 제 29장의 여래(如來) 약래약거약좌약와(若來若去若坐若臥)는 보신불과
화신불로 보고, 여래자(如來者) 무소종래역무소거(無所從來亦無所去)는 법신불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 第三十 (하나로 합하는 이치의 모양)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以三千大天世界 碎爲微塵 於意云何 是微塵衆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若是微塵
衆 實有者 佛 卽不說 是微塵衆 所以者何 佛說微塵衆 卽非微塵衆 是名微塵衆 世尊 如來所說三千大天世界 卽非世界
是名世界 何以故 若世界 實有者 卽是 一合相 如來說 一合相 卽非一合相 是名一合相 須菩提 一合相者 卽是不可說 但凡
夫之人 貪着其事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미진으로 만든다면 네 생각에 어떠하냐?
이 미진들이 얼마나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일 이 미진들이 실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곧 이 미진들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미진들은 곧
미진들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진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대천세계도 곧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세계가 실로 있는 것이라면 곧 하나로 합쳐진 모양이니 여래께서 말씀하신 하나로 합쳐진 모양은 곧
하나로 합쳐진 모양이 아니라 그 이름이 하나로 합쳐진 모양이기 때문입니다.”“수보리야, 하나로 합쳐진 모양이라는
것은 가히 말로서 할 수 없는 것이나 범부들이 탐착하는 일일 뿐이니라.”
앞의 제 29장을 설명할 때 “여래如來 약래약거약좌약와若來若去若坐若臥”를 육체가 오고가고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또 하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가 오고가는 것으로 해석하고 또 하나는 보신불과 화신불 혹은 관세음보살로 해석
하여 생멸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래자(如來者) 무소종래역무소거(無所從來亦無所去)”를 법신불로 해석하여
불생불멸법이라고 하였다.
이 제 30장도 이와 같은 안목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가루로 만든다면 그 가루의 수가 많겠느냐고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물어보고,
수보리가 대답하기를 많습니다. 그러나 만일 가루가 실제로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가루라고 말씀
하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루는 가루가 아니라 그 이름이 가루이기 때문입
니다 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물질적인 면에서 해석할 때 자동차를 예로 들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완전히 분해하여 놓고 그 각종
부품이 많다고 하겠느냐고 물으면 누구나 많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부품 중에 실제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부품
이 있느냐고 물으면 어느 부품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부품은 없다고 할 것이다. 변하지 않는 부품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
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떠한 부품도 곧 부품이 아닐 수 있으니 그 이름이 부품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 장에서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가루로 만들어 극히 미세한 티끌로 만들어 그 수가 한량없이 많은
티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중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티끌은 없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미
세한 티끌이란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티끌은 없는 법이다. 미세한 티끌이 변하여 티끌이 아닐 수 있으니 그 이름이 미
세한 티끌이라고 하신 것이다.
번뇌에 비유하여 설명하면 선남자 선여인의 마음속에서 한량없이 많은 번뇌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번뇌도
영원히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번뇌는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번뇌는 변하지 않는 번뇌가 아니니 곧 번뇌가 번뇌
아닐 수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번뇌라고 하신 것이다.
화신불에 비유하여 설명하면 선남자 선여인의 간절한 소망에 의하여 그를 수호하여 주는 화신불도 그 소망에 응하여
많아진다. 그러나 때로는 그의 간절한 소망이 해이하여 지고 나태하여지면, 그 많은 화신불 중 어떠한 화신불도 영원히
변하지 않고 그를 수호하여 주는 화신불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화신불은 곧 화신불이 아니
라 그 이름이 화신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미진에서 삼천대천세계로 말씀을 바꾸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이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라면 곧 하나로 합쳐진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앞에서 삼천대천세계를 자동차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듯이 자동차에 비유하면 자동차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존재하면
자동차가 고장 나는 법이 없으니 하나로 유지되지만 실제로는 고장이 나므로 하나로 유지되지 못하고 분해하는 경우
가 생기니 자동차가 자동차가 아니라 그 이름이 자동차라고 하는 것이다.
내 몸이라고 하는 것도 내 몸이 아니요 그 이름이 내 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내 몸을 해부하여 보면 오장 육부를 비롯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부분도 영원히 변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부분은 하나도 없다. 이렇게 시간을 다투며 변화하는
부분들을 다시 합쳐 봉합하여 내 몸이라고 하는 형상을 보아도 내 몸이 하나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전과 같은 내 몸은
아닌 것이다. 배가 아프다고 하면 약 먹여 주어 야지요, 허리 아프다면 주물러 주어 야지요, 심한 경우에는 수술해서
도려내야지요, 어느 것 하나 내 몸이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없는 법이니 내 몸이라고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부부사이의 관계로 설명하여 보면, 부부는 부부가 아니라 그 이름이 부부이다. 왜냐하면 부부 사이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이 존재한다면 부부 사이가 완전히 하나로 합쳐졌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헤어지는 경우도 있으니
그 이름이 부부라고 하는 것이다.
범부들이 구하는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최상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최상의 깨달음이다.
왜냐하면 최상의 깨달음을 하였다면 법신불과 하나로 합쳐져야 하지만 하나로 합쳐진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므로
그 이름이 깨달음인 것이다.
일합상(一合相)이라고 하는 것은 가령 예를 들어 설명하면 자동차에 있는 모든 부품을 모두 분해하여 놓으면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또 각기 다른 기능을 하도록 되어있다. 이 각기 다른 모든 부품을 다시 결합하면 하나의 자동
차가 된다. 이 각기 다른 부품을 다시 조립하여 하나의 자동차가 되었을 때 일합상(一合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서 뜻하는 일합상(一合相)은 분해하기 이전의 차와 똑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거주하는 집이나 빌딩도 빌딩이라는 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부수어서 분해하면 각기 다른 건축자재로 구성
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 각기 다른 건축자재를 다시 결합하면 또 하나의 모습을 한 빌딩이 되지만 전과 똑같은 하나
의 집이 되지는 않는다.
삼천대천세계를 부셔서 된 미세한 티끌도 티끌 각자의 모습은 다르겠지만 그들을 다시 모아 결합하면 다시 삼천대천
세계라는 한 모양을 하게 되지만 전과 똑같은 삼천대천세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라는 이름 아래 볼 때는 모든 국민이 하나로 보이지만 그 내부를 드려다 보면 세계 각
국의 인종들이 다 모여서 사는 곳이 미국이다. 인종마다 다른 특성이 있고 사람마다 다른 특성을 가지고 미국이라는
나라를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구성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펴보면 한국으로 가는 사람 미국으로 들어오는 사람
병원에 가는 사람 죽는 사람 태어나는 사람 등 수 없이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 개개인의 변화는 전체 미국이라는 나라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어떠한 것도 영원한 것이 없으니 미국이라고
특별히 좋아 할 것도 싫어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약세계(若世界) 실유자(實有者) 즉시일합상(卽是一合相)”중 실유자(實有者)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있다’라는 뜻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실제로 존재한다’라는 것이다. 합하여 설명하면 ‘만약 세계가 영원히 변
하지 않고 실제로 존재한다면 즉시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을 가질 것이다’이다. 즉 분해하면 그 구성요소는 각기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이들이 모두 영원히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합하면 전과 똑 같은 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래설일합상 즉비일합상 시명일합상”이라고 하는 것은 자동차를 분해하였다가 다시 합쳐 하나로 만들어 한
자동차의 모습을 갖게 하고, 집을 분해하였다가 다시 결합하여 한 집을 만들어 한 집의 모습을 갖게 하고, 삼천대천
세계를 부수어서 티끌로 만들었다가 티끌을 다시 합쳐서 하나의 삼천대천세계를 만들어 하나의 삼천대천세계의 모습
을 갖게 하였다고 하더라도 원래의 자동차, 원래의 집, 원래의 삼천대천세계와 똑같이 하나가 된 모습은 아니므로 그
이름이 일합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범부가 수행을 해서 모든 번뇌를 여의고 마음 가운데 있는 법신불과 일치하였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하나로 합쳐진 것이라고 보기 어려움으로 그 이름이 일합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합상(一合相)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가설(不可說)한 것이고 다만 범부들
이 탐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때 일합상(一合相)은 항상 여여하여 변함이 없는 법신불과 완전히 계합하는 것을
말한다. 즉 법신불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법신불과 분리(分離)하였다가 다시 합쳐도 법신불과 한 모습을 갖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법신불 그 자체가 된다는 것은 불가설(不可說)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왜냐하면 화신불이나 보신불이 법신불
과 일합상이 되었다고 하면 화신불과 법신불은 법신불과 일치하여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니 일합상이 되었다고 하여도
옳지 않고 일합상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 화신불과 보신불은 법신불에서 나왔으니 일합상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옳
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일합상자(一合相者) 즉시불가설(卽是不可說)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범부가 수행하여 모든 번뇌를 여의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법신과 계합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였다
고 한다면 그는 아직 일합상(一合相)을 이룬 수행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증득할 것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바가 없다
고 하여도 옳은 것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들어 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합상자 즉시불가설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참선 중에 선정에 드는 때가 있다.
선정에 든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자기가 선정에 들 수 있었는지 어떻게 선정에서 나왔는지를 사실대로 표현
하기 어려움을 느낀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숙면에 드는 때가 있는데 어떻게 숙면에 들었는지 숙면에서 나왔는지
를 사실대로 아는 사람도 없고 표현하기도 어렵고 재현하기도 어렵다.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선정에 들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선정에 들지 못하고, 그 마음마저
사라졌을 때 선정에 들게 되는 것이고, 잠을 자는 것도 잠을 자야하는데 하는 생각이 남아 있는 한 잠에 들지 못하고
잠을 자야하는데 하는 생각이 사라졌을 때 잠에 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합상자(一合相者) 즉시불가설(卽是不可說) 단범부지인(但凡夫之人) 탐착기사(貪着其事)”라고 한 것
이다.
‘일합상이라는 것은 즉시불가설한 것인데 다만 범부들이 탐착하는 일일 뿐이라’고 한 것은 이 제 30장의 결론 부분이다.
삼천대천세계를 다 부셔서 가루를 만들어 그 하나하나를 다 검토하여 봐도 ‘실유자(實有者)’즉 영원히 실제로 존재하는
자는 없는 것이니 착각하여 적은 일이나 부분에 탐착하게 되면 큰일을 저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동차의 한 부속
품에 탐착하여 그 부속품을 차에서 빼버리면 자동차를 못 쓰게 되고, 집에 한 기둥을 탐하여 빼버리면 집을 못 쓰고,
삿된 사랑에 탐하면 가정에 풍파가 오고, 해야 할 공부 중 한 부분에 탐을 내면 공부 전체가 멀어지고, 수행에 탐을 내도
깨달음이 멀어지는 법이며, 자연자원에 탐을 내니 자연을 오염하여 인간의 생명이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일단 망가진 것을 후회하고 참회하여 다시 봉합한다고 하여 하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전과 같지는 않는 법이니 처음
부터 탐착하지 말고 순리대로 하라는 것이다.
탐착하지 않고 순리대로 한다고 하여도 세계는 변하는 것이고 변하는 세계 속에서 그 변화를 순조롭게 따라가면 자연히
그 변하는 세계 속에 하나로 영입되지만 탐을 내서 구하는 마음이 있게 되면 구하고자 하는 그 대상은 자신으로부터 점
점 멀어질 뿐이라는 것이다. 잠을 ‘자야지’ ‘자야지’ ‘자야지’하고 잠에 탐착하면 잠은 점점 멀리 다라 날 뿐이니 잠을 잔
다는 생각을 놓아 버릴 때 잠이 오는 것이 이치라는 것이다.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第三十一 (자기 소견을 내지 않음)
須菩提 若人 言 佛說我見人見 衆生見壽者見 須菩提 於意云何 是人 解我所說義不 不也 世尊 是人 不解如來所說義 何
以故 世尊 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是名我見人見 衆生見壽者見 須菩提 發阿耨多羅三藐
三菩提心者 於一切法 應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不生法相 須菩提 所言法相者 如來說 卽非法相 是名法相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말하였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여래가 말한 뜻을 이해한다 하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은 곧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
아니라 그 이름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이는 일체법에 대하여 응당 이와 같이 알며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
고 이해하여서 법상(法相)을 내지 말지니라. 수보리야, 법상이라고 하는 것은 곧 법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법상이
라고 여래가 설하였다.”
제 30장에서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미진을 만들어 찾아 봐도 영원히 변하지 않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또 삼천대천세계를 다 둘러 봐도 영원히 변하지 않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진리와 하나로 합쳐져서 영원히 변하지 않고 여여 부동한 것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곧 불가설하고 오직 범부
들이 탐착하는 바라고 하는 여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세존께서 아상이 있어 일합상이라는 것은 부처님만 알고
중생은 아무 것도 모르고 탐착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냐.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여래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설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 이 사람은 여래의 뜻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여래가
수보리에게 물은 것이다.
수보리가 대답하기를 그 사람은 여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미 반야지혜를 깨달아 무상정
등정각을 이루시어 무주(無住) 무상(無相) 무위(無爲)의 법으로 오직 중생을 위하여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설하
십니다.
세존께서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 있어서가 결코 아닙니다. 오직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기 위하여, 중생이 받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소멸하여야 한다는 것을 설하시고, 중생이 아직 아견 인견 중생견 수
자견을 다 소멸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중생들은 아직 유주(有住) 유상(有相) 유위(有爲)의 법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의 참 마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와 하나로 합쳐진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고, 다만 그 일합상
을 탐착할 뿐이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은
여래의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 아니라 중생을 위하여 설하신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라는 뜻이다.
여래께서 이와 같이 중생은 잘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하는 것을 듣고 부처와 중생은 차별이 있다는 법을 여래가 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법상(法相)이라고 하고, 중생에게도 불성이 있
으니 부처와 중생이 평등하다는 말을 듣고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으니 부처를 특별히 공경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법상(法相)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법은 법을 설하는 대상에 따라 그에 맞게 설하신 것이기 때문에 한 경우에
설한 법문이 다른 경우에 다를 수 있다. 이러한 것을 감안하여서 법을 해석하여 법상(法相)에 걸리지 않게 하여야 한
다는 것이다.
불교 동화에 나오는 예를 하나 들면 어느 스님이 나무 밑에 앉아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데 토끼 한 마리가 헐떡이며
뛰어와서 뒤에 포수가 자기를 잡으려고 따라오고 있으니 자기를 좀 숨겨달라고 간청하였다. 스님이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는 토기를 불쌍히 여기시어 그를 장삼 밑에 숨겨 주었다. 잠시 후 포수가 달려와 스님에게 토기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였느냐고 물어보았다. 스님이 보았다고 대답하였다. 포수가 어느 방향으로 갔느냐고 물어
보았다. 스님이 저쪽으로 갔다고 오른 쪽 나무를 가리키었다. 포수는 그 쪽 나무를 향하여 달려갔다. 포수가 간 것을
보고 스님이 토끼보고 장삼 밖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두려움에 싸인 토끼는 몸을 떨며 장삼 밖으로 나와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포수가 보이지 않아 숨을 놓았다. 스님이 포수가 저쪽으로 갔으니 너는 이쪽으로 가거라 라고 일어주어
토끼는 포수와 반대방향으로 갔다. 이 이야기를 듣고 스님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님은 계를 파한 거
짓말쟁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스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또 스님에 대한 법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다.
우리들의 입장이나 수준에서도 이와 같은 일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부모가 자녀를 위하는 마음에는 자신들의 득을
보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나 때로는 자녀들을 나무라기도 하고 자녀들의 뜻대로 말과 행동을 못하게 하여야 하
는 경우들이 있다. 이러할 때 자녀들이 부모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자기들을 나무란다고 생각하고 대드는 때도 있고
자기 인생 자기가 사는데 왜 부모가 간섭하느냐는 식으로 대드는 때도 있다.
이와 같이 자녀들이 부모를 보고 알고 이해하는 것은 자녀들이 부모가 부모 자신을 위하여 그들을 탓하고 그들이 하
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험을 통하여 볼 때 자녀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보
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라고 보고 알고 믿고 이해하고 행하지 왜 우리 부모는 저럴까 하는 법상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다.
법상에 대하여 좀 더 설명하면, 요즈음 부부가 맞벌이하는 가정이 많아지고 있다. 부부는 자식들을 위하여 돈을 벌려
고 열심히 일하고 또 자녀들도 집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주기 바란다. 공부를 해야 할 자녀들이 부모들이 집에 돌아오
기 바로 직전까지 TV를 보다가 부모가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TV를 끄고 자기 방에 들어가 공부를 한다.
집에 돌아 온 부모가 그 자녀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하루 종일 집에서 열심히 공부한 줄 알고 대단히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자녀들을 맞이하고 칭찬한다. 반대로 종일 공부하다가 피곤해서 TV를 막 켰는데 부모님이 들어오셔서 보고,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종일 TV만 보고 있다고 걱정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도 부모가 자기들이 본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법상이다. 똑똑한 자녀들은 부모가 갖는 이와 같은 법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식견이 맑은 부모들은 자녀가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공부하고 있다고 칭찬하여 주지만 종일 공부했다는
추상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녀가 공부하지 않고 TV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그 때 TV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종일 TV를 보고 있었을 것이라고 비약적인 생각은 하지 않는다. 부모의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보대 어떠한 상을 짓지 않는 것이다. 나름대로 각자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중생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할 때, 부처님이 중생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스님이 토끼를 살리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였을 때 스님은 계
를 파하였고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발심한 사람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믿고 이해하고 법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이해하게 된다.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리
를 깨달으시고 자신을 위하는 마음에는 무주(無住) 무상(無相) 무위(無爲)의 법에 계심을 확실하고 철저하게 믿을 때
부처님께서 범부들에게 설명할 수는 없고 다만 범부들이 탐착하는 바라고 하시는 발씀을 듣고 자신들이 아직 수행이
부족하여 천안이나 혜안이 열리지 못하였으니 부처님의 말씀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이라고 알고 보고 믿고 이해하면 법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이 법상이라는 것도 여래가 법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중생을 위하여 법상을 설명하려고 하니 법상이 된 것이라고 하
시는 말씀이다.
여래가 이 경을 설하시어 일체 중생에게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깨달아서 스스로 보리과(菩提果)를 수행하도록 하셨
다. 범부들이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곧 여래께서 아(我) 인(人) 등의 견해(見解)을 설했다고 하니, 여래께서 설
하신 매우 깊은 무상(無相) 무위(無爲)의 반야바라밀법을 알지 못한 것이다. 여래께서 설하신 아인(我人) 등의 견해
(見解)는 범부의 아인(我人) 등의 견해(見解)와 똑같지 않으니, 여래께서는 일체 중생은 다 불성(佛性)이 있는데 이것
이 참다운 아견(我見)이라고 하셨으며, 일체 중생의 무루(無漏)의 지혜 성품은 본래 스스로 구족해 있는데 이것이
인견(人見)이라고 하셨고, 일체 중생은 본래 번뇌가 없는데 이것이 중생견(衆生見)이라고 하셨으며, 일체 중생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불생불멸(不生不滅)한데 이것이 수자견(壽者見)이라고 하셨다. 이것이 여래의 견(見)이다.
보리심을 발한 자는 응당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음을 보며, 응당 중생의 무루종지(無漏種智)가 스스로 구족함을
알며, 응당 일체 중생의 자성(自性)이 본래 생멸이 없음을 믿을 것이니, 비록 일체의 지혜방편을 행해서 사물을 접하
고 중생을 이롭게 하나 능소(能所)의 마음을 짓지 말아야 한다. 입으로 무상법(無相法)을 설하면서 마음으로 무상행
(無相行)을 행(行)하여 마음에 능소가 없으면 이것을 ‘법상(法相: 여래 법상, 실상)’이라고 한다.
이것이 여래의 법상(法相)이다.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第三十二 (응화는 참이 아니다)(끝)
須菩提 若有人 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 持用布施 若有善男子 善女人 發菩提心者 持於此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人演說 其福 勝彼 云何爲人演說 不取於相 如如不動 何以故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佛說是經已 長老須菩提 及諸比丘比丘尼 優婆塞優婆夷 一切世間 天人阿修羅 聞佛所說 皆大歡喜 信受奉行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무량아승지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하더라도,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보리심을 발하여 이 경을 지니고 사구게 등을 수지 독송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연설하여준다면 이 복이 저 복보다
수승하리라. 어떻게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연설하는 것인가 하면, 상(相)을 취하지 아니하여 여여하여져서
움직이지 않음이니라. 왜냐하면 「일체 유위법은 꿈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 같고 또한 번개
빛과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여 마치시니 장로 수보리와 모든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와 일체 세간의 천상의
사람과 아수라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모두 크게 환희하여 믿고 받아 받들어 행하였다.
앞의 제 31장에서 부처님께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설하신다고 어떤 사람이 말한다면 그 사람이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뜻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이것은 제 30장에서 진리와 하나로 합쳐지는 것만이 영원히 변
하지 않고 실재하는 것이나 이것은 불가설한 것이고 다만 범부들이 탐착하는 바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어
떤 사람이 부처님의 뜻을 모르고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은 것과 같다.
이 장에서 설하는 법상(法相)이란 진리에 대한 그릇된 상을 의미하는 것이나, 제 31장에서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일으키는 상으로 설하여 지고 있다. 우리들의 말로 표현하면 말하는 사람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말 꼬리를 잡아 시비를 일으키는 상이다.
전장에서 설하고 있는 법상(法相)은 사실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법을 아전인수
(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여 자기의 생각하는 틀을 옳다고 강화하여 생기는 틀에 자기가 점점 더 깊이 구속되어 가는
것이다. 법을 잘못 이해하여 생기는 틀에 구속되어 있음에도 본인은 구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를 설하여 피해를 입히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일으키는 법상(法相)은 우리들의 수준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많은 불화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부자(父子)지간에 일어나는 불화와 살인극이 벌어지는 사건들이나, 친구지간에 일어나는 불화와 살인극이 벌어지는
사건, 고용주와 종업원 사이에 벌어지는 불화와 투쟁, 부부사이에 일어나는 불화와 이혼, 나라와 나라사이에 생기는
경쟁과 전쟁 등 모든 불화들이 다 이 법상(法相)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강도 사건 사기사건 살인사건 등도 모두 법상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법상이 일어나지 않고 한
나라의 뜻이 상대방 나라에 바르게 전달되고 그 사실을 사실대로 인식할 수 있다면 전쟁에 들어가야 할 일이 없을 것
이다. 이라크와의 전쟁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과의 전쟁 등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법상이 한번 일어나기 시작하면
불신(不信)이 생기기 때문에 전쟁이란 극단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며, 부부사이에 일어나는 불화와 이혼도 말하는 사
람의 뜻이 상대방에게 바르게 전달되고 바르게 이해된다면 법상이 강하게 치솟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부사이에도 그 뜻이 바르게 전달되지 못하여 법상을 일으키게 되니, 만일 상대방의 뜻이 사실대로 이해될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되면 이혼까지 가야할 일이 없을 것이다. 고용주와 종업원 사이에 일어나는 투쟁도 법상이 원인
이 된다. 고용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피고용인의 뜻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용주
가 돈을 얼마를 벌었는데 우리들에게 너무 적게 준다고 더 받아 내려고 투쟁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쌍방에 뜻을 사실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투쟁할 일이 없게 된다. 친구지간에 살인극이 벌어지는 이유
나 부자지간에 벌어지는 살인극도 알고 보면 법에 대한 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서로가 사실대로 인식하면 법에 대한 상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제 32장에서 어떤 사람이 만아승지세계 칠보를 가지고 보시한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이 법상(法相)을 일으키는 사
람이라면 『금강경』 사구게를 수지 독송하고 남을 위하여 연설하는 사람이 얻는 공덕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남을 위하여 연설하는가 하면 “불취어상(不取於相) 여여부동 (如如不動)”하게 하여야 한다고 했다.
앞의 여러 장을 통해서 계속하여 부처님께서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 닦아야 할 보림에 관하여 설하셨다.
이제 그 보림 수행의 마지막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에서 보림하는 수행자는 불취어상(不取於相) 여여부동하게
남을 위하여 연설하여야 한다고 가르침을 내리고 계신다.
“불취어상(不取於相)”의 상(相)을 모든 상(相)으로 해석하게 되면 ‘모든 상(相)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뜻으로 해석
된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도 가(可)하지만 “불취어장”도 하나의 상이고, “여여부동(如如不動)”한 것도 하나의 상(相)
이므로 “불취어상”도 “여여부동”한 것도 버려야한다고 해석될 수 있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나 상(相)을 제 31장에서 설하신 법상(法相)으로 해석하면 제 31장과 제 32장이 문맥이 통하게 된다.
불취어상(不取於相)”을‘모든 법상(法相)을 취하지 말라’, 즉 부처님의 법을 설하는 사람은 ‘모든 잘못된 견해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한다.’『금강경』을 읽고 외우고 스스로 행하고 남을 위하여 설하여 주는 사람이 자기 업식(業識)에 따
라 글자를 읽고 외우고 스스로 행하고, 자기가 이해하는 글자의 뜻에 따라 남을 위하여 설하여 주는 것은 부처님이
설하신 뜻과는 다른 자기의 업식에 의하여 지은 법상을 남에게 설하는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기 업식에 의하여 지은 법상을 취하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시는 것이다.
자기 업식으로 지은 법상은 자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더 깊이 빠지게 됨으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되지
못하지만, 업식으로 지은 모든 법상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면 스스로 “여여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석하는 것이 앞장과 문맥이 이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그 해석도 쉬워지고 부처님의 뜻에 합치하여진다고
생각된다.
자기 업식(業識)을 지워, 업식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생각의 착오로 지은 법에 대한 상을 일으키지 않도록 한다면,
부처님이 설하신 법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행하고 남을 위하여 연설할 수 있게 된다.
“여여부동(如如不動)”하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연설할’때 선교방편(善巧方便)으로 근기(根機)를 보고 기량
(機量)에 응하여 가지가지로 마땅함에 따라 설법하는 것을 뜻한다. 법을 듣는 사람이 가지가지 모습으로 똑 같지 않으
므로 “불취어상(不取於相)”하여 분별심을 내지 않고, 다만 공적(空寂)하고 일여(一如)한 마음을 요달해서 소득심(所
得心)이 없으며, 승부심(勝負心)이 없으며, 희망심(希望心)이 없으며, 생멸심(生滅心)이 없으면 이것을 ‘여여부동(如
如不動)’이라고 한다. 이것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며 금강반야바라밀이 되는 것이다.
何以故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은 업식(業識)에 의하여 지은 모든 법상(法相)이다. 진실(眞實)은 명(名)과 상(相)을 떠난
것이고, 깨달음이란 모든 업(業)이 정화(淨化)되어 청정함에서 오는 것이다. 업식(業識)에 의하여 지은 모든 법상은
꿈과 같아 깨고 보면 진실이 아니고, 환상(幻相)이라 제 정신으로 보면 망령된 생각에 불과한 것이고, 거품과 같아
사실보다 과장된 것이며, 그림자와 같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밤이슬과 같아 해가 뜨면 사라지듯이 밝은 마음으로
보면 없는 존재이고, 번개와 같아 번쩍할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응당 이와 같이 관할 것이다.
앞의 두 구절과 합치면 云何爲人演說 不取於相 如如不動 何以故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다. ‘법상을 취하지 말고 여여부동하게 하라’, 왜냐하면 일체 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 빛과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하라고 하셨다.
이 사구게는 남을 위하여 설법할 때,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하여야 함을 부연하여 설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불취어상(不取於相)의 상(相)을 법상(法相)으로 해석한다고 위에서 언급하였다.
이 법상을 이 사구게에서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라고 설하고 있다. 일체유위법이란 업식을 가진 사람들이 짓는
모든 법이라는 뜻이다. 업식을 가진 사람들이 짓는 법이란 진리에 어긋나는 법이고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는 법이다.
이와 같이 진리에 어긋나고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는 그릇된 견해를 법상이라 한다고 위에서 설명하였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모두 법상에 속한다.
제 31장에서 어떤 사람이 부처님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설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부처님이 설한 법의 뜻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 후 부처님께서 수행하는 사람은 “당연히 불생법상(不生法相)”, 법상
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마음에서 짓
는 모든 법이 일체유위법이다. 그리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간략히 두자로 표현한 것이 법상이고, 법상과 일체
유위법은 동격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역시 마음에서 짓는 상(相)이다.
유위법(有爲法)의 법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과 접촉함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든 접촉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법
이든 상관없이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라고 해석하
는 것이 옳다고 본다.
우리들의 의식 밖에 존재하는 산하대지(山下大地) 등 일체 만물, 인조(人造)이든 비인조(非人造)이든 상관없이 일체
만물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업장이 두터운 사람이 만물을 보고 느끼는 심상(心相)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 심상(心相)이 그릇된 견해(見解)를 일으켜 법상(法相)이 되고 법상이 말과 행동으로 옮겨질 때 삿된 짓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삿된 말과 행동이라도 이 행동을 여몽환포영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업장이 두터운 내 심상(心相)에서 만들
어진 그릇된 견해를 법상이라고 하기도 하고 유위법이라고 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 밖에서 이루어 진 것을
법상이라고 하거나 유위법이라고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하였다면 도둑질을 한 행동 그 자체와 그 결과를 가지고 법상이다 혹은 유위법이라고 하지 않
는다는 것이다. 그 행동의 동기가 법상이고 혹은 유위법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동기는 각자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도둑질 할 법상이 있었기 때문에 도둑질 한 것이니, 도둑질할 법상이 없었다면 도둑질할 이유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니, 도둑질하고 싶은 법상이 일어날 때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이라고 관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의 심상(心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마음의 업장이 소멸되고 청정한 마음에서 이루
어지는 견해나 법을 무위법(無爲法)이라 고 한다.
유위법과 무위법의 차이는 내 마음 밖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법에 의하여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업장의 영향
을 받는 심상에서 짓는 법은 유위법이고, 내 마음이 업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심상에서 짓는 법은 무위법이 되는 것이다.
업장의 영향을 받는 심상이 짓는 법에는 희노애락(喜怒哀樂)에 따라 번뇌의 폭이 심히 크기 때문에 여여부동(如如不動)
할 수 없지만 업장이 소멸된 청정한 마음의 심상에서 짓는 법은 희노애락이 사라지고 번뇌가 사라졌기 때문에 저절로
불취어상(不取於相), 법상을 취할 것이 없으므로 여여부동(如如 不動)하게 되는 것이다. 업장의 영향을 받는 심상이 짓
는 희노애락이 꿈과 같아 깨고 나서 보면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환(幻)과 같아 깨고 나서 보면 허망한 것이고, 거품과
같아 사실보다 과다하게 평가된 것이고, 그림자와 같아 본래의 실체(實體)가 아니고, 이슬과 같아 해가 뜨면 없어지듯이
밝은 마음으로 보면 사라지고, 번개 빛과 같이 찰나 사이에 사라지는 것이다. 업장이 짓는 희로애락을 응당 이와 같이
관하여 업장을 소멸하고 무위법(無爲法)을 얻어 불취어상(不取於相)하고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수행자(修行者)들이
중생에게 설법하고 제도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할 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깨달은 바를 실재 행동에서도 깨달은 사람으로서 불취
어상(不取於相)하고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되는 것이다. 곧 불(佛)의 위(位)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佛說是經已 長老須菩提 及諸比丘比丘尼優婆塞 優婆夷 一切世間 天人阿修羅 聞佛所說 皆大歡喜 信受奉行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여 마치시니 장로 수보리와 모든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와 일체 세간의 천상의 사람과
아수라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듣고 모두 크게 환희하여 믿고 받아 받들어 행하였다.
이 금강경을 설하실 때 참여하지 않은 중생을 살펴보면 육도(六道) 중생 가운데 지옥 아귀 축생이 포함되어 있지 않고,
사람 중에서 장로 수보리 비구 비구니 우바세 우바이 이외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일체 세간의 하늘 사람과 아수라는
포함되어 있다.
끝으로 제명(題名)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 대하여 말씀드리겠다. 응화(應化)란 응신불(應身佛)과 화신불(化身佛)
을 의미한다. 응신불과 화신불은 참된 부처가 아니라는 뜻이 제32장의 제명(題名)이다.
우리는 평소에 부처님에 대한 분별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소 당혹스럽게 들릴 수 있다.
궁극적으로 무엇이 참된 부처이냐 하는 것을 설한 부분이 바로 이 마지막 장 제 32장이다.
제 18장에서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을 가지신 부처님을 설하고 있다.
이러한 눈들은 중생의 고통에 응하여 사정을 살피고 그에 맞게 몸을 나투어 중생을 인도하고 교화하기 위하여 부처님
에게 필요한 방편술이다. 타심통, 천이통, 숙명통, 신족통, 누진통을 하는 것도 다 중생의 고통에 응하고 그에 맞게 나
투기 위한 방편술이다.
이러한 방편술이 귀하고 중생제도를 위하여 지극히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방편은 수행에 의하여 얻어진 것
이다. 수행에 의하여 이러한 방편술이 가능하게 하는 근원은 바로 중생 누구에게나 잠재하고 있는 불성(佛性)이고,
이 불성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법신불(法身佛)이다.
중생 각자의 마음에 법신불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 법신불이 중생의 한량 없는 업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각자의
사고하는 방식이 다르고 말과 행동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업에 영향을 받아 취하는 마음이 있게 되면 심각한 우비고뇌(憂悲苦惱)가 따르게 됨으로 이 우비고뇌를 일으키는
마음을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한 이치를 반드시 관하고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한 이치를 반드시 관하면 그러한
마음을 일으키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소멸하고 업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위법이 일어나 여여부동(如如不動)
하게 되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들게 되고 금강반야바라밀에 들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 곧 참된 부처님 법신불
(法身佛)이라는 것이다. 응신불 화신불 보신불 등은 모두 이 참된 법신불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법신불만이 original,
원불(元佛)이라는 의미이다.
이상 『금강경』 강의 내용은 대한불교 조계종 시카고 불타사 주지 현성스님이 2002년 9월 22일부터 2004년 1월 11
일까지 시카고 불타사 일요법회에서 법문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