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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때와 같으리라 - 허리케인 '카트리나'
1부-노아의 때와 같으리라
아직도 미국은 지난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영향으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인명 피해와 전염병의 문제, 그리고 문화적인 도시 유산의 완전한 파괴, 오일 쇼크와 물가의 상승 등 많은 이유들에서 카트리나는 아직도 우리들에게 여파를 미치고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준 천연재해로 손 꼽히면서 이 허리케인은 오래도록 우리 기억 속에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조금 더 나아가, 성경의 예언의 말씀을 연구하고 살피는 사람들로서 좀 더 영적인 각도에서 이 문제를 재 조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노아의 때
마 24장 37~39절에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시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때에는 그 상황이 노아의 때와 흡사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할 것이라는 말인가?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에 있어서 그러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와 곧 임하는 심판에 대한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특히, 여러가지 경고의 말씀들에 대한 인류의 반응이 노아 홍수 시대의 사람들과 아주 흡사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위의 말씀의 문맥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한 가지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홍수가 임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생활 방식에 대한 언급이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깨닫지 못했다는 부분의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일들은 죄도 아니요, 지나친 행동들도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삶의 필수적인 과정들이다. 누가 먹고 마시지 않으며 살 수 있는 이들이 있겠는가? 누가 성년이 되어서 결혼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겠는가? 결혼하지 않고서 어떻게 인류의 번성과 증가가 가능하단 말인가?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생명의 유지에 필수 불가결한 일들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그러한 일들을 열거하시면서, 마치 그것들이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홍수가 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된 이유들인 것처럼 언급하신 것일까?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일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일에만 정신을 팔고 살았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하는 우선 순위의 문제이다. 또한 왜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가 라는 생애의 목적이 뒤바뀌어 있었다는 지적이다. 누가복음 21장 34~36절에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여 두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위의 말씀에서 “방탕함과 술 취함”은 “먹고 마시고” 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방탕함” 이란 영어로 “Surfeiting” 인데 그 말의 뜻은 “탐식”이다. “술 취함” 이란 물론 마시는 것의 일종이다. 또한 “생활의 염려” 속에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들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서, 노아 홍수 시대의 사람들은 부절제한 생활을 살고 있었다는 말씀이다. 결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성도덕의 타락도 포함 될 수가 있겠다. 하나님을 떠나서 이성의 사랑과 성적인 희열에서 인생의 만족을 찾고자 하는 육욕적인 생활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한 아내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혼을 통하여 다른 이성들을 찾아 나서는 생활 방식들 말이다. 물론 이혼 당하여 슬퍼하는 억울한 자들도 많지마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간통과 간음들로 신성한 결혼제도가 망쳐져 왔는가! 더 나아가서는 뒤틀어진 성적 욕구로 인하여 동성 연애들이 생겨 나고 이제는 그들도 떳떳하게 거리를 활보하며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상황이 되는가 싶더니만, 이제는 한 수 더 나아가서 정식으로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양자로 들여 키우며 정식 가정으로 결속시켜 나가는 사회가 되어 버리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베드로 후서 2:5-8). 베드로는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그들의 성적인 음란한 행실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한 일들은 의인들의 마음에 고통을 주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였다. 그리고 노아 시대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은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 즉 우리 세대들에게 본을 삼기 위하여서 내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날 노아 시대의 심판과 소돔 고모라의 결과를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처럼 살았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하여 120년 동안이나 계속적으로 경고하시고 호소하신 말씀을 거절하였다. 나중에는 그러한 말씀들을 듣고 조롱 할 정도로 마음들이 둔하여 있었다. 그들의 부절제한 생활들과 음란한 생활, 또한 어떻게 하면 더 잘 먹을까 더 잘 마실까 하는 생활의 염려들에 집중된 생활 방식은 그들의 두뇌의 기능을 둔하게 만들었다. 생활의 염려는 지성적인 면에서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대하여 이해하는 영적인 감각을 둔하게 만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믿고 안다고 하면서도 생활의 염려에 집중하면 성령의 음성을 민감하게 듣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임할 것이라는 감각이 더 이상 생기지 않을 정도로 영적인 눈이 어두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서 기도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부하게 되려고 애쓰지 말라고 하셨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태복음 6:24~34).
노아 시대에도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언젠가 더 확실한 징조가 보이면 노아가 지은 방주에 들어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확실하고 분명한 징조들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들의 감각은 점점 더 무뎌져 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들을 의식하여 일반적인 대중의 눈에 좀 지나친 행동은 삼가게 되면서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대 다수의 흐름에 따라가는 타성적인 태도가 생기게 된 것이었다.
드디어 굵은 물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일생 동안 한번도 비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얼마나 놀랬을까? 그들의 충격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때에 모두 다 회개 하였을 것이다. 아니 후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방주의 문은 천사의 손에 의하여 일주일 전에 영원히 닫혀져 있었다. 그들이 모두 달려와 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를 치며 두드렸을 때에, 그 육중한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하는 식구들과 어린아이들이 허우적 거리며 물 속에 빠져 죽어 가는 비참한 모습들을 속절없이 바라다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다 괴상한 악마들이 아니었다. 여전히 부모의 사랑과 연민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었다. 문제는 그들은 그들의 마음이 둔하여 져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절실하게 받아드리지 않을 정도로 게으르고 부주의한 생활을 한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방주에 들여 주시지 않으셨을까? 그들은 두려움에서 잠시 회개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들의 마음이나 성품이 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을 방주에 들여 보내 주셨다면, 홍수가 끝나고 그들이 다시 방주에서 나온 다음에는 옛날 살던 그 방식 그대로 다시 되돌아 갔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뉴 올린즈 허리케인을 보면서
루이지아나 주의 New Orleans 도시는 해안 가의 살기 좋기로 이름 난 관광 도시였다. 그리고 그 옆의 Gulf Port 와 Biloxi 도시들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좋은 경치의 도시들이었다. 그러했기에 그 도시들은 도덕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한 곳들이었다. 도박이 법적으로 허용되었는가 하면 창녀들의 활동과 신접한 강신술의 활동들도 융성한 도시들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타락한 대 도시에서 피하여 살아야 한다. 소돔과 고모라와 노아 홍수의 모본이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다. New Orleans 는 해발이 바다의 수면보다도 낮은 도시였다. 마치 사발 그릇처럼 움푹 들어 간 곳에 건설한 도시였다. 좋은 경관을 찾는 것도 좋지만, 왜 그러한 장소에 도시를 건설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그리고 그 도시는 외곽에 쌓은 Levee 즉, 콘크리트로 쌓은 외곽 벽들에 의존하여 살고 있었다. 그 것도 몇 년 전부터, 저 방벽들이 큰 허리케인에는 견딜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경고가 계속 주어졌었다. 그리고 2004년도 7월 달에는, 비상 사태 때에 온 도시가 물에 잠기게 되면 어떻게 백만이나 넘는 도시 인구들을 대피 시킬 것인가 하는 예행 연습까지 한 적이 있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왜 그들은 그 경고들을 진지하게 받아드리지 않았을까? 마음들이 둔하여 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드로 후서 3장 3~10절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New Orleans 사람들이 가졌었던, 오늘 뜬 태양이 내일도 뜰 것이라고 안심하며 경고를 무시해 왔던 그 태도는 현재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들을 대표해 주는 실례였다. 온 세상이 그렇게 살아 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크고 확실한 경고를 주신 것이다. 이제 곧 멸망이 임할 것이다. 이 멸망은 어느 한 도시의 멸망이 아니다. 온 세상이 엄청난 천연재해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온 지구 전체가 흔들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 기절하게 만들 것이다. 이러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사도 베드로는 계속하여 말씀하여 주셨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벧후 3:11-14).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참상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이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시키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창세시 6장에 있는 노아 홍수가 올 수밖에 없었던 형편이 바로 우리의 형편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 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 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 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창 6:5~22).
오늘날 이 세상은, 우리의 눈과 귀를 돌리어 보고 듣는 것들마다 죄악적인 장면들을 연상케 만들어 우리의 생각들을 부패시키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있으며 사는 일에 빠져서 하나님의 경고와 말씀을 무시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러나 노아는 자기의 식구들을 구원하였다. 아니 자기 식구들 이외에는 구원 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사람들의 영적인 감각들이 둔하여져 있었다. 누가 과연 앞으로 곧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있을까?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지시 하신 대로만 사는 의로운 자들, 죄악의 관영 함으로 슬피 울며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 들어가 환란을 통과하며 보호함을 받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족들을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모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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