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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봄 학기 진군특강
아름다운 소식 있는 날
말씀/왕하6:24-7:20
요절/왕하7:9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오늘은 봄 학기 진군특강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사마리아 성을 놀라운 계획과 능력으로 구원하십니다. 또 하나님이 사마리아 성 구원 계획에 쓰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면서 능히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이 생명 구원의 역사에 우리를 써 주시도록 영적 소원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쓰임 받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은 여호람입니다. 여호람은 아버지 아합의 뒤를 따라 우상을 숭배하던 악한 왕입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가 엘리야의 사역을 계승하여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6장 24절을 보십시오. 어느 날 기습적으로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이 군대를 이끌고 올라와 사마리아 성을 에워쌌습니다. 아람 군대의 전략은 사마리아 성을 포위해 식량을 비롯한 모든 생필품과 물자들의 반입을 완전 차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항복을 받아내고자 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안의 식량은 바닥이 나고 물가는 폭등했습니다. 당시 물가가 어떠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나귀는 유대인들이 평소 입에 대지도 않는 율법에 부정한 짐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귀 머리 하나의 가격이 노동자의 1년 평균 연봉에 해당하는 은 팔십 세겔을 호가하였습니다. 비둘기 똥이라고 불리던 콩 종류의 여물지 않은 것들이 0.3리터에 약 150만 원에 팔렸습니다. 이는 매우 살인적인 물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국가적인 대 위기 가운데 이스라엘 왕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간곡히 도움을 요청하는 여인에게 왕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는데 낸들 어찌하겠느냐!’ 이런 의미입니다. 백성을 섬겨야 할 지도자로서 정말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알고 보니 여인이 왕에게 도움을 청한 데에는 매우 끔찍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굶주려서 옆집 아줌마와 서로 자기 아들을 잡아 삶아 먹기로 했는데 먼저 내 아들을 삶아 먹고 나니 옆집 아줌마가 오리발을 내밀고 아들을 안 내어놓고 있으니 이를 해결해달라는 청원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참담한 일입니까? 이스라엘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을까요? 신명기 28장에 보면, ‘네게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하면 네 몸의 소생의 살을 먹을 것이라’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하나님의 이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우상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바알이 무엇입니까? 풍요의 신으로 섬기는 우상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바알을 숭배한 결과는 극도의 굶주림이었습니다. 바알은 이 상황을 해결해줄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헛된 바알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의 죄를 징계하시기 위해 아람 군대를 보내 이런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하셨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왕은 어찌해야 합니까? 당연히 자신과 백성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습니다. 30절에 보면, 왕은 자기 옷을 찢고 속살에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옷을 찢고 베옷을 입는 것은 회개의 표시입니다. 왕이 회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정말 진심으로 회개했을까요? 31절을 보십시오. “왕이 이르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하니라.” 왕은 나라가 이렇게 된 모든 책임을 선지자 엘리사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엘리사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왕이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결코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실로 회개했다면 모든 책임을 백성을 지키고 섬겨야 할 책임이 있는 왕인 자신에게 돌렸을 것입니다. 왕이 옷을 찢은 이유는 회개했기 때문이 아니라 엘리사에게 열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엘리사의 집에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장로들이 국난의 때에 국난의 타개책을 찾기 위해 왕궁에 모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왜 엘리사의 집에 모여 있을까요? 이미 자포자기한 왕에게 장로들이 무슨 기대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댈 곳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뿐이었습니다. 엘리사의 집에서 국난 극복 대책 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왕의 사자가 엘리사를 체포하러 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엘리사가 뭐라고 말합니까?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아들이 내 머리를 베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엘리사는 왕을 가리켜 ‘살인한 자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살인한 자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여러 명 죽인 여호람의 아버지 아합 왕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한마디로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왕의 사자에 의하면 왕의 말이 이렇습니다.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이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입니다.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재앙을 통해 징계하실 뿐만 아니라 재앙 가운데서 구원도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왕은 구원의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절망에 빠져 헤어 나올 힘이 없었습니다. 해결책도 없었고 그렇다고 적에게 항복할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이런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7장 1절을 보십시오.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내일이면 성안의 식량과 생필품 문제가 해결되고 물가가 안정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오늘 당장 이 시점에서 구체적인 방법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사마리아 성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약속은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무조건 신뢰할만한 약속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구원의 복음이었습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길게 이야기할 것 없습니다. 단순하게 ‘아멘’으로 화답하고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 왕이 신임하는 한 장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이 말은 사방이 아람 군대로 포위되어 있는데 어떻게 하루 만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는 의문을 표시한 것일까요? 이 장관의 말은 단순히 그 정도의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창을 내어 식량과 생필품들을 성안에 쏟아부어 주셔도 해결이 절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럴 능력도 없으시면서 허풍으로 말씀하셨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심히 모독하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광야를 지나며 식량이 다 떨어졌을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실제 하나님께서 하늘의 창을 내사 하늘에서 비같이 양식을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이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40년간 부족함 없이 먹었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루 만에 사마리아 성의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불신을 넘어 하나님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더구나 백성들에게 희망을 제시해야 할 지도자인 왕과 장관에게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 책임이 더 무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이런 장관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성안의 식량과 생필품의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내일 장관은 죽을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참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왕과 장관이 했던 말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표현을 바꾼다면 그 말들은 이와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이건 다 하나님의 사람이라 불리는 엘리사 때문이에요. 두고 보라고요. 그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하나님은 내 인생에 계속 실패만 주셨다고요. 이제 하나님께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안할 꺼예요.” “세상이 두 쪽 나도 이번 일은 아무런 해결책이 없어요. 하나님도 어쩔 수 없어요.” “하나님이 도와주시려고 했으면 진작 도와주셨지 일이 여기까지 오게 하셨겠어요?” 적어도 한 번쯤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거나 아니면 우리 입에서 나온 말들일 것입니다. 인생 문제에서 잘 풀리지 않거나 위기를 만났을 때 나오는 말들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닥쳐옵니다. 그리고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갑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해결책이 보이질 않습니다. 여기서 끝장인가 싶어 불안합니다. 이때 많은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바로 보길 두려워합니다. 자기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싶고 회피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죄 문제를 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책임을 전가하고 남 탓을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합니다. 또 누군가 한 사람을 지목해 희생양을 삼습니다. 부모님 탓, 동역자 탓, 목자님 탓, 남 탓을 합니다. 그 후에는 자포자기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마음을 비웠다는 말로 멋지게 포장하고 미화합니다. 이런 사람이 만약 지도자라면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어떻게 했습니까? 엘리사는 위기 속에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집중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가장 절망적인 때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려움이나 위기를 만나게 될 때 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독생자를 주신 사랑의 하나님, 지금도 만물을 주관하고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신실하게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허물과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하여 주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신실하신 주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주위에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려움이나 위기의 순간을 만날 때 먼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사마리아 성을 구원해 가십니까? 기드온과 같은 용사가 등장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나병환자 네 사람이 나옵니다. 이들은 율법에 부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성안에서 격리되어 성 밖 성문 어귀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가장 천하게 여김을 받던 나병환자에게까지 먹거리가 돌아올 리 없었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굶어 죽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이판사판 아람 진영에 가서 구걸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해 질 무렵 아람 진영에 도착한 네 사람의 눈앞에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진영 안에는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6절을 보십시오.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아람 군대는 진영 남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큰 군대가 진격해 오는 환청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고용한 용병들의 기습 공격으로 생각하고 ‘걸음아 나 살려라’ 줄행랑을 쳐버린 것입니다. 장막과 말과 나귀도 내버려 두고 진영을 그대로 남겨둔 채로 자기 나라로 도망친 것입니다.
사실 아람 진영으로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은 나병환자 네 사람 외에는 없었습니다. 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그렇게 컸을까요? 한 발을 떼면 말 달리는 발굽 소리들, 또 한 발을 떼면 몰려오는 큰 군대의 소리, 또 한 발을 떼면 병거, 전차 달리는 소리라도 났던 것일까요? 어찌되었든 아무튼 하나님이 아람 군대로 하여금 집단 환청을 듣게 하셨습니다. 패닉 상태에 빠진 아람 군대는 모든 식량과 생필품, 귀중품까지 그대로 남겨둔 채 몸뚱이만 도망친 것입니다. 굶주림에 사생결단, 죽기 살기로 아람 진영을 찾아왔던 나병환자들입니다. 그들은 간만에 뷔페식으로 배 터지도록 먹어댔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빈 장막 여기저기를 털어 많은 재물도 취했습니다. 대박입니다. 이거야말로 극한 굶주림에 처해 있던 그들에게 임한 놀라운 구원의 은혜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또 한 가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5절을 보면,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 본즉” 또 7절을 보십시오. “해 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아람 군대가 해 질 무렵에 모두 도망했습니다. 그때 네 나병환자는 해 질 무렵에 아람 진영 끝에 이르렀습니다. 아람 군대는 해 질 무렵에 모두 도망했고 나병환자들은 해 질 무렵에 진영 끝에 이르렀다! 이는 사마리아 성을 구원하기 위한 놀라운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입니다. 6절은 분명 ‘주께서’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대로 사마리아 성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대로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야겠습니다.
여기서 스토리가 끝난다면 이 사건은 어떤 불우한 인생들에게 임한 큰 행운의 스토리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닙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자기 몫의 은금을 정신없이 챙기던 나병환자들이 갑자기 멈추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왜 안 됩니까?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이 무엇입니까? 인생 대박 났다는 소식입니까? 아름다운 소식은 ‘아람 군대가 물러가 우리가 살았다, 사마리아 성 사람들이 기근에서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병환자 네 사람만을 기근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런 일을 행하셨겠습니까? 네 명의 나병환자들은 하나님의 사마리아 성 구원의 타임 테이블에 도구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편의 드라마처럼 생각해보십시오. 네 사람은 사마리아의 구원을 먼저 알게 된 사람들로서 이 소식을 전해야 할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계속 침묵하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성안 사람들은 그 시각에도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성안 사람들은 이 네 사람을 그동안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근처에 보이기만 해도 당장 멀리 떨어지라며 돌멩이를 집어 던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이 받았던 마음의 상처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안의 사람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왔던 길을 되돌아가 성읍 문지기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세상에서 무가치하고 부정하다고 여김을 받던 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삶과 죽음을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사마리아 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성 구원의 역사에 네 나병환자가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8절에 보면, 이 나병환자들이 이 장막 저 장막 다니며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챙겼다고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병환자들이 위대한 성인이나 용사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더 먹고 싶고 더 챙기고 싶은 욕망들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나병환자들은 평균 이하의 삶을 살던 비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침묵하지 않고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한 것, 그 작은 행동 하나로 사마리아 성 구원 역사의 키맨(key-man)으로 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우리는 성인도, 빼어난 용사도 아닙니다. 엄청난 능력자도 아닙니다. 이 지구상에 거주하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해주셨습니다. 죄 사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목마르고 굶주린 영혼에 생명의 떡과 생명수를 채워주셨습니다. 은이나 금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특별할 것 없는 나에게 왜 이런 특별한 복을 주셨을까요? 그 이유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말할 수 있습니다. 나만 구원 받고 천국 가라고 주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마땅히 아직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서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생명구원역사의 타임 테이블 한쪽에 참고표 해서 도구로 쓰실 것이라고 우리의 이름이 일일이 기록되어 있을 줄 믿습니다. 사마리아 성의 구원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대로 하나님이 이루어가셨습니다. 거기에 나병환자들이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대로 하나님이 이루셨습니다. 거기에 선배 목자님들이 쓰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구원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대로 하나님이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쓰임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가서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침묵하지 말고 말하면 됩니다. 우리가 단순히 전한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이 죽어가던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게 된 것도 그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침묵하지 않고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추운 겨울에 학교 신체검사장에서 한 선배가 따뜻한 커피를 한 잔 타주면서 아름다운 구원의 소식, 복음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예수님 믿고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입니다. 제가 이 아름다운 구원의 소식을 받고 입 씻어버리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몰라 굶주리고 고통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놀라운 소식을 알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성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1,12절에는 나병환자들로부터 온 소식을 들은 왕의 반응이 나옵니다. 왕은 나병환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아람 군대의 매복 작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왕은 다 가졌는데 단 한 가지 믿음이 없었습니다.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이 도착했지만 믿음 없는 왕 때문에 여전히 굶주림 가운데 있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한 신하의 말대로 정탐을 해 본 결과 나병환자들의 말이 한 치도 틀림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성안의 모든 백성이 물 밀듯 아람 진영을 향해 몰려나갔습니다. 마음껏 진영 안의 물건들을 가져온 결과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람 군대는 물러갔고 사마리아 성은 다시 평화로워졌고 물가는 안정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적들이 가지고 있던 물자로 성안의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왕의 장관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에 창을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왕의 장관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7절을 보십시오.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였던 그의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가 말한 대로라.” 장관은 성문 앞에서 하나님이 사마리아 성을 구원하신 사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짓밟혀 죽음으로 그 구원의 은혜를 조금도 누리질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조롱한 자의 비참한 최후였습니다. 이 일이 불의의 사고인지 백성들의 복수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일 역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0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말씀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대로 생명 구원의 놀라운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하심을 기대해야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 구원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되기를 소원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