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가 된 오빠와 대추 세 개
정월 대보름이다!
세상 모르고 살았던 꿈같은 어린 시절이 안개처럼 자욱이 피어오른다.
지금쯤은 신명이 막바지에 달하여 불 깡통을 허공을 향해 던지며 “불놀이야!”를 외칠 때이다. 오빠는 정초가 되면 대보름 불놀이를 위해 깡통을 주워서 못으로 구멍을 숭숭 냈고 나는 소똥을 주워서 말렸다. 그리고 엄마 몰래 짚을 작게 묶어서 숨겨 두었다. 그러나 나는 겁이 나서 한번도 깡통을 돌리지 못하고 깡통을 휘휘 돌리며 달리는 오빠를 쫓아다녔다. 그러다가 지치면 손에 들고 있는 소똥 불씨로 마른 풀에 불을 붙이며 허공에 포물선을 그으며 은빛으로 떨어지는 불 조각들을 바라보며 환호하였다. 달이 휘영청 떠오르면 오빠와 나는 달빛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냥 자는 것이 아쉬워서 찰밥과 나물을 야금야금 먹고 또 먹었다.
내 어린 시절의 무대는 마을 뒤로 흐르는 만경강과 마을 앞에 펼쳐진 너른 들판이었다. 그리고 그 무대에 나와 함께 주연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단연코 오빠였다. 언니가 없었던 나는 매사에 오빠를 의지하였고 오빠를 따라 다니는 것을 좋아하였다.
마을에 엿장수나 아이스케키 장수가 오면 오빠를 졸라댔다. 오빠는 엄마의 잔소리를 염두에 두지 않고 비료부대, 헌책, 신발 등을 주고 엿과 아이스케키를 샀다. 내가 사면 엄마에게 야단을 맞지만 오빠가 사면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엿장수가 올 때마다 오빠를 앞세웠다.
성품이 유순한 오빠는 자기가 빌려온 만화책이나 동화책을 내가 먼저 보도록 해주었고 숙제도 부탁하면 곧 잘 해주었다. 3학년 여름방학 때는 오빠가 그려준 그림으로 상을 받기도 하였다.
오빠는 형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나 손수 만들어야 했다. 윷가락도 팽이도 나뭇가지를 잘라서 만들었다. 그러면 나는 천 조각을 잘라서 팽이채를 만들고 달력을 뜯어서 윷판을 만들었다.
오빠는 겨울 방학 때 마다 가오리연을 만들었고 나는 그 옆에서 노트를 잘라서 연꼬리를 만들었다. 가오리연에는 꼬리를 3개 붙이는데 가운데 꼬리는 길어도 짧아도 상관이 없는데 양쪽 끝의 꼬리는 길이가 꼭 같아야 했다. 연이 완성되면 우리는 하씨 아저씨네 논에 가서 연을 날렸다. 오빠는 실꾸리를 잡고 실을 풀고 나는 연을 들고 멀리 가서 띄워주는 일을 하였다. 연이 무거워서 날지 않으면 나는 꼬리를 하나씩 둘씩 떼어 냈다. 그러다가 연이 바람을 타고 올라가면 너무 신기하여 환성을 지르며 연을 따라 달렸다.
한번은 오빠가 방패연을 만들었는데 연살이 너무 두꺼워 연살에 붙인 창호지가 제대로 붙지 않았고 폼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끙끙거리는 오빠를 보고 대나무 살을 얇게 가다듬어 주고 연의 중심을 잡아 주셨다. 그 날 오빠는 실꾸리를 풀고 나는 방패연을 들어 올리며 신나게 놀았다.
우리 마을의 오빠 또래의 남자 애들은 다 형이나 삼촌들이 있었다. 오빠만 형도 삼촌도 없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우리 마을 바로 뒤에는 꽤 큰 연못이 있었는데 겨울에 얼음이 잘 얼어서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겨울 놀이의 하이라이트는 썰매타기였다.
초등학교 1학년 당시 우리집에는 썰매가 없었다. 그래도 오빠와 나는 아침밥을 먹고 난 후 바로 연못으로 가서 서로 손을 잡고 끌어주면서 놀았다. 가끔 오빠 친구들이 호의를 베풀어 썰매를 빌려주면 오빠는 내가 먼저 타게 해주었다. 그러나 내가 송곳질을 못하여 썰매가 앞으로 나가지 않아 아예 오빠는 등 뒤에서 나를 밀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썰매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하루 종일 오빠의 조수가 되어 못과 톱, 철사 그리고 판자 등을 챙겼다. 드디어 다 만들어져서 시운전을 했는데 썰매가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실망한 우리는 썰매를 둘러메고 집으로 왔다. 오빠가 썰매를 뒤집어 놓고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철사를 박은 못이 너무 튀어나왔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삐뚤어진 철사를 바로잡아 주었다. 우리는 그 해 겨울에 썰매를 타며 추운 줄을 모르고 지냈다.
아무리 오빠가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는 일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밤에 큰 집 제사에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추석 명절과 설 명절에 차례를 지내러가는 것이었다. 오빠는 아이지만 남자이므로 경주 이 씨 문중의 일원으로 매번 당당하게 큰 집 행사에 참여했다. 큰 집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당시 나의 로망이었다.
3학년 가을 추석에 나는 엄마에게 잘 보이려고 방 청소도 하고 마당도 깨끗하게 쓸었다. 그리고 독아지와 항아리에 물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저도 큰 집에 가요.”
“안 돼. 너는 집을 봐야지.”
나는 큰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 오빠에게 갔다.
“오빠, 나도 큰 집에 가고 싶어.”
“엄마에 말할께. 기다려.”
엄마는 나를 데리고 가자는 오빠의 말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러자 오빠가 쭈빗거리며 입을 열었다.
“엄마, 오늘은 동생 데리고 가세요. 제가 집을 볼게요.”
“먼 소리! 너는 가문을 이어갈 남자라서 가는 거다.”
모두들 큰 집에 가고 나만 혼자 집에 남았다. 그러나 나는 오빠의 말을 곱씹으며 위로를 받았다. 추석 명절이었지만 부엌에는 장만해 놓은 명절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은수 네와 서분 네 대문 앞에 버려진 고수레를 누가 볼 새라 잽싸게 주워왔다. 그리고 주워오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후다닥 먹어 치웠다. 점심 시간이 다 되어서 돌아온 오빠가 큰 집에 모인 사촌들 모두 식사를 마치고 함께 봉의산에 성묘까지 다녀왔다고 하였다.
엄마는 성묘에 가지 않았지만 대가족의 설거지를 다 마친 뒤에 늦게 돌아오셨다. 그러나 명절 음식을 하나도 챙기지 않고 빈 손으로 오셨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사흘 내리 큰 집으로 음식 장만하러 다닌다며 송편 하나도 가져오지 않은 엄마가 너무 야속하였다. 나는 노란 전 부스러기와 송편과 팥떡 등이 먹고 싶어 큰 집에 가기로 하였다.
오빠가 대문을 나서는 나를 불렀다.
“할머니가 대추 세 개 주었는데 너 주려고 가져왔다. 햇대추인데 단단하고 맛있어. 먹어 봐.”
오빠의 손에 들려있는 빨간 대추 세 개가 하늘처럼 커 보였다.
나는 그 날 가슴이 먹먹하여 대추를 먹지 못하였다. 그냥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렸다. 지금 그 대추를 먹었는지?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지만 나는 당시 대추 세 개를 먹지 않고 나를 위해 가지고 온 오빠가 우리 오빠라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나는 그 일로 오빠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오빠는 공부도 잘 했고 얼굴도 귀태가 있고 성품이 좋아서 어디에서나 인기가 좋았다. 오빠는 초등학교에서 6년 내내 반장이었으며 6학년 때는 전 학년 학생회장이었다. 모든 것이 평범한 나는 오빠의 동생이라는 자부심으로 주눅이 들지 않고 동화 같은 초등시절을 보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과거로 돌아가서 살 수 있는 24시간을 준다고 하시면 나는 오빠와 아버지와 함께 연과 썰매를 만들었던 날과 오빠에게 대추 세 개를 받았던 날로 돌아가고 싶다.
순수의 시간! 순수한 마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동화 같은 그 날이 가슴에 살아있음에 행복하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오빠는 행복한 왕자였고 나는 행복한 왕자의 보호를 받는 행복한 동생이었다.
오빠와 함께 달렸던 들판과 바라봤던 달은 일찌기 동화가 되었고 그 덕분에 나는 동화 속을 드나드는 영원히 철이 들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2024년 2월 25일, 주일 인시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