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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칠언(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가상칠언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일곱 가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사셨던 삶의 마지막 정리이면서 극한의 고통 속에서 나온 최후의 말씀입니다.
사복음서에 흩어져 있는 가상칠언을 시간대 별로 정리하여 보면요. 첫 번째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입니다. 기도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요 앞부분인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는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를 요청하십니다. 뒷부분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는 용서를 구하는 근거를 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잘못을 용서하여 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용서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기에 이 기도는 사랑이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 10:10)인데요, 십자가에서 그 목적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의 근거로 제시하신 것은 그들의 무지때문입니다. 미처 알지 못하는 것도 용서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여기에서의 무지는 지식의 결핍이 아닙니다. 성경을 공부했으나 말씀의 참의미를 모르는것이지요
첫번째 가상칠언은 우리들에게 성경과 진리의 무지로 인한 죄를 피해야한다고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서운 죄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가상칠언의 첫 번째 말씀은 택자들을 위한 무죄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힌 십자가 좌우편에는 함께 처형을 당하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요 마태와 마가는 그들을 강도라고 불렀고, 누가는 행악자라고 지칭하였습니다. ‘강도’로 번역한 헬라어 ‘레스테스’는 단순한 도둑이 아니라 폭력을 사용하여 남의 것을 갈취하고 살인까지 저지른 흉악범을 암시하지요 당시 십자가는 반역이나 살인과 같은 무서운 죄를 짓고 법정 최고형을 선고받은 비(非)로마시민에게 적용되는 사형방법이었으니 무척 악한 강도였을듯합니다. 반란자였을거라 추정하는 이도있습니다.
지금 십자가 주변의 대부분 인생들은 예수를 조롱하고 욕하고있습니다. 강도들도 그랬습니다.“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였더라”(마 27:44) 이들의 비난에 앞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고 모욕하였고, 뒤 이어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조롱과 비난의 강도를 높였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 두 강도들마저도 예수를 비난하는 일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당시 십자가 주변에 모여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등을 돌리며 욕하였음을 보여줍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욕하고 모욕하고 비방하고 조롱하고 희롱하고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한 강도가 다른 강도를 꾸짖으며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리라”(눅 23:40-41)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고 말합니다.
어떤 계기로 그런 변화가 생겼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죽음 직전에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고 예수 앞에 회개를 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께 자신을 의탁한것입니다. 적어도 그는 하나님나라의 존재와 예수께서 그 나라의 주인이심을 믿고, 그곳에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회개한 강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실 모든 인생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는 회개이지요. 회개보다 앞서는 것이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는 것이구요 이러한 깨우침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며, 성령의 조명으로 가능합니다. 사실 성령하나님의 하시는 일 가운데 중요한 것중 하나가 책망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여기에서 ‘책망’은 ‘유죄증명’이라는 뜻인데요, 성령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조명하시면, 누구도 변명의 여지를 찾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회개한 강도는 성령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주시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였으니까요
회개한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보장을 약속받았습니다. 회개가 곧바로 응답된 것이지요. 진심의 회개는 하나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에 지체 없이 응답을 받습니다. 강도가 예수와 함께 있게 될 낙원은 우리가 추구할 본향이요 궁극적인 하나님나라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여기 이 땅에서도 하나님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비적 단계의 하나님나라입니다. 이 땅은 그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과 상급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그런 점은 바울의 고백 속에 잘 드러나 있지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회개한 강도는 이 땅에서의 예비적 하나님나라를 경험하지 못한 채 곧장 낙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세상에서 헛된 삶을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는 어떤 선행도 없었습니다. 이중은혜인 칭의와 성화중에 성화의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런점에서 저는 오히려 강도가 부럽기도합니다. 너무자 자주 반복되는 저의 죄때문입니다.
두 번째 가상칠언은 마지막 순간이라도 자신의 죄를 깨우치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누구라도 구원받아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또한 죽음이후 낙원이있고 그곳은 예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또한 구원은 자신이 쌓은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저에겐 낙원이있음을 알려주시는 위로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악한이는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마지막 순간으로 미루려하더군요 그는 바보입니다. 왜냐면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나라를 경험하며 누리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얼마든지 이 땅에서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경험할 수 있고,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나라에서의 상급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합니다.
가상칠언(3): "네 어머니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 19:26-27)
첫 번째 가상칠언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는 말씀이었구요
두 번째 가상칠언은 회개한 강도를 향한 용서와 낙원을 약속하시며 천국의 존재와 그 천국으로 들어가는 여부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알려줍니다. 또한 구원은 개인의 공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강력한 위로인것이죠
세 번째 가상칠언은 육신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에 대한 배려로서 부모공경의 계명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신 말씀이면서 새로운 가족 새로운 교회공동체에 대한 말씀입니다.
부모공경 계명은 다른 계명들과는 달리 장수와 땅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이를 두고 바울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하였지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첫 계명’에서 ‘첫’은 ‘처음’이란 뜻도 되겠지만 ‘유일’이란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고 더 타당합니다. 약속이 있는 ‘첫 계명’만 있지 그 다음은 없기 때문이다. 곧 제5계명은 십계명 중에서 약속이 보장된 유일한 계명입니다. 십계명은 우리들이 당연히 지켜야할 도덕법입니다.그중 제5계명은 특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기셨을까요? 예수께는 같은 혈육의 친동생들이 있었는데요.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는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마 13:55-56) 그럼에도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긴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요한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유일한 제자였습니다. 다른 동생들은 도망가고없었는지 모르나 어찌되었든지 그자리에 없었나봅니다. 요한만이 어머니 마리아를 맡길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둘째로, 마리아는 예수를 낳으신 육신의 어머니였지만, 그보다 더 큰 비중은 영적인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새로운 성도들이 나타나기에 새로운 교회 새로운 영적 형제자매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니 이제는 육신의 동생들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안의 성도들이 더 우선이 되었습니다.
셋째로, 요한은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가장 오래 살면서 교회를 끝까지 지킨 인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다 순교로 일생을 마쳤구요. 요한도 박해를 받아 밧모섬에 유배되는 힘든 생활을 하긴 했지만, 오랫동안 살다가 수명을 다하고 죽은 유일한 제자였습니다. 요한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오래 살아야 했던 이유는 위기에 처한 초대교회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였을듯합니다. 계시록과 다른 성경도 써야 했는데요 이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생애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었기에, 마리아의 기억과 진술이 필요했을듯합니다.
예수께서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맡긴 것은 어머니 마리아를 위한 배려이면서 동시에 초대교회를 위한 배려입니다. 그리고 주안에서는 혈족보다 형제가 더 중요합니다. 새로운 가족이기때문입니다.
가상칠언(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 15:34)
가상칠언의 1번과 4번 7번 말씀은 하나님께 하신말씀이구요 2번 3번 5번 6번 말씀은 사람에게 하신말씀입니다.
1번부터3번까지는 아침9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때부터 정오 12시 사이에 하신 말씀이구요 정오부터 어두워졌다가 3시경에 죽으셨는데요 4번째 말씀부터는 죽기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호흡이 힘들고 고통스러우셨는지 주님의 말씀이 길지 못합니다.
첫 번째 말씀인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는 용서이구요, 두 번째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성도가 죽어가는 낙원과 그곳의 주권을 말씀하시면서 회개에 인간공로가 없는것을 말씀해주심입니다.또한 낙원에 함께 있게될것을 말씀하시는 위로입니다. 세 번째의 “보라 네 어머니라”는 새로운 영적인 가족인 교회가 어떠해야하는지를 알려주심입니다. 네 번째 가상칠언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당시의 유대인들이 사용하였던 아람어입니다.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
누가 버림받아야하나요? 주님이 아니시고 죄가 가득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대신 주님께서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의 버림받으심으로 버림받아야 마땅할 저희가 버림받지않게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라는 단어 대신 하나님을 사용하십니다. 개인적인 관계표현인 아버지보다 공적인 관계표현인 하나님을 사용하시는 것은 공의의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를 대신하여 받고계시기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님께 그렇게 냉정하게 등을 돌리신 이유가 멀까요? 우리를 향하여 사랑과 은혜의 얼굴을 드시기 위함입니다.“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5-26) 예수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그 얼굴을 드시고 얼굴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시 67:1) 즉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버리심은 우리를 사랑하시기때문이며 우리를 버리지않기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버려져야하기에 대신 당신께서 버려짐을 당하셨습니다. 그분덕에 이젠 우리에게 영원히 버림이없습니다.
어찌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이 문장은 질문이 아닙니다. 감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것은 구약 전체에 걸쳐서 예언되고 강조되었던 것이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자명한 일입니다. 예수께서도 누군가가 남을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대속의 원리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매년 대속죄일마다 한 마리 양을 아사셀 양으로 삼아 사막 먼 곳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것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영원히 용서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 일을 직접 수행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감히 저의 문장으로 바꾸어보면 "아! 공의의 하나님께서 저를 버리셨군요 아버지께서도 이토록 저들을 사랑하시는군요. 저도 정말 나의 백성들을 사랑합니다 기꺼이 버려짐을 당하겠습니다."입니다.
가상칠언(5): "내가 목마르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루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 19:28)
예수께서 “내가 목마르다”고 호소하신 것은 우리의 영적 목마름을 대신 갚아 주셨음을 선언하심입니다. 우리는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처럼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매일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가야만 하는데요. 그런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이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목말라하신 것은 육체적 갈증으로 인한 고통의 호소하신걸까요? 못박힌 손과발의 통증을 말씀하지않으시고 또한 점차 힘들어져오는 한호흡 한호흡도 말씀하지않으신것을 생각해보면, 단순한 육신의 목마름을 넘어 영적 목마름을 이야기하시는듯합니다. 이사야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라고 하셨으니, 주님의 목마름으로 우리가 생수를 마시게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수의 근원이시고(렘 2:13). 예수께서 목마름의 고통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그 생수의 근원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부자의 고통이 무엇이었나요? 물한방울이 필요한 타는 목마름이 아니었나요? 사실 우리는 모두가 부자처럼 지옥불에서 갈증과 목마름으로 영원히 고통받아야할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목마름을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받으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목마름이 해결되는것을 넘어서, 이제는 생명수를 영원히 마시게되었습니다. 아멘 할레루야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 19:30)
여섯 번째 가상칠언은 “다 이루었다”는 완성입니다. 무엇의 완성일까요? 저희 죄의 용서를 완성하신것이구요 또 성육신하셔서 이땅에 오셔서 모든 율법을 지키심으로 이루워진 의의 완성입니다. 또한 주님의 사명의 완성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여서 죽기위한 사명의 완성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여섯 번째 가상칠언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구원의 길이 완성되었음에 대한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의 성취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예수께서 못 박혀 죽으신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입니다. 다른 길, 다른 대안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을 위한 필요조건은 완전하게 갖추어졌습니다.
우리의 공로는 전혀 필요없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우리의 어떤 공로를 주장한다면 가상칠언6번째 말씀의 주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죄악입니다. 주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가상칠언(7):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낮 12시(제6시)로부터 오후 3시(제9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계속되었습니다(눅 23:44). 온 땅에 임한 어두움과 함께 성전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눅 23:45). 아래서위로 찟긴것이 아니고 위에서 아래로 찟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찟으신것입니다. 왜일까요? 이젠 성전의 존재가 필요 없게 되었기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에서 드려지는 마지막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은 마지막 제물일 뿐 아니라 단 한번으로 영원히 드리는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성전에서 다른 희생 제물을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성전이 존재할 의미가 사라지면서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도 하나님앞에 언제든지 담대히 나아갈수있게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존재로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마지막 단계로 영육이 분리되는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리곤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죽음의 문을 넘어 아버지께로 갈것입니다. 성도는 그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의탁하는 자이기도합니다.
성도는 가상칠언을 기억하며 그 가상칠언대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집사님도 돌로 치는 유대인들 앞에서 마지막 남긴 말은 예수의 가상칠언 중 첫 번째와 마지막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라고 하셨으니까요 스데반이 따른 예수님의 모범은 이제 우리가 뒤따라 실천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웃과 형제의 죄를 용서하며,죽음이후 낙원이 있음을 인지하고,새로운 교회 공동체가 무엇인지 알고, 마땅히 버림받아야할 저대신 주님이 버림받으신 성부와 성자의 사랑을 고백하며, 영원한 갈증을 주님께서 대신 목말라하심으로 오히려 저희는 생명수를 마시게되었으니 찬양하고, 주께서 다 이루셨으니 저의 공로를 더하려하지않고 그저 감사 감격하며, 영혼을 아버지손에 맡기는 인생으로 살아가야합니다. 스테판집사님처럼요
(이태복목사님의 설교와 권혁승님의 글을 읽고 들었습니다. 나름 수정하였습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가상칠언(架上七言, seven words on the Cross)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하신 일곱 말씀.
1언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2언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언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7).
4언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5언 : “내가 목마르다”(요19:28).
6언 : “다 이루었다”(요19:30).
7언 :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