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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동해안 지역 지연작전
제 1 절 작전 개요
1. 개 요(총괄)
동해안지역 지연작전은 국군 제3사단이 주축되어 1950년 7월 14일부터 7월 31일까지 동해가도를 따라 남진한 북한군 제5사단과 동해안에 상륙해 태백산맥을 타고 내륙으로 침투한 제766부대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실시된 공방전이다.
이 기간중 북한군의 목적은 한국군을 완전히 격멸하고 미군이 한반도에 무사히 도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북한군은 남동 해안의 부산과 울산, 포항 항구를 신속히 장악하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영덕-포항을 조기에 공략하고 부산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이를 위해 북한군은 7월 1일 울진을 점령한 후 7월 12일 영덕 북쪽 14km지점인 평해까지 남하하였다. 그러나 유엔군 해군의 함포사격과 함재기 공격을 피해 주로 야간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남진 속도가 크게 둔화되었다.
한편 동해안지역을 담당한 제3사단은 7월 24일까지 제23연대와 독립 제1대대만으로 동해안 방어작전을 수행하다가 24일 제22연대가 원대 복귀하고 해군의 포항경비부에서 편성한 육전대도 이 지역에 투입됨으로써 전투력이 크게 증강되었다.
북한군 제5사단이 제10연대를 진보 방면으로 우회시키고 양개 연대로 7월 14일부터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국군 제23연대와 독립 제1대대는 방어진지가 돌파되면서 축차 철수하고 유엔 공군기와 함대가 북한군의 집결지와 접근로에 타격을 가하여 진출을 저지한다.
동해안지역 지연작전('50.7.14~31)
북766부대
입암
경찰대대
북5사
영해
반변천
기갑연대 경찰대대(예) 3사단으로 예석잔환하기 위하여 연결작전 실시
진보
3대대/기갑
청송 기갑연(예) 독립대대
23연
22-3사 독립대대(예) 영덕
대구에서 원대복귀
주왕산
23연(예)
재편성 후 영덕 방향으로 공격
22-3사 23연 증원
강구
제22연대 7. 26 강구 도착
그러나 7월 17일 영덕이 피탈당하고 피아간에 181고지와 207고지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 되었다. 결국 8월 2일 18시경 국군 제3사단은 영덕을 재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북한군 제766부대가 청송을 목표로 남하하고 , 제5사단 제10연대가 울진에서 영덕으로 우회기동을 위해 제766부대를 후속하였다.
육본에서는 이 적을 격퇴하기 위해 7월 26일 독립기갑연대를 제3사단에 배속하여 진보로 투입하였으며 강원경찰 제5대대를 통제하여 동측방에 배치하였다. 기갑연대는 7월 29일부터 8월 2일까지 북한군 제766부대와 격전을 벌인 후 진보 남쪽 비봉산으로 철수하는데 이로인해 북한군의 우회기동은 큰 차질을 갖게 되었다.
2. 북한군과 국군 상황
가. 북한군
북한군은 제5사단과 유격부대인 제766부대가 투입되었다. 이들은 7월 12일 평해를 점령한 후에 이틀간 부대정비를 하고 14일부터 영덕-포항을 목표로 2개 연대를 동해가도로 1개 연대를 동해가도 해안방어를 위해 울진-평해간에 남겼다.
제766부대는 내륙으로 진출하여 전선 후방에서 무장 폭동을 유발하고 철도와 수송시설을 파괴하여 국군의 퇴로 및 증원을 차단하는 임무였다.
나. 국군
국군 제3사단이 제23연대만으로 울진-영해간 60km의 공간을 담당하였다. 사단장은 이준식 준장, 제22연대장은 강태민 중령, 제23연대장은 김종원 중령, 독립기갑연대장은 유흥수 대령(제2기병대대장:장철부 소령), 독립 제1대대장이 김종순 중령, 독립 제2대대장이 이소동 소령, 제11포병 대대장이 노재현 소령이었다.
제23연대는 제22연대가 증원(7월 24일 강구 도착)될때까지 울진-영해선을 방어하다 7월 13일 영덕북쪽으로 철수하여 새 방어진지를 편성한다.
제 2 절 영덕 부근 전투
1. 전투 개요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한 지 16일 만인 7월 10일, 제23연대는 유엔 해군의 함포지원을 받으며 영덕 북방 영해에서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13일에 영해를 철수하여 영덕북방에서 영덕을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7월 17일, 북한군의 야간 기습공격으로 영덕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영덕의 상실은 포항항구와 영일비행장의 확보를 위해 더 이상 후퇴하면 안되었다.
이에따라 제3사단은 7월 25일부터 영덕탈환을 위해 육.해.공군 합동작전을 계속하여 8월 2일 18시경에 영덕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북한군 제5사단은 40% 이상의 병력 손실을 입고 부대정비에 들어간다.
2. 전투 경과
가. 국군 제3사단의 영덕 방어선 형성
'50. 7. 1일에 북한군 상륙부대가 울진을 탈취한 이후 영덕으로 전선이 내려감에 따라 동해상의 미 해군 제7함대의 함포지원과 함재기의 출격으로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육본은 7월 10일에 사단장 유승렬 대령을 경남편성관구사령관으로 전출 시키고 육사 교장인 이준석 준장을 신임 사단장으로 보직시켰다.
사단은 영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제23연대는 7월 16일 축산의 고래산-167고지선에서 7월 17일에는 강원도 경찰대대를 삼화리에 , 독립대대를 화림산선, 제23연대를 7번국도를 포함한 축산면의 237고지선을 점령하였다.
한편 동해의 함대에서는 계속하여 함포사격과 함재기가 출격하여 북한군 제5사단은 거의 주간행동을 못하고 야간에만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왔으며 7월 19일 19시에 영덕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에따라 미 제8군의 워커중장은 7월 20일 제5공군사령관과 제25사단장 킨소장을 대동하고 포항에서 회동하여 포항을 지키기 위해 영덕을 재탈환하기 위한 화력지원을 극대화 하기로 한다.
따라서 7월 20일부터 유엔 공군과 해군의 지원하에 제23연대는 영덕 탈환전을 개시하여 7월 21일 영덕을 탈환하고 화림산-237고지선까지 진출한다.
한편 북한군 제5사단은 7월 8일 울진에 무혈입성한 후 9일 금매리(울진 남쪽 6km)지역에서 산포리 지역으로 상륙한 국군 2개 대대와 11일까지 교전한다. 이후 11일 23시에 고리동 부근을 점령한다.
국군이 새로운 방어계획에 따라 영덕-강구 선으로 축차 철수하자 7월 12일 평해에 들어왔으나, 유엔군의 해군 화력에 완전히 제압당하여 주간행동을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놓였다.
이무렵 국군 제3사단도 병력보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제22연대의 조속한 복귀를 기대했으나 제22연대는 한강선에서 철수한 후 조치원-청주-문의를 거쳐 도보로 철수하고 있기 때문에 예상보다 훨씬 늦게 도착하여 사단장 이준식 준장은 공병대대와 강원도 경찰대대를 활용하여 적의 침투에 대비한다
나. 영덕 피탈과 207-181고지 선으로의 철수
목골재-가마실재의 제1차 저지선에서 유엔군의 해군과 공군의 화력을 지원 받아 북한군 제5사단을 견제하던 제23연대는 밀리기 시작하여, 7월 16일 고래산-1-2-167고지 선으로 후퇴하였다가 17일에는 구미리-화림산-237-매정동을 잇는 선상에서 방어 편성한다.
이 무렵 북한군 제5사단은 16일 11시경 해군 포항경비부 예하 1개 중대 규모의 용호대와 교전 후 영해를 점령한다. 그리고 18일 오후에 영덕 근교까지 진출한 후에 19일 06시부터 총공세를 가하여 19일 19시에 영덕을 완전 점령한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전략적 가치가 높은 포항과 영일 비행장의 확보를 위해 유엔군 해군과 공군의 전투력을 국군 제3사단에 지원하여 영덕-강구 선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제3사단은 20일 오후부터 영덕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하였다. 21일 강력한 화력의 지원하에 제23연대가 영덕을 탈롼하여 그 여세로 화림산-237고지-매정동 선까지 진출하였다.
영덕 전투(7.14~31)
적5사
경정동
삼화동 화림산 237
독립대대 23연
화수동
독립대대(예) 23연
영덕
태부동
3-22연
22연
23연
3-22연(7.26도착)
강구
그러나 다시 22일 이른 새벽에 적이 제23연대 지휘소를 급습하여 대혼란이 야기되면서 다시 208고지-207고지-181고지선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어서 북한군은 강구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후 제23연대는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181고지선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이어갔다.
북한군 제5사단은 7월 23일 영덕을 재 점령하고 강구로 공격하였으며,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와 독립대대 는 주요 감제고지에서 함포지원하에 적이 도주하여 예비인 제1대대가 181고지를 재탈환한다.
다. 제22연대 증원과 207고지-181고지 전투 / 영덕 탈환
이런 상황에서 대구에서 24일 재편을 마친 제22연대 강구에 도착하여 26일 181고기 재탈환전에 투입된다. 국군 제3사단은 유엔군의 함포 및 공군의 지원하에 우측에 제22연대, 좌측에 23연대로 7월 29일에 영덕 탈환전을 감행하여 8월 3일에 화림산-매정동선을, 서측방은 독립 제1대대가 삿갓봉 320고지를 확보하였으며 8월 5일까지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반면 북한군 제5사단은 많은 병력 손실을 입고 수색정찰 외에는 일체의 작전활동을 중지하였다.
3. 전투결과
북한군 제5사단이 영덕지구에서 국군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2주일이 넘도록 지체하게 됨으로써 북한군 제2군단의 작전계획은 큰 차질을 빚게 된다. 당초 7월 하순에 포항을 점령하기로 계획했던 그들은 유엔군의 함포와 공군력, 그리고 국군 제3사단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좌절되고 말았다.
동해안 축선을 따라 남진이 어렵다고 판단한 북한군 제2군단은 안동을 점령한 제12사단으로 하여금 청송-기계 축선으로 장거리 침투를 감행하게 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은 제5사단은 부대정비를 하게 한다.
제 3 절 진보 전투
1. 전투 개요
진보 전투('50.7.28~31)
북766
339
경찰대대
반변천
2/기갑
진보 1/기갑 원전삼거리
원전동
273
경찰(예)
기갑연대 지휘소
비봉산
3/기갑
기갑연대
청송으로 철수
영덕 전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인 7월 28일 영덕 서측방 진보 방면에는 북한군 제5사단 제10연대가 제766부대를 후속하여 진출 중이었으며, 청송 동남방의 주왕산 일대는 제766부대 병력과 게릴라가 준동하고 있었다.
진보와 청송은 안동과 영덕의 중간 지점이며, 영양-진보-청송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영덕으로 우회하거나 포항, 영천으로 진출하는데 중요한 접근로였다.
7월 26일 육군본부는 독립기갑연대를 제3사단에 배속하여 진보로 투입한다. 연대장 유흥수 대령은 연대주력과 장갑차 5대를 진보 반변천 남안에 배치하고 이 일대에서 공비를 토벌 중이던 강원경찰 제5대대(대대장 김인호 총경)를 통제하여 동측방에 배치하였다. 연대는 장갑차 엄호하에 경찰 1개 중대를 주왕산에 집결한 제766부대 병력과 게릴라를 소탕하면서 진지편성에 주력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그 동안 계속된 유엔군의 공군기 폭격으로 공격을 중지하고 있다가 29일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여, 8월 1일 미명에 경찰대대가 돌파되는 위기에 처하였다. 이로인해 퇴로 차단의 위협에 진보 남쪽 비봉산 일대로 물러남으로써 진보를 상실하였다. 영덕의 제3사단과 연결을 위해 4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이 무렵 안동 남쪽을 방어하던 수도사단이 좌측 길안으로 진출함에 따라 이들과 연결을 이루고 수도사단으로 배속이 변경되어 북한군을 계속 방어하게 된다.
이 작전으로 북한군 제5사단 제10연대의 영덕으로의 우회기동을 저지하였으며, 제766부대의 침투를 차단하여 아군 전선이 양분되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2. 전투 경과
가. 독립기갑연대의 반변천 방어선 형성
전 전선에서 북한군의 진격 속도가 늦어지자 수안보까지 내려온 북한군 최고 사령과 김일성은 "도로를 따라 정면으로만 밀고 나갈 것이 아니라, 산을 타고 측배후로 우회하여 적을 포위섬멸하고 숨 돌릴 틈을 주지않는 맹추격으로 진공속도를 높이라"로 일선의 지휘관들을 다그쳤다.
이에 북한군 제2군단은 유격부대인 제766부대(부대장 오진우 총좌)를 주왕산으로 침투시켜 공비들을 규합하여 민심교란과 아군의 병력을 분산을 획책하는 한편, 동해안으로 남하한 제5사단에서 제10연대를 영양-진보-청송을 거쳐 포항으로 우회기동하게 한다.
당시 북한군 제10연대는 병력이 약 3,000명 수준이고 76밀리 야포 4문, 120밀리 박격포 5문, 45밀리 대전차포 5문 등이었다. 제766부대는 개인화기 위주로 무장하였으며 약 1,000명으로 추산되었으며, 계속적인 전투 피로가 누적되고 유엔 공군의 차단 공격으로 보급품이 현지조달에 의존해야만 하여 사기저하와 전선 이탈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한편 국군 제3사단은 7월 17일부터 영덕-강구 선에서고전을 면치 못하자, 육군본부와 제8군에서는 제22연대(연대장 강태민 중령)와 미 해병 1개 대대를 급파하여 동해가도의 위기를 수습하였다. 그러나 영덕-안동간에 걸친 55km의 산악 및 계곡 접근로는 여전히 개방되어 있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이 간격을 메우고자 영동에서 대구로 이동중인 기갑연대를 제3사단에 배속함과 동시에 이곳에서 대비정규전을 수행 중인 강원경찰 제5대대를 기갑연대에 배속시켰다. 당시에 기갑연대는 병력이 고작 550명이었으며, 2개 중대로 1개 대대를 편성하고 장비는 장갑차 4대,반장갑차 1대, 말 200여필 등을 보유했다. 당시 경찰은 400명 수준이고 개인화기만 보유하고 있었다.
7월 25일 진보에 도착한 연대장 유흥수 대령은 경찰로부터 상황을 보고 받게 된다. 경찰은 1개 연대 규모의 적이 영양방면에서 남하 중이며, 26일 아침 경찰은 407고지(진보 동북쪽 2km)에서 교전했으나 진보로 철수 중이라는 내용과 경찰대대 후방인 이전동(주왕산 남쪽 4km) 부근에 제766부대와 재산공비로 구성된 약 1,000여명의 게릴라가 준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갑연대장은 두절된 사단과의 통신을 복구하게 하는 한편, 현 접촉선에서 적을 저지하기로 결심하고 반변천 차안상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나. 제3사단과의 연결시도
7월 27일 06시경에 유훙수 연대장은 경찰에서 1개 소대를 차출하여 장갑 제1중대장 박용선 대위에게 배속하여, 영덕의 제3사단과의 연결작전을 수행토록 하였다. 그러나 정찰대가 황장재 고개를 지나 원전동 서쪽 1km에 이르렀을 때 1개 중대 규모의 북한군이 호를 구축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연대에 연락한 결과 적과의 접촉을 피하여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별다른 피해없이 복귀하게 된다.
7월 28일, 북한군의별다른 움직임이 관찰되지 않는 가운데, 피난민들로부터 1개 대대 규모가 화매동(원전동 북쪽 2km)에 집결하고 있으며, 이전동(청송 동남 12km)에는 1,000명 이상의 게릴라가 주왕산에서 하산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연대장은 현 진지선의 고수, 제3사단과의 연결, 공비토벌이라는 세 가지 일들을 동시에 실시하기로 결심하고, 제2기병대대 1개 소대로 사단과의 연결을, 경찰대대는 장갑차 1대를 증원하여 1개 중대로 이전동의 공비를 소탕하라고 명령하였다.
사단과의 연결 임무를 받은 제2기병대대(대대장 장철부 소령)는 제6중대에서1개소대를 차출하여 황장재를 피해 능선과 계곡을 가로질러 화매동 서북쪽 1.5km까지 진출했으나 적이 배치되어 경계를 하고 있음으로 이를 공격하여 30여 명의 사상자를 발생케 하였으나 적의 역습에 밀려 결국 복귀하고 말아 제2차 연결 작전도 실패했다.
한편 같은 이날 28일 08시경, 경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이전동에 진입하여 게릴라 100여 명을 사살한다.
7월 29일, 그동안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 북한군이 07시경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여 339고지의 경찰 2개 중대는 후방로의 차단 위협속에서 11시에 273-월전삼거리로 철수시켜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하게 한다.
다시 연대장은 사단과의 연결작전을 위해 제3도보대대(대대장 이붕직 대위)로 제3차 연결 작전을 시도하였다.
다. 주저항선 전투
7월 30일 미명, 폭우가 계속되는 가운데 북한군이 공격을 개시한다. 연대 주저헝선의 앞을 반변천의 범람으로 도하가 어렵게 되자 강원경찰 제5대대지역으로 공격을 집중했다.
이 지역을 방어하던 경찰은 공용화기도 없이 부족한 소총탄으로 북한군과 맞서야 했다. 경찰은 273고지에서 계속하여 적과 맞서고 있었으며, 연대는 연대본부 행정요원으로 조직한 1개 중대 (실 병력 100명) 와 장갑차 2대를 월전 삼거리로 추진하여 경찰을 지원하여, 북한군은 406고지로 물러섰다.
이 무렵 사단과의 연결작전을 위해 나갔던 제3도보대대는 수색대가 추매기(원전동 동남쪽 9km)에 이러렀다. 여기서 신안촌락에 북한군 이 차량 20대여 대와 10여 대의 우마차가 진보쪽으로 이동하기 위해 줄지어 있고 병력이 분산되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에 수색대는 적이 먼저 대대지역에 다다를 것으로 판단, 기습공격을 가하여 적을 일부 무력화 시킨후에 대대로 돌아와 이 사실을 보고하는 중에 적이 추격하여 사경을 가하게 된다.
대대장은 그들이 대대를 발견한 이상 영덕의 서측방 방어를 위해 병력을 증원할 것으로 판난하여 본대로 복귀할 것을 결심하고 복귀중에 적의 공격을 받아 분산철수하게 된다.
이렇듯 제3도보대대의 제3차 연결작전도 실패한 상황에서 기갑연대는 7월 31일 미명에 273고지로 침투한 북한군 1개 대대와 교전을 치루게 되었다. 결국 3시간 동안 버티다가 밀리어 비봉산 동북쪽 능선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좌전방에 반변천을 이용하여 방어중인 제1기갑대대와 제2기갑대대는 지형적 잇점을 이용하여 적의 진출을 저지하였지만 많은 병력 손실이 발생하여 결국 비봉산-월전삼거리-무명고지(월전삼거리 북쪽 500m)--261고지를 연하는 선으로 방어선을 축소하게 된다.
기갑연대장 유흥수 대령은 계속되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하였다. 특히 피난민들이 북한군 1개 대대규모가 괴정동(청송 동북쪽 7km)에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종합하여 분석한 결과로 청송으로 철수하게 된다.
여기서 연대는 적을 기만하기 위해 22시경에 주력이 월외동(청송 동쪽 7km)로 집결하여 북한군을 공격한려 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고, 차량 30여 대에 병력들을 분산시켜 헤드라이트를 켠 상태로 달기(청송 동쪽 5km)까지 진출했다가 그곳에 일부만 남겨놓고 전 차량이 헤드라이트를 끈 채 조용하 청송으로 돌아가는 방식을 취하여 적을 기만하였다.
라. 기갑연대의 진보 철수와 수도사단 배속
8월 1일 07시부터 적 1개대대 규모가 273고지를 발판으로 공격하고, 또 다른 1개 대대가 월전삼거리에서 공격하여 월전삼거리 북쪽 500m 고지에 배치되 ㄴ잡갑1대대는 세차례의 격전에서 장갑차와의 협공으로 적을 물리치고, 경찰대대는 273고지에서 적을 방어하고 있었다.
이렇듯 에하부대가 북한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물리치고 있을 때에 제3사단과의연겨릉ㄹ 위해 정보참모부에서 1개 분대를 투입하게 된다. 이날 10시에 차량으로 진보를 출발하여 청송-청운동을 거쳐 이전동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능선을 따라 행군하여 8월 2일 신안까지 진출했으나, 전날(8월 1일) 국군 제3사단이 영덕을 탈환하게 되자 밀려난 북한군의 주력이신안에서집결하여 정비중이어서 영덕까지의 통로가 차단되었다. 더이상의 진출이어 어려워 다시 차량으로 본대로 돌아오니 본대는 진보에서 물러나 청송에 집결하였다.
연대장 유흥수 대령은 8월 1일 저녁부터 수색대를 투입하여 적정을 수색결과 북한군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고, 8월 2일에는 강원 경찰로부터 적 2개 대대 규모가 273고지 동쪽으로 우회하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진다. 이에 연대자ㅑㅇ은 적이 연대의 동쪽 배후로 우회해 31번 도로(진보-청송간)를 공격하리라 판단하여 연대 예비인 제도보대대와 본부중대를 동천(비봉산 북쪽 1km)으로 이동 시켰다.
8월 2일 07시경 273고지 정면에 소수병력으로 공격을 하더니 북한군은 1개 연대 규모로 우회공격을 감행하여 부득이하게 철수하게 된다.
한편 이날 좌인접 부대인 수도사단(사단장 김석원 준장)이 길안으로 진출하여 추목동 다리골-426고지 간에 방어선을 형성하기 시작하고, 3일에는 소상상태를 유지한 가운데 수도사단장이 청송에 위치한 독립기갑연대를 방문하여 길안-청송지구방어에 대한 전술협조를 하였으며, 다음날 기갑연대는 수도사단에 배속되었다.
3. 전투 결과
7월 22일 제3사단에 배속된 기갑연대는 영양-청송 축선 사에서 준동을 시작한 북한군 제766부대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진보로 진출하였다. 이 당시에 연대의 병력은 550명 정도이도 장비는 장갑차 4대와 말 200필정도였다. 게다가 유무선 통신장비가 부족하여 육군본부나 영덕의 제3사단과도 교신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악조건하에도 연대는 진보 일대에 배치된 후에 강원경찰 제5대대를 통제하여 반변천을 중심으로 방어진지를 편성, 27일부터 8월 1일까지 4차례의 북한군 공격을 저지하였다. 이로써 영덕-강구를 공격주인 북한군이 측방 위협을 느끼게 한다.
한편 강원 경찰 제5대대는 월전동-273고지 선에 방어선을 편성하여 북한군 제766부대의 남하를 8월 2일까지 저지함은 물론 후속하는 북한군 제10연대의 영덕으로 우회 기동을 저지하였다.
이후에 기갑연대는 수도사단에 배속되어 사단의 우일선으로 청송 전투에 참가했다가 의성으로 이동하게 된다. 진보에서 기갑연대의 분전으로 아군의 전선이 양분되는 위기를 막을 수 있었다.
제 4절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1. 탐문 및 탐사 결과
[영덕 지역]
가. "축산 경정리의 미 해군 대위 랑웰"
영덕에서 전화가 왔다. 85세가 된 김태산씨가 본인이 어부를 했는데 미군 유해 1구를 그믈로 건져서 해변가에 매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분이 지금 몸이 아파서 대구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장소를 물어보니 경정리 해변가 해안초소 올라가는 길이라 한다.
나는 탐사팀을 데리고 현장으로 갔다. 경정리 노인정에 들러 관련사실을 설명했더니 해안초소가 여러곳이라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다고한다. 해변가를 따라 과거 초소 위치를 확인해 해가며 지역 향토사단 간부와 초소에 근무하는 보초들의 구전되는 이상한 이야기는 없는지 물어보았다.
"아 귀신이 나온다 하여 폐쇄된 초소가 한군데 있습니다."
나는 그곳을 찾아 해안선의 순찰로를 확인하고 해당 간부에게 지역주민들 이야기가 있으면 바로 연락달라 당부하고 떠났다. 그 후에 얼마 있어 지역에서 연락이 왔다.
"미 공군 조종사 1구를 경정리 해안 산 밑에 묻은 곳을 알고 있소"
김정대란 어른이다. 동네 어른으로부터 들었다며 전쟁중 공군 비행기가 영덕 공습간 바다에 추락하여 폭발했고 그물에 공군 복장을 한 미군 조종사 대위의 유해와 항공기 잔해가 걸려 나와 경정리 해안가 야산에 묻은 곳을 안다는 것이다.
내가 직접 들은 내용하고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비행기 추락 폭발이라는데 비행기 추락을 본 적이 없고 비행기 잔해가 나왔다는 이야기도 다르다. 조종사란 말은 같았다.
바로 기동발굴팀을 데리고 다시 경정리를 찾았다. 그리고 노인정에서 김영대 어른을 만났다. 함께 매장 장소로 추정되는 곳을 가니 지난번 귀신이 나온다는 초소막 오르는 산 밑이다. 그러면서 지역 문등산(석산)에도 1구가 매장되었는데, "백골 부대원이 마을 논에서 물을 먹다 전사하여 지역주민이 묻었다."는 것이다.
기동발굴 팀에는 베테랑 팀장인 준화가 임무를 맡아 진행하는데 2주간을 발굴 했지만 찾지를 못했다.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지 일대의 여러 곳이 추가 발굴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기간중 여러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러나 결국 못찾고 석산에서 1구를 발굴했다. 백골 부대원이라 했는데 아직 제18연대가 제3사단에 편입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곳 전투에는 제23연대와 독립 1.2대대, 제22연대, 강원 경찰인데 왜 "백골부대원"이란 말이 나왔을까?
"백골부대 어원을 말하다"
국군 제3사단 제18연대를 진백골부대라 한다. 제3사단을 요즘 백골부대라 하고. 그런데 6.25전쟁 당시에 제18연대는 주로 서북청년단원들로 구성 되는데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상징적 의미로 철모에 백골을 그리고 다녔다 한다.
이 제18연대는 원래 '48. 11월 20일에 포항에서 창설되며 최석 중령이 연대장이었다. 전쟁이전에는 옹진반도에 들어가기도 하며 전쟁직전에 제17연대와 교대되어 서울에 있었으며 수도사단 소속이었다. 그러다 북진 작전간 성진까지 진출했다가 철수작전간에 흥남에서 부산으로 철수하면서 '12월 10일 예속 변경되어 제3사단으로 가서 홍천-하수내리로 진출한다. 반면 원래 제26연대는 '50. 8. 24일 포항지구 전투간 창설되어 제3사단에 예속, 형산강 돌파작전에 참여하고 북진 작전간 혜산진까지 진출 후 철수 작전간 '50. 12. 10일 수도사단으로 예속 변경된다.
(1)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서북청년단원이다.
서북청년단은 광복 후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단체가 대공투쟁의 능률적인 수행을 위해 조직한 우익청년운동단체로써 1946년 11월 30일 서울 기독교 청년회에서 결정된 서북청년회였다.
이들은 경찰의 좌익 색출 업무를 돕고 좌우익의 충동이 있을때마다 우익진영의 선봉장을 했다. 따라서 제주도 4.3 항쟁에서 미군은 이들을 여기에 파견하였으며 많은 마찰을 가져왔다. 그러다 '47년 4월 지청천이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자 '48년 9월에 여기에 통합 되고 이후에 이승만의 노선에 따르는 대한청년단에 '49년 12월 19일 흡수 통합 된다.
따라서 서북청년단 인원들이 전쟁전후 군에 들어와 많은 역활을 하는데 제8사단 제18포병대대는 거의 전원이 서북청년단이었다.
(2) "독립 제1대대,2대대의 역사제고"
이런 선상에서 육군은 북한에서 탈출한 청년들과 귀순장병들로써 수색학교('48. 11. 25일 창설 되고 '49. 6. 20일에 제1독립대대로 개편), 호림 부대 (영등포 학원), 보국대대(제803독립대대)등을 창설하여 남파되는 유격대와 지방공비의 소탕작전에 운용하기도 한다.
결국 이 두가지 사례에서 영덕지구에 참여한 독립대대는 그 구성원이 서북청년단원들이란 사실에 주목해본다면 그 분들이 고향에 대한 가고픈 그리움을 강하게 표시한 것이 백골이다.
백골이 되더라도 북으로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여기 석산에 숨져간 용사는 바로 이곳 영덕전투에서 숨져간 독립대대 병력이라고 나는 맏는다.
다시 경정리 미군관련 발굴로 돌아가 본다. 우린 '08년도에 몇번의 현장 조사와 기동발굴에도 유해를 찾지 못해 아쉬움이 컷다.
2. "용사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그래서 '09년 초에 내가 직접 기동발굴팀을 이끌고 주소령과 현장을 찾았다. 해안경비병들이 걸어 다니는 길을 다시 분석했다. 하지만 이곳은 폭이 좁은 계곡같은 곳이라 다른 비상루트가 있을리가 없다. 아직 대구병원에 계시는 최초 제보자 어른께도 전화를 드려 미군인지 국군인지 다시 한번 물었다. 하지만 침묵으로 말을 안하신다. 본인이 직접 아버지와 묻었음에도 말이다.
결국 이곳 초소에서 근무하다 제대한 인원을 수소문하여 그 귀신이라는 정체를 파악하였다. 비가 내리거나 파도소리가 요란한 날에는 꼭 나타나 계단을 타고 오르려하면 뭔가 있는 것같아서 뒤돌아보면 바로 뒤에 서있다 사라진다는 소설같은 이야기다.
나는 발굴 장소를 좀더 위로 올렸다. 계단을 올라서는 바로 그 위치까지 올려서 다시 땅을 파내려갔다. 이곳 땅은 색깔이 붉은 색으로 콘크리트처럼 딱딱하여 삽으로는 잘 파내기도 힘들다. 야삽 뒤로 정을 들고 돌을 찍듯 흙을 파내는데 얼마를 파내니 쿵쿵거리는 미약한 소리가 났다.
항공잠바를 입고 잠든 용사님
"잠바가 나옵니다." 발굴병의 외침이다.
"동작그만, 모든걸 멈추고 일어서 뒤로 물러나라" 직접 트롤(전문 발굴 장비)를 들고 유심히 살펴보니 쟈크가 그대로 있다. 방향을 확인하니 머리가 초소막쪽이고 발이 바닷가쪽이다. 좀더 표면을 긁어내니 신발이 나오는데 단화다.
원형이 그대로 있는 수첩, 그리고 랑웰 캡틴
가슴쪽이 볼록하여 보니 수첩이 있다.그 순간을 놓치지않으려 카메라를 대고 지갑을 열어보니 그대로 살았다. 그래서 신분증을 꺼냈다. 예비역 신분으로 다시 군에 들어와 한국을 찾아온 자유의 투사였다. 군번도 있고 혈액형도 있고 바로 미 하와이 JPAC에 전화를 걸었다.
"스탠리, 나 이과장이다."
"아니 이 새벽에 무슨 일로 전화를 했습니까?"
"빨리 6.25젅쟁 전사자 중에 해군 랑웰대위가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러 연락이 왔다.
"있어요. 대위로 전역했다가 다시 소위로 들어와 소해정을 타고 임무 수행중 실종됐습니다."
2년간의 끈질긴 추적끝에 미군용사를 발굴했다. '50년 10월에 바로 경정리 앞바다에서 소해정이 임무 수행중 어뢰접촉으로 폭발하여 21명 승무원 전원이 전사하여 아직까지 10여 명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유해는 완벽하게 완전유해로 발굴 되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미 본토로 고향을 찾아가 워싱턴에 있는 웰링턴 국립묘지에 안장 되었다.
그 이후에 미군측 발굴단이 국내에 들어와 이 일대에서 주민들의 제보를 청취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다른 실종자를 찾는 발굴을 개시하였다. 우리가 발굴한 지점에서 300여 m 떨어진 해변 도로 위 산 골짜기 부분에 집단으로 매장되었다는 이야기등 분분하여 발굴 했지만 어린 아기가 죽어서 묻어놓은 곳으로 판명 되었다. 일대를 정말 열심히 미군부대원들이 우리측 인원을 지원받아 발굴했지만 추가 실종자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대구 병원에 계시던(지금은 돌아가심) 김태산 어른처럼 그 당시에 분명 그믈에 걸린 유해가 있어 어딘가에 묻어버리고 그분들이 휴대하고 있던 달러나 동니 될만한 것들(랑웰도 계급장이 백금이라는 소문에 다 떼어 갔음)을 가져가고 그 죄책감에 말없이 살다 많은 어부들이 운명했으리라 보는 것은 나만의 판단일까~!
"UN KNOWN" -무명용사님 묘비"
나는 웨링턴 묘지에 안장 되는 날에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조문을 했다. 미국의 독립전쟁에서 그리고 1860년대 남북전쟁에서 숨져간 용사들을 모셔놓은, 그리고 역대 미국의 대통령이 잠들어 있는 곳에 갔다. 화려하지도 않고 준엄한 느낌을 주는 에치먼드언덕에 자리잡은 유서깊은 곳이다. 흰말이 봉송된 알루미늄 관을 실은 마차를 끌고 안장 장소에 도착하여 그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조기를 지금의 용사님들, 운구에 참여한 군인들의 가슴을 터치하여 그 애절하고 뜻깊은 충절을 담아 굴토된 묘안에 넣고 안장식이 끝났다.
나는 그 유족들에게 발굴되는 과정의 사진을 준비하여 드리고 간략하게 설명을 드렸다. 지켜보며 하얀 눈물만을 흘리는 조카분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런데 여기서 엄청 큰 사실을 발견했다. 미국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용사도 묘비를 세운다는 것이다. 우린 지금 여러 이유들, 땅이 부족하고 적군인지 아군인지 구별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감식용 시료만을 채취하고 화장하여 보관하였다.('10년부터는 중성자 박스에 유해 그대로 보관중)
이걸 보면서 우리도 전향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도 감히 말하고 싶다. 미국도 우리보다 먼저 남북이 싸웠다. 그러나 이긴 북쪽(링컨이 주도)이나 패한 남쪽이나 같은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려 온 청교도들이란 차원에서 대 통합을 이루었다.
1864년에 조성된 묘역은 1864년 5월 13일 인근지방병원에서 죽은 남군포로가 처음 묻히기 시작하였고 무명용사는 조성 당시에 제1차 세게대전의 전몰군인의 묘역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전쟁에서 전사한 이름 모르는 병사들도 묻혀 있다.
그런데 우린 지금 완전하지도 않은 같은 공산국이었으며 실질적으로 김일성을 사주한 중공군을 중공에 인도적 차원에서 매년 발굴되는 유해를 넘겨주고 있다.그 숫자만도 1,000구가 넘었다.
하지만 북한군은 같은 민족이며 헌법상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면서 완벽하지도 않은 피아판단을 근거로 단지에 넣어져 파주 적군 묘지 원수의 무덤에 들어가 있다.
하루 빨리 정치권이 나서서 비무장지대에 "평화 공존지대"를 조성하여 남북한 공히 70년전 전쟁의 광란에서 숨져간 용사님을 모두 이곳에 안장하여 못다핀 젊은 청춘의 한을 씻김굿을 통하여 저 하늘로 올려 보내고 역사속에서 민족 대통합의 희생자였음을 상호 인정하는 큰 그림을 그렸으면 한다. 젊은 군인은 싸우라고 하니 용감히 싸우다 죽은 용사일 뿐이다.
3. "오포리 진등재에 남겨진 용사님"
전사에 의하면 북한군 제5사단이나 제766육전대는 미 함대의 함포사격과 함재기의 출격으로 고개를 못들어 낮에는 침묵하고 밤에 주로 공격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경부가도에 주력군이 지금 김천을 지나고 있는 마당에 동해안은 진출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부산을 압박하려는 그들의 작전의도가 빗나가고 있었다. 또한 너무 많은 병력손실로 어려움이 많아 계속하여 점령지에서 징집인원으로 채우다 보니 전투력이 떨어지고 후방에서의 군수물자 지원도 원활하지 못했다.
그래서 집요하게 산악침투로를 이용하여 북한군 제5사단의 좌익에서는 국군 수도사단을 따라 1개 사단이 진출하면서 측방에서 제3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려 하였다. 오천리에서 오십천을 건너 산을 올라서면 320고지 삿갓봉이다. 이 고지에서 바라보면 오십천이 남에서 북으러 흘러 동으로 그리고 다시 남으로 흘로 강구로 내려가 바닷물과 합쳐지는 모습이 훤하게 보인다.
강구항에서 점심을 먹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온 한 아저씨가 본인이 국군이 묻혀 있는 곳을 안다며 직접 안내를 하겠다고 한다.
"당신 쓸데없는 일에 나서서 또 어딜가요?"
우린 오토바이를 따라 화전리로 달려갔다. 914번 도로를 따라 얼마를 가니 화전리가 나오는데 밭에서 여러사람이 밭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릴 데리고 가는 분이 이 밭의 남자 주인이다. 허나 부인되시는 분이 잠깐 갔다온다는 이야기에 또 쓸데없는 일에 나선다고 막무가내로 화를 내고 있다. 얼마나 내가 무안한지 마로 못꺼내고 한참을 지켜보다 곧 우리 차로 모셔다 드리겠다고 약속을 해야했다.
바로 길 좌측 봉우리가 두리봉이 있다고 한다. 높이야 200m도 안되는 바로 길옆 야산인데 이곳도 시체가 깔려 있었다고 한다. 계속하여 차는 길을 올라서 정상에 다다랐다. 이곳에서 올라서면 남북으로 능선이 이어져 아주 쉽게 북쪽의 삿갓봉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장사에서 서족으로 오르는 930번 도로를 따라 오르면 메티재를 만나고 또 그 밑에 동대산이나 연인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그런데 이곳이 전쟁 당시에 북한군의 침투로였고 이 능선을 이용하여 영덕의 배후를 차단하고 차후에 장사지구에 제3사단을 고립시키게 된다.
"이 저수지에 물 반, 사람 반이였데요."
차가 먼저 화전 저수지 둑방에 섰다. 동네 어른들 이야기가 이 저수지에 죽은 군인들이 수없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언젠가는 물을 다 빼내고 시신 건져내는 일도 있었단다. 우리는 고개숙여 묵념을 올렸다. 그리고 정상에 올랐다.
일단 올라왔으니 아저씨를 보내드려야 했다. 그런데 아저씨가 안간다며 함께 삿갓봉까지 간다는 것이다. 남자들의 오기인지도 모른다. 어르신이 일에 짜증이 난 것인지 아니면 호국정신이 투철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약속을 지연시키는 장본인, 아니 고급장교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일정구간을 차로 들어가 탐사를 하는데 종격실 능선에 개인호가 엄청 많다. 탐지기를 돌리니 소리가 여기저기 빽빽거렸다. "우리 어릴때 여기에 올라와 탄피주어서 엿바꿔 먹었어요."
결국 어른을 먼저 차로 내려보내고 내일 다시 만나기로 했다. 오포리 음지마을 앞산에도 군인이 엄청 죽어 묻혀 있다는 제보였다.
우리는 삼사해상공원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잠들 집에 여장을 풀고 목욕을 하고 다시 모텔에 오니 마침 주인장이 어디서 멧돼지를 잡았다고 고기를 먹자고 한다.
"살다보니 이런 횡재(?)도 있더라."
사장님이 안주인의 우리 이야기를 듣고 좋은 일 하는분들인데 대접을 해야 한다고 기꺼이 본인이 사냥으로 잡아온 것을 우리에게 선물하겠다고 함께 먹자고 한다. 이 지역 발굴을 담당해야 할 해병대 유소령과 펑치기(?)로 유명한 김준위, 나와 우리 팀장, 운전병이 참석하여 성찬이 이루어져 간단한 약주에 모처럼 에너지를 축적했다.
"이과장님, 우곡리 솔밭산 주변에도 탄피가 수 없이 널려 있어요." 사장, 포수님의 이야기다.
다음날 우리는 먼저 오포리에 가 어제의 어른을 만나 여사장님께 죄송하다고 인사를 드렸다. 그랬더니 손사례를 치며 괜찮다고 한다 "저 양반이 이핑계 저핑계로 바쁜데 꼭 빠져 나가서 그렇지 어제는 미안해요"
"모든 자료에 수상한 기록만 가득하다-강구에 4,172위의 미수집 유해기록의 진실~?"
여기도 산이 온통 개인호다. 영덕지구 전투의 치열함을 알 수가 있었다. 서울 현충원의 위패카드를 지역별로 분류하니 강구지역이 무려 4,172위다. 가장 많은 인원이 찾아지지 못한 곳이다. 주요전투지역 자료에는 영덕지구가 국군 제3사단이 북한군 제5사단과 전투하여 피해 현황 쌍방에 "미상"이라 나와 있다. 제5군지사가 보관하고 있는 전사자 미수집 명부에는 제3사단이 장교 24명 부사관.병이 769명으로 되어 있다
어느 것을 믿고 않믿고의 문제를 넘어서는 사실은 기막힌 숫자다. 나는 발굴 업무에 근무하는 동안 그 진실게임에 들어가 많은 것을 알고 싶었지만 들어 갈수록 안타까운 마음만 남긴체 눈감고 가슴으로 울어야만 했다.
4. "금호리 181고지의 돌개바람"
오십천대교 바로 밑에 승덕사란 절이 있고 바로 그 위가 207고지며 그 위가 고불봉으로 영덕지구 전투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이곳으로부터 강구쪽으로를 금호리라 하는데 200m 내외의 낮은 고지군이다.
우린 이곳에 유해가 엄청 있었다는 제보에 따라 일대를 샅샅이 탐사하고 탐문을 했다. 누구를 만나도 그 당시에 산에 가면 뼈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탄피나 소총도 많아서 북한군이 밀려간 후에 주민들이 경찰 통제로 올라가 수거하여 반납하였다 한다.
하지만 일부 군인들이 들어와 유해를 주변에서 화장하여 목함에 넣어서 가져갔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군 점령기간에 동네 어른들이 산에 올라가 묻어버린 유해는 제대로 발굴되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북한군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분이 없다."
거짓말이 아니고 나는 20년간 전국을 다녔다. 그런데 지금까지 누구한테도 북한군 유해를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5.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파예프의 6.25전쟁 보고서에는 북한군이 엄청 죽었음을 기록한다.
북한군은 우리보다 적게 죽었을리가 없다. 소련군 군사고문단장의 보고서에 의하면 문경-영주-영덕 방면의 북한군 제2군단은 정찰 및 경계미숙으로 제15사단이 음성 북쪽과 충주 서쪽에서 2회에 걸쳐 아군의 매복에 걸려 많은 손실을 입었으며 일시적으로 방어로 전환했다고 한다. 뒤를 이어 북한군 제1사단이 투입된다.
문경지역 영강-유곡리전투에서 북한군 제1사단은 우리 군과 5일간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많은 손실을 입은 후 7월 22일 점령지역으로부터 8~10km 철수 하였다고 기록한다. 이 전투에서 병력 40%의 피해를 입었다.(1권 205~206p).
또한 북한군 제5사단은 울진을 점령한 후에 7월 16일 우리 군 해병 1개 대대(해군 포항경비부)를 격파하고 영해를 점령한다. 사단은 7월 18일 새벽 5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영덕을 오후 6시에 완전히 해방 시켰다. 7월 21일1 포항으로 상륙한 증원병력으로 아군은 7월 21일 오후에 역습을 재개하여 오후 늦게 북한군 제5사단 예하부대들을 격파하고 영덕을 탈환하게 된다. 그후 23일 새벽에 야간공격으로 영덕을 재탈환하며 미군 및 남조선군 병사와 장교 3,000명 이상이 전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1권 207~208)
이러한 기록에 크게 의미를 두지않는다 하지만 북한군 제1사단의 피해가 40%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0,000명이면 4,000명이다. 국군 제3사단 등 지원부대(독립 제1.2대대, 경찰대대)가 3,000여 명이 전사했다는 기록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러한 간단한 비교에서 과연 우리가 발굴하고 있는 유해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무엇이 진실에 가까운건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면 내가 내손바닥에 검은 흙을 묻히는 결과일까?
6. "북한군 유해는 어디로 갔는지, 우리 용사님의 유해는 어디에 있는지?"
어느날이다. '10년도 이른 봄에 해병대에서 이곳 일대의 유해발굴을 시작하였다. 지역 책임은 제50 향토사단이지만 경계업무에 매진토록 하고 상륙임무를 수행하는 해병대가 포항에 집결보유되어 있어 해병대를 투입했다. 실제로 전쟁 당시에 해군 포항경비부가 전투에 참여도 했다.
덕곡리 골짜기 한부분을 공사하여 24인용 숙영텐트를 공병이 투입되어 완벽하게 내무반을 만들었다. 우리 발굴팀도 1개 기동 발굴 팀이 들어가 있었다.
그런 어느날 눈이 내리는데 한 60cm는 쌓여 기동이 불가한 상황이다. 그러나 전쟁시라면 악천후가 되어 북한군이 기습하기 딱 좋은 날이 된다. 그래서 나는 한번 게획한 것은 사고 위험이 없다면 하도록 통제하였다.
"눈이 내리는데 어떻게 너희들 쉬나 아니면 산에 오르나?"
"어~, 쉬었으면 합니다만 날씨를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백팀장의 답변이다.
"그래 알았다. 안전에 유의해. 나도 한번 그곳에 가보겠다." 얼마후에 연락이 와서 눈이 그쳐 투입한다는 내용이다. 나는 차르 ㄹ달려 나갔다. 금호리에 도착하니 북쪽은 눈이 그대로 쌓여있고 남쪽은 햇빛이 갑작스레 뜨거워져 다 녹아갔다.
그러니 백팀장은 내가 남쪽으로 올 것으로 알고 감시원을 배치하였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 길을 잘못들어 남쪽으로 오른다는 것이 북쪽으로 고불봉 능선을 올랐다.
"산 꼭대기 나무가지에 걸려있는 텐트들 잔해"
그런데 오르기전 골짜기를 바라보니 멀쩡하게 정리정돈이 칼처럼 되어있던 텐트가 하나도 없다. 우리 기동발굴팀 인원이 달려와 상황을 설명한다. 일요일 오후늦게부터 야간에 바람이 부는데 바람이 아니라 미국 동부에서나 볼 수 있는 토네이드급의 돌풍이 불어 모든 것을 다 산 위로 올려버렸다고 한다. 사람이 바람따라 가지않아서 다행이지 가건물은 다 날아가 산 위에 소나무나 할엽수가지에 걸쳐 있다고 한다.
꼭 검은 눈이 내린 것처럼, 24인용 텐트가 찟겨지고 프레임에서 벗겨져 날아가 나무가지에 앉아 있다. 여기에 눈까지 새벽에 내렸지만 이내 바람이 불어 눈은 다 날아가고 햇빛이 드는 곳은 녹아버렸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강력한 바람이 어떻게 이곳 영덕 금호리 우곡리 골짜기에 불었다.
나는 207고지와 고불봉을 오르기 위해 하금호에서 산으로 접어들었다. 눈이 쌓여 산속에는 길이 없어져 보이지 않는다. 별거 아니다 싶어 아이젠도 없이그저 걸어서 오르는데 한참을 걷다보니 산 능선이 아닌 엉뚱한 북쪽에서 오르는 구간에 내가 들어가 있었다. 그러니 눈이 무릎까지 덮는다.
"눈이 쌓인 산에서 만난 발굴현장"
시간이 많이 흘러 점심시간이 되어갔다. 하지만 열심히 걸었다는 것이 산을 반바뀌 돌아 북쪽에서 오르는 정반대의 임도에 내가 서있다. 다시 용기를 내어 오르는데 가까이에 병력이 보인다. 발굴작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오르면서 불평을 했을지 모르지만 능선일대는 눈이 대부분 녹아내려 발굴에는 지장이 없다. 드디어 정상에 올라선다. 병력이 내가 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감시(?)인원은 계속하여 남쪽을 보고 있다.가가이 다가서서 "뭐하니?" 물으니 놀라서 움칠한다. 혹시라도 설인인줄 알았다고 한다. 허겁지겁 간부들이 뛰어 온다. 백팀장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다가섰다.
"어디로 올라왔습니까?"
"나 남쪽에서 우회해 가지고 북쪽으로 올라왔지. 눈이 많이 내려 힘들겠다?" 사실 능선에는 눈이 조금 밖에 없어서 30cm니 60cm니 하던 이야기가 무색해 졌다.
"60cm 맞지 않습니까?" 백팀장이 눈을 굴려서 한주먹량을 만들고 본인 손을 펼쳐 이어 60cm 표시 시늉을 했다. 웃음이 나왔다. 모두 웃었다. 우리는 누구 위해 발굴 작전을 성심 성의껏 해야 하는지 다시한번 마음 속에 다짐했다.
"강구의 핏물, 4172명의 숫자는 허구인가- 공동묘지 푯말에 새겨진 참전용사?"
강구항에서 우린 대게를 골랐다. 바로 위에 강정리가 대게 발생지다. 영덕게가 아니라 강구게다. 웃기는 이야기가 아니라 영덕은 영덕군의 읍소재지며 강구는 영덕군의 강구면 면소재지다. 이곳에 강구항이 있다. 영덕항은 없다.
우리는 강구리 이장님을 만나 함께 봉화산(150m)을 오른다. 이곳 중간지점에 공동묘지가 있고 참전용사 묘가 있다는 제보내용을 확인하러 가는 길이다. 언제 누가 안장했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산위로 올라서서 얼마를 걸으니 묘비가 나왔다. "6.25전쟁 참전용사"라는 오래된 돌비가 나온다. 그러나 이것이 유족이 해놓은 것인지 아니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인지 모른다. 다만 이 일대가 모두 공동묘지인데 일제시대에도 있었다 한다.
"수많은 무연고 묘, 그리고 봉분이 훼손되는 묘의 정체?"
혹시 이곳에 그 수많은 참전용사님이 묻혀있는 것은 아닐까? 8월 전투에서 오십천교를 또 무계획하게 폭파하여 대안상에 있던 군인들이 철수하지 못하고 물속에 뛰어들어 익사하는 등의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하게 된다. 강을 건너지 못한 일부 병력은 금호리로 우회하여 산을 타고 뛰어내리면 강구항에 도달하는데 이렇게 해서 그 많은 인원이 정말 익사, 아니 전사한 것일까?
그래서 혹시라도 너무 비참하니 물을 먹어 퉁퉁 배가부른 용사님들을 건져내서 지역주민을 붙잡아 부역으로 한구한구 이 공동묘지로 옮겨 묻은 것일까?
아니면 전후에 국군이 들어와 일대에서 화장하여 이곳 어딘가에 묻었든지 서울 동작동 국군묘지 현충관 내부 지하 납골당에 그 까만 재를 옮겨 놓은 것일까?
7. 현충원의 위패 및 묘비 분석
우리 위패 자료에 4,172명인데 소련군 군사고문단장의 기록에 3,000명선이라 하니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것도 갔고 하지만 유해는 지금 영덕-강구에 없다.
우리 14만여 명의 시신을 찾지못한 유해의 위패카드상 실종지의 지역별 분포를 보면 100명 이상 되는 곳이 30개소, 99~50위 이상이 20개소다.
특이한 몇 곳을 알아보면 경기도는 총 8개 지역중 화성 송산 719, 의정부 517, 인천 269, 양주 108, 광주도척 65위다.
강원도는 속초 356, 설악 174, 인제 북면 106, 김화 95, 홍천 내촌 97위다.
경북은 영덕.강구 4,172, 상주외서 404, 울진 평해 231, 울진 북면 106, 칠곡 용수리 220, 풍천 95, 청도 123, 경주 107, 의성 81위 등이다.
기타 지역은 충주 161, 통영 태도 125, 남해 136, 금산 복수 307, 보령 월사리 241, 태안 36, 덕유산 564, 정읍 회문산 134, 장수 장안산 139, 내장산 138, 순천 조계산 405, 목포 허사 128, 영광 불갑산 375, 사천 마도 98, 창녕 93, 고창 방장산 70, 정읍 용계후산 81, 담양 중옥 86, 제주 84위, 강화 58, 군위 172위 등이다
도대체 영덕-강구에 어떻게 4,172명의 용사님이 수습되지 못하고 남겨졌다는 것인지 이해가 어렵다. 설상 강구항에 밤에 후퇴를 하다 밀려 들어갔다 하여도 솔직히 몇 백은 모르겠다. 이건 아니다. 4천명이면 산더미다.
그렇다면 유해를 수습하여 현충원에 안장된 인원의 지역별 현황을 보면 100명이상 전사한 지역이 31개소, 99~50명 이상이 20개소다.
서울.경기는 장단 6,643, 연천 508, 가평 486, 서울 167, 노량진 52, 수원 75, 김포 65위 등이다.
강원도는 금화 3,050, 양구 1,500, 인제 875, 고성 828, 철원 547, 화천 290, 홍천 211위 등이다.
경북은 영천 436, 안강 268, 안동 188, 포항 178, 경주 172, 영덕 167, 찰곡 139위 등이다.
이상의 내용에서 문제점은 어느 정도 파악했으리라 본다. 몇번에 걸친 유해수습이 종전 후에 부대별로 전투 경로를 따라 이루어지고 현장에서 수습하여 화장해서 국군묘지에 납골당으로 온 경우도 있고 일부는 유족에게 자가봉송 된 경우도 있다.
따라서 현재 현충원의 묘비를 이용한 현황은 자가봉송 유해가 누락된 현황이므로 지역별 전사 숫자는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진보 지역]
1. "바치골의 국군 유해"
우리가 '00년도에 진보를 찾았을 때는 한여름이었다. 마침 진보 장날이라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진보는 반변천이 북쪽에 흐르고 동쪽에는 서시천과 화매천이 반변천과 만나는 물의 고장이며 청송 교도소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마을회관을 찾아 노인을 찾으니 반갑게 맞아 주셨다. 이곳에서의 전투는 사실 크게 일어나지 않았고 병력도 전투경찰이 오히려 열심히 싸웠다고 한다. 군인들이 강변에 진지를 구축하는데 그 당시에는 비가 계속 내려 땅을 파나마나였으며 이미 청송에 게릴라 부대가 들어와 지역 프락치들이 활동하고 있어 국민들은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피난도 대부분 못갔다고 한다.
"전투경찰은 보지도 못했다."
우리 전사에는 경찰이 진보 우측 석보면의 화대천 전방 고지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하며 축차적으로 물러나 사시천을 넘어와서는 고현리의 273고지를 중심으로 사시천 넘어 406고지간에서 쟁탈전을 한 것으로 기록되고 이어서 비봉산 동측방으로 밀려 내려오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바로 그 서쪽인 진보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본인이 이 일대는 다 안다고 자랑하는 한 어른이 나서서 자기 논에 국군을 파가라고 한다.
"아니 어떻게 어르신 논에 유해가 있습니까?"
"지금은 땅을 팔아버려 남이 경작하는데 비봉산에서 죽은 군인들을 칡순이나 뭐 들것이나 들고 나오면 이 논에다 쭈욱 펼쳐놓고 무슨 보고서를 쓰는지 아군 몇 명이 논에 있어요."
"혹시 화장은 안했습니까?"
"여기서 화장은 없었어요. 그런데 8월들어서자마자 북한군이 기습공격으로 비봉산을 빼앗겨 시신을 미쳐 빼내지 못하고 그대로 있어 북한군이 통제하여 논을 파고 묻어 버렸어요."
"그 곳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어른을 모시고 바치골로 갔다.
"그럼 언제 여기에 묻힌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까?"
"원래 논이니 벼가 자라는데 벼가 웃자라 바람에 다 넘어져서 하나도 수확을 못하는데 다시 국군이 올라와 유해를 찾는거요. 그런데 우리가 아나."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모르겠어. 동네에 웬만한 사람은 다 붙들려 가서 문초를 당하고 고생했는데 갑작스레 마을사람들이 경찰에 부역으로 끌려나와 이 논바닥을 전수 팠어요."
"그래서 유해가 나왔습니까?"
"몇구 나왔는지는 정확히 모르는데 나왔다고 해요."
"왜 어른은 땅주인인데 여기에 없었습니까?" 들어보니 어른은 바로 청방이 되어 전투경찰을 따라 일월산지역 공비토벌에 참여하였다 한다.
2. "북한군 제766 유격대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진보 지역전투에서 언급하고 싶은 부대가 있다. 바로 동해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제766부대의 성격이다. 아무런 제재를 받지않고 상륙하여 내륙으로 진출해서 아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로와 군수시설을 습격하며 아군의 퇴로차단 역활을 수행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개전초부터 이곳 진보에 이르기까지 사실 우리의 동해안 내륙에는 아무런 방어부대가 없는데도 진출을 제대로 하지않고 오히려 아군 주위에 멤도는 듯한 활동을 하였다는 점이다.
이부대의 부대장은 오진우 총좌인데 북한 혁명 제1세대로써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6세 때인 1933년부터 빨치산 활동을 하였으며 1976년 이후 16년간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북한 권력 핵심요원으로 김일성과 같이 원수 칭호를 받았다.
그는 기록에는 1917. 3. 3에 함남 북청출신이라 한다. 하지만 경주 감포지역에서 만난 한 지역주민은 오진우가 경주사람이라고 한다. 그 가문이 이곳에 살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또 한 사람인 제15사단장 박성철이다. 박성철은 경주에서 출생(함북 길주 출생이란 설도 있음)하여 일본 죠치대학을 다니다 공산당에 입당하게 되며 1935년 룡정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 김일성을 만났다고 한다. 그는 북한 외교의 1인자로 국가 부주석겸 중앙 인민위원회 위원으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제766부대나 제15사단이 어딘지 모르게 어설픈 공격을 하고 진출해 왔다는 것이다. 제15사단은 상주 화령장에서, 음성 동락리에서 녹아난 사단이며 내륙으로 진출한다는 제77유격부대는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농민수준의 군대였다는 것이다.
과연 오진우와 박성철은 그런 고향의 향수, 아니 그 조상들의 고향의 향수에 어느정도 느낌을 갖고 찾아오지않았나, 그래서 몰아붙이지 못하고 머뭇머뭇거리다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을 주어 국가의 운명을 이어가도록 혹시나 도와주지않았나 싶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 나다.
제 5절 참전용사 / 지역주민 증언 내용 /유해발굴현황
1. 참전용사
가. 이강은(3-22-1-2중, '18) : 본인은 '50.7.11일 입대하여 영덕-강구전투에 참여하여 강구 603고지(207고지로 추정)를 향해 공격하여 진지를 탈환했다. 그런데 70여 명중 6명만이 생존하는 치열한 전투를 했다.
나.정창섭(3-22-1대, '18) : 이강용사와 같은 증언이며 본인은 이곳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여 후송된다.
다. 박찬민(학도병, '18) : 본인은 '50.8월 중학교 5학년인 제17세 때 대구에서 거리 모병시 지원하여 대구농림학교에서 훈련받고 밤에 트럭으로 영덕 북방 분지형태의 산중턱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좌측엉덩이에 총상을 입고 실신하였다다 깨어나 탈출하였다.
깨어나 보니 많은 인원이 전사해 있었으며, 탈출하여 영덕 시골 민가에서 농니부부의 도움으로 총알을 제거 및 치료한 후 대구로 이동하여 예전 고향인 범어동 과수원집에 가서 생활하던 중 9.28 서울 수복 후 부역으로 낙동강 전전 현장에 갔는데 전사한 사람이 아주 많았으며 특히 경부선 낙동강 철길 굴속에 전사자들이 많았다.
2. 민간인 증언 내용
가. 김옥련('18) : 어릴 때 영덕 평해 지정마을ㅇ에 살았다. 소를 먹이기 위해 마을 공동묘지가 있는 산에 다보면 철모 등 유품과 두개골이 등이 많이 있었고 일부는 바위틈에서도 보았다.
3. 유해발굴 현황(380구)
이곳 영덕 강구 지역은 거의 매년에 걸쳐 유해발굴 작전이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총 380여구가 발굴된다('19까지), 주요발굴결과를 보면 '10년에 무려 76구가 금호리 일대(24)와 흥가리 지역(37), 우곡리(8구)에서 발굴된다. '14년애도 같은 지역에서 24구, '15년에는 15구, '16년에는 7구가 발굴된다. 그외에 우곡리에서 9구가 발굴되었다.
다른 년도의 발굴도 위의 전투지역을 벗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여기서는 '10년도 자료를 집중 제시한다.
가. 2010년 발굴 결과
주로 전투지역에서 발굴이 된 유해로 76구다. 금호리 무명 183고지 일대에서는 개인호 425개를 굴토하여 유해 17구가 발굴되고 , 화전리 무명 237고지는 개인호 181개와 교통호 70m를 굴토하여 유해 1구를 찾았다.
금호리 무명 207고지에서는 능선상 개인호 99개를 굴토했으나 유해는 찾지 못했다. 금진리 무명 150고지에서는 개인호 220개를 글토하게 되는데 강구항으로 향하는 주능선과 주변 가지능선을 굴토했다. 여기서는 유해3구를 발굴하게 되는데 완전유해는 업쇼고 다리뼈 등 부분 유해로 발굴되었다. 우곡 2리 무명 320고지는 개인호 32개를 발굴하여 유해 2구를 찾았다.
천전리 무릉산은 산 정상부와 279고지로 향하는 능선일대에서 개인호 220개를 굴토하였으나 유해는 찾지못했다. 천전리 무명 279고지와 그 남쪽 227고지일대는 개인호 200여개를 식별하여 유해 3구를 찾았다.
남산리 남산일대는 개인호 175개를 굴토하여 유해 2구를 발굴하고, 화저리 무명 261고지일대에서는 개인호 450개에서 유해 13구를 발굴했으나 상직리 무명 241고지는 개인호 175개를 굴토했으나 유해는 찾지못했다. 반면에 상직리 무명 206고지에서는 개인호 600여개를 발굴하여 유해 9구를 했다.
원직리 무명 151고지에서는 개인호 550개를 발굴하여 유해 2구를 발굴, 홍기리 무명 330고지에서는 개인호 730여개를 발굴하여 유해 6구를 발굴했다. 우곡리 무명 360고지에서는 개인호 200여개를 발굴하여 유해 4구를 발굴했다.
제보지역에서는
가.이재기(79, '10)가 19세 여름 관공서에서 마을의 위생상 문제라며 마을 주변의 시신을 묻으라 하여 마을 어른 들과 산에 올라 길가에 방치된 유해를 구덩잉에 묻었다 하여 함께 동행하여 발굴결과 유해 2구가 식별되었다.
나.최창진(76,'10)의 제보로 6.25잔쟁 후에 산 능선에 시신들이 있었고 부패하면서 벌레들이 시신 주변에 득실거리면서 경찰과 동네 어른들이 산에 올라 함께 삽으로 흙을 올려 시신을 덮어 주었다 하여 발굴결과 1구를 발굴했다
이외에도 이재교(82), 이기특(82), 이재기(79) 등의 제보는 모두가 전쟁 후 여름에 시신들이 전투지역에 널려 있으면서 부패되어 얼마나 냄새가 나고 벌레들이 득실거리고 개들이나 여우들이 물고 나타나 위생상 문제등으로 묻으라 하여 동네 어른들이 산에 올라가 대부분 묻었고 , 일부는 민간요법으로 사용한다고 파가는 경우도 있었고 문등병 환자들이 격전지 주변에는 찾아와 사람 뼈를 찾아서 갔다고 한다.
제 6 절 민간인 패해 현황
소백산맥 지연전에 모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