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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 18,1-15
그 무렵
1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2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3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5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
그들이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6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 반죽하여 빵을 구우시오.”
7 그러고서 아브라함이 소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서둘러 잡아 요리하였다.
8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가져다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가 “천막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등 뒤 천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듣고 있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은 노인들로서, 사라는 여인들에게 있는 일조차 그쳐 있었다.
12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
13 그러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하느냐?
14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내년 이맘때에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15 사라가 두려운 나머지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부인하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8,5-17
5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6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12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
14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을 때,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
15 예수님께서 당신 손을 그 부인의 손에 대시니 열이 가셨다.
그래서 부인은 일어나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6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앞 장면의 나병환자 치유에 이어, 백인대장의 하인을 고치신 이야기와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이야기, 그리고 악령 들린 이들과 병자들을 고치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늘은 백인대장의 한마디의 말만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오늘 날 전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이 영성체 때에 드리는 신앙고백입니다.
“주님, 제 안에 당신을 모시기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접하게 될 때 취하게 되는 두 가지 태도를 보게 됩니다.
첫 번째 태도는 “주님, 저는 주님을 저의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자신의 비참한 실존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을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곧 자신이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라는 것이요, 백인대장의 신분이지만 하인의 병을 어찌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이요, 종일 뿐이지 결코 주인이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종인 자신이 감히 주님이신 예수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카복음의 병행구문에서는 ‘주님 앞에 나서기에도 합당치 못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는 제 자신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제대 앞에 설 때마다 합당치 못한 제 자신의 모습이 몹시 두렵고 떨리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의 태도는 “주님,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라는 의탁과 신앙고백입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빵이심을 깨달았을 때, “주님, 당신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셨는데, 제가 당신을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믿고 의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곧 그분이 주님이심에 대한 깨달음과 그분의 권능에 대한 의탁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고, ‘이렇게 하라’ 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 하면 저렇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서 ‘낮이건 밤이건 구름만 걷혀 올라가면 길을 떠났고, 구름이 이틀이고 한 달이고 한 해이고 머물러 있으면 떠나지 않았던 것’(민수 9,21-22)처럼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 저도 백인대장처럼,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 하고 믿음의 간청을 드립니다.
주님의 권능뿐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믿으며, 특별히 사랑을 성취시키시는 ‘말씀의 권능’을 믿습니다.
저를 ‘먼저’ 믿어주시는 당신의 믿음에 의탁하여, 성모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저도 ‘먼저’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하오니, 주님!
저도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믿음으로 듣고,
청하기 전에 ‘먼저’ 믿고 청하게 해주십시오.
오늘 제가 당신의 거룩함 앞에서 제 비참함을 깨닫게 하시고,
광야에서 당신 백성이 그러했듯이 오로지 당신 말씀에 의탁하여
가능해 보일지라도 ‘돌아서 가라’ 하면 돌아서 가고,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곧바로 가라’ 하면 곧바로 가게 하소서.
거룩하신 당신이 진정 저의 주님이시오니, 저를 인도하시나이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마태 8,8)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당신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만을 제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은 머리 위에 계시되 속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유를 주시니,
당신께 온전히 속한 자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오래도록 위암으로 고통을 받고 계신 형제님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언제나 맑고 밝은 웃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고 구역모임에도 빠지지 않으시려 애를 쓰셨습니다.
근황을 여쭈며 "어떤 생각을 하시느냐?"고 했더니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자유를 누릴 때가 곧 오겠구나!”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꿈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좋은 꿈도 있고, 그렇지 않은 꿈도 있는데 요즘은 아주 나를 옴짝달싹 못하는 꿈에 시달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꿈이란 것을 가톨릭 성가 29번 ‘주 예수 따르기로” 1절에 비유해 주셨습니다.
“주 예수 따르기로 나 약속했으니 내 친구 되신 주여, 늘 함께 하소서.
주 함께 계시오면 나 든든하옵고 주 나를 이끄시면 바른 길 가리다.”
그리고 좋지 않은 꿈은 2절 “이 세상 온갖 유혹 내 맘을 흔들고 내 모든 원수들이 늘 괴롭히오니 주 나를 돌아 보사 내 방패 되시고 내 옆에 계시옴을 깨닫게 하소서.”에 빗대시며, 3절은 주님께 맡기고 또 주님의 고유권한이시라고…, “저 영광 빛나는 곳 주 내게 보이니 그 아름다운 곳을 사모합니다. 주 예수 섬기기로 나 약속 했으니 끝까지 따라가게 용기를 주소서.” 하고 말했습니다.
‘성가로 하는 기도는 2배로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냥 입으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담아 간절히 기도하시는 모습에 감사했습니다.
내용 하나하나가 나의 미래를 비춰주고 유혹을 극복하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성가를 부를 때 가슴으로, 온 마음으로 불러야 하겠습니다.
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씀드립니다.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나빠도 꿈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주님의 눈으로 보고, 더 큰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꿈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귀합니다.
꿈을 통해 메시지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모든 것은 주님의 섭리 안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자기 하인이 중풍으로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마’하셨습니다.
이에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하시며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 주셨습니다.
참으로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이방인 군인이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마음속에 갖고 있는 생각과 그분께 대한 신뢰를 우리는 믿음이라 합니다.
백인대장은 확고한 믿음을 소유했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먼저 받고 나중에 받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래된 신자, 새 신자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얼마나 의탁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세례를 받은 지 오래되었다고 저절로 믿음이 생기는 것도 더 많은 은총을 체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새로 영세받은 신자가 훨씬 더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시기 질투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까롤로 까레또)
매 순간 하느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구하는 바를 넘치게 받고 또 다른 것도 더 받을 것이지만,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감히 청하지도 못하고 그럼으로써 얻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믿음에 믿음을 더하여 믿는 대로 이루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깊은 신앙과 지극한 겸손, 따뜻한 인간미의 소유자, 백인대장>
이스라엘 백성이 부정 탄 인간, 접촉하거나 상종하거나 말을 섞지 말아야 할 존재로 완전 개무시하면서, 마주치면 재수 옴 붙었다며 욕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나병 환자들, 세리와 죄인들,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선민의식이 유달리 강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혈주의를 고수하면서 다른 민족들과 피가 섞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으며, 이방인들을 개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으며, 그들과 접촉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중죄로 여겼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물 한잔 달라는 예수님의 청을 의아하게 여긴 사마리아 여인의 태도라든지, 딸의 치유를 청하는 이방인 여인을 향해 자녀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는 예수님의 의아한 발언 등이 그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세상 착한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굳이 이방인인 자신의 집까지 오실 필요가 없겠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백인대장의 깍듯한 예의와 배려심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백인대장의 넘치는 인간미는 놀랄 정도입니다.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치유, 아니면 부인이나 아들딸의 치유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을 보십시오.
자신의 소유물이었던 종의 치유를 간절히 청하고 있습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8장 6절)
당시 종이나 노예는 정식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주인의 소유물로서 가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젊고 건강할 때는 값도 나가고, 좋은 가격에 매매도 할 수 있었지만, 늙고 병든 노예는 그 어디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보통 주인들은 노예가 병들면 병들었는가 보다, 죽으면 죽는가 보다 하고 그냥 방치했습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을 보십시오.
자신의 아들보다 더 끔찍이 여겼습니다.
중풍으로 고생하는 종의 치유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백인대장의 예수님을 향한 깊은 믿음과 한없는 겸손을 보십시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메시아성, 전지전능하심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굳이 현장에 가시지 않더라도 원거리에서 치유할 수 있는 원격 치유 능력을 지니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백인대장의 깊은 신앙과 지극한 겸손, 따뜻한 인간미에 감동받으신 예수님께서 아주 흡족해 하시며 그를 크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세례받은 지 오래되었다고, 수도 생활이나 사제생활의 연륜이 길다고 뻐길 거 하나도 없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순교자 집안, 구교우 집안 출신이라고 어깨에 힘줄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참으로 묘하신 분입니다.
잔뜩 어깨에 힘준 사람들, 절대로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크게 뒤통수를 치시고, 그를 곤두박질치게 만드십니다.
깊은 바닥 체험을 통해 거듭나게 하십니다.
반면에 한사코 낮은 곳을 찾는 겸손한 사람들, 나는 보잘것없는 사람, 나는 큰 죄인이라고 가슴 치는 사람은 가엾이 보시고, 총애하시고 위로 위로 높이 끌어 올려주십니다.
나자렛의 소녀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을 찾는 하느님 - 환대의 사랑, 환대의 믿음>
시인은 떠났어도 시는 영원히 남습니다.
아니 시와 더불어 영원히 살아 있는 시인입니다.
오늘은 7월 첫날, 7월이면 떠오르는 시, 이육사의 청포도입니다.
윤동주처럼 일제 강점 시 옥중에서 순국한 애국시인으로, 두 분 다 시와 삶이 일치된 한없이 고귀하고 청순한 시인들이었습니다.
청포도 전문을 인용합니다.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아이야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결코 감상적 나약한 시가 아닙니다.
희망과 기쁨이 싱그럽게 피어나는 청신淸新한 시입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아마 우리 나라 역사를 통해 가장 많이 인재를 배출했던 때가 선조시대 임진왜란과 그 전후와 영.정조시대, 그리고 일제강점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청포도를 읽으며 저는 청포를 입고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의 환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시인이 그린 손님은 빼앗긴 곤고한 나라를 상징하겠지만, 저는 고달픈 몸으로 우리를 찾아 오신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고달픈 세상, 고달픈 손님들을 통해 부단히 수도원을 찾는 고달픈 주님이십니다.
베네딕도 규칙을 읽을 때마다 감동과 동시에 뉘우치는 참 아름다운 구절이 있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 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규 53,1)
수도원을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이 또 하나의 그리스도라는 놀라운 진리를 설파하는 성 베네딕도가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니 정주의 베네딕도 수도원은 환대의 집이며, 수도자들은 환대의 사람들입니다.
정주 영성과 환대 영성이 하나로 연결됨을 봅니다.
교회 내에서 큰 가정 역할을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베네딕도회의 자랑일 것입니다.
이에 근거한 제 사랑하는 좌우명시 한연이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찬미받으소서."
수도원 앞문은 세상에 늘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고, 뒷문은 늘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을 환대하는 삶, 얼마나 멋진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삶인지요!
환대 전통은 예로부터 동서방이 일치합니다.
예전 어렸을 적 제법 산다는 집에는 손님맞이 사랑방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제 아파트 문화가 대세라 사라진 환대 전통이 참 아쉽습니다.
옛 서방은 물론 중동에서도 환대 전통은 계속되었고 교회의 전통이 되었으며, 정주의 베네딕도회가 그대로 수도영성에 담아낸 것입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믿음, 환대의 기쁨, 환대의 행복, 환대의 아름다움...환대 예찬에는 끝이 없습니다.
환대의 기쁨은 짧지만 냉대의 아픔은 오래갑니다.
오늘 말씀도 환대라는 렌즈를 통해 보면 그 내용이 확연히 이해됩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 선행하는 사람을 찾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기에 하느님 찾기가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만 강조하다가 사람을 찾는 하느님을 잊어 버리면 안됩니다.
더불어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가도가도 하늘은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짧지만 엄청난 깊이를 함축한 시입니다.
하느님을 찾기 전 이미 와 계신 하느님안에 머무는 관상의 행복을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이래서 향심기도를 비롯한 온갖 묵상기도의 수행입니다.
부단히 끊임없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아브라함의 지극정성의 환대가 감동적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고달픈 몸으로 찾아온 손님들을 환대했는데 놀랍게도 하느님과 그 일행이었습니다.
제1독서 전반부가 아브라함의 손님환대하는 모습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의 환대에 감격한 하느님 일행은 아브라함의 늙은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축복하셨으니 환대의 축복입니다.
이어 사라는 못미더워 속으로 웃었고 전개되는 주님과 다툼이 참 유머러스합니다.
‘사라가 두려운 나머지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하면서 부인하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저는 이를 하느님의 유머라 부르고 싶습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의 결정적 표현이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친히 병자를 방문하시어 치유하시는 모습들로 가득합니다.
어제는 나병환자, 오늘은 백인대장의 병든 종, 베드로의 장모, 많은 병자들 치유하노라 온힘을 다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오늘 백인대장의 주님을 맞이하는 겸손한 믿음, 환대의 믿음이 놀랍습니다.
주님 환대의 정신으로 충일한 참 단순하고 순수한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에 감탄하신 주님의 고백에 이어 주님은 그에게 하늘 나라의 축복을 약속하시며 종의 치유를 선언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도 이런 믿음을 본적이 없다.
...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주님을 감동, 감탄시켜 종의 치유를 가져온 백인대장의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온마음을 활짝 열어 주님을 환대하면서 백인대장처럼 겸손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모시도록 합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여러 만남이 이어지는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두 개의 결정적 만남에 주목합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으려 말하였다.'
(창세 18,2-3)
'한 백인 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마태 8,5)
천사들을 환대하는 아브라함과, 고통받는 종의 치유를 청하기 위해 예수님께 다가온 백인대장의 모습이 겹칩니다.
둘 다 매우 겸손하고 진실된 태도의 영접으로 보입니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창세 18,3)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마태 8,8)
고대 중동 사막 지역에서 나그네를 귀하게 대접하는 일은 축복을 부르는 관습입니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길을 지나는 이들을 나무 아래로 모셔 물과 음식과 쉼을 제공하지요.
그는 나그네들이 하느님의 천사인 줄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믿음으로써의 행동이라기보다 선하고 관대한 인류애적 견지에서 그들을 섬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굳은 믿음을 가지고 다가와 청합니다.
심지어 직접 종에게 가 주시겠다는 예수님을 자기의 비천함을 들어 만류하지요.
정복국의 군사 장교가 식민지 백성의 예언자(로 보이는 청년)에게 이토록 예우를 갖추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는 그저 좋은 소양이나 성정을 넘어서 "믿음"에 근거하는 겸손과 확신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
(창세 18,5)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마태 8,13)
천사들은 아브라함의 섬김을 받아들입니다.
영적 존재인 그들에게 딱히 필요하지 않은 서비스일지도 모르지만 아브라함의 지향과 의지, 말이 실현되도록 자신들을 그의 손에 맡기지요.
예수님은 백인대장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십니다.
그의 겸손한 신앙고백이 그대로 이루어져 열매를 맺도록 해 주시는 겁니다.
그가 간절히 바라고 굳게 믿은 그대로 종은 치유될 것입니다.
제1독서의 뒷 부분에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태어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과, 이에 대해 의혹을 품는 사라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생물학적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의 여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공경하고 자부심을 갖는 선조지만, 그 믿음이 형성되기까지의 생생한 민낯은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성경은 이를 감추지 않고 기록한 것이지요.
복음 대목의 후반부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든 이들과 예수님의 만남이 이어집니다.
병들고 약하고 고통을 겪는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손길로 구마와 치유를 받아 온전함을 회복하는 역동적인 장면이지요.
물론 오늘 간절히 주님을 찾는 그들의 믿음은 언젠가 십자가형의 외침으로 변하고 말 나약하고 기복적인 믿음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늘 제1독서 속의 아브라함 부부처럼 그들 역시 아직 과정 중에 있음을 아시기에, 기꺼이 그들을 맞아 각자의 필요를 채워주신 것이지요.
아주 적극적으로 혼신을 다해 그들의 질병과 병고를 떠맡으십니다.(복음 환호송 참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마태 8,10)
예수님의 기쁨에 찬 감탄이 들리는 듯합니다.
이 감탄은 백인대장을 넘어 우리를 향하고 있지요.
존재 전체로 주님을 맞아들여, 말씀으로 고백하고, 실천으로 섬기는 믿음은 그저 인간적으로 잘 형성된 인성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아직 과정 중이라 여전히 흔들리고 동요하는 섬약한 믿음일지라도 주님은 우리의 말인 신앙고백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주님께서 우리 곁을 그저 지나쳐 가시지 않도록 신앙의 눈을 크게 뜨고 주님을 맞이하는 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청한 바가 들어 허락되고, 우리의 겸손한 환대와 믿음에 그분이 감탄하시기를 빕니다.
반드시 우리가 믿는 대로 될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지순례 중에 ‘에게 해’ 연안에서 며칠 머물렀습니다.
잔잔한 바다와 빨간 지붕의 집들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제게 ‘에게 해’는 폴 모리아 악단이 연주했던 ‘에게 해의 진주’로 친숙했습니다.
순례를 안내하던 가이드는 ‘에게 해의 진주’는 원래 노래 제목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역이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제목은 ‘페넬로페(Penelope)’라고 합니다.
가이드는 페넬로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스파르타 지방의 왕이었던 이카리오스는 딸 페넬로페를 아주 사랑해서 딸이 오디세이와 결혼해서 떠나려 하자 같이 살자고 설득합니다.
남편 오디세이는 아내 페넬로페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베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남편을 따라가겠다는 뜻을 밝히고 이에 아빠 이카리오스는 딸과 사위를 보냈습니다.
오디세이가 전장으로 떠나면서 페넬로페에게 1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재혼하라고 했는데 그녀는 20년이 지나도 재혼하지 않고 오디세이를 기다렸습니다.
오디세이가 없는 사이 구혼자들의 청혼이 밀려오자 시아버지에게 드릴 수의가 완성되면 결혼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낮에는 옷을 만들고 밤에는 풀어버리는 식으로 시간을 벌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페넬로페의 베 짜기’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쉴 새 없이 하는데도 끝나지 않는 일을 비유할 때 쓰입니다.
후에 오디세이가 돌아오자 페넬로페는 침대를 옮기라고 합니다.
오디세이가 그 말을 듣고 무슨 말이냐며, ‘이 침대는 옮길 수 없지 않소?’라고 말하자 진짜 신랑이 돌아온 것이 맞다고 부부는 감격의 해후를 합니다.
오디세이와 페넬로페의 신혼 침대는 성안을 뚫고 자란 단단한 올리브 나무를 베지 않고 그 나무 중심으로 침실을 만든 둘만의 사연이 있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에게 해의 바다가 더욱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오늘은 며칠 전에 읽은 책의 이야기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동공이 커지고, 목이 아픈 증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병원에 갔지만 의사들도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더 큰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신장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고 해서 약을 먹었습니다.
치아가 안 좋은 것 같다고 해서 잇몸 치료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몸은 더욱 나빠지고,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실망이 커진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여행이라도 다녀오려고 하였습니다.
여행을 위해서 새로이 옷을 맞추려고 양복점엘 갔습니다.
옷을 재단하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목 치수는 22인치로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오랫동안 19인치로 옷을 입었습니다. 22인치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재단사의 말을 듣고 22인치로 옷을 맞춰 입었습니다.
그랬더니 눈도 좋아졌고, 목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병은 신장 때문도 아니었고, 치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목에 꽉 끼는 옷을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 성공’이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고야 믿습니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 주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이런 모든 표징은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만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을 따르면, 우리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와 같은 믿음을 아름답게 노래하셨습니다.
“그분이 비천한 당신 종을 굽어보셨음이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음이네.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네.
그분 자비는 세세 대대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미치리라.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 편하고 쉬운 승리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희생과 봉사의 길이었습니다.
나눔과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신앙은 희생과 고난 속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청년이 “이제 졸업인데 과연 전공을 살려 일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라는 말을 합니다.
전공을 살려 일할 수 있다면야 쉽게 일을 배우고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어서 좋겠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잘하는 전공을 살려야 할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저는 학창 시절에 이과 쪽이 제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수학이나 과학이 훨씬 재미있었고, 또 다른 과목에 비해 잘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서 글을 쓰고 남 앞에 말하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했고 그래서 전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문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불평불만으로 가득했었습니다.
신부가 된 지 25년째의 삶을 사는 지금, 그래도 잘한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그토록 싫어했고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했던 글쓰기와 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어느 책을 보니, ‘인생의 단계마다 나만의 특기를 발굴하라.’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적성에 맞지 않고 전공도 아닌 것이 나만의 특기도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늘 새로운 것을 행하며 그 안에서 즐거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모든 배움이 다 쓸모 있음을 깨닫습니다.
어떤 배움이든 나를 성장시키고 기쁘게 잘 살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걱정과 두려움은 뒤에 두고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만큼 이 세상 안에서 할 일은 많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포기하는 순간 그만큼 내가 할 일도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우리에게 원하실까요?
이 세상 안에 사는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새로움을 간직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며 도움을 청합니다.
종을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주인이 있을까요?
주인은 종을 위해서 무엇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종이 주인을 위해 무엇을 할 뿐입니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주인의 모습을 버리고, 오히려 종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직접 고쳐 주시겠다고 했을 때,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라면서 굳은 믿음을 표현합니다.
이 역시 로마의 백인대장이라는 지휘 아래에서 보기 힘든 모습입니다.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끌고 와서라도 기적을 행하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갔던 것입니다.
한 명의 종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겸손하게 나아가는 모습.
이전까지의 자기 모습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었기에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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