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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28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성 베드로 샤넬 사제 순교자, 성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드 몽포르 사제)
제1독서 : 사도 12,24―13,5ㄱ
복 음 : 요한 12,44-50
그때에
4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45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49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50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학교 입학 뒤, 제 앞에는 ‘행복’만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토록 되고 싶었던 신부님. 이제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첫걸음을 뗐기 때문이지요.
쉽지 않은 길이어도 원하는 길이니 행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입학 후 채 1년이 되지 않았는데 부정적인 마음이 가득해지면서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길이 과연 나의 모든 것을 바칠 만큼 의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더 좋아 보이는 화려한 길들이 제 눈에 비쳤습니다.
이런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독서’였습니다.
성경과 함께 다른 책들을 읽으며 지식이 쌓였고,
이 지식이 저에게 지혜를 아주 작지만 만들어주었습니다.
이 자그마한 지혜들이 모여 불신의 마음을 줄여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제로 나름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분이 많습니다. 지혜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내 안을 채우고 있지 못해서 힘듦만을 느끼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까이하고, 다른 책들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묵상을 통해 주님을 아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노력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부정적인 생각으로만 불평불만으로 일관한다면
주님께서는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아들을 믿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불신이 가득한 유대인들을 향한 말씀이었지요.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것은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로부터 해방을 가져올 수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
그 옛날 모세가 보여줬던 모습을 세상에 펼칠 수 있는 그리스도만을 찾았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닌, 자기들이 원하는 모습만을 찾으니 주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빛을 가져다주시기 위해 당신 신성의 눈부신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물러나는 것은 어둠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그분께서 당신은 심판하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어둠에 들어가 계속해서 심판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의 믿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단죄하는 것이며,
그 판결에 대해 하느님을 탓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인간적인 지식보다 주님의 지혜를 익혀야 할 것이며,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요한복음>을 “표징의 책”과 “영광의 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 <복음>은 “표징의 책”이 끝나는 12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말씀해 온 것들을 요약하시면서,
간절함으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2,44).
그것은 네 번에 걸친 “나는 ~이다”라는 표현과 함께,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는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요한 12,46)고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46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시작인 1장의 “로고스 찬가”에서,
“모든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의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6)라는
말씀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주제인 ‘빛의 자녀 찾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라고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47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전체 복음서의 핵심을 보여주는 3장의 말씀, 곧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말씀을 상기시켜줍니다.
반면에 믿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요한 3,18 참조).
<세 번째>는 “나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요한 12,49)라고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49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7장의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라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네 번째>는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라고 계시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50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한다.”(요한 38)와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8,55)는 말씀을 밝혀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에 대한 선언에 앞서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가 원천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원천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 이면에는 아버지의 권능이 있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아버지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곧 당신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 속하며, 아버지의 유일한 계시자로,
당신을 보는 것은 당신을 보내신 분을 본 것이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구원은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아들의 말씀을 듣고 믿고 받아들이는 일에 달려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시는 빛으로 오셨고,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갑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
주님!
당신께서는 말씀을 이루시되, 결코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응답을 기다리며, 오히려 저에게 승복하십니다.
이 놀라운 겸손에 제가 무릎 꿇습니다.
주님, 당신의 겸손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014년입니다. 중서울지역 ME 대표사제를 맡게 되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봉사자들에게 ‘가문비나무의 노래’라는 책을 선물했습니다.
책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미처 읽지 못하였습니다.
2021년입니다. 미동북부 ME 대표사제를 맡게 되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봉사자들에게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서 ‘가문비나무의 노래’를 선물했습니다.
이번에는 시간을 내서 책을 읽었습니다.
앞에는 강이 있고, 뒤에는 산이 있는 깊은 산 속에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복잡한 도시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상의 분주함에서 잠시 떠나 피정을 간 느낌이 들었습니다.
짧은 글과 사진들이 영혼을 울리는 잠언과 같았습니다.
높은 산에서 자라는 가문비나무는 좋은 악기의 재료가 된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자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겨울을 이겨내면서 나이테는 촘촘해지고, 세포막이 단단해져서
악기에 필요한 ‘공명’이 잘 생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높은 산에서 자라는 가문비나무는 아래에 있는 줄기는 스스로 잘라내고
높은 곳에 있는 가지만 햇빛을 받는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나무의 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무는 넓고 둥근 나무로 자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나무가 좋은 악기의 재료가 된다고 합니다.
삶의 시련과 고통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습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습니다.
처음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20여 세대가 성당 땅에서 무상으로 살았습니다.
오랫동안 공소였던 성당은 특별히 관리가 되지 않았고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은 액수라도 임대차계약을 맺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무런 계약 없이 무상으로 20년 이상 살면 점유권을 주장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계약서를 만들었고 성당 땅에서 사시는 분들을 모시고 임대계약서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임대료를 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이 성당의 땅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하느님과 사랑으로 맺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됩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생명에 관한 비유를 만들어 낼 능력이 없다.
내적 깨달음을 얻기는커녕, 더는 우리 주변이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해석할 능력이 없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이기를 그만두었다.
우리는 그릇되게 살고 있다. 우리는 그저 오래전에 썩어 버린 인식을 갉아먹고 있을 뿐이다.”
자본과 물질문명에 갇혀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이 세상을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함부로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희망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하나는 소망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의 모습입니다.
소망과 욕망의 공통점은 간절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다만 욕망은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뜻을 간절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욕망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고, 우리를 죄의 굴레에 떨어지게 합니다.
하지만 소망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소망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런 소망은 절망 중에서도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기도하고, 늘 감사드리며,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요한 12, 46)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의 아들
하나하나의 삶이
빛이다.
어둠을 밝히는
참된 빛이시다.
거짓의 껍질을
벗게 하는
진리의 참 빛이시다.
빛은
그 어디에 있어도
빛으로 존재한다.
사랑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신다.
존귀함을
되찾아주신다.
빛은 길이다.
빛이 있기에
길을 찾는다.
빛은
우리자신을
비추어준다.
빛은
먼저
우리자신의
먼지를 보게 한다.
빛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알게 된다.
빛은
언제나
늘 가까이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삶이
참된 빛이다.
그래서
빛은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실천이
빛의 참된
생명력이다.
빛은
감출 수 없다.
그래서
올곧은 빛이다.
이미 와 있는
세상의 빛이시다.
서로 사랑하는
사랑이
빛의 삶이며
빛의 실천이다.
빛 속에 머물려면 만인 앞에 솔직해져라.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빛은 성전 안에 있는 진리입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빛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누구 곁에 머물거나 어떤 집에 들어가면
반드시 그 집의 규칙을 지켜야 하고 상대를 의식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옆에 머물며 할 수 없는 행동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물면 그분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현존이 곧 뜻이고 그리스도의 현존이 곧 빛입니다. 그러니 빛은 현존이고 계명입니다.
우리가 그분 계명 안에 머물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은 우리 안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게 해서 구원하시는 방식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과 대화함으로써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지 않았다면 선악과를 따먹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현존을 잊음으로써 어둠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빛 안에 머물며 구원받으려면
항상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믿고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의 현존을 항상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이 한 이 말을 되새겨야 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이전에
눈에 보이는 사람들 먼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눈에 마음에 들기 위해 살기 이전에 사람들 눈에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라는 말이 아니라
항상 사람들이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빛 속에 머물게 됩니다.
‘정직한 후보’(2020)는 ‘정치인이 거짓말을 못 하게 된다면 어떨까?’라는 상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할머니의 죽음과 보험회사와의 싸움을 통해 국회의원이 된 주상숙은
4선 당선을 위해 국민에게 거짓말을 일삼으며 인기몰이를 합니다.
사람들 앞에 나설 때는 싸구려 옷을 입고 낡은 신발을 신고 허름한 아파트에 사는 척하지만
실은 값나가는 옷을 입고 좋은 구두를 신으며 어마어마한 저택에 삽니다.
하지만 주상숙에게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모두가 죽은 줄 아는 주상숙의 할머니 김옥희입니다.
김옥희는 죽지 않고 살아있었지만 죽은 걸로 기록되어 있고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상숙을 부른 김옥희는 제발 거짓말하지 말고 철 좀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돌탑을 쌓고 소원을 비는데 그날 이후로 주상숙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이상한 현상을 겪게 됩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던 주상숙은 공식 석상과 방송 프로그램에서
자기 의도와는 다르게 진실만을 말해 고민에 빠집니다.
사실 줄거리보다는 솔직한 정치인의 생각이 담긴 대사가 더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시어머니가 찾아온다고 할 때 남편에게
“너희 집 얘기만 나오면 짜증이 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사 프로그램에 나가서 야한 이야기를 하다가 사회자가
“시사 프로그램에서 이런 19금 토크를…. ”이라고 말하니,
“어차피 투표는 19금이니까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녀는 고백합니다.
“나, 말이 내 맘처럼 안 나와. 말이 똥처럼 나와.”
그나마 솔직함으로 밀고 나가자는 유일한 희망을 찾고서는
“늦어서… 죄송하진 않아요.”라고 인사합니다.
“나는 서민의 일꾼이다.”라고 말해보라는 보좌관에게 “야, 내가 서민의 일꾼은 아니잖아.”라고 합니다.
연설을 하면서 이런 말들도 쏟아냅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사는 동네로… 만들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국민들이 똑똑해지면 저 같은 사람은 아주 골치 아파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는 정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또 자신과 함께 비리를 저질러 온 사람들을 폭로하고는 자신도 2년 감옥살이까지 합니다.
이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한 일들입니다.
왜냐하면, 잠시라도 빛 속에서 살던 때가 좋았기에 계속 솔직해지려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어떤 정치인이 마이크가 꺼진 줄 알고 말을 하다 실수를 해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무선 마이크를 차고 미사를 하시다가 미사를 마치고
제의방 화장실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다 그 소리가 성당에 다 들렸다는 우스갯소리도 들었습니다.
이것이야 잘못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듣다보니
‘항상 신자들이 다 보고 듣는 가운데 살아간다면 죄지을 일은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무화과 잎으로 가린다는 것은
외적인 것으로 덮어버린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솔직함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거짓된 속성을 뜯어버리시고 아드님의 정직함을 입혀주십니다.
그것이 가죽옷입니다.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들이 빛 속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분과 함께 있으면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분의 계명 안에 머물고 싶거든 먼저 솔직해집시다.
가장 좋은 것은 만인 앞에서 할 수 없는 것은 안 하는 것이고,
만인이 들어도 괜찮은 말만 하는 것입니다. 생각까지 그럴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혼자 있을 때도 만인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시다.
사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수의 천상 백성이 지켜보고 있고 하느님도 보고 계십니다.
이것이 빛 안에 머무는 방법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순종을 이야기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45)
예수님께서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누차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를 이 세상에 드러내시기에 예수님은 또한 아버지의 현존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 하느님을 예수님을 통해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아드님은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시며 그 사랑을 이 세상에 실재하도록 하시니까요.
예수님이 아버지께 전적으로 순종하시기 때문입니다.
굴종이나 맹종이 아닌, 그분 본성 그대로의 사랑의 순종입니다.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50)
예수님은 육화하신 아버지의 말씀이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예수님이란 존재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침과 행적으로 그 말씀을 완성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인간의 약함을 안고 오셔서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합니다.
제1독서는 새로운 시대의 신앙을 보여줍니다.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사도 12,2)
구약을 성부의 시대, 신약을 성자의 시대,
예수님 승천 이후 교회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고 하지요.
예수님 승천 이후, 성부, 성자와 한 분이신 성령께서
이 세상에 현존하시면서 주님의 뜻을 전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사도 12,4)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파견하셨고, 아드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어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변호자요 보호자가 되어 주시지요.
성령께서는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도록 힘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 제가 민족들 앞에서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오리다. 알렐루야."(입당송)
제자들은 성령에 힘입어 모든 민족들에게 담대히 주님의 이름을 전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께 순종하는 사도들의 열정적 행보를 통해
구원의 지평이 온 세상으로 열리고 펼쳐지는 과정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하시는 분은 사도 개개인이 아니라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이십니다.(마르 13,11 참조)
사랑하는 벗님!
세상의 작은 변방 이스라엘에서 하느님의 개입으로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아드님이신 성자의 희생제사로 완성되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 우리가 사는 오늘 여기까지 이어집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성령의 인도로
이 구원 역사 안에서 작은 발걸음을 새기면서 나아가는 중이지요.
우리가 매일 접하는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께 순종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세상 안의 작디작은 나라, 그중에서도 힘없고 가난하고 미소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지만
마음이 성령의 불로 타오르면 온 세상을 품고도 남을 광대한 그릇이 된답니다.
사랑의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