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단을 뵙고 오다
눈이 오면 한번 찾아뵙겠다고 벼르고 별렀는데 전날 오후부터 싸락눈이 순천 하늘을 덮기 시작했습니다.
해 바뀌고 입춘도 넘어 우수가 코 밑인데 나이 육십 줄에 무언가에 홀려 설레 보기는 참 오랜간만이었습니다.
거리를 걷다가 지붕이 털려버린 연향동 청자 다방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잔 시켜 홀짝이며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조그마한 눈송이가 더 작아지면서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소름 돋도록 아름답다는 맘이 들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그중에는 간간히 뜨거운 커피 잔에 뛰어들어 뜨겁게 달아오른 내 가슴을 식히려 들었지만,
한번 달궈진 내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해 바뀌고 무장 없이 2월로 치달아버린 시간들과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의 소모에 대하여 압박으로 가중되는 나의 마음에
상서로운 기운의 수혈이 필요하다는 것도 나에 대하여 위로가 될 것 같았습니다.
늦었지만, 나에게 기대한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갖자는 데는 더 이상 여지가 없어 보였습니다.
지리산에서 노고단은 오래 동안 나에게는 감춰진 지리산의 일부였습니다.
내가 성장한 남원 시골집 마당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면 앞 산 너머로 뿌옇게 보이는 정령치가 전부였으니 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집에서 보면 노고단은 지리산의 남서 방향에 자리 잡고 있기에 그럴 수밖에요.
그러기를 한참 지나서야 포항에서 광양으로 발령받아와 순천에서 터를 잡고 살면서부터 한번씩 오르기 시작한 지리산,
그때부터 노고단은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온 것이지요. 이후 수시로 국도 17번을 타고 남원을 오가면서 섬진강을 아랫도리에 두른
채 묵묵히 세상을 굽어보는 노고단은 그래서 낯설지 않았습니다.
뜨겁던 여름날이나 눈 덮인 겨울날에도 한 번씩 찾아뵙고 오면 답답한 마음 홀가분해지는 그런 곳, 내 마음에다 순금처럼 순정한
위로를 한없이 채워주던 지리산 그 안의 노고단은 나에게는 생전에 한 번도 뵌 적 없던 할매처럼 따스하고 은근하게 다가오는 온정한 품이 되어있었습니다.
순천에서 오전 7시 01분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구례구역까지 거기서 군내버스를 타고 화엄사 입구에서 내려 바라본 노고단은
화엄사로 들어가는 길보다 먼저 내 안으로 굽어와 안아버린 하늘로 가까이 있었습니다. 오르면서 차오른 숨이 가파올 때 마다
코발트 빛으로 가득한 푸른 하늘에 숨구멍을 단단히 내 막힌 가슴 시원 시원하게 뚫어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차오르기 시작한 신명의 시간을 이렇게 적어봅니다
지리산 노고단 산신 할머니께서 설도 지났으니
한번 다녀가시라 해서 다녀왔습니다
할머니께서 어이쿠 손주 왔느나고 눈발에 뛰어나오셔서 얼마나 황송하던지
아예 노고단 오르는 계단마다 넙죽넙죽 큰 절 올리며 일 계단 일보일배하는 정성으로 올라 뵙고 왔습니다
하여간 든든한 울 할매 내 하는 일 앞으로 운수대통할 테니 걱정말라시며 추우니까 서둘러야 된다며
날 저물면 지리산 내려가는 코 재길 험으시다고 우찌나 등을 떠미시던지
하여간 핏줄 이란 것이 뭐 있겠느냐며 찾아오는 마음속에 이미 정이란 거 다 쏟아놓은 것 아니시냐며
지리산 능선마다 불끈불끈 쥐락펴락 신수 다져 지금껏 살아온 세월이 집안 내력이라고
흐훕
앞으로 박철영이 경자년 한해 거뜬흘거라고
그 기운 석삼 년에 10을 곱으로 셈혀도 된다고
거듭거듭 지리산 노고단 산신 할매 약조하셨으니
부귀영화까징 아니더라도
대대손손 앞날이 창창하것다는 말씀
할매 뵙고 복주머니에 가득 정담 담아 지리산을 내려오는디 박철영이 발걸음 좀 보소
넘어지면 코 닿는다는 코재를 미끄럼틀 타고 내리듯 다다다다다닥 쌩흐니 내려오는디
지리산 오르는 길 가득 쌓여 길을 막던 눈이 봄눈 녹듯
사르르르 나뭇가지를 흔들어 길을 쓸어내었고나
노고단 산신할매 눈길 받아 계곡 물 타고 흘러내리는 소리가 옥수에 옥구슬 구르듯 하는구나
어느새 연기암 문수보살님까지 비천상을 내어
날 보살피니 맞닥뜨린 지금이 곧 화엄이고 그런 세상을 누릴 자 뉘 내가 따로 있겠는가
걸음걸음 글 읽은 사람들 죄다 내가 보고 듣고
가득 채워온 복주머니 하나씩 챙겨
천날 만날 만복 하시라"
즐거운 마음으로 혼잣말 중얼대며 내려오는 데 화엄사 쪽에서 인호형(김인호 시인)이 바람에 얹혀
연기암을 올라오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박철영 올림-
첫댓글 경자년 벽두에 노고단에서 지리산 정기는 제대로 받았구먼..글발이 선 걸 보니 일상의 삶도 치열해지지 않았겠나 싶고..잘 읽었네..
어이쿠 감사합니다
모처럼 지리산의 넉넉한 품에 안긴듯 즐거운 산행이었습니다
엊그제 순천에 다녀오는 길에 남원과 구례구역을 지나면서 바라본 눈 세례를 받은 겨울 지리산이 참으로 장엄하고 아름다웠다네. 언젠가는 다시 올라보리라 마음 먹고는 있지만 그날이 올까 싶은 걸 보면 나이들어가는 것은 어쩔수 없나보네. 자네 나이도 이제 만만치가 않지만 나로서는 자네의 젊음이 부럽기만 하네. 모처럼 눈을 내려주셔서 산이 저리도 희고 빛나는데 얼마나 좋았을까 싶네. 지리산 정기를 받고 올 해도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기를 바라네.
저도 산을 오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언젠가는 안타까운 일들이 다가오겠지요
우선할 때라도 그런 행운을 가졌습니다
다들 좋은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