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충북 보은 친정교회에 전도사로 시무하던 남편은 장로회(통합측) 신학대학교 졸업반이 되는 해 봄, 경기도 파주 갈현교회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5남매의 부모가 되어 있었고 새내기 전도사 살림에 가족을 다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거리도 멀기 때문에 첫 째와 세 째 넷째는 친정 엄마에게 맡기고 집과 가구도 다 그대로 두고 떠났다. 간단한 보따리와 5남매 중 둘째와 막내 2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버스도 타고 기차를 타면서 이사를 하는데 둘째는 기차 안에서 홍역 꽃이 이마에 돋아나고 있었다. 나중에 소식을 들으니 고향에 두고 온 세 째와 넷째도 홍역을 앓느라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이사를 가보니 이 교회는 전임 전도사가 10년을 섬기면서 교인들과 두터운 정을 쌓아오다가 갑자기 하는 말이 이제까지 자기가 신앙생활을 헛해 왔다면서 전교인들을 구원파로 이끌어갔다고 한다. 서울 서 노회에서 보조를 받던 교회가 그렇게 되니 보조도 끊기고 전도사가 생활이 안 되니 사임해 가고 그때 극동방송국에 권신찬 목사가 방송을 통해서 날마다 구원 파 논리를 펼치는 때여서 갈현교회는 전교인이 권신찬 목사의 설교에 푹 빠져 있었다.
장로님 한 분이 그 패거리에 휩쓸리지 않고 교역자를 모시자고 하니까 그러면 교역자를 모셔서 자기들의 구원파로 흡수하자고 계획을 세웠다. 고 한다. 그들은 라디오를 옆에 놓고 들으며 권신찬 목사의 말이 참 진리라며 예배시간도 라디오로 대신하는 그들이다.
그들의 주장은 한번 회개하므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죄까지도 다 도말해 주신다고 했는데 기성교회에서는 왜 아직도 회개하라 외치는가......? 성전은 성령이 거하는 마음이 성전인데 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치장하며 꾸미는가......? 하면서 교회가 너무 낡아 초라하기 그지없어도 수리도 하지 않고 청소도 하지 않았다. 이사 가던 해 여름방학이 되자 남편은 벽돌을 한 차 사다 부려 놓고 유리 창틀 밑을 다 허물고 혼자서 벽돌을 쌓아 수리를 싹 해놓았다. 못 하나도 박을 줄 모르는 장로님은 너무 놀라워하시며 감탄사만 쏟아내셨다. 성전에 대한 인식을 차츰 바꾸어 놓으니 초등학교 6학년 생 다섯 명이 날마다 학교만 끝나면 교회에 들려 청소를 해 놓고 반들반들 윤이 나는 마룻바닥에 뒹굴며 좋아했다.
구원 파(모임 패)는 밭에서 호미로 일해도 마음에서 예배하면 되지! 왜 꼭 예배당에 가서 예배해야 되는가......? 모든 율법 철학은 마지막 때에 다 불 태워버리겠다. 고 했으니 예배 순서(주보)도 율법이며 앉아서 눈감고 기도하는 것도 율법이라며 기도시간에도 눈뜨고 시계 보며 자유로운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간 상태인지라 밤마다 황당한 저들의 행동에 시달렸다. 남편은 내일이면 서울에 학교를 가야하는 데 밤마다 찾아와 빙 둘러앉아(모임 패) 전도사에게 성경을 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성경을 펴지 않고 ‘말씀해 보세요.’ 하며 묵비권 행사를 하고 있으니 교만하다며 이 말 저 말이 새어 나왔다. 저들의 계획이 빗나가니 저들은 성미를 뜨지 말자 그러면 굶다가 보따리를 쌀게 아니냐! 이런 말들이 들려오자 우리는 오기가 생겼다. 어느 날 수요예배 기도시간에 웅성웅성하기에 눈을 떠보니 다 나가버렸다. 교인 80%가 나가 교회 밑에 모 집사 집에서 모임 패식으로 예배를 하며 지붕 꼭대기에다 확성기를 달아놓고 소리 높여 복음 송을 부르며 우리의 예배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믿지 않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이런 말들이 퍼지자 이방사람들이 채소며 먹을거리를 가져왔다. 마치 엘리야에게 까마귀가 먹을거리를 물어다 준 것처럼…….
교회 지대가 높아 우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포기하며 남의 집 우물을 길러오던 때였다. 외조부께 풍수지리를 조금 익힌 남편은 용감하게 사람을 사서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10여m내려가야 길러오던 물은 소금을 탄 듯 염기가 있는 물이었는데 3m 밖에 안 팠는데 이렇게 맛있는 생수가 솟아나는 것이다.
저들은 모였다면 빙 둘러앉아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를 가운데 앉혀 놓고 성경을 펴 돌아가며 읽다가 가운데 사람이 손을 번적 들며 ‘나 구원 받았습니다.’ 하면 그 성경 구절을 기억하며 그 때와 시를 구원 받은 날자와 시로 머릿속에 입력해 둔다. 저들은 누구를 만나던, ‘구원 받았습니까’ 물어서 년 월 시를 대답 못하면 지옥자식으로 간주해 버린다. 이 때 우리 집 둘째가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학교를 가면 지옥자식이라고 돌 팔매질을 한다. 며 학교가기 싫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암담했다. 이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기도하면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50년 전이기 때문에 라면이 대중화 되지 않고 괜찮다고 생각하는 때였다. 하루는 담임 여 선생님을 집으로 초청하고 라면을 정성껏 끓여 대접하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부탁을 드렸다. 그랬더니 어떻게 처세를 했는지 공교롭게도 아무 탈 없이 원래의 모습대로 쾌활하게 학교에 잘 적응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무서운 학교 폭력이 라면 한 개의 효능으로 해결됨이 엄청난 대단한 감사로 느껴진다. 지금은 그 아들이 바르게 잘 자라나 교회에 안수집사로 국민은행 본점에 여신부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성실히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