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예배는 하나님의 요구인가 아니면 인간의 필요에 의해 시작되었나?
우리가 예배당에서 형성된 것과 관련되어 습관화된 것에 의해 흔히 예배를 의무적인 것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구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으나 사실 예배(개신교식 예배)는 의무 조항이 없다(신약에서).
예배에 대한 문제는 당연히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의 예배를 더듬어야 한다. 전체적인 4장의 조망은 어떻게 예배가 시작되었는지 살피는 것이다. 가인은 '먹을 것'으로 그리고 아벨은 가족의 숫자에 해당하는 양떼의 첫 새끼들을 희생시켜 제사하였다. 이것이 서술하는 바는 예배의 목적이 무엇 때문에 치루어졌는지를 읽는 우리가 짐작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가인의 잘못된 예배는 먹을 것을 가져온 것으로보아 예배 목적이 '먹을 것'이었음이 짐작된다. 당시는 에덴에서 쫓겨나 척박한 환경에서 장남인 가인으로서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고생했음이 읽혀진다. 비도 오지 않고 땀 흘려 노동해서 농사해야 겨우 먹고 사는 가인의 고뇌가 읽혀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예배를 거부한다. 많은 주석가들이 그 이유를 해설하지 못했지만 가인의 예배가 거부된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탐욕' 때문이다. '너는 탐심을 다스려라'는 지적이 그것을 부연 해준다.
그렇다면 아벨의 제사가 받아들여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개역성경에서는 아벨이 '양 한마리'를 가져온 것 처럼 오해되지만 흠정역이나 킹제임스 버전을 보면 '양떼가운데 첫 새끼들'로 번역되어 여러마리임을 알 수 있고 이는 가족들 숫자만큼의 대속물이었다! 죄로 인해 에덴에서 쫓겨난 고통스러운 실수와 기억이 아담과 하와로부터 아벨에게 전달되었고 결과적으로 죽음이라는 숙명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의 고백'이 이 제사의 목적이었고 거기에는 탐심 같은 것이 없다. '나는(우리는) 죽게 된 존재일 뿐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런 제사를 아벨이 했던 것이다.
후대에 아벨의 희생 제물 제사가 구약 예배의 표준이 된 유래는 이러한 맥락이며 예배 자체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치루어졌을 뿐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 시작 된 것이 아니다. 어것을 오해하면 안된다.
02. 개신교식 예배는 어떻게 유래되었나?
혹자는 예배행사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초대교회에서 언뜻 언뜻 보이는 정황들을 조합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 Hot한 ChatGPT를 이용해보면 이 종교의식이 자리잡게 된 역사적 연원을 일목요연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즉, 개신교신 예배는 99%쯤 가토릭의 미사에서 형성되었으며 약 1500년 정도의 갭이 종교개혁과 초대교회 사이에 존재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가토릭의 미사도 콘스탄티누스 밀라노 칙령 이후 약 1300여년이 흐르면서 서서히 그 모습이 갖추어져 갔으며 비교적 최근인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의결되어 그동안 라틴어로만 집행되어 온 미사에서 현지어를 사용 가능하게 되었다.
개신교 예배와 가토릭 미사의 차이점은 가토릭은 성찬의식에 무게 비중이 있고 개신교 예배는 설교중심인 점이 차이가 있다. 이것을 좀 더 비판적으로 보자면 이 예배행사를 위해서는 반드시 '사제'의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의 중심에 목사나 신부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소위 성례권이라는 권한 아닌 권한을 목사가 쥐고 흔든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 성찬 문제를 별개로 둔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기념하라고 제자들에게 유훈하신 것이므로 예배와는 본질적으로 별개 사항이다. 초대교회에서 이 성찬이 자연스럽게 정착한 것을 예배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03.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나는 제사를 원치 않는다(그것 보다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원한다).
더 이상 헛된 짐승을 나에게 가져오지 마라. 그 역겨운 기름 태우는 냄새에 질렸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04.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말라!
이것은 예수님의 지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외면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에게 부여된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서 '탐욕'을 예배에 개입시켜서 안된다는 가인을 꾸짖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억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 많은 목사들이 소위 예배라는 종교행사를 통해서 신자들이 '무엇을 먹을까......'를 소원하도록 부추긴다. 무슨 무슨 감사기도, 무슨무슨 소원, 갖가지 제목의 헌금봉투들이 그러한 탐심을 주제로 연결된다. 인간의 필요에 민감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은밀히 골방에서 하는 기도를 천사들이 부지런히 실어 나르도록 격려하신다. 우리의 예배가 이러한 탐심으로 오염 되어 있다면 가인의 예배와 질적으로 무엇이 다른지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05. Worship은 무용한가?
예배는 이렇듯 인간의 필요에 의해 습관화 되고 정형되었다. 그리고 어떤 불순한 의도에 의해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요구인양 속이는 기만행위는 옳지 않다. 다만 전체 성경 맥락 속에서 예배(Worship Service)가 어떻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이해하는 정도면 족하다.
개신교 예배행사에 많이 참석하면 할수록 구원이 담보되는가? 이것은 목사들에게 딜레마적 질문이 될 것이다. 교리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아니까..... 그들이 예배라는 장치를 통하여 대중을 통제하고 자신의 목적을 정당화하는 문제는 나와는 무관한 일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래의 두 사례를 통해 무엇이 과연 참된 예배인지 생각할 시간을 갖도록 해보자.
06. 예배 패러다임의 극적 전환
요한복음 4장 -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당시 이스라엘은 남유대와 북이스라엘로 분단되어 있다. 그러나 예배 문제로 곧잘 국경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사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러므로 남유대 종교그룹은 그리심산에 산당을 짓고 거기서 예배해도 같은 효력이 있다고 해왔다. 바로 이 문제를 그 여인이 묻는 것이다. 거기서 예수님은 예배에 대한 역사적 예배패러다임 전환을 발표하신다.
이 곳(그리심산 산상)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다. 이제는 참 예배를 하는 시절이 도래하였다. 누구든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이것은 중대한 선언이다. 전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갔으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게된다(Seek)! 누구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아다니신다.
이를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다시 부연한다.
'너희 몸을 산 제물로 살라서 이웃(또는 믿는 지체들)을 위해 예배하라. 이것이 합당한 예배다.' 더 이상 무슨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랴.
거의 모든 종교는 신당이 존재한다. 불교는 절로, 유교는 사당으로, 모슬림은 모스크로, 샤머니즘은 무당집으로, 기타등등은 그들의 사원으로 가서 신을 만나 복을 빌거나 소원을 아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삶에서 묵묵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그 때에 하나님은 이를 살펴보고 계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벽돌 건물을 성전 운운하며 거기에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처럼 속이는 질 낮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통탄할 지경이다. 그곳에서 밤낮으로 절하게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