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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 2,19-22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20,24-29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토마스는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자리에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고 말한 그를 환히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요한 20,27)
엠마오를 가던 제자들이 빵 쪼개는 만찬을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 본 것처럼, 토마스도 예수님의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것은 찢어지고 구멍 뚫린 당신 몸의 성찬이었습니다.
토마스는 그때서야 비로소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마침내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20,28)
그런데 대체 무엇이 토마스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게 한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토마스는 동료들 중 자신만 주님을 뵙지 못한 것이 마치 자신만이 부활하신 주님을 뵐 자격이 없는 자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동료들이 뵌 주님을 자신은 뵙지 못한 슬픔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 뵙기를 더더욱 고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더욱 더 확인하고 싶었고,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가 보게 된 것은 주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돌아가신 예수님을 뵌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앞에서 모든 의혹과 자책이 녹아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주님의 끝나지 않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상처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표시임과 동시에,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남김없이 쏟아 부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눈에 보이는 상처를 통에,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에게는 사랑의 성찬이 베풀어진 것처럼, 토마스에게는 사랑의 성혈이 베풀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마음이 열리고, 믿음의 눈이 열려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당신의 사랑을 베푸시는 성찬을 통해, “우리의 주님, 우리의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 그분의 사랑을 통해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
사실 보이는 것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히브리서에서 말씀해주듯이,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그러니 토마스가 본 것(보고 인식한 것)은 상처였지만, 믿은 것은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보지 않고는 믿지 못했지만, 보고서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고 또 보고 보지만, 여전히 그분의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마치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던 히브리인들이 보지 못해서 못 믿었던 것이 아니라 보고도 목이 뻣뻣해져 하느님을 믿지 안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보고도, 특히 매일 영성체를 하면서도 여전히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고뇌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 가까이 계신지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깁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찢어진 가슴을 열고,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증거해야 할 것도 역시 주님의 사랑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의 씨름인 의심>
제 생각에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의심의 존재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믿음의 존재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또 완전한 불신의 존재도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의심이란 불신과 다릅니다.
불신이란 믿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의심이란 믿지만 의심한다는 뜻입니다.
반신반의가 바로 의심의 정확한 뜻입니다.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란 반신반의의 존재라는 말입니다.
반신반의의 존재가 인간이지만 다름이 있다면, 불신을 선택하고 불신 쪽으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기로 하고 믿는 쪽으로 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토마스 사도가 의심의 대명사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믿음을 고백하였으니, 의심을 통해 믿음으로 나아간 사람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분명 그는 의심이 불신 쪽으로 쏠렸던 적이 있습니다.
여드레 동안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어디에 있었고 왜 다른 제자들과 같이 있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서 제자단을 떠난 제자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만이 아니었을 것이고, 토마스 사도도 그들처럼 제자단을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믿었던 주님이 죽음으로 끝장나자 실망을 넘어 절망하였을 것이고, 주님께 대한 희망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나니 더 이상 제자단 가운데 있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자단을 떠났던 그가 여드레 만에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면 이 여드레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믿음의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돌아와서 한 말을 보면 아직 믿음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의심하지만 의심이 불신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고, 어떻게든지 믿어야겠다고, 적어도 믿음의 불씨를 꺼버리지는 않기로 마음을 바꾼 겁니다.
불신의 그룹에는 속하지 않고 믿음의 그룹에 속하기로 마음을 바꾼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믿음이 확고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확고하다면 그룹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믿어도 될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기로 마음먹고서 완전히 떨어져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단에 남아 있던 다른 제자들도 반신반의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믿음의 불씨를 끄지 않으려고 서로 의지하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던 것이고, 토마스 사도도 불신 쪽에서 믿음 쪽으로 마음을 바꾸고 돌아온 것뿐입니다.
아직도 의심이 믿음으로 온전히 바뀐 것은 아니었고 믿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토마스의 의심은 믿고 싶은 의심이자 믿기 위한 과정의 의심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치자 의심은 의심을 거치지 않은 믿음보다 더 단단한 믿음으로 바뀝니다.
의심은 야곱이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하였듯이 믿음의 씨름이기 때문입니다.
씨름이 격렬할수록 믿음은 단련이 되고 단단해지겠지요?
우리도 믿음의 씨름인 의심을 시시하게 하지 말고 대단하게 하면 어떨까요?
토마스 사도의 반만큼이라도.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은 선물입니다>
믿음의 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주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이 없어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체험한 이야기를 전해주면 부러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직접 체험하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 중에 토마스라는 사람은 주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깨우러 갈 때 거기에 있었고,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였으며, 고별사를 할 때 ‘아버지께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한 용맹심과 충성심이 높은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하고 말하였을 때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아주 솔직한 답변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토마스는 예수님의 손과 발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를 통해 우리를 위한 사랑의 흔적을 보고 싶어 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지 못하는 토마스라고 말하는 것보다 정직한 토마스라고 말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여드레 뒤에 토마스도 같이 있는 제자들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는데, 특별히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0,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힘과 능력에 믿음을 두지 않고, 주님의 사랑에 믿음을 둡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오로지 믿기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드레 뒤에 다시 오셨는데 그것은 토마스에 대한 특별한 배려입니다.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 누락되어 실망할 수 있는 제자의 마음을 풀어주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섬세한 사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안배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토마스 혼자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였다면 혼자만 왕따가 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버려두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데 장애가 될 요소를 없애주시며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큰 사랑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결국 토마스는 감히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도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을 알아챘고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신 말씀이 ‘못 자국을 직접 보고, 손가락을 넣어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토마스가 했던 말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면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한 제자는 토마스가 처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진정한 하느님으로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
그렇다면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성전과 성경을 통해 전해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있으니 행복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만지고 감각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구애 받지 않으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믿고 또 믿어서 행복하기 바랍니다.
거짓으로 믿는 것보다는 정직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편이 훨씬 더 주님 마음에 듭니다.
따라서 정직한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름만 신자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토마스의 훌륭한 점은 형제들의 증언을 의심하면서도 형제들과 함께 공동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심과 싸울 때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토마스는 공동체에 머물러 있었기에 믿음의 최종적 자리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시험받고 도전받아야 합니다.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
(예수회 존 포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두려움은 믿음을 증가시키는 발판>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이면 항상 복음은 의심 많은 토마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물론 사도 요한과 같이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보지 않고도 쉽게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요한보다는 대부분 토마스와 비슷합니다.
그러니 토마스를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토마스는 그래도 믿으려 했습니다.
그가 믿으려 한 것만으로 해서 그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주 많은 이들은 믿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왜 세상 사람들은 믿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까요?
또 왜 토마스는 어떻게 끝까지 주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확인하려 하였을까요?
이는 자신 안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지, 아니면 없다고 믿는지에 따라 다릅니다.
자신을 그저 육체와 동일시하는 사람은 굳이 하느님을 믿으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왠지 자신 안에 영혼과 같은 것이 있음을 느끼는 사람은 신적인 존재를 찾으려 합니다.
곧 영혼이 있다고 믿는 이들만이 육체적인 위협을 넘어 영원한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앞으로 20달러 지폐의 새 인물이 될 해리엇 터브먼은 1820년대 초 메릴랜드에서 흑인 노예로 태어난 여성입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체벌과 가혹한 노동 조건을 견디며 노예 제도의 잔인한 현실을 경험했습니다.
탈출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탈출했다 포기하고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주님께서 그녀에게 길을 보여주십니다.
확신이 생긴 그녀는 혼자 그 길을 따라 탈출하여 펜실베이니아에 도착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에 확신이 생긴 그녀는 편히 지낼 수 있었음에도 13번이나 돌아와 가족들과 700명에 달하는 흑인 노예들을 탈출시킵니다.
그래서 그녀를 흑인 모세라 부릅니다.
두려움에 맞서는 동안 믿음도 함께 성장합니다.
한 예로, 노예 그룹을 위한 탈출을 계획하는 동안 터브먼은 그녀에게 앞에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하느님의 환상을 받았습니다.
평범하고 빠른 경로를 택하는 대신 그녀는 그룹을 더 길고 위험한 경로로 이끌었습니다.
그날 밤 원래 경로가 노예 포수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발견되었습니다.
이 상황은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서 사람들을 자유로 이끄는 것과 관련된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그녀의 믿음과 기도가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육체적 인간이 있고 영적 인간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도 귀신을 보기도 하고 그래서 무서워서 잠도 못 자다가 결국 신학교를 나간 일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육체적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육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육체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무 쓸모 없습니다.
썩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탄이 두려움으로 우리를 잡아 놓으려 한다는 것을 신학교 때 체험으로 알았습니다.
저도 성체 조배를 하는데 이상한 숨소리를 들었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으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귀신을 본다는 사람에게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먼저 권고합니다.
기도로 두려움을 이기면 부활한 주님을 만납니다.
토마스는 도망을 쳤어야 맞습니다.
사도 가운데 있으면 예수님처럼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는 영혼에 대한 더 큰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영혼이 있다고 믿는 이들은 믿음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두려움을 이기면 신앙이 생깁니다.
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는 그래서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두려움은 믿음을 가로막는 사탄의 무기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믿음을 증가시키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두려움의 문 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체험을 위한 속성과정이나 암표는 이 세상 어딜 가도 없습니다>
피정 센터를 찾는 분들 가운데, 수도자인 제가 부러울 정도로 진한 하느님 현존 체험 속에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철저한 하느님 부재 체험으로 답답해 하고 힘겨워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평생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염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찐한 하느님 체험일 것입니다.
저 역시 수도자로 살면서 늘 부끄럽게 생각하는 일 한가지는, 제 신분상 언제나 하느님을 눈앞에 뵙는 듯이 살아야 할 텐데, 하느님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 텐데, 그래서 하루하루를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서 이렇다 할 체험이 없이, 그 어떤 확신도 없이 살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물에 물 탄 듯한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가끔 신자들께서 자신들이 경험했던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 할 때면 더욱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게 됩니다.
이럴 때마다 한가지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수도자에 대한 특별우대가 없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합니다.
성직자라고 해서 얻게 되는 프리미엄이란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는다면, 기도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성직자 역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심하는 비신자나 냉담자처럼 지낼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최근 제가 느끼는 갈증 가운데 가장 큰 갈증은 하느님께 대한 갈증입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예전처럼 그분 얼굴을 뚜렷하게 뵈올 수만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텐데...
단 한 번만이라도 예전처럼 강렬하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정말 잘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은 우리의 영적 생활의 무미건조함 여부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인생 여정에 동반하시고 우리 인간 역사에 활기차게 역사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 개인의 행복과 불행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삶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 사도는 눈으로 반드시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불신에 가득 찬 우리 인간의 삶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죽어도 못 믿겠다’는 외침은 바로 오늘 우리의 외침입니다.
하느님은 고통과 눈물 그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는데,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 거냐?’고 외칠 때 우리는 또 다른 토마스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보다 각별한 하느님 체험을 위해 노력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하느님 체험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선물입니다.
하느님 체험을 위한 속성과정이나 암표는 이 세상 어딜 가도 없습니다.
하느님 체험을 위한 족집게 과외는 따로 없습니다.
오직 끊임없는 간절한 기도,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하느님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순간을 기다리는 인내심만이 우리를 보다 강렬한 하느님 체험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
오늘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분이 정말로 부활하셨다고 믿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결코 믿지 못하겠소.” 라는 말 때문에 토마스 사도가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이 말은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을 간절하게 바라는 말로, 즉 “나도 정말로 믿고 싶다.” 라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러 가실 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라고 말했던 사람입니다(요한 11,16).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라고 말씀하시자(요한 14,3-4),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묻기도 했습니다(요한 14,5).
아마도 토마스 사도는 적극적인 성격의 사람이었던 것 같고, 언제나 항상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도, 미리 예고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동료 사도들의 말을 믿지 못했을까?
우선 먼저 사도들 쪽의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토마스 사도에게 전해줄 때, 사도들 쪽에서 확신에 가득 찬 모습으로 전해 주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으면서도, 부활에 대해서 ‘반신반의’ 했던 사도들이 있었습니다(마태 28,17).
바로 그런 모습 때문에 토마스 사도가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동료 사도들의 말을 믿지 못했으니 예수님의 부활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혹시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어떤 영적인 체험을 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 ‘확신’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믿게 만들 수 있습니다.
자기가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면, 믿음을 증언하지 못하고, 증언한다고 해도 그 증언에는 힘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 토마스 사도가 확인하고 싶어 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바로 그 예수님인가?”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 몸의 상처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 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 바로 앞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상처를 사도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요한 20,19-20)
그래서 토마스 사도의 말을 “나도 당신들처럼 예수님 몸의 상처를 직접 보고 싶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스 사도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신 것은 그에게 특별한 은총을 주신 일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토마스 사도 덕분에, 예수님의 부활은 틀림없는 진실이라는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바로 그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지 못하고 있었던 토마스 사도가 믿게 되었다는 일 자체가, 또 예수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한 일 자체가 예수님 부활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모든 신앙인들에게, 특히 오늘날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보지 않았지만 믿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보지 않았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고,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히브 11,1)
이 말은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이며, 믿음은 우리 희망의 토대이다.” 라는 뜻입니다.
또 바오로 사도는 ‘희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마 8,18)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로마 8,24-25)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 교회 공동체>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수도공동체입니다.”- 2021.7.21.
2년전부터 제 집무실 게시판에 붙어있는 글귀입니다.
갈수록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을 느낍니다.
공동체로부터 끊임없이 배우는 것도 참 많습니다.
하느님이 참 좋은 선물이 공동체요 공동체를 통해 받는 축복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배우는 겸손입니다.
공동체 형제 하나하나도 ‘신의 한 수’와 같은 선물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읽을 때마다 공감하는 제 행복기도문 중 일부입니다.
선물이란 깨달음과 동시에 저절로 솟아나는 감사와 찬미입니다.
하루하루가 주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선물 중의 선물이 공동체의 선물입니다.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교회공동체를 통해 부단히 배우면서 참나를 형성해 갑니다.
공동체 내에서 상처도 받지만 공동체로부터 받는 위로와 치유, 축복의 구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어제 마침 구입했던 개신교 저명한 목사인 이정배 교수의 <스승의 손사래>라는 책을 독료했습니다.
신학 50년 여정에서 만난 선생님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으로, 얼마나 많은 스승들과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복된 존재인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훌륭한 스승들과의 만남의 부족을 간접적으로 끊임없는 독서를 통해 스승들을 만남으로 보완하곤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최고의 스승은 주 예수님이요 여기 공동체입니다.
오늘은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공동체도 참 다양했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순교했다는 교회 전승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토마스가 있기에 얼마나 역동적인 주님의 제자 교회 공동체인지 깨닫습니다.
얼마나 개성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토마스인지요!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일주전 전례모임 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의 고백에 당시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토마스의 답변입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의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얼마나 솔직하고 정직한 고백인지, 바로 이것이 토마스의 장점입니다.
토마스 덕분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납니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서의 공동전례 모임시 나타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임재와 더불어 벽은 변하여 문이 된 기적입니다.
새삼 공동체의 중심은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게 하는 장면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움의 벽은 평화의 문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평화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다해도 평화가 없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지요.
아무도 앗아갈 수 없고 빼앗아 올 수도 없고 거금을 주고 살 수도 없는 주님께로부터 받는 평화의 선물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평화를 찾아 수도원을 방문하는 이들이요 우리가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도 주님의 평화뿐입니다.
이어지는 토마스의 고백과 주님의 답변을 통해 제자들은 크게 배우니 그대로 교회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받은 축복입니다.
거룩한 미사 공동전례에 참석할 때 마다 늘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토마스처럼 고백하며 주님의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이 귀한 고백을 배우겠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고백하며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평생 지니고 살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참으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이런 믿음과 더불어 평화의 축복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날마다 이런 분위기에서 쓰는 강론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교회공동체를 통해 살아 활동하십니다.
살아 계신 주님의 지체가 된 우리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자체가 그대로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의 체험입니다.
공동체 하나하나의 형제들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 얼굴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가르쳐주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며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한 가족’인 교회 공동체라니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혈연을 뛰어넘어 미사에 참석한 모든 교회 성원들이 하느님의 한 가족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이보다 고맙고 영예로운 축복도 없습니다.
광야 세상에 오아시스와 같은 하느님의 한 가족 공동체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멋진 고백을 통해 교회의 참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살아있는 교회공동체요 끊임없이 성장하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는 교회공동체, 그대로 삼위일체 하느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이런 교회공동체보다 큰 선물이 어디 있겠는지요!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는 공동체요 하느님의 거처로 성장, 성숙 중인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생활 자체가 파스카 주님의 체험이요 하느님 체험임을 깨닫습니다.
밖에서가 아닌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내 몸담고 있는 교회공동체에서 만나야할 주님이요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교회를, 교회 공동전례를 사랑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공동전례를 통해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평화를 선사하시어 공동체의 일치를 굳건히 하십니다.
아멘.
*AMEN(아멘)이란 뜻풀이를 소개합니다.
Agree with God(하느님 말씀에 동의하고)
Move with God(하느님과 함께 움직이고)
End with God(하느님과 함께 끝내고)
Never doubt God(하느님을 결코 의심하지 마라)
AMEN!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처음으로 자전거로 장거리 여행했을 때를 잊지 못하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꼭 해보고 싶은 여행이었지만, 자전거를 잘 타지도 못했고 또 자신도 없어서 마음만 먹고 있었지요.
그러나 더 나이 들어서는 할 수 없겠다 싶어서 30대 중반에 갑곶성지에서 부산까지의 자전거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시에는 워낙 튼튼해서 별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대전까지 갔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구를 지나면서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무릎이 너무 아픈 것입니다.
걷지도 못할 정도의 통증이 밀려왔습니다.
자전거 여행을 자주 가는 선배 신부님께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근처의 정형외과에 들어가서 ‘근육 이완 주사’를 맞고 푹 쉬라는 것입니다.
자그마한 시골 읍내에 들어가니 허름한 정형외과가 눈에 보였습니다.
워낙 손님이 없다 보니 접수하자마자 곧바로 진찰받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 친절하셨습니다.
이 더운 날 고생한다면서 냉커피도 주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근육 이완 주사를 맞고 병원 앞 약국에서 약을 받았습니다.
약사 선생님 역시 이 뜨거운 여름날에 고생한다면서 약값을 깎아주십니다.
자전거 여행 중에 기억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곧바로 ‘사람 만난 일’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참으로 살맛 나는 세상’임을 느끼게 된 사건들이 자전거 탄 것보다 더 기억에 남습니다.
그 만남으로 힘든 것도 잊고 목표했던 부산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계속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를 잊게 할 수 있는 사람과의 만남이 계속 있었습니다.
이 만남을 거부하면서 고통과 시련이 더 크게 보였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그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고 해서 불신의 아이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뵙고는 곧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면서 교회의 부활 신앙을 선포하였습니다.
어쩌면 불신의 아이콘이라기보다는 고통과 시련의 상황에서 곧바로 주님을 통해 힘을 얻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주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면서,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과거의 유다인들처럼 끊임없이 표징만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고백보다는 어렵고 힘든 상황을 먼저 해결해달라며 불평불만 속에 빠질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 그 자체가 희망이 되어 자기 신앙을 고백했던 토마스 사도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주님과의 만남 그리고 이웃과의 만남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토마스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면서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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