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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극심한 고통 1:12~15
12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13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14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
15 주께서 내 영토 안 나의 모든 용사들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딸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도다
위로자가 없는 예루살렘 1:16~17
16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17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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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주님이 진노하신 날에 유다를 괴롭게 하시고 황폐하게 하십니다. 죄악으로 인해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유다를 넘기시니, 예레미야의 눈에서 눈물이 물같이 흘러내립니다. 시온이 두 손을 펴지만 그를 위로할 자가 없고, 사방의 대적들로 인해 예루살렘은 불결한 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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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극심한 고통 1:12~15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죄로 물든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겪는 고통을 네 가지 은유로 진술합니다. 첫째는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자신의 가장 깊은 곳, 뼛속까지 타는 고통입니다. 둘째는 그물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고통입니다. 이는 그물에 갇힌 물고기처럼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무거운 죄악의 멍에에 목이 짓눌리는 고통입니다. 이는 결박당한 포로처럼 힘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넷째는 술틀 안의 포도처럼 으깨지는 고통입니다. 바벨론 침공 때 유다의 군대는 무용지물이었고, 젊은이들은 무참히 희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겪는 고통은 처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하나님의 심판으로 예루살렘이 겪은 고통은 어느 정도였나요?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죄가 내게는 없는지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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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자가 없는 예루살렘 1:16~17
죄는 하나님을 ‘적’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예루살렘은 아픔과 슬픔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의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16절)도 없고, ‘위로할 자’(17절)도 없습니다. 반복되는 탄식에서 드러나듯, 하나님을 멀리한 예루살렘은 이제 철저히 혼자입니다. 그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그 곁에 ‘위로자’가 아니라 ‘대적’이 넘친다는 사실입니다. 대적들은 예루살렘을 ‘불결한 여인’으로 취급하며 멸시합니다. 참된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만 옵니다. 하나님만이 상한 자의 위로자요 아픈 자의 치료자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호 6:1).
● 더 깊은 묵상
심판받은 예루살렘이 눈물을 흘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픔과 슬픔 가운데 있을 때 나는 누구에게 위로받으려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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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살해야 할 죄
잉글랜드의 신학자인 존 오웬은 「죄의 멸살」이라는 매우 수준 높은 논문을 썼다. 다소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제목인데, ‘멸살’이란 무언가를 죽여 없애는 걸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을 수 있는 모든 실질적인 죄를 살펴서 동기 차원에서부터 그 기세를 꺾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과정을 밟노라면 죄를 짓는 일 자체가 대단히 불쾌해 보인다. 참다운 빛에 비추어 볼 때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사악한 노릇인지 깨닫고, 훗날 같은 상황에 부닥쳤을 때 더 굳세게 저항할 힘을 갖게 된다. 그러자면 죄의 위험성(결과)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고, 그 단계를 넘어 통탄스러워하는 마음을 확고하게 지켜야 한다는 게 오웬의 주장이다. 다시 말해, 죄가 우리 삶의 주인 되시는 분을 얼마나 욕되게 하고 그분께 슬픔을 안겨 드리는 짓인지 절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저지르는 죄를 다시는 짓지 않도록 힘쓰는 한편, 고의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생각과 행동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죄를 택한다는 것은 하늘 아버지와 나누는 친밀함, 모든 영광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위엄이 주는 풍요함, 그분의 한없는 인내를 모두 저버리는 것임을 기억하라. 따듯한 햇볕을 쐬어 곰팡이와 세균을 죽이듯,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내면의 두려움과 이기심, 교만과 아집을 몰아내라.
팀 켈러의 기도 / 팀 켈러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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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예레미야애가 1장 16절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생명을, 하나님의 '떠나심'은 파멸을 낳습니다. 예루살렘이 통곡하는 이유는 위로와 생명의 하나님이 멀리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기쁨과 부를 누린 것은 그들의 강성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하시고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떠나신 자리는 눈물 자국으로 얼룩집니다. 사랑과 위로의 부재는 사람을 외롭게 하고, 하나님의 부재는 인생의 현재와 미래를 허무하게 합니다.
이 세상이 망가지도록 만든 원인은 하나님의 창조에 있지 않다. 죄인인 우리 자신에게 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죄를 미워하시고 철저히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길 원합니다. 모든 사람이 떠나가고 삶이 송두리째 무너진 순간에도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게 하소서. 심판의 고통이 힘겨워도, 치료하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 사랑을 끝내 붙들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72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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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신 진노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유다를 향하여 견디기 힘든 고통과 아픔이 주어지게 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진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때가 되면 모두가 자신들이 범한 죄를 후회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보기에 강해 보여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기 전에 많은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들은 그 기회들을 다 놓쳐버리고 결국 진노를 당하고서야 깨닫고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도들은 유다를 통해 큰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그들이 당한 고통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민감하게 깨어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2. 위로 받지 못하는 심정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비참한 상태를 보면서 그의 눈에서 눈물이 물같이 흐르도록 운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슬픈 상황에서도 위로받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예루살렘은 주변의 적들이 일어나서 공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 이상 보호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열방 중에서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이런 창피를 당한 것은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예레미야는 더욱더 눈물이 나고 아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하신 일이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에 대한 죄에 대한 보응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이 위로를 구하지만 그들은 위로를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묵상하기
나는 하나님의 위로 안에 머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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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기근의 때입니다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막13:8)
참을만한 기근이 아니라 심한 기근입니다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떨어졌더라"(렘52:6)
이 기근은 육의 양식이 아니라 영의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기근입니다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그래서 보물을 주고 사려고 해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애1:11)
심지어 목사와 장로들도 얻지 못하여 기절하게 되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하였도다"(애1:19)
온 세상을 다녀도 얻지 못하여 청년들도 기절하게 되었습니다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8:12~13)
그렇다면 왜 이런 기근이 왔을까요?
거룩과 진리의 하나님을 정욕과 탐심의 죄된 우상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암8:14)
세상과 짝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약4:4)
그렇다면 이 우상과 기근이 우리와는 상관 없는 것일까요?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애1:12)
예레미야는 바로 자신이 이 반역의 주동자였다고 고백했습니다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애1:20)
예루살렘의 큰 죄가,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애1:8),
바로 자신의 죄악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애1:14)
그러므로 우리가 울며 애통하며 죄악을 아뢰며 간구하기 원합니다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애1:16)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하시고 우리의 소원을 이루시며 구원하실 줄 믿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시145: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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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3~15절 예루살렘을 수호하는 전사였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예루살렘을 파괴하는 침략자가 되십니다. 뼛속까지 불을 쏘아 보내고 사냥하듯 그물을 치시고, 죄의 무게를 맛보도록 그들의 죄를 재료 삼아 멍에를 만들어서 그들의 목에 올리십니다. 사랑이 컸던 만큼 배은망덕한 시온에 대한 진노는 맹렬했고 심판은 처절했습니다. 그들은 비참한 현실에 대한 탄식에 앞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먼저 공감해야 했습니다. 신뢰가 배신으로 돌아올 때 결국 처절하게 심판할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봅시다.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16~19,21a절 하나님의 ‘떠남과 유기’는 죄의 결과이자 심판의 실상입니다. 시온이 두 손을 펴서 도움을 요청해보지만 위로할 자가 없습니다. 진정한 위로자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고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동맹국)는 오히려 그들을 속였고, 지도자들은 자신조차 돌볼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떠난 자리를 원수가 차지하여 그들을 약탈할 뿐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마치 곁에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지 않습니까? 주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일에 게으르지 맙시다.
18,20절 시온은 비참한 처지를 탄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반역한 자신의 죄를 탄식합니다. 개인과 사회의 고통스런 현실을 직면하며 정직하게 탄식하되, 이러한 상황을 야기한 우리의 죄를 더욱 절실히 탄식합시다. 그래야 비로소 구원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린도후서 7장 10절).
21b,22절 시온은 원수의 행위를 심판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시온이 범죄하여 심판을 받은 것처럼, 원수들의 악행도 동일하게 판단하고 벌하시라고 촉구합니다. 그들은 시온을 약탈하고 학살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약자들과 소외된 사람들이 착취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지 않도록, 이 땅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의 손길이 미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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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내 영토 안 나의 모든 용사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딸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도다’ - ‘여호와께서 유다의 모든 용사들을 거절했으니, 적군을 소집해 유다의 젊은이들을 무너뜨리고 또한 처녀 유다를 포도주 틀을 밟듯이 밟아버렸다‘ 라는 말입니다.
‘술틀에 밟으셨다’는 말은 아군들의 피해가 마치 술틀에서 포도가 으깨지듯이 그렇게 참혹했다는 회화적 표현입니다. 문제는 그 모든 일을 주께서 즉, 여호와께서 했다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 아니라 미움과 증오와 복수의 하나님과 같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그 하나님은 자녀들을 끝까지 지켜 보호해주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이 무궁하시고 아침마다 새로우신 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니 식언치 않으시고, 사람이 아니시니 후회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분의 행동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뜻에는 사람이 다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 애가의 저자가 행인들에게 물은 말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거기에 후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포함됨은 물론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죄를 지으면 징계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선택 받은 그분의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백성이므로! 그분께서 택하셨기에 그분의 선택은 틀림이 없는 까닭입니다. 감당할 수 없게 두들겨 패서라도 돌이켜야 하니까! 골수에 불을 보내기까지 사랑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의 구원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눈물이 물같이 흐를지라도 그 구원의 줄을 놓치지 말며, 사방에 대적들로 우겨 쌈을 당해도 그것조차 또 다른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격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이전에 죄 짓지 않는 것이 가장 최선입니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우리에게 죄가 없는지 깨닫기 위함이고,
더 나아가 죄지을 성향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을 의도적으로 모른척하고 지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유다를 바벨론에 넘기듯이 우리도 악한 세상과 원수들에게 넘길 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예방의학은 병의 예방에 중점들 두는 위생학의 한 분야를 말합니다. 레위기에 부정을 피하는 것이라든지, 우리가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는 것이 그 좋은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바람직한 의학이라고 할 수 있으니,
사전에 조치를 하여 큰 병을 막는 귀한 의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죄도 예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그런 심판을 사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방 접종, 예방 의학, 예방 범죄 등과 같이 우리도 각자의 취약점에 죄를 사전에 차단케 하는 예방 장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것 하나만 자기 것으로 개발하더라도, 우리의 실수와 갈등은 한결 적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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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 못한 현실이 도래한 이유
"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결국을 생각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게 낮아져도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란을 감찰하소서"(9절)
생각지 못한 비참한 현실이 도래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사람들이 결국을 생각지 않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을 생각함이 없이 단지 지금 멋대로 합니다. 자신의 처신을 생각함이 없이 행동하였기에 그 결과도 생각하지 않은 놀라운 비참함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소생시키려고 보물로 식물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11절) 사
람들이 금은보화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 금은보화가 그들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버리기로 마음먹으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아끼는 금은보석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챦은 것인지 가르치기 위해 먹을 것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이 떨어지자 금은보석이 먹을 수도 없는 하챦은 것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금은보석이 아무리 좋아도 배고픈 사람에게는 전혀 무익한 것이었던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우선순위를 잘 알지 못하고 그릇된 우선순위를 가지자 하나님이 그들이 생각지 못한 현실을 주셔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선을 위한 능동적 고난을 피하다가 보면 결국은 수동적 고난이 몰려올 것입니다. 마치 공부하는 것을 피한 학생이 용케 잘 피하는 것같지만 결국은 대학에 들어갈 때 대학낙방이라는 비참함이 몰려오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믿음을 위하여 씨 뿌리지 않는 사람은 생각지 못한 현실이 도래할 수 있습니다. 마치 믿음을 위하여 살지 않는 사람은 그들의 마지막이 지옥인 것과 같이 말입니다. 어떤 누가 지옥을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지옥을 가장 큰 현실로 직면하게 될 날이 멀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생각지 못한 현실로 완전히 뒤바뀐 사람들을 봅니다. 우리는 엄청난 비극의 역사를 볼 때가 있습니다. 엄청난 비극을 맞게 된 가정을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지금 할 수 있을 때에 그러한 비극을 막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사소한 일에 목숨걸고 있지 말고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조금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천지를 주관하는 하나님께 더욱더 의지함으로 우리의 미래를 밝혀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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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신 진노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유다를 향하여 견디기 힘든 고통과 아픔이 주어지게 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진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때가 되면 모두가 자신들이 범한 죄를 후회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보기에 강해 보여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기 전에 많은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들은 그 기회들을 다 놓쳐버리고 결국 진노를 당하고서야 깨닫고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도들은 유다를 통해 큰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그들이 당한 고통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민감하게 깨어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2. 위로 받지 못하는 심정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비참한 상태를 보면서 그의 눈에서 눈물이 물같이 흐르도록 운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슬픈 상황에서도 위로받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예루살렘은 주변의 적들이 일어나서 공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 이상 보호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열방 중에서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이런 창피를 당한 것은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예레미야는 더욱더 눈물이 나고 아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하신 일이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에 대한 죄에 대한 보응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이 위로를 구하지만 그들은 위로를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묵상하기
나는 하나님의 위로 안에 머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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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동안 예레미야는 임박한 심판에 대한 그의 경고 때문에 핍박과 멸시를 받았다. 기원전 586년 느부갓네살이 마침내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파괴했을 때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비극적인 몰락을 함께 슬퍼했고 한때 그처럼 웅장했던 도시의 죽음을 애도하는 다섯 편의 아름답고 감정적인 애가를 기록했다.
이 애가들은 그처럼 사악하고 목이 굳은 백성들에게 통렬한 메시지를 전하도록 사명을 받은 예레미야의 예민한 마음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 성과 성전, 궁전, 그리고 성벽 모두가 잿더미로 화했고 그 거주민들은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다.
1장 : 예루살렘의 멸망
이 장은 예레미야에 의한 애곡(1:1-11)과 의인화된 예루살렘에 대한 애곡(1:12-22)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루살렘 도시는 그 흉악한 죄로 인해서 황폐하게 되었고 그 대적들은 조롱하며 비웃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비탄스러운 처지를 돌아보시고 원수를 갚아달라고 호소했다.
2장 : 하나님의 진노
두 번째 애가에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황폐로부터 그것의 파괴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로 그 주제를 바꾸었다. 바빌론은 오직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그 성을 멸망시킨 것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혹독하게 황폐케 된 것에 대한 직접적인 목격자로서 기록했다.
하나님께서는 바빌론인들을 사용하여 모든 종교적인 관행들을 철폐하셨고, 제사장들, 대언자들, 왕들을 흩으셨으며, 성전과 궁궐들을 무너뜨리셨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거역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자초한 백성들의 고통을 슬퍼했고, 예루살렘의 탄원을 노래함으로 본 장의 애가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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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예레미야
기록 연대: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 직후
기록 목적:
- 유다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줌으로써 교훈을 삼기 위하여
- 여호와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하나님이 되심을 가르치기 위하여
- 멸망으로 실의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소망을 주기 위하여
[시편 119:113-120]
(113) 저는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미워하며 당신의 법을 사랑합니다.
(114) 당신은 제 피난처시요, 제 방패시니 제가 당신의 말씀(약속)만 바라봅니다.
(115) 악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리라!
(116) 당신의 말씀대로 저를 붙들어 되살려주시고 제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117) 저를 붙드소서. 그러면 제가 구원을 얻고 끊임없이 당신의 율례를 살피겠습니다.
(118) 당신께서는 당신의 율례에서 떠난 자들을 다 멸시하셨으니 이는 그들의 속임수가 헛되기 때문입니다.
(119) 당신께서 이 땅의 모든 악인을 쓰레기처럼 버리시므로 제가 당신의 증거들을 사랑합니다.
(120) 제 육체가 당신을 두려워하며 떨고, 또 당신의 심판을 제가 두려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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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노(1:12~14)
예루살렘이 겪는 아픔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불순종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해 그들을 괴롭게 한 것입니다. 골수에 불을 보내 이기게 하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의 고통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극심하다는 뜻입니다. 그물이 쳐졌다는 것은 유다 백성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 도망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의 죄악을 멍에로 삼아 그들의 목에 올려놓으시니 백성은 그 무게를 견딜 수 없어 피곤해합니다. 또 하나님은 죄를 범한 백성을 그들보다 월등히 강한 원수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이처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은 두렵고 처참한 결과를 낳습니다. 성도는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 묵상 질문: 유다 백성이 겪는 고통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어느 정도로 컸나요?
- 적용 질문: 죄를 극도로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와 싸워 이기려고 얼마나 노력하나요?
위로자 없는 슬픔(1:15~17)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 백성이 불순종하고 죄를 범하면
그들과 맞서 싸우십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용사들을 멸하셨습니다. 술틀에서 포도를 밟을 때 붉은 포도즙이 나오듯,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진노의 틀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시니 유다 백성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울며 두 손을 펴서 애원해도 시온을 위로할 자가 없습니다. 시온은 두려운 대적과 홀로 맞서 외로이 싸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 사방의 적에게 명령하셔서 그들을 공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이 고립된 것은 죄로 인한 자업자득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면 심판과 고독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위로가 찾아옵니다.
- 묵상 질문: 예루살렘의 슬픔과 아픔을 위로할 사람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죄악으로 고통당할 때 그 원인과 위로를 지금까지는 어디서 찾았나요?
앞으로는 어디서 찾아야 할지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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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결코 그렇게 쉬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값으로서 사망이라는 형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지지만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죄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천국에서 의의 심판을 받을 때도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부끄러운 구원을 얻을 것이요, 죄를 씻어내는 일에 열심을 낸 사람은 칭찬과 많은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죄와 싸우십시오. 죄값을 치루는 그 때가 오기 전에 먼저 죄를 씻어내는 그 일을 하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죄값을 치루어야 하는 그 때가 되면 얼마나 불쌍한 것인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세상의 여러 일에 욕심들이 많습니다. 돈을 더 벌고, 자식의 성적을 올리고, 명예를 잡는 일에 욕심을 내어 열심을 냅니다. 물론 그런 일들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아주 더 좋은 일을 하나 말하겠습니다. 그
것은 죄를 씻기 위해 욕심을 내서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죄를 씻는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일에 욕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신령한 복입니다.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복입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죄를 씻는 일에 욕심을 가진 사람이 적습니다. 그것이 안타깝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여. 죄를 씻는 일에 욕심을 내십시오. 선한 그 욕심을 내십시오. 그것을 강력하게 권합니다.
엄청난 죄값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우리의 책임으로서의 죄값이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값이 얼마나 크고 무겁고 가슴아픈 일인지를 철저히 기억하여 오늘 우리가 죄를 씻어내기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오래 참으시지만 무한정의 시간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은 그런 심판의 시간들을 준비하는 기회의 시간입니다.
예레미야가 40년 동안이나 그렇게 울부짖었던 시간들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외로움에 힘들어하는 모습 속에서 누군가가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이웃이 되어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오늘을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으로 살아내는 우리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