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의 산 / 虛窗 朴籌丙
노자가 말했듯이 강과 바다가 능히 백곡(百谷)의 왕일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 두었기 때문이다. 강과 바다처럼 자신을 낮추는 태도에 우리는 겸(謙)이라는 글자를 붙인다.
謙이란 글자는 言과 兼으로 이루어진 글자 곧 言兼이라 한다. 言兼이란 말을 겸해서 한다는 뜻이다. 말을 겸해서 한다고 함은 결국 남에게 말할 기회를 주면서, 상대편의 처지를 고려하면서 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남에게 말할 기회를 준다는 것, 상대편의 처지에 마음을 쓴다는 것, 그것은 남의 반대와 비판까지도 수용하려는 태도가 아니겠는가. 남을 받아들이려는 노력, 남의 자리를 위해 자기를 비우려는 모습, 이 텅 빈 여백과 공간, 그것이 謙의 모습이다. 謙의 모습은 비어 있기 때문에, 빈 그릇이기 때문에 남의 음향이 되울린다. 남의 음향이 되울릴 수 있기 때문에 남이 좋아하게 된다.
남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는 마음은 자신을 낮추는, 양보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자신이 빈 공간으로 남으려는 마음은, 이웃과 세상을 위해 공을 세웠으되 그 대가를 바라지 않고, 뜻을 얻지 못해 초목과 더불어 썩어 간다 할지라도 조금도 애틋해 하지 않아, 오고가는 모습이 때를 따라 자적하다. 때가 그치면 그치고 때가 행하면 행한다(時止則止 時行則行)라고 할까. 자신을 위해,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떠들 필요도 바쁠 까닭도 도시 없다. 떠들 필요가, 바쁠 까닭이 없기 때문에 말을 겸해서 한다. 남을 앞세운다.
예전에 선비들은 자기가 나설 수 있을 때면 세 번을 사양했다 한다. 첫 번째의 사양을 예사(禮辭)라 하고, 두 번째의 사양을 고사(固辭:현재는 굳이 사양하는 뜻으로 쓰인다)라 하고, 세 번째의 사양을 종사(終辭)라 했다.
이 세 차례의 사양을 합쳐서 삼사(三辭)라 하는데, 삼사를 하고서도 굳이 청해 오면 그제야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살얼음을 밟듯, 띠풀[白茅]을 깔 듯, 성심을 다하는 삼사의 자세를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의정을 맡아 주시오.” 할 때 “성은이 망극하여이다.”라고 응낙하면 당장 정승이 되고, 한 번 사양했을 때 두 번 다시 권해 오지 않으면 정승 자리가 다른 사람한테 돌아가는 판국인데도 그 걸 어찌 입에 발린 소리로 세 번씩이나 사양했겠는가.
삼사는 밖으로만 꾸미는 허례가 아니라 한 번 사양한 후 다시 청해 오면 또 사양하고 그래도 다시 권해 오면 그래도 사양한다는 식으로 상당한 간격을 두고 세 번을 사양한다는 뜻이다. 세 번을 사양하는 동안 자신이 그 직을 맡을 재목인가를 골똘히 생각해 봐야 한다는 뜻인지도 모르고, 한편 세 번을 청하는 쪽에서도 과연 그 사람에게 그런 걸 맡겨도 좋겠는가, 그래서 한 번 믿고 쓴 이상 끝까지 믿을 수 있겠는가를 세 번씩이나 염려해 봐야 한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삼사의 자세를 고수하는 사람이야말로 어쩌면 앞을 훤히 내다보고 있는 현인이 아닐까. 높은 산정에서 사해를 굽어보듯, 고금을 회통한 어진 선비야말로 구태여 그런 자리를 바라겠는가. 세 번이 아니라 열세 번이라도 사양할밖에. 초야에 묻힌 제갈량을 찾아 세 번씩이나 머리를 굽히는 삼고초려의 장면은 몇 번을 읽어도 마냥 그윽하다. 나는 마음이 울적할 땐 곧장 이 대목을 펼친다. 비록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오장원의 이슬로 사라진 제갈량이었건만 어쩌면 그러한 자신의 운명까지도 훤히 내다보았을 그였기에 더욱 삼사의 자세를 견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 운명과 한계를 뛰어넘어 보려했다면 그것이 공명을 더욱 위대하게 하지 않을까.
謙은 꾸며진 자시비하(自己卑下)가 아니다. 강과 바다가 자질구레한 물들보다 크기 때문에 도리어 자신을 낮추게 되는 자연스러운 경지이다. 『주역』에서 “땅속에 산이 있는 것이 謙이다.”(地中有山謙)라고 했다. 산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것인데 그 산이 높아서 땅속으로 들어갈 줄 아는 상태이다.
『주역』의 얘기를 더 들어 보자. “하늘은 가득 찬 걸 이지러뜨려서 謙에게 더하고, 땅은 가득 찬 걸 변하게 하여 謙에게 흐르게 하고, 귀신은 가득 찬 걸 해롭게 하고 謙에게 복을 주고, 사람은 가득 찬 걸 미워하고 謙을 좋아한다.”
謙은 계산된 자기비하가 아니듯 의도된 침묵이 아니다. 의도된 침묵은 이른바 묵적(黙賊)이다. 하물며 세상을 방관하면서 냉소하면서 은자인 체 지자인 체하거나, 얼마간의 지혜와 능력을 농하여 세상을 업신여기고 남을 깔보는 태도는 비록 두 손을 땅에 집고 기어도 그것은 謙이 아니다, 같잖은 오만일 따름이다.
산이 땅속으로 들어가면 하늘이 넓어진다. 그런 하늘을 가슴에 열어 놓을 일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