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이죽을 아시나요!
이것이 과연 인간의 음식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나라 전체가 극도로 피폐했던 그 당시에는
정말이지 ‘먹고 죽을’ 식량조차 구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돼지나 개밥이 되어야 할 것들을 먹을 수밖에 없었고
그 대표적인 것이 흔히 말하는 ‘꿀꿀이죽’이었다.
쌀이 남아돌아 주체를 못하는 오늘날에는
상상도 되지 않을 일이지만
그때 우리는 이 해괴하고 슬픈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꿀꿀이죽은 수프 속에 식빵, 고기류, 샐러드 따위의
음식물들이 걸쭉하게 혼합된 미군의 잔반(殘飯)이었다.
쉽게 말하면 미군들이 먹다 남긴
세 끼 식사의 찌꺼기를 모은 것이다.
미군 부대 내에서 발생되는 쓰레기 처리나
병사들이 남긴 잔반을 치우는 일은 한국인이 했는데 그 처리 업자가
바로 공설운동장 야구장 서남쪽, 평양옥 가는 방향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당이 넓고 입구 오른쪽에 잘 지은 일본집이 서 있던 곳이었다.
꿀꿀이죽이 개, 돼지 대신에 사람 차례가 된 것이 바로 이곳에서였다.
인간이 굶는 마당에 축생을 먼저 먹일 수는 없는 일.
더구나 꿀꿀이죽은 매우 기름지고 풍성하면서도
매 끼니 식단이 바뀌는 호사스러운(?) 것이었다.
따라서 초근목피 부항 든 백성들에게는 꿀꿀이죽이야말로
허한 속을 채우고 보(補)해 주는 아주 훌륭한 음식이었다.
그래서 거기에 착안한 누군가가
남의 침 묻은 이 음식 쓰레기를 팔기 시작한 것이었다.
쓰레기를 치워 미군으로부터 돈을 받고
다시 그 쓰레기를 동족에게 팔아 치부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쌀 한 가마니가 만 환쯤 되던 그 무렵,
꿀꿀이죽의 가격은 기억컨대 한 되들이 깡통 하나에 50환이었다.
결코 값이 눅다고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종이, 목재, 깡통, 쇠붙이 등속의 각종 폐자재들과
거기에 커다란 드럼통 두 개를 실은 트럭이 미군 부대로부터
우리가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마당에 도착한다.
야속하다고 할까, 기막히다고 할까.
차가 도착하면 각종 쓰레기들이 내려지고
죽이 담긴 두 개의 드럼통도 한쪽으로 옮겨진다.
그러면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달려들어
내용물 속에 손을 넣어 전체를 세밀하게 조사한다.
통 속에 가라앉은 ‘왕건’ 덩어리를 건져내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골라진 소시지나 햄 덩어리,
또 닭고기, 칠면조, 양고기, 스테이크 조각 같은 것들은 잘 손질이 된 후
어엿한 미제 고기로 행세하며 팔렸다.(부대찌개 재료)
창영동 골목에는
이런 고기류와 함께 꿀꿀이죽을 끓여 파는 전문점(?)이 여럿 늘어서 있었다.
지금은 골목길조차 그 흔적이 남았는지 모르지만
이 골목을 ‘꿀꿀이 골목’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막일꾼, 노무자, 지게꾼 같은 사람들이 끼니를 위해 이용했다.
꿀꿀이죽은 이 골목에서 한 번 더 걸러지고 물이 첨가되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게 되면 멀건 국물 속에는 으깨진 당근 조각이나
완두콩 부스러기밖에는 남지 않는데 그래도 값은
소(小)짜가 한 양재기에 5환, 대짜가 10환이나 되었다.
이렇게 적으면 꿀꿀이죽도
그다지 못 먹을 음식은 아니라는 오해를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그것을 처음 먹기 시작했을 때에는
참으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부러진 이쑤시개, 담배 필터, 엉킨 ‘지리가미(티슈)’덩이,
껌을 쌌던 은박지 따위가 우리 입속에서 씹혔기 때문이었다.
끓여 퍼 놓은 죽 속에 담배꽁초가 필터만 남긴 채 풀어져
거뭇거뭇한 무늬를 이루고 있거나 씹던 껌을 숟가락으로
건져내는 순간은 정말 지옥이었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미군들은 우리가 그것을 먹는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
코를 푼 지리가미나 이쑤시개, 껌 종이 따위가 섞이지 않도록
제법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물론 인천 시민 모두가 연명을 위해
이 슬픈 음식을 먹지는 않았겠지만 당시 상당수의 시민과 피난민들이
여기에 목을 매고 산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내 차례를 기다려 한 국자 얻어야지
6·25전흔이 채 가시기 전인 1950년대 중반,
땔감은 위험을 무릅쓰고 철길에 떨어진 조개탄을 주워
어렵게 냉기나 가셨고 하루세끼 챙겨 먹는 것은 고사하고
어떻게 허기를 채우느냐가 급선무였던 시절이 있었지요.
다행히(?)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소시지 햄 통조림 등
음식물쓰레기로 만든 '꿀꿀이죽'을 얻어먹는 날이면 그 날은 생일날이었고요.
길게 늘어선 줄에서 뽑을 것도 없는 짧은 목을 애써 뽑으며
내 차례를 기다려 한 국자 얻어먹던 우유 죽은 왜 그렇게 맛이 있었는지요?
미군들이 지나며 조소 속에 던져 준 껌과
초콜릿을 줍기라도 하는 날이면 함지박만큼 벌어지던 입가는
어느새 주름진 볼로 변해버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