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불보다 더 전에는 어떻게 불렀을까? 갓바위 부처님의 조성 시기를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본다. 부처님이 조성되기 전에 바위만이 솟아 있을 때의 산봉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그때도 관봉이라고 하였을까? 관봉은 우리말로 갓봉이 아닐까? 지금은 알 길이 없다. 갓봉이라고 불렀다면 의미는 확실해진다. 분명한 것은 그때에 살았던 사람들도 오늘의 우리처럼 삶에 짓눌려 아파하면서 살았다는 거다. 그들도 누구에게 아픔을 호소하고, 소망을 기도하였을 것이다. 사람 사는 일이 모두 그렇기 때문이다.
지난 번에 불굴사를 답사하였을 때 주지 스님의 말이 불굴사의 부처님이 암부처이고, 갓바위 부처님이 숫부처라고 하였다. 이것은 불교 신앙으로는 있을 수 없는 말이다. 민간에 암미륵, 숫미륵이라는 말이 있지만 불교신앙이 아니고 토속신앙이 불교의 부처님을 차용하여 사용하는 말이다. 암과 수라는 개념은 음양의 조화를 가치의 우위에 두는 모신 신앙이 뿌리이다. 암부처, 숫부처에서 유추해보면 부처님이 여기에 자리를 잡고 앉아계시기 이전에는 남근석을 모신 신앙터였을 가능성이 많다. 남근석은 성기신앙의 한 형태로서 모신신앙이 뿌리이다. 남근석 신앙은 바위 신앙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지형의 특징이 산이 많은 것이다. 아무리 넓은 평야래도 산이 보이지 않는 곳은 없다. 산은 우리와 가장 친숙한 땅이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우리의 시조신인 천신이 하강한 곳이 산이다. 산은 우리에게 기도처가 되었다. 산은 우리에게 고향의 우리 집처럼 가장 친숙한 곳이 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산에 가는 것을 산에 오른다, 라고 하기 보다는 산에 들어간다(入山)라고 하였다. 죽었을 때는 산에 무덤을 만들었다. 그래서 죽음을 ‘돌아갔다.’라고 하였다. 마치 자기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듯이 표현하였다. 돌아간 곳이 산이고, 묻히는 곳이 산이므로 산소(山所)라고 하였다.
최남선은 우리의 고대 문화의 특징(15개를 들었다) 중의 하나로서 ‘돌은 산악의 표상이다.’라고 하였다. 바위 신앙은 바로 산악 신앙이라고 하였다. 바위(선돌)를 태양과 하늘의 상징으로 삼아서 숭배의 대상으로 하였다. 산신제를 올리는 산을 상징하는 것은 나무도, 풀도, 계곡도 아니다. 천년, 만년, 변함 없는 바위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서 거석문화를 형성 하였다. 갓바위는 온통 바위 덩어리로 된 산봉이다.
굴불사의 바위 굴은 모신신앙의 상징이다. 굴불사의 뒤편에 있는 바위굴은 철제 사다리로 길을 닦아 두었지만 오르기가 무척 가파르다. 힘들여 올라가 보니 바위 굴이 넓지는 않았다. 촛불도 켜져 있다. 부처님도 모셔져 있다. 앞은 평평하게 터를 만들어서 기도처로 만들어 두었다. 부처님이 이 땅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어떤 신을 모셨는지는 모르지만 굴 자체가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는 모신신앙이 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