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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우왕비왕설’로 정국을 장악하다
팔관회 흥국사 회의 통해 공양왕 등극, ‘우왕은 신돈의 아들’로 낙인
이색은 공양왕과 손잡고 이성계에 맞서기로, 길재는 권력투쟁 피해 은거
▎1389년 11월 팔관회 기간, 흥국사 회의에서 이성계는 정창군 왕요를 왕으로 밀었다.
그가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이다. 사진은 부산 진구에서 재현된 팔관회 행사.
팔관회가 열린 1389년 11월 15일, 정창군은 왕위에 올랐다.
팔관회는 정월 보름의 연등회와 함께 나라의 안전과 번영을 기원하는 2대 국가적 행사였다.
바로 그날, 고려왕조의 마지막 왕이 즉위한 것이다.
팔관회는 신라 진흥왕대인 551년 전몰장병을 위한 위령제로 시작됐다.
궁예가 898년 재개했고, 왕건도 918년 고려를 세운 뒤 지속하고 정례화했다.
신라 때는 불교식 위령제로 분위기가 엄숙했다.
그러나 점차 동맹 같은 전통적 추수감사제와 전시적 왕실의례,
민속의 문화 축제적 성격이 더해졌다.
행사는 이틀간 열렸다(11월 14일 팔관소회, 15일 팔관대회).
서경에서는 10월에 열렸다.
행사는 극히 화려하고 다채롭고, 흥겨웠다. 행사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왕이 가마를 타고 위봉문 앞까지 나와
태조 진영에 술을 올리고 절하는 예조진작헌(詣祖進酌獻)이다.
둘째는 모든 관원이 늘어서서 왕에게 하례하고 충성을 다짐하는 좌전수하(坐殿受賀)다.
그리고 술과 음식이 나오고 잔치가 시작되면서 춤과 노래, 온갖 공연이 펼쳐진다.
셋째, 연회가 끝난 뒤 왕은 궁궐 앞 법왕사에 행차해
고승들의 법회를 열고 국조의 안녕을 기원한다.
918년 고려의 첫 팔관회 장면을 보자.
“격구장 한 곳에 윤등(輪燈)을 설치하고
향등(香燈)을 곁에 벌여놓고 밤새도록 땅 가득히 불빛을 비추어 놓았다.
또 가설무대를 두 곳에 설치했는데 각각 높이가 5장(약 15m) 남짓하고
모양은 연대(蓮臺)와 같아서 바라보면 아른아른했다.
갖가지 유희와 노래, 춤을 그 앞에서 벌였는데
사선악부(四仙樂部)의 용·봉황·코끼리·말·수레·배는 모두 신라의 고사였다.
백관이 도포를 입고 홀을 들고 예를 행했으며,
구경하는 사람이 서울을 뒤덮어 밤낮으로 즐겼다.
왕이 위봉루에 나가서 이를 관람하고 그 명칭을
‘부처를 공양하고 귀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供佛樂神之會)’이라 하였는데,
이후 해마다 상례로 삼았다.”([고려사절요] 태조 원년 11월)
이날은 궁궐이 개방돼 백성도 구경할 수 있었고,
훗날에는 송나라 상인이나 여진족, 일본인, 페르시아 상인들도 왔다.
왕과 귀족, 백성, 외국인이 함께 어울려 잡희 공연을 즐기고,
춤추고 노래하고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즐긴 대규모 축제였던 것이다.
왕위계승, 혈연이냐 자질이냐
▎고려 태조 왕건의 초상화. 임종 한 달 전 [훈요십조]를 남겼고, 팔관회의 개최를 당부했다.
왕건이 팔관회를 열던 시대는
“풍진이 들끓고 칼과 창이 종횡하던” 후삼국의 전쟁기였다.(김부식, ‘하팔관표(賀八關表)’)
고려 내부의 사정도 위태로웠다. 918년 6월 왕건이 쿠데타로 집권한 뒤
10월까지 5개월간 세 차례의 반(反)왕건 쿠데타가 일어날 정도였다.
왕건은 전쟁에 지치고 흩어진 인심을 어루만지고 하나로 묶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943년 4월, 임종 한 달 전 왕건은 측신 박술희에게 ‘훈요십조’를 유훈으로 남겼는데
그 제6조에서 팔관회를 계속 열어 “군신이 동락(君臣同樂)하면서 경건히 행하라”고 당부했다.
군신이 함께 즐거워하면서, 제사를 통해 하늘과 산신, 용신 등에게
왕조의 안전과 번영을 기원하도록 한 것이다.
팔관회는 고려시대에 총 114회 열렸고, 고려 말에도 그 성대함이 쇠하지 않았다.
팔관회의 성대한 의식 동짓달마다 여는지라
해마다 상서를 내려 해동을 보우해 주시도다
음식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네 풍속을 준수하고
의관은 고풍을 따랐나니 역시 중국의 풍도로세 (이색, ‘종덕부추송팔관개복다식[種德副樞送八關改服茶食]’)
1389년 팔관회 날에는 창검이 삼엄히 늘어선 흥국사 회의에서 고려의 운명이 결정됐다.
흥국사는 924년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국찰로, 팔관회가 열리는 구장 앞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기우제를 지내거나 반역자를 심문하는 국청이 열리기도 했고,
1198년에는 노비 만적이 이곳에 모여 봉기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날 팔관회에서는 누구를 왕으로 옹립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이성계는 먼저 “우왕·창왕은 본래 왕씨(王氏)가 아닌지라 종사(宗祀)를 받들 수 없다”고 주장했다.
우왕이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소생이라는 이른바 우왕비왕설(禑王非王說)이다.
그리고 “정창군(定昌君) 왕요(王瑤)는 신종(神宗, 20대왕, 재위 1197~1204)의 7대 손으로
그 족속이 가장 가까우니 마땅히 세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왕권 정통성의 근거로 ‘혈연’을 제시한 것이다.
혈연 그 자체는 어떤 형이상학적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인류는 관습적으로 혈연을 재산이나 권력 승계의 근거로서 인정해왔을 뿐이다.
왕요는 이성계보다 열 살 아래로 당시 45세였다.
왕다운 왕은 필요없다
▎공민왕 시대 고려를 배경으로 한 영화 [쌍화점]의 한 장면.
공민왕은 훗날 우왕이 된 모니노를 후계자로 채택했는데
그가 친자가 아니라는 반론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준은 이성계 안에 반대했다.
왕요가 “부귀로 생장하여 다만 치재(治財)할 줄만 알고 치국할 줄은 모르니
가히 세울만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성품이 자애롭고 어질고 나약했으며(慈仁柔懦) 우유부단했다’([고려사])고 한다.
성석린 역시 “임금을 세우는 데는 마땅히 어진 이를 가릴 것이요,
반드시 그 족속의 친소를 논할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들 역시 왕씨가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혈연의 정당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왕족 내에서라면 혈연의 가까움보다 자질, 즉 ‘택현’(擇賢)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태조 왕건의 유훈이기도 했다.
왕건은 ‘훈요십조’ 제3조에서 적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하되,
그가 불초하면 둘째나 중망을 받는 자가 계승하도록 했다.
“왕위계승은 맏아들로 함이 상례이지만, 만일 맏아들이 불초할 때에는 둘째 아들에게,
둘째 아들이 그러할 때에는 그 형제 중에서 중망을 받는 자에게 대통을 잇게 하라.”
([고려사] 세가, 태조 26년 4월)
혈연의 원칙에 따르되, 부득이한 경우 혈연 내의 택현을 승계 원칙으로 제시한 것이다.
혈연과 택현은 전근대 왕조의 주요한 승계 원칙이었다.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준 선양(禪讓)도 형식만 보면 택현이다.
그것은 전설적인 성왕 요순이 따랐던 원칙이었다.
창왕 폐위 후의 문제에 대해 이성계는 사전 조정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자 결국 추첨에 의존했을 정도로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이성계도 자신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았다.
추첨 결과 왕요가 뽑혔다.
“이에 종실의 몇 사람의 이름을 써서 심덕부·성석린·조준을 보내어
계명전(啓明殿)에 가서 태조에게 고하고 제비를 뽑았더니 정창군의 이름이 뽑혔다.”
왕을 결정하는 회의에서 조준 등이 이성계에게 반대할 수 있었다니 놀랍다.
이로 보아 당시까지 이성계는 주요 재상 중 한 명으로 인식됐던 것으로 보인다.
역성혁명의 가능성은 아직 모두에게 분명한 것이 아니었다.
정몽주의 경우가 그랬을 것이다. 조준조차 그러했다는 것은 의외다.
정창군이 왕이 되기에 부적합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이성계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왜 그를 옹립했는가? 이성계는 야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준은 왕다운 인물을 원했다.
그때까지 조준은 고려왕조의 존속을 바란 것으로 보인다.
위화도회군 이후 조준은 급진 개혁의 선봉장이었지만,
아마도 이성계파의 가장 깊숙한 정치적 논의에는 참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튿날인 11월 16일 새벽,
이성계와 심덕부 등 9대신은 정비(定妃, 공민왕의 제4비 안씨)를 예궐했다.
군대가 호위하는 가운데 종친과 백관이 모두 따랐다.
정비의 교지에 따라 창왕이 강화부로 추방되고 공양왕이 즉위했다.
정창군이 “놀라고 두려워서 사양하니 정비가 손수 국왕의 인(印)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이로써 위화도회군 직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투쟁에서
조민수파에 패배했던 이성계파는 비로소 왕위 계승권을 장악했다.
제2의 무신정권으로서 안착한 것이다.
공민왕의 애매한 처사가 부른 참극
▎공민왕의 실정과 문란한 사생활은 승려 신돈의 정치 개입을 낳았고,
고려의 몰락을 촉진했다. 드라마로 제작된 [신돈]의 한 장면.
위화도회군 이후 회군파의 정치적 조치는 모두 정비의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왕권의 정당성이 혈연의 원칙에 의해 지지됐기 때문이다.
마지막 공양왕의 선양과 이성계의 즉위도 정비의 이름으로 공포됐다.
그녀는 회군파의 정당성을 분식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장치였다.
창왕 교체의 명분으로서 이성계는 우왕비왕설,
그리고 “천자의 명이 있으니 마땅히 가짜(假)를 폐하고 진짜(眞)을 세울 것”이라는
폐가입진(廢假立眞)론을 내세웠다.
정비의 교서도 기본적으로 이에 기초했다.
첫째, 우왕비왕설로서, 이인임이 그 원흉으로 비판 받았다.
“우리 태조로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자손이 서로 이어져 종묘사직을 받들어 왔는데,
불행히 공민왕이 훙서하고 후사가 없었다.
당시 종척과 군신들이 의론하여 종실의 어진 이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권신 이인임이 오래 국병(國柄)을 잡음으로 말미암아 불의를 많이 행하고
은혜를 팔아 자기의 죄를 면할 것을 도모하여,
역적 신돈의 아들 우(禑)를 공민왕의 후사라 모명(冒名)하고 소생모를 죽여
그 입을 막고는 질녀를 시집보내어 그 은총을
굳게 하니 신인(神人)이 분함을 쌓은 지 15년이었다.”
우왕이 누구 소생인지는 불분명하다.
그것은 공민왕의 다소 모호한 처사에 기인한다. 우왕은 1365년(공민왕 14) 태어났다.
아명이 모니노이고, 생모는 신돈의 비첩 반야이다.
그러나 공민왕은 모니노를 자신의 소생으로 공식화하지 않았다.
1368년(공민왕 17), 공민왕은 처음으로 반야에게 매월 쌀 30석을 하사했다.
모니노가 공개된 것은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처형된 직후였다.
공민왕은 근신에게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가서 그 비(婢)를 사랑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놀라게 하지 말고 잘 보호하라”고 말했다.
신돈의 사후 공민왕은 모니노를 자신의 생모인 명덕태후전에 살게 했다.([고려사] 신우총서)
성균직강 이숭인에게 그를 가르치게 하자,
명덕태후는 이를 꺼려하여 “조금 커서 공부를 시키더라도 늦지 않다”고 반대했다.
그러자 공민왕은 “제가 이제 명수가 다해 죽게 되었으니,
지금 후사를 세우지 않으면 누구에게 사직을 부탁하겠습니까?”라고 애소했다.([고려사절요] 공민왕 22년)
당시 공민왕은 술과 남색 등 육체적 황음과 정신적 고뇌에 절어 생명력이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죽는 바람에 후계자도 없었다.
모니노를 후계자로 세운 것은 궁여지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덕태후는 공민왕의 실정과 문란한 생활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생활을 정상화하고 정치에 힘쓸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개선되지 않았다.
2년 뒤 공민왕은 이색 등에게 모니노의 이름을 추천하게 하여 우(禑)라는 이름을 내렸다.
또 시중 경복흥, 밀직제학 염흥방,
정당문학 백문보를 불러 논의한 뒤 우를 강녕부원대군에 봉하자,
신하들이 이를 경축했다.
아울러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인 백문보, 전녹생, 정추에게 가르치게 했다.
후계자로서 공식화한 것이다.([여사회강, 麗史會綱])
1374년 9월, 공민왕은 죽은 궁인(宮人) 한씨를 모니노의 공식 생모로 정하고,
그녀의 3대와 외조를 추증했다.([고려사] 신우총서) 암살되기 일주일 전이었다.
신돈 사후 공민왕은 이처럼 차근차근 모니노에게 후계자의 지위를 갖추게 하고
이인임·경복흥·이색 등 주요 대신들을 이 일에 관여케 했다.
출생의 모호성을 보완하고자 했던 것이다.
1374년 9월 갑신 심야. 공민왕이 술에 만취해 자던 중 암살됐다.
새벽에 명덕태후는 시해 현장을 살피러 갔다. 이때 모니노를 대동했다.
처음에는 시해 사실을 숨겼다. 범인 최만생과 홍륜이 곧 잡혔다.
이틀 뒤 빈소를 차리고,
모니노가 재추들과 함께 발상함으로써 상주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후계자의 지위를 굳힌 것이다.
이튿날 왕위 승계문제가 논의됐다.
그런데 뜻밖에도 명덕태후와 경복흥은 모니노가 아닌 종친을 세우고자 했다.
경복흥의 어머니는 명덕태후의 큰 언니의 딸, 즉 조카다.
명덕태후는 경복흥에게 이모할머니인 셈이다.
궁중의 내막을 가장 잘 아는 공민왕의 육친과 외척이 모니노의 혈통을 부정한 것이다.
우왕비왕설의 진위 논쟁
▎공양왕의 묘비. 이성계에 의해 추대됐지만 그의 권력에 맞서려 했다.
그러나 이인임이 공민왕의 유훈을 근거로 모니노의 계승을 주장했다.
신돈의 처형 직후 공민왕은 수시중(守侍中) 이인임에게
“원자(元子)가 있으니 나는 걱정이 없다”고 한 바 있었다. 원자란 왕의 장자이다.
간접적으로 모니노의 장래를 부탁했던 것이다.
왕의 승계를 둘러싸고 혈연의 원칙과 유훈이 충돌했다.
왕위 승계의 합법적 결정권은 최종적으로 왕실에게 있지만,
공민왕이 생전에 모니노를 후계자로 공식화한 것도 사실이었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수산(李壽山)은
“오늘의 상황으로 보아 마땅히 종실을 옹립해야 한다”고 명덕태후를 지지했다.
이인임의 주장은 왕실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잘못될 경우 반역죄에 해당했다.
하지만 왕족 왕유(王瑜)와 왕안덕(王安德)이
“왕이 대군으로 후사를 삼았으니,
이를 두고 어디에 구하겠는가”라고 이인임의 의견에 찬성했다.
결국 이인임이 백관의 지지를 얻어 10살의 모니노를 옹립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1376년(우왕 2) 3월, 반야가 밤에 가만히 명덕태후궁에 들어와 울면서
“내가 진실로 주상을 낳았는데 어찌 한씨를 어머니로 하느냐”고 호소했다.
이인임은 그녀를 감옥에 가두고 심문했다.
그러자 반야는 새로 만든 중문(中門)을 가리키며,
“하늘이 만일 나의 원통함을 안다면 이 문이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반야는 임진강에 수장됐다.
왕의 생모였지만, 정치의 무자비한 수레바퀴에 끼어 희생된 것이다.
공민왕은 명백히 모니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공민왕의 생모인 명덕태후는 모니노의 태생을 부정했다.
이성계파의 우왕비왕설도 충분한 근거를 가진 셈이다.
그러나 원천석은 우왕비왕설을 부정했다.
그는 이색의 벗이자 태종 이방원의 소시적 스승이었다.
시대가 불순한 것을 보고 원주 치악산에 은거했다.
조선 건국 후 이방원이 직접 찾아가기도 했지만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듣건대 이달 15일에 정창군이 즉위하고,
전왕(前王) 부자는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폐하여 서인을 만들었다 한다.”
안정복은 우왕비왕설이 이성계파에 의해 날조된 것으로 봤다.
“우왕과 창왕의 일은 당시 재상 이색, 초야의 원천석의 정론을 막기 어렵고,
본조의 상론(尙論)하는 선비인 유희춘·윤근수·신흠·
이덕형 같은 이도 모두 사필(史筆)을 거짓으로 여겼다.
더구나 성조(聖祖, 이성계)가 왕씨에게 선양을 받았으니,
우왕과 창왕이 왕씨니 신씨니 하는 분변은 애당초 논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정도전·조준·윤소종의 무리가 왕씨가 아니라는 설을 지어내어
구신(舊臣)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계책으로 삼는데,
온 나라가 부화하여 따르느냐 어기느냐를
충역의 구분으로 삼아 하나의 의리로 만들었다.
뒤에 역사를 만드는 이도 모두 마음으로는
그른 줄 알면서도 다시 상고하여 분별하지 않으니,
만일 임금이 판하(判下)하는 분부가 없으면 사사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조선의 관변 사가들도 우왕비왕설이 거짓인 줄 알았지만,
왕명 없이는 함부로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학자들은 [고려사]를 찬술한 정인지를 거짓되고 비루하게 여겼다.
성리학의 정치적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역성혁명 없이는 조선도 없지만, 조선을 만든 정치적 행위는 부정했다.
그러나 이성계를 부정할 순 없다.
이성계는 성스러운 조상(聖祖)으로 부르면서,
개국공신인 정도전·조준·윤소종은 모두 역사를 더럽힌 자로 비판한다.
성리학은 어떤 사상보다도 정치적 앙가주망(지식인이 정치 참여)에 적극적이다.
치인은 수기만큼 유학자의 삶에서 영원한 갈망이다.
다산도 자신의 삶에서 치인이 결여된 것을 슬퍼했다.
그래서 마음으로나마 치인을 대신하고자 [목민심서]를 쓴 것이다.
이인임·조민수·이색 탄핵의 정치적 함의
▎사진은 종로 경희궁에서 열린 과거제 재현 행사.
성리학은 어떤 사항보다 정치참여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정치와 성리학의 동거는 매우 위태로운 것이다.
그 긴장이 정몽주의 삶을 지배했고, 조광조를 순교자로 만들었다.
공자는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당당하게 행동하되
말은 공손해야 한다”(邦無道 危行言孫)고 말한 바 있다.
도연명처럼 은자가 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여말선초의 정치가와 학인들의 호 가운데 은(隱)자가 많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시대와의 불화를 피해 모두 숨고 싶었던 것이다.
야은(冶隱) 길재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은자의 상징이었다.
그는 조선인이 희구하는 삶의 양식을 창조했다.
그래서 정몽주와 함께 조선인의 칭송 대상이 된 것이다.
정비의 교서는 우왕의 정치를 비판했다.
“우는 이에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여 국인의 원망을 사고,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어지럽게 하여 천자에게 죄를 얻었다.”([고려사])
1388년 위화도회군을 정리한 정비의 교서에서는 우왕을 직접 비판하지 않고,
최영의 희생양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학정과 반(反)사대를 우왕의 죄로 명시했다.
조민수와 이인임의 죄도 비판됐다.
“왕씨의 제사를 회복할 때이거늘 대장 조민수가 이인임의 친척으로 상상(上相)이 되어
이인임의 간사한 꾀(邪謀)를 이어 우의 아들 창을 세우니
악으로써 악을 이은 것이나 권병을 잡고 있으므로 형세가 갑자기 제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조민수는 1388년 7월, 창녕에 유배됐다.
당시의 죄목은 불법적인 사전(私田) 겸병, 그리고 사전 개혁에 반대한 것이었다.
한 달 뒤인 8월, 그는 방면되어 고향 창녕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정비의 교서에 의해 그는 왕씨의 종사를 단절시키고자 한 반역자로 재규정됐다.
안정복은 성호 이익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민수와 변안렬을
간신전(奸臣傳)에 넣은 것은 공정한 필법이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윤근수 역시 “[고려사] 간신전에 실려 있는 조민수,
변안열의 경우에 그들의 행적에서 시종일관 간사한 실상을 볼 수가 없다”고 봤다.
([월정집] 별집 제4권, 漫錄) 이색은 조민수를 높이 평가했다.
1382년(우왕 8) 이색이 판삼사사에 임명될 때, 조민수도 함께 수시중에 올랐다.
그때의 시에서 이색은 “한 시대의 영웅이 시중에 임명되는 때
/ 미천한 이 몸 역시 판삼사를 맡게 됐네”라고 조민수를 일대의 영웅(一代英雄)으로 칭했다.([목은시고] 33권)
이인임에 대해서는 1388년 8월, 조준의 개혁상소에서 이미 신랄하게 비판됐다,
“이인임은 국가의 권력을 제 마음대로 한 지가 20년이 넘어
죄악이 가득 쌓였는데 다행히 하늘이 죽였으니,
원하건대 관작을 삭탈하고 시호를 내려 주지 말아
악한 짓을 하는 자를 징계하십시오.”([고려사절요])
이어 12월에는 우사의(右司議) 윤소종이
이인임의 일생에 걸친 죄를 조목조목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그 죄악을 논하면 개국한 이래로 이인임같이 심한 자가 없다”고 극언했다.
이인임이야말로 이성계파 최고의 공적(公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성계파의 정치노선이 이인임 노선을 부정한 위에 세워졌음을 뜻한다.
그랬지만 그때까지 이성계파의 정치노선은 기본적으로 반(反)부패·개혁노선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창왕의 폐위에 즈음한 정비의 교서는 이인임의 죄를 재규정했다.
근거는 조민수와 같이 우왕비왕설이었다.
즉 우왕비왕설은 조민수·이인임·이색을 한 번에 반역죄로 꾈 수 있는 핵심 명분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반(反)이성계파를 공격하는 이성계파의 기본 프레임이 됐다.
이성계, ‘연립정권’을 허물다
▎고려 말의 대학자 야은 길재의 초상화.
역성혁명에 협력하지 않았음에도 정몽주와 함께 조선의 칭송을 받았다.
정비의 교서는 우왕비왕설이 명 황제에 의해 지지된 것임을 밝혔다.
“홍무 22년 9월에 문하평리 윤승순 등이 경사(京師,
명나라 수도 남경)로부터 돌아와 성지(聖旨)를 흠봉하니
‘고려의 왕위는 왕씨(공민왕)가 시해되고 후사가 끊어진 뒤로부터
비록 왕씨를 가탁하여 이성(異姓)으로 왕을 삼았으나
삼한을 대대로 지키는(世守) 좋은 계책은 아니다.
참으로 현명하고 지혜로운 배신이 그 자리에 있어 군신의 분수를 정한다면
비록 수십세(世)를 조회하지 않아도 또한 무엇을 근심하랴’고 하였다.”
황제의 뜻에 대해 국론을 묻는 과정도 거쳤다.
그랬더니 “종친과 외척, 대소 신료가 모두 말하기를
‘종친 정창부원군 왕요는 곧 태조 정파인(正派人) 신왕의 7대손으로 족속이 가장 가까우니
마땅히 공민왕의 후사로 삼을 것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여론에 따라 “왕요에게 명하여 왕위에 나아가 종묘와 사직을 받들게 하고
우와 창은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정비의 교서는 공양왕의 즉위를 고려왕조의 중흥으로 자리매김했다.
“아아! 자홍(子弘)을 폐하고 대왕(代王)이 한나라의 제사를 회복하여 이로써
400년 태평의 업을 터 닦았으니 지금으로써 옛것을 비교하여 보면 그 이치는 한가지로다.
이에 너희들 무리는 여(余)의 지극한 뜻을 체득할지어다.”
자홍은 한고조 4대 황제 유홍이다.
한고조 유방이 죽은 뒤 황후 여태후는 섭정에 의해
전권을 장악하고 실질적으로 여 씨 왕조를 창업했다.
기원전 180년 여태후가 죽자 한고조의 손자 유장이
개국공신 주발, 진평과 함께 여씨 일족을 토멸하고,
한고조의 차남 유항(劉恒)을 옹립했다.
그가 한문제로서, 유씨의 한나라를 회복했다.
1389년 11월, 공양왕이 즉위했다.
창왕의 외척인 이림과 그 아들 이귀생도 유배됐다. 연립정권의 또 다른 축이 무너졌다.
그리하여 정몽주의 정치적 대안은 완전히 붕괴됐다.
공양왕의 즉위는 결국 권력을 분점하지 않겠다는 이성계파의 의지 표명이었다.
공양왕의 동생 왕우는 장단에 파견돼 군사를 거느리고 비상사태에 대비했다.
이곳은 이색이 머물고 있었다. 그것은 다음 권력투쟁의 향방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색과 그 추종자들에게는 수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비의 교서는 이성계파의 의견을 완전히 대변하고 있다.
우왕대의 정치노선을 총체적으로 비판하고,
그를 추종하거나 계승하려는 정치노선을 반역죄로 재규정했다.
고려의 왕위 결정권은 이제 왕실의 손을 떠났다. 또
한 왕위 승계이 추첨에 의존할 정도로 무가치한 것이 됐다.
역성혁명은 바로 목전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흥국사 회의에 참석하고 창왕의 폐위에 동의한 정몽주의 선택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가 역성혁명이 임박한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했다면 정치적으로 순진한 것이다.
정치는 힘의 필연적 결과이다.
힘의 분포와 양상이 하나의 현상으로 현시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는 대체로 명분에 의해 섬세하게 치장돼있다.
창왕의 폐위도 마찬가지다.
우왕비왕설은 왕씨 중흥을 위한 명분으로 치장돼 있다.
그러나 실제의 의미는 그 반대다.
이성계의 권력이 왕권을 압도하고, 원한다면 고려왕조를 찬탈할 수 있을 정도로 커진 것이다.
명분상의 충성은 실제로는 반역을 뜻했다.
反이성계파를 발탁한 공양왕
그런데 뜻밖에도 공양왕은 이색을 판문하부사에 임명했다.
김저가 연루자로 진술한 변안렬, 왕안덕도 각각 영삼사사, 판삼사사에 임명됐다.
여기에는 복선이 깔려 있었다. 정창군 왕요는 왕위를 원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왕위에 추대되자 그는 “나의 평생에 의식과 종들이 다 족하거늘,
이제 짐이 이와 같이 무거우니 할 바를 알지 못 하겠다”고 말하며 울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정치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며, 이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이성계파를 싫어했고 두려워했다.
즉위한 날 저녁, 왕의 사위 강회계의 아버지 강시(姜蓍)가 궁궐에서 공양왕을 알현했다.
그는 “여러 장상들이 전하를 왕으로 세운 것은 다만 자기의 화를 면하기 위한 것이지,
왕씨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삼가시고 믿지 마시어 스스로 보전할 것을 생각하소서”라고 충고했다.
([고려사절요] 공양왕 원년 갑신)
이 말은 불행히도 이성계의 귀에 들어갔다.
공양왕의 첫 인사는 하나의 결단이었다.
관망자의 입장을 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이 위험한 운명과 역할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색은 장단으로부터 개성에 돌아왔다. 그는 대궐에 나가 왕에게 하례했다.
이색이 예궐하자 공양왕은 서서 그를 기다렸으며 협조를 요청했다.
왕은 “나는 평생을 한가로이 놀고 있었는데 오늘날 이 자리를 얻을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왕이 즉위를 태묘에 고하고 환궁해서도 사양하면서 남면(南面)하지 않자,
이색은 “이미 즉위를 고하고 이제 또 남면하지 않는다면 신민의 바람에 답할 수 없다”고 권했다.
우왕·창왕의 폐위를 막지 못했지만 이색 역시 공양왕을 통해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고자 결심한 것이다.
이성계파가 우왕의 공식적 어머니 궁인 한씨의 신주를 철거할 것을 요청하자,
그는 “이 일은 그 종말을 보장할 수 없으니,
아직 천천히 하라”고 말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원년 11월 갑신)
우왕비왕설에 간접적으로 반대의 뜻을 표명한 것이다.
이색과 권근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던 길재는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어머니가 늙었다는 것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는 도중,
장단에 들러 이색을 찾아가 거취를 물었다.
그러자 이색은 “나는 대신이니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할 것이지만
그대 같은 사람은 마땅히 가야 한다”고 말했다.([동사강목] 제17하, 경오년 공양왕 2년)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다.
계속~~~
첫댓글 지금이나 그옛날이나 권력과 욕심이
세상을 피바다로 만듭니다
감사합니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