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세 외할머니의 임종 직전,
할머니는 물을 몹시 마시고 싶어 하셨지만 집안 어른들은 반대하셨습니다.
저는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몰래
물을 떠다 드렸죠.
할머니는 정말 목이 타셨는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외삼촌은 저를
호되게 꾸짖으셨죠.
그때 제 손에는 할머니가 평소 쓰시던 법랑 컵이 들려 있었습니다.
컵 테두리는 칠이 벗겨져 있었고, 옆면에 그려진 작은 국화 무늬는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닳아 있었죠.
물을 마신 할머니의 목에서 나던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조금 잦아들었습니다.
할머니는 천천히 눈을 떠 저를 바라보셨어요.
흐릿했던 할머니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 빛나는 것 같았고,
제 손을 잡으려는 듯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셨습니다.
저를 꾸짖는 외삼촌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멍멍할 정도였습니다. 겁이 난 제가 뒤로 움츠러드는
바람에 손에 든 컵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죠.
엄마가 얼른 다가와 저를 붙잡으며 외삼촌에게 눈치를 주셨습니다.
"얘도 할머니가 너무 목말라하시니까 안쓰러워서 그런 거지..."
외삼촌은 엄마 말은 듣는 척도 않고 저를 노려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안쓰러워도 함부로
먹이면 안 돼!
임종 전에 물을 마시면 편히 못 가신다는 옛 어른들 말씀 몰라? 할머니가 가시는 길이 평온하지 못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저는 대꾸도 못 하고 할머니만 바라보았습니다.
할머니는 다시 한번 낮게 신음하며 고개를 제 쪽으로 돌리셨습니다. 입술은 여전히 가뭄 든 논바닥처럼 갈라져 있었죠.
그날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커튼이 일렁였고,
방안은 외삼촌의 목소리와 할머니의 거친 숨소리 외에는 적막만이 감돌았습니다.
거실에 있던 친척들이 소란에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한 이모할머니가
"애가 몰라서 그런 건데 너무 화내지 마라"며 외삼촌을 말리셨고,
사촌 오빠도
"할머니 물 드시고 나니 좀 편안해 보이시긴 하네"라고
거들었습니다.
외삼촌은 아무 대답 없이 제 손에서 컵을 뺏어 탁자에 내려놓고는
저를 한 번 더 노려보고 방을 나갔습니다.
저는 할머니 침대 곁에 남아 쭈그리고 앉아 할머니의 손을 잡았습니다. 할머니의 손은 무척 차가웠고,
피부는 마른 나무껍질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었습니다.
문득 어릴 적 생각이 났습니다.
유난히 덥던 여름날,
할머니는 항상 이 법랑 컵에
설탕물을 타서 식힌 뒤 제게 건네주셨죠.
"천천히 마시렴, 사레들릴라."
그때 컵은 국화 무늬가 선명한 새것이었고,
저를 꽉 쥐어주시던 할머니의 손은
참 따뜻하고 힘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이제 할머니는 손을 들 힘조차 없어 제 온기에 기대고 계셨습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할머니가 정신이 드셨는지 눈을 반쯤 뜨고 탁자 쪽을 곁눈질하셨습니다. 할머니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 컵을 보고 계셨습니다.
슬쩍 문밖을 보니 외삼촌은 거실에서 손님들과 이야기 중이었고,
엄마는 옆에서 눈물을 닦고 계셨습니다.
제가 작은 목소리로
"할머니 아직 목마르신가 봐요"
라고 묻자,
엄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 쪽 시선을 가로막듯 문 앞을 지켜주셨습니다.
저는 얼른 컵을 집어 들고 따뜻한
물을 따라 제가 먼저 맛을
보았습니다.
뜨겁지 않은 걸 확인하고 할머니 입가에 가져다 드렸죠.
할머니는 천천히 입을 벌려 이번에는 아주 조금씩, 조심스레 물을 삼키셨습니다.
다 마신 뒤에는 가볍게 입술을 축이기도 하셨죠.
컵을 제자리에 놓으려는데 외삼촌이 들어오셨습니다.
제가 컵을 내려놓는 걸 보셨지만
아무 말 없이 할머니 곁으로 다가오셨습니다.
할머니는 그때 제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셨어요.
마치 외삼촌에게
"애 탓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외삼촌은 할머니의 이마를 짚어보고 이불을 여며주셨습니다.
아까 일은 더 언급하지 않고 다시 밖으로 나가셨죠.
그날 밤 저는 잠들지 못하고 할머니 곁을 지켰습니다.
할머니는 가끔 깨어날 때마다 저를 쳐다보셨고 손을 까딱이셨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목마르시다는 걸 알았고,
그때마다 엄마에게 물어 조금씩
물을 드렸습니다.
새벽녘이 되자 할머니의 호흡은 이전보다 훨씬 고르고 평온해졌습니다.
눈을 감으신 모습이 아주 편안해 보였죠.
새벽 3시쯤,
갑자기 할머니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급히 엄마를 불렀고,
엄마는 할머니의 숨결과 맥을 확인하더니 이내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할머니 가셨다..."
할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입술은 여전히 조금 말라 있었지만 낮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고, 얼굴에서도 고통스러운 기색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외삼촌이 들어와 한참을 서 계시더니,
탁자 위의 법랑 컵을 집어 먼지를
닦아 제게 건네주셨습니다.
"이 컵, 네가 가져라. 할머니가 10년 넘게 쓰시던 거잖니."
나중에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엄마가 그러시더군요.
사실 엄마도 진작 물을 드리고 싶었지만,
외삼촌이 워낙 완강하게 규칙을 따져서 엄두를 못 냈다고요.
제가 몰래 물을 드려서 다행이라고, 아니었으면 할머니가 가시는 길에 얼마나 목이 타셨겠냐며 저를 다독여주셨습니다.
저는 그 법랑 컵을 가슴에 품고 물을 마시던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비록 외삼촌에게 꾸중은 들었지만,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할머니가 가시는 길,
목마르지 않게 해드렸으니까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펌글)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