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외 2편)
신 진
걷지 못하고 나앉아 있는 슬픔을 지날 때에는 걷는 슬픔이여 너도 잠시 멈추었다 가라 너도 슬픔이고 못 걷는 슬픔이었지 않느냐?
못 걷는 슬픔에게 예를 갖춘다 해서 금세 일어나 걷기야 하겠냐마는 지나가던 슬픔이 걸음 멈추고 다독이는 동안 그도 매무새 추스를 수 있을 것이니
이이나 저이나 슬픔은 슬픔끼리 영판 닮지 않았더냐 같은 체온 같은 맥박 한통속 사연
언제 비 오지 않는 날 있더냐 아침결에 한 식구 서로 얼굴 살핀 후에 제가끔 길을 나서듯 걷는 슬픔이여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에는 잠시 등짝 다독이며 얼굴 살피다 가라
비 맞지 않는 자 어디 있더냐 슬픔이 슬픔을 잊지 않고 우산그늘 나눌 때 못 걷는 슬픔도 멈춤 그 다음 동작을 기억하려니
집게의 집
지상에서 가장 집을 사랑하는 갑각(甲殼)의 생물 이름도 집게, 그에겐 항상 집이 있다 동시에 언제나 없다 집을 사랑하므로 집을 소유하지 않는다 들면 나의 집 나면 남의 집 있을 때 내 사랑 없을 때도 내 사랑이다 오늘도 집을 떠나는 일상 내일의 치수를 미리 재지 못하듯 내일 들 집을 미리 정하지 않는다 바위구렁에 들면 물너울 받아가며 월파(月波)에 몸을 씻고 펄 속에 들면 드나드는 갯물에 한때의 속셈 정(淨)히 헹구는 천지가 나의 집 우리의 집 도시도 한촌(寒村)도 강남3구도 지하 셋방도 없다 들거든 내 집 나거든 남의 집 있는 날이 없는 날이요 없는 날이 있는 날이다 택배 며칠 있으면 생신이지요? 꽃다발 하나 보낼게요, 택배로 끼마다 준비하기 힘드실 테니 아침은 배달로 때우세요 채식도 육식도 환자식도 가능해요 관리실 가서 배달 앱 깔아 달라 하세요 영양제 좀 보낼까요? 칼슘이랑 비타민 디, 아니면 양파 즙 같은 거 음식으로 챙기기 어려울 테니 대체 식품으로 대신하시라고요 그래, 그래 고맙다 걱정 말아라 해 먹다 사 먹다 시켜 먹다 하께 아이 전화 받고 나서 눈 붙이는 사이 택배가 왔다 나다, 밥 잘 묵고 지내나? 아아들은 어짜고? 얌전하게 웃으시지만 삼사 년 장자도 못 알아보다 가신 어머니― 아이고 엄마, 먼 길 어째 왔소? 강을 어째 헤엄쳤소? 사자(使者) 등에 업혀 왔소? 몰라, 드론 택배로 왔다 실려 온다고 강도 사자도 볼 새 없었다 —시집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2024.10 --------------------------- 신진(辛進) / 1950년 부산 출생. 1974년 이원섭, 김남조 시인에 의해 《시문학》 추천 받고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목적 있는 풍경』 『장난감 마을의 연가』 『멀리뛰기』 『강』 『녹색엽서』 『귀가』 『미련』 『석기시대』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시선집 『풍경에서 순간으로』 『사랑시선』 등. 현재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