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는 반대로,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낸, 종이 신(神)이나, 나무나 금속이나 흙으로 만든 우상에게 음식물과 돈을 공양한다 해도, 거의 소용없는 짓일 뿐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도, 신체(神體)의 작은 세포이며, 대 신전(神殿)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신전(大神殿)인 지구 위에서, 신의 몸속에 포함되어 있는 인간이, 왜 조그마한 ‘대신전’이나 ‘대불전’을 만들어, 신을 제사지내는 것일까.
정재(淨財)라고 일컫는 부정(不淨)한 돈으로서, 그런 것을 세운들, 신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
진짜 신불이라면, “마음이 병든 자에게도, 몸이 불편한 자에게도, 가난에 시달리는 자에게도, 모든 불쌍한 자들을 위해서 보시하라, 그들을 불행으로부터 구하라, 그래서 신의 자식으로서의 자각에 눈뜨게 하라,“ 라고 할 것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이와같이, 신의 마음에 대해서, 보은의 행위를 실천해 나간다면, 반드시 유토피아가 건설되어 갈 것이다. 신은, 인간의 생활의 지혜가 만들어 낸 돈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돈이 필요한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양도, 신에 대한 보은 감사(報恩感謝)의 증표로서, 그것을 올리는 사람의 마음이라면, 그 뜻이 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벌을 받는다든가, 자기 허영으로서 하는 공양이라면, 그것은 벌써, 마음을 잃은 짓임을 명심해야 한다. 광신, 맹신자의 공양으로, 호화로운 옷을 입고, 금은보석으로 몸을 치장하고 있는 교조나 지도자가 있다. 이들은 족함을 잊고 몸을 지옥에 떨어뜨려 간, 잘못된 자들이다. 받아먹는 무리도, 공양을 바치는 맹신자쪽도, 모두 마음을 상실한 가엾고, 어리석은 인간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축제에서, 부정을 씻는 요금이라든가, 부정을 씻은 감사라든가, 공물같은 것을 한다고 해서 정말로 정화된 것은 아니다. 만약 씻어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기회를 인연으로 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바로잡고, 평온한 생활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의 정화는, 타력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올바른 마음과 행위의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태양은, 1초당 석탄 200만 톤을 연소시킨 만큼의, 열에너지와 빛에너지를 지구에 공급해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신의 자비, 사랑의 마음의 구현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이 태양에게, 광열비를 지불하고 있는가. 신은, 광열대금 따위는 받지 않으며, 부정을 씻어주는 대가 따위는 절대 받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을 갖고 제물을 바치고 있다. 이와 같은 마음을 상실한 행위는, 오히려 마음에 구름을 만들어 내고 마는 것이다. 깨끗함을, 마음에서 우러난 것으로서, 받은 경우는, 감사의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설령 깨끗함을 받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과 행위가 올바른 것이 아니었다면, 또다시 괴로움을 만들어 내고 마는 것이다.
보시란, 감사의 마음을 행위로서 나타낸 것이다, 결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보시 중에는, 노동의 보시, 작물의 보시, 금전적인 보시 등이 있는데, 그것은 남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체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올바른, 세상사의 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신의 이름을 빌어, 보시를 강요한다면 이미 그 인간의 욕망은, 마왕, 아수라, 동물령, 지옥령의 작업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정화에 의해 나타나는 빙의령에 대해서도, 집안에 제단이나 불단을 차리고 신불을 모시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위이다. 그들은 지옥계에 떨어져 있는 자들인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지옥임을 깨닫지 못하고,) 이 지상계에 집착을 가지고 있으니까, 위험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이 왜 지옥계에 떨어졌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해서, 광명의 천상계로 보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불단이나 묘 따위에, 집착을 가지게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을 받들어 모시게 되면, 가정에 부조화한 현상이 일어나, 도리어 불행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마음과 행위를 바르게 하고, 정법을 들려 주어서, 빙의령을 납득시키는 길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스스로의 마음과 행위가 부조화한 채로, 정화의 흉내를 내어서는 안 된다.
‘건드리지 않는 신(神)애 동티나지 않는다.’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 라는 속담 그대로이다.
선생이 학생한테서 공부를 배우는 꼴이 되어서야 어찌 선생노릇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잘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맹신자가 되거나, 광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생에 의문이 있거든, 그것을 규명하는 것. 의문을 가진 채로 맹신하는 것은, 올바른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거짓의 신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의문을 풀어주지 못하는 지도자는, 마음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위선자의 낙인이 찍혀야 할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실은 꽤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주; 모든 종교의 시작은. 어느 누가 보아도, 올바른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모두의 공감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가르침은 천상에서의 천사의 생활방법이며,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또한 자기가 했던 생활이므로, 자기도 모르게 수긍하게 되니까요. 그렇게 가르치다가, 틀린 것 하나를 (의도적인 내용을) 부지불식간에, 넣어버립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의문이 생기는 것이지요. 하지만 의문이 생겨, 질문을 하면, 앞에서의 올바른 것들을 예로 들어서, 강제로, 우격다짐으로 믿도록 하고 말지요.
“나 이외의 신을 섬기지 말라.”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다, 나의 생존을 위해) 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여기 신의 몸인 지구상에서, 신의 몸의 일부분으로 포함되어 있는, 이 육신으로서,..... 인연있는 이여. 같이 생각해봅시다.)
3. 시아귀(施餓鬼)에 대하여
(시아귀; 아귀도에 빠지거나, 연고자가 없는 사자(死者)를 위한 공양) “저는 매년 시아귀(施餓鬼)를 행하고 있습니다만 과연 효과가 있는 것입니까. 승려로서 대대로 이어받아 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형식적인 행사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 점,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질문과 같이 현대의 승려도, 시아귀(施餓鬼)는 습관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시아귀는, 원래는 몸이 나빠서 일하지 못하거나, 생활능력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보시 봉사를 하여, 그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자비와 사랑의 행위였었다. 요컨대 살아 있는 자에 대한 봉사였던 것이다.
그것이 어느 새에, 죽어서 방황하는 무연불(無緣佛)에 대한 공양으로 변하고 말았다.
P147 |
첫댓글 생활속불교에서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나무관세음보살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