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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현장에 가면, 긴장감이 생긴다. 혹 집중력이 흐려져 무언가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거나 듣지 못할까봐서이다. 사람의 말도, 사건도 순간인지라 놓치고 나면 다시 잡을 방법이 없다. 긴장의 이유는 이런 현장의 찰나성뿐 만은 아니다. 코끼리 발톱을 만지고선 “이게 바로 코끼리다”라고 전달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기자도 사람이어서, 게다가 한눈에 직감적으로 본질을 파악하는 대기자가 되기에는 가야할 길이 구만리인지라, 시간과 집중력을 쏟아 부어도 놓치는 것들이 있다. 그뿐일까. 현장에서 발걸음을 돌리며 스스로에게 묻는 “충분한가?”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는 적도 종종 있다. 부끄럽지만, 그렇다. 하지만 기자라는 직업이 장막을 걷어내 가려졌던 곳을 보이게 하는, 들릴 듯 말 듯한 미세한 목소리를 세상에 들리게 하는 증폭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만은 명심하고 있다. 자신의 의도를 완벽하게 내려놓은 객관은 불가능할지라도, 최대한 다양한 소리를 담아 진실에 가까운 균형 잡힌 구성을 해야 한다는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원칙을 꽤나 소중히 가슴에 품고 있다. 지난 주말, 희망버스가 울산으로 향했다. 많은 시민이 280일 넘게 송전탑 위에서 농성중인 최병승 · 천의봉, 두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하루 속히 땅으로 내려오기를 바라며 버스에 올랐다. 이들이 현대차 공장 안으로 진입을 시도하자, 안전모와 방패로 중무장한 현대차 직원과 용역은 소화기를 뿌려대며 막았고, 희망버스 참가단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21일 저녁 공중파 3사 뉴스와 22일자 주요 일간지는 약속이나 한 듯 ‘폭력버스 시위꾼에 습격당한 울산 현대차’, ‘탈선하는 희망버스’, ‘폭력으로 얼룩진 희망버스’ 등의 제목으로 이 소식을 전했고, 뉴스와 기사 속에서 소박한 바람으로 희망버스를 탔던 이들은 폭력 시위꾼, 밤새 술판을 벌이고 쓰레기도 치우지 않는 저질시민이 됐다. 울산 현대차 희망버스 기획단은 24일 기자회견을 열고 “현대차가 주는 자료를 그대로 받아써 사실을 왜곡한 언론 보도로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심각하게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언론중재위원회에 언론중재를 신청했다. 지난 21일 현대자동차 측은 각 언론사에 ‘폭력으로 얼룩진 희망버스’라는 참고자료를 배포했다. 물론 언론의 이런 편협한 보도방식은 그다지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다. 2011년 여름에도 부산 영도의 희망버스에 관한 보도는 ‘충돌’, ‘갈등’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았다. 3차 희망버스가 있었던 2011년 7월 30일 공중파 방송 3사가 희망버스를 다룬 뉴스의 제목만 봐도 KBS 뉴스9은 ‘3차 희망버스 집회 강행…긴장 고조’, MBC 뉴스데스크는 ‘3차 희망버스 행사‥부산 긴장감 고조’, SBS 8뉴스는 ‘3차 희망버스 부산에 집결…대규모 충돌 우려’ 등으로 약속이나 한 듯 똑같다. 그러니까 그들은 원래 그렇다. 그런데 ‘원래 그렇다’는 말은 얼마만큼의 인정, 혹은 포기를 동반한다. 아무런 기대가 없으니 개선할 것도 없다. 그러니 ‘원래 그렇다’는 위험하다. 그들을 향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1988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였던 부시는 민주당 후보 마이클 듀카키스가 매사추세츠 주지사 시절 실시한 주말 휴가제 때문에 살인 혐의로 복역 중이던 흑인 윌리 호튼이 백인 커플을 납치해 성폭행한 사건을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실제로 듀카키스가 주지사로 있었던 기간 동안 매사추세츠의 강력범죄는 13% 이상 감소했고, 마약범 체포는 5배 이상 증가했지만, 사람들은 오로지 윌리 호튼만 기억했다. 공포심은 늘 최고의 힘을 발휘했다. 게다가 수감자의 주말 휴가 제도를 처음 시행한 것은 당시 현직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즉, 공화당의 정책이었던 것이다. 듀카키스 측은 이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고 선거에 패배했다. 후에 펜실베이니아대 정치커뮤니케이션학 캐슬린 제이미슨 교수는 민주당이 1988년 선거에서 패배한 이유 중 하나로 “조지 부시 측의 언론 플레이가 인종차별적이고, 사실과 전혀 다르므로 유권자들이 ‘당연히’ 진실을 알 것이라 생각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은 점”이라고 지적했다. 진실은 언제나 당연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자세히, 오래 보아야 진짜 모습에 닿을 수 있듯이, 세상의 진실에 닿기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노력이 없다면, 언론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언론들의 ‘폭력 시위’ 보도 속에 ‘사내 하청 직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대법원 확정판결을 현대차가 3년째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진실은 묻혔다. “손가락이 아니라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아야 한다”는 진리를 이제 언론에 적용해야 할 때인가 보다. 시민들은 이제 신문기사와 방송 뉴스를 접할 때조차 저들이 ‘왜’ 저렇게 보도하는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들이 가리키는 달이 무엇인지를 보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 같다. 권력은 빛나는 곳에,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있다. 약하고 가난한 존재들은 잘 보이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는 세상에 잘 들리지 않는다. 기자가 숨겨진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세상에 보이게 하는 직업이라면, 어쩔 수 없이 본질적으로 힘없는 이를 향할 수밖에 없다. 이번 주말에도 곳곳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든다. 언론의 철저한 외면에도 지난 주말, 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국정원의 선거 개입을 규탄하며 서울광장을 메웠다. 울산에서 소화기 분말과 물대포를 맞고 술 취한 잡배가 되어버린 희망버스 참가자들에게 빚진 마음으로, 이번 주에는 카메라를 들고 시청 앞 광장에 나가야겠다. 그곳에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향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다시 묻고 싶다. 문양효숙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