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얀 키에르케고어는 1813.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부친57세 모친45세의 7남매
(남4 여3)의 늦둥이 막내로 출생했다.본처 죽자 가정부가 모가 되어 7남매를 낳았다.
모친은 쾌활한 성격이나 부친은 음울하고 근엄하며 타인과 조화롭지 못하고 복종이
최고의 덕으로 삼는 엄격한 가정교육과 가부장적 가장이였다.부친의 성격을 그대로
물러 받았다.후에 "광기에 가까운 교육"을 받았다 회상하며 "나는 어린 시절이 없었다"
한탄하곤 했다.다른 애들과 어울리지 못한 나약한 쇠얀에게 엄격한 그리스도교적
교육이 행해졌다.맏형은 목사로 둘째 형은 상인이되어 미국에서 객사하고 다른 형은
어릴 때 머리를 다쳐 죽고 누나 둘 결혼했지만 하나는 어려서 죽었다.부친이 여든 둘
사망시는 맏형 페터와 쇠얀 뿐이였다.
18살때 코펜하겐대학 신학과에 아버지의 희망과 맏형의 바램으로 입학했으나 신학보다
철학과 미학에 흥미를 가졌다.헤겔의 철학에 몰두했고 영향을 끼친 사람은 시인이며
철학자인 파월 묄러였다.심미주의자와 사귀면서 어린시절 골수에 사무친 "죄와 참회"의
종교에 대한 혐오감으로 그시절 일기장에 "그리스도교는 광기의 종교다" 적었고 따라서
부친과의 관계도 어색하여 가출하고 하숙생활과 카페나 요정도 출입하고 약간의 빚도지고
타락의 길로갔다.자살 미수사건후 심적으로 회복하여 부친과 화해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기에 "커다란 지진"이라 표현한 부친의 비밀을 알게된 사건으로 방탕생활후 짧은 기간내
어머니와 형제들이 차례로 죽고 늙은 부친과 맏형과 솨얀 셋만 남았다.부친의 비밀이란
정확히 모르나 종교적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쇠얀에게는 충격적인 부친이 하나님을 저주한
사실이 아닐까 추측한다.
1855년 부친 사망후 처녀작으로 "아직 생존하고 있는 사람의 초고에서,그의 의지에 반하여
출판되다"란 제목으로 한스 안델센에 대한 비판 내용이다. 1841년 "아이러니(反轉)의 개념에
대하여--소크라데스를 염두에 두고"란 학사 논문 을 심사받음.키에르케고어는 25세때 레기나란
16살 처녀를 사랑하여 약혼 했으나 곧장 파혼하게 되었다.파혼의 검은 그림자는 타고난 암울한
성격과 밑 바닥에 그의 "종교성"이라 할수 있다. 그의 일기장에 "나는 종교적인 가지고 있으면
레기네가 없어도 살수 있었고 또 지금도 살 자신이 있다"라 적혀있다.연애에는 신이 필요치 않다.
오직 타오르는 애정의 불길만 필요한데 --- 약혼 파기후 심신회복과 도피하듯 베르린대학에
유학을 갔다.헤겔 사망후 셰링이 강의하는 것을 열심히 청강했다.그러나 허전하고 부족함을 느꼈다.
그때 나이 삼십에 "이것이냐/저것이냐" 집필을 착수후 1년 이내 2부를 완성하고 "두개의 강화"
"공포의 전율""반복" "세 개의 강화" "철학적 단편""불안의 개념" "네 개의 강화" "인생길의 여러
단계" "어떤 기회에 즈음하여 쓴 세 개의 강화" "철학적 단편 결론으로서의 비과학적 후서"등을
발표했다.1843.2 부터 1846.3 에 이 모든 것을 출판한 놀랄만한 창작들이었다.강화집 외에는 모두
익명으로 저술하고 자신의 이름을 발행자로 기입했다.그이유는 (간접적)전달 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는 은퇴하여 시골에서 목사로 목회와 "외톨이"로세월을 보내고 싶어했다.그러나 그의 작품에 대한
경박한 비평으로 코펜하겐에서 유명한 "콜사르"악덕 신문사와 논쟁을 벌렸다.신문 사설에 풍자
만화가 실리고 졸지에 유명한 인물이 되어 버렸다.이 사건으로 "현대의 비판" "철학적 단편의
결론으로서의 비과학적 후서"란 책을 저술하고 이때부터 "순교"라는 관념을 중시하게 되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길을 걷자면 필연적 "세상과 충돌" 조소를 받아야 하나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이것이 하나님 명이고 고난 속의 참 신앙이다.키에르케고어는 건덕적인 강화는 점점
그리스도교적 강화로 고난의 설교로 변하였다.당시 덴마크 교회 수장인 뮨스터 감독의 생활이 과연
고난의 생활인 순교자라 불릴수 있을까?지금의 교회는 --- "그리스도교의 훈련"이란 저서를 통해
뮨스터에 접근했으나 오로지 침묵하고 의견을 듣고 싶어나 핑계를 대며 대면을 회피하였다.
뮨스터가 죽은후 신학교수 마르텐센이 히브리13장 주제로 추도 설교를 했는데 뮨스터 감독은
참된 진리의 증인이고 사도시대 부터 이시대에 까지 변함없는 거룩한 사도였다는 내용이다.
이일 9개월후 마르텐센이 후임 감독으로 취임이 결정되자 1854년 신문 (조국)에 "감독 뮨스터는
진리의 증인--진정한 진리의 한 사람 --이였던가?" 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논쟁은 반년 이상
격렬히 전개되고 덴마크에 뛰어난 설교자며 대중의 존경을 받는 돌아가신 감독을 비방한다는
호된 공격을 받았다. 키에르케고어는 더욱 흥분하였고 신문의 논설과 소책자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 소책자 모음이 "순간"이란 저서로 자신의 가슴속에 쌓여있는 사상의 짐을
토할 기회를 주시고 싸울 용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모든 힘을 소모한 1885.10.2(43살)
그는 거리에서 졸도하여 한달후 마음의 평화를 간직한 채 숨을 거두었는데 사인은 어릴 때
나무에서 떨어져 발생한 척수병이였다. "폭탄은 터져서 주위에 불을 지른다"고 죽음의 침상에서
말했다. -----끝 -----
"죽음에 이르는 병"(키에르케고어 저) 중 "키에르케고어의 생애에 대한 짧은 이야기"(임춘갑 저)
2023. 1. 5 金 鍾 漢 작성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