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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 22,1-19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
4 사흘째 되는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자, 멀리 있는 그곳을 볼 수 있었다.
5 아브라함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어라.
나와 이 아이는 저리로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겠다.”
6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함께 걸어갔다.
7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하고 부르자, 그가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자,
8 아브라함이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하고 대답하였다.
둘은 계속 함께 걸어갔다.
9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11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14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
15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16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9 아브라함은 하인들에게 돌아왔다.
그들은 함께 브에르 세바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브에르 세바에서 살았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9,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3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는 몸이 마비가 된 지라 제 발로 걸어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질병의 치유에 앞서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이는 당시에 질병은 죄의 결과로 여겨졌고, 이 병자 역시 자신의 죄채감에 빠져있음을 알아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태 9,2)
이 놀라운 사실, 이 엄청난 사실 앞에, 감히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죄의 용서’를 선포하신 이 사실 앞에, 아니 이 무뢰하고 불경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죄를 용서받았다.”고 누가 선언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용서받았음을 누가 알 수 있을까요?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히에리무스는 말합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중풍병자가 용서받았는지는 용서하실 수 있는 오직 한 분만이 확실히 아십니다.”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생각을 아시고 전지하신 하느님의 특성을 드러내시며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마태 9,6)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당신이 용서권자요, 하느님이심을 직접 드러내시며, 당신의 권한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의 치유를 보여주십니다.
곧 영적 표징의 증거를 위한 육체적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마태 9,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가 평상을 가지고 가게 함으로써 육신이 병과 고통에서 벗어났음을 똑똑히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중풍병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믿는 이들이 아담의 죄로 떨어져 나온 낙원으로 가는 길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힐라리우스)
이렇게 하느님이신 당신께서 영혼과 육신 모두의 창조주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영혼과 육신의 마비 모두를 고쳐주십니다.
그리하여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마태 9,8)
한편 오늘 복음은 ‘용서’가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셨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하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마태 9,6)
주님!
평상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평상을 들고 가게 하소서.
평상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과 맞짱을>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아브라함이 복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오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 안에 복을 내리시는 하느님의 원칙,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원칙이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 순종할 때 하느님께서는 복을 내려주시고,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이란 모든 복의 원천이 하느님께 있다고 믿는 사람이고, 그래서 행복을 원한다면 하느님께 복 주십사고 청해야 합니다.
내 행복은 내가 농사짓는다고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있고 그래서 순종해야 한다는 마음도 있지만, 그 순종이 오늘 아브라함에게 요구되는 그 정도의 순종이라면 나는 과연 아브라함처럼 순종할지 저의 믿음에 대해 생각게 됩니다.
이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복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해도 자식이 나의 복이고 행복인데 그 봉헌을 요구하는 하느님이라면 말입니다.
이런 하느님이라면 저는 믿지도 순종하지도 않을 것이고, 오히려 분노할 것이고, 그래서 불순종할 것입니다.
나의 행복인 자식을 내놔야 복을 주신다니!
이 말은 내가 움켜쥐고 있는 나의 행복을 내놔야 하느님의 행복이 주어지는 거라는 말이 아닙니까?
나의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행복이라!
내가 쥐고 있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행복이라!
아! 너무 어렵습니다.
아니, 어려운 것을 넘어 분노가 치밉니다.
그래서 이런 행복을 구차하게 구걸하느니 차라리 행복을 걷어차고 내 행복의 길을 가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깔 있는 불순종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과 이런 맞짱도 뜰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맞짱을 뜨고 깨끗하게 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맞짱을 떠보지도 않고 승복도 제대로 하지 않을 바엔 맞짱을 뜨는 것이 낫습니다.
아브라함도 바로 믿고 순종한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모리야 땅까지 가는 데 왜 사흘이나 걸렸겠습니까?
이 사흘이란 시간 동안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치열하게 싸웠을 겁니다.
야곱이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치열하게 맞짱을 뜨고, '나의 행복보다 당신의 행복이 더 낫습니다.' 라고 승복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이 아니라 승복입니다.
아브라함은 승복의 순종을 하는 데 사흘 걸렸습니다.
여기서 다시 저를 생각합니다.
완전히 승복하고 순종하는 데 나는 몇 년이 걸릴까?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근원을 치료하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외적인 병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시는 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 근원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육의 치유를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외적인 질병의 치유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인을 다스리는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는 표징일 따름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달을 가리킬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달’인 것처럼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나를 구원하실 예수님이지 병의 치유가 아닙니다.
물론 간혹 병의 치유를 통해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 매달리는 것보다 언제든지 그러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환자 자신이 갖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의 믿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이웃을 살리고자 하는 사랑의 행위는 소중합니다.
사실 중풍 병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무지와 껍데기 믿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시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게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 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편이 되어주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마음의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다지고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에게 잘해주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뽑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우둔한 믿음 탓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눈뜨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책’을 생각합니다.
‘주책’ 아시죠?
'주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믿음으로 산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내가 들고 가야 할 평상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스스로 걷지조차 못하는 중증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중병 병자에게 평상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요즘으로 치면 휠체어나 이동식 침대일 것입니다.
그나마 환자가 드러누워 있을 수 있고, 이동 시에는 반드시 필요한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라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대상, 빨리 떨쳐버리고 싶은 증오와 원망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필요하기도 했지만,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그런 대상!
그러나 언제나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대상!
그런 중풍병자를 가엾이 보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외치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마태 9,6)
오늘 내 평상이란 무엇인가 묵상해봅니다.
하루라도 빨리 떨쳐버리고 싶은 내 열악한 환경,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 혹독한 매일의 현실이 내 평상입니다.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이 오랜 악습과 반복되는 죄가 내 평상입니다.
내가 매일 마주해야 하는 못마땅한 주변 동료 인간들이 내 평상입니다.
그 평상들은 나를 수시로 힘들게 하고, 좌절케 하며, 무너지게 만들지만,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나와 단절시키고, 멀리 던져버리고, 활활 불살라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집에 안착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간직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구원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기쁜 얼굴로 하느님 아버지 품에 안기고 싶다면, 그게 과연 무엇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일상적인 고통과 십자가, 이 비참하고 혹독한 현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평상을 아버지 집에 도착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는 그것으로 가능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은 하느님>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좀 더 단순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증언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입니다.
또는 “나는 너를 구원한다.”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그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또는 그 병자를 구원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은 ‘병의 치유’만 원했겠지만, 병자 자신은 ‘병의 치유’도 포함해서, ‘죄의 용서’와 ‘영적 구원’을 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병자의 병이 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 텐데,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용서’가 더 급한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용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선포’ 라고 설명하는 이가 있는데,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선포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선포’ 라는 해석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또 고해사제의 사죄경도 ‘선포’가 아닙니다.
‘전달’입니다.
율법학자들이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이라고 생각한 것은 하느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또는 사람을 구원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교 기준으로는 그들의 생각은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는 그리스도교 기준으로는 ‘틀린 생각’이고, 또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악한 생각’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말씀은 ‘중풍의 치유’와 ‘죄의 용서’가 모두 어렵다는 뜻으로, 즉 둘 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그 병자를 고쳐 주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는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느님의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내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믿어라.”입니다.
표현만 보면, 율법학자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증명해 보이려고 병자를 고쳐 주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이 이야기에서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을 더 잘 부각시키기 위해서 설정한 배경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시자 군중이 두려워하면서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바로 그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에게’ 라는 말은 군중이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했음을 나타내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는
도달하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모든 교리는 바로 이 믿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똑같은 성경을 사용하고 있고, 하느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안 믿는 종파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 바람과 호수를 꾸짖어 고요하게 만드셨을 때(마태 8,26), 제자들은 놀라면서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라고 물었습니다(마태 8,27).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같습니다.
“이분은 어떤 분이신가?”
“하느님과 같은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분이시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 4,12)
이 고백은 토마스 사도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이라는 신앙고백을 풀이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 하느님이시고 주님이십니다.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하느님에게서 받아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우리에게 주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요한 14,14).”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의 여정 - “믿음이 답이다!”>
얼마동안 휴양기간을 얻어 농사하며 충전중인 사제가 잠시 수도원에 면담 고백성사차 들려 대화를 나눴습니다.
“밭농사는 잡초와의 전쟁입니다.
풀 뽑다가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삶도 전쟁입니다.
영적전쟁입니다.
믿음의 전쟁이요, 우리는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입니다.
교황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Weeds never die!(잡초는 결코 죽지 않는다!)
잡초는 약치지 않아도 거름주지 않아도 잘도 자랍니다.
좋은 밭도 놔두면 순식간에 잡초밭이 되어 버리듯 마음밭도 그러합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끊임없는 수행생활의 충실입니다.
잡초가 상징하는바, 죄, 악, 병, 전쟁 등 온갖 부정적인 것들입니다.
이들은 인류 역사와 끝까지 함께 할 것입니다.
결국 답은 믿음뿐입니다.
하루하루 하느님의 자녀답게 믿음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아 있음이 은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어 보속으로 참 많이 써드리는 말씀처방전을 주었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임마누엘 사제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6-18)
하두 많이 써드려서 성서가 빛이 바랬고 닳아 떨어져 나갔습니다.
말씀처방전에는 “웃어요!”스탬프도 힘껏 찍어 드렸습니다.
어제 저녁식사시 온종일 병원진료차 다녀온 수도형제를 위로하며 나눈 대화입니다.
“젊어서는 공부와 싸우고 중년에는 일과 싸우고 노년에는 병마와의 싸움입니다.
그러니 삶은 전쟁이네요.
걱정, 근심, 두려움, 불안, 병고 등 빼버리면 진짜 건강하게 젊음을, 행복을 살 수 있는 것은 잠시뿐인 것 같습니다.”
사실 미사대장을 보면 온통 세상의 축소판같습니다.
생미사, 연미사 정말 사연이 많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시편 말씀도 생각납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립니다.”
(시편 90,10)
오늘 말씀 주제도 믿음입니다.
복음은 중풍병자를 낫게 하시는 주님의 치유이적입니다.
치유은총에 전제되는 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을 때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이들의 방향은, 선택은 정확했습니다.
우리가 병고를 안고 찾아가야 할 분은 오직 하나 우리 삶의 중심인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눈에 이들 동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바로 진심으로 뉘우치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주님께서 즐겨 자주 쓰시는 표현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33)
개인의 믿음은 약해도 공동체의 믿음은 강합니다.
교회공동체 믿음의 밭에 깊이 뿌리내려야 할 개인 믿음의 뿌리입니다.
영성체 모시기전 사제가 바치는 기도문도 생각납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의 마음 속 악한 생각을 꾸짖으시고 재차 중풍병자의 온전한 치유를 선언하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에 이은 육신의 치유이니 전인적 치유입니다.
모든 병의 뿌리에는 죄가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병이 많다는 것은 죄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통 병자요 죄인들입니다.
병자를 치유하고 죄인을 용서하러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조화와 균형을 깨는 죄요, 주님은 죄의 용서를 통하여 영육의 조화와 균형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죄의 용서와 더불어 저절로 치유가 뒤따릅니다.
죄의 용서와 치유에 앞서 중풍병자 동료들의 믿음이 주효했음을 봅니다.
이 일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이런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니 하느님 찬양과 더불어 선사되는 믿음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의 훈련입니다.
평상시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 공동전례보다 더 좋은 믿음의 훈련도 없습니다.
믿음의 훈련으로 믿음을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끊임없는 믿음의 훈련으로 믿음의 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창세기의 장면은 읽을 때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감돕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시험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믿음의 어둔 밤 같습니다.
믿음의 유혹이 아니라 믿음의 시험입니다.
악마가 유혹하지 하느님은 시험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묵묵히 시종여일하게, 믿음의 시험을 순종으로 통과합니다.
부를 때 마다 응답합니다.
하느님도 아브라함을 신뢰했지만 초조했던 듯 싶습니다.
“아브라함아!”
“예, 여기 있습니다.”
이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입니다.
다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죽이려 하자 재차 다급히 개입하신 주님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예 여기 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은 믿음의 시험에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십니다.
믿음의 여정, 믿음의 시험, 믿음의 축복입니다.
하루하루 죽을 때까지 계속될 믿음이 여정에 믿음의 시험들입니다.
날짜는 알 수 없지만 마지막 믿음의 시험은 죽음일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이 심기일전하여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로 믿음의 훈련에 믿음의 공부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십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을 고백합시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전에 성당에서 여름이면 학생들과 ‘신앙학교’을 갔습니다.
시설이 갖추어진 캠프장으로 가기도 했고, 산에서 텐트를 치면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다고 하였듯이 ‘신앙학교’를 열기 위해서 교사들은 몇 달 동안 준비하였습니다.
당시 신학생이었던 저는 여름방학이면 교사들을 도와서 ‘신앙학교’에 함께 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은 ‘조’를 맡아서 학생들과 지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주로 물품 준비를 하거나, 전례 준비를 도왔습니다.
당시 학생들에게 가장 추억에 남는 프로그램은 ‘추적놀이’였습니다.
조원들이 정해진 ‘미션’을 수행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조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풀었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하였습니다.
추적놀이의 정점은 캄캄한 밤에 무서움을 참고 목적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중간에 교사들은 몇 가지 장치를 해 놓았습니다.
무서운 소리가 나기도 하고, 분장한 귀신이 나오기도 하고, 무덤이 있기도 했습니다.
담력이 약한 아이들은 울기도 하지만 모두들 조장을 중심으로 ‘추적놀이’를 잘 마치게 됩니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위해서 ‘옥수수, 수박’과 같은 간식을 마련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추적놀이’의 시작은 ‘탄생’입니다.
아기는 엄마의 태중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습니다.
엄마와 연결된 탯줄을 통해서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먹고, 자고, 놀면서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아기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좁고, 어두운 자궁을 지나야 합니다.
그래서 태어나는 모든 아기들은 첫 호흡을 하면서 힘차게 울어 됩니다.
엄마와 연결되었던 탯줄은 잘라지고, 그 흔적은 아이의 배꼽으로 남게 됩니다.
이제부터 아이는 스스로 숨을 쉬어야 합니다.
들숨과 날숨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하루도 살아남을 수 없는 나약한 몸입니다.
부모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아이는 스스로 일어나고, 걷고, 말하게 됩니다.
인간은 다른 포유동물에 비해서 가장 오랜 시간 ‘추적놀이’를 하면서 공동체에 적응하게 됩니다.
이런 추적놀이는 인류가 쌓아온 문화와 문명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저 또한 29년 동안 ‘추적놀이’를 통해서 사회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영원한 안식을 얻을 때까지 ‘추적놀이’는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추적놀이’를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알고 싶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도를 몰랐지만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미션’을 기꺼이 수행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제물로 쓰신다던 이사악을 대신해서 어린 양을 제물로 준비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주신 ‘미션’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느님께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마련한 ‘추적놀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로 물든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의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의인이 50명만 있어도, 아니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살려 주실는지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청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살려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추적놀이의 관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셨으니 하느님께서 거두심을 감사드렸습니다.
다른 하나는 ‘행동’입니다.
오늘 중풍병자의 이웃은 예수님께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초등학생 때 심부름을 많이 했습니다.
막내인 저만 초등학생이고, 형과 누나들은 중학생 이상이라 학교 끝나고 늘 밤늦게 집에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거의 모든 심부름을 독차지했습니다.
귀찮고 힘들 것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께서는 늘 보상을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과자 하나, 아이스크림 하나….
이렇게 먹을 것으로 보상을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보상이 있어도 하기 싫은 심부름이 있었습니다.
바로 석유를 사 오는 일이었습니다.
20리터짜리 들통에 석유를 받아오는 것인데, 어린 제게 20리터는 너무 무거웠습니다.
여기에 석유 가게까지의 거리도 상당했습니다.
이렇게 힘들어서 하기 싫은 심부름이었지만, 이 역시 제가 했습니다.
착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보상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당시 시장에서 닭 다리, 닭 날개만 따로 튀겨서 팔았는데, 이것을 사 먹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석유를 받은 다음, 시장에 들러 닭 다리 한 마리를 주문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데, 이상하게도 석유가 너무 가볍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닭 다리 먹을 기쁨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또 힘이 세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글쎄 석유 들통에 구멍이 나서 계속 석유가 빠져나간 것입니다.
닭 다리 먹을 생각에 석유가 새는 것도 몰랐던 것입니다.
당시의 생각을 떠올리면, 지금 역시 영적 마음이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속적인 것에 관한 관심으로 인해서 영적인 마음은 빠져나가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빠져나가고, 평화로운 마음이 빠져나갑니다.
주님과 함께 있음 그 자체로 위로와 기쁨을 얻었는데, 어느 순간 함께 있음이 불편하다면 이 역시 영적 마음이 빠져나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보시고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에 병이라는 것은 죄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모든 병자는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벌을 받는 중이었기에 치료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당시 시대의 상황을 보셨기에, 겉으로 보이는 병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힘차게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면, 절대로 예수님의 반대쪽에 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 몇 사람은 이를 하느님 모독으로 생각했습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면서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물론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세상의 기준으로만 보고 있기에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 안에 영적인 마음이 빠져나가는 순간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 마음을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어떤 유혹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용기를 내어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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