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세상과 멀어서 절로 즐겁구나
안동 하회마을 원지정사(遠志精舍)
조선의 선비 서재에 들다
원지 정사는 원대한 뜻이라는 말 그대로 세상의 온갖 욕망을 멀리하며 유학자로서 곧은 기상과 올바른 품성을 갖고 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마음의 기운을 다스리는 곳
북쪽 숲에 정사(精舍)를 세웠는데 모두 다섯 칸이다. 동쪽은 마루(堂)로 삼고, 서쪽은 서재로 삼았다. 서재에서 북쪽으로 나가다 다시 서쪽으로 돌아서서 높다란 누각을 만들었다. 강물을 굽어보기 위해서였다.
정사를 완성하고 나서 '원지(遠志)'라 이름 짓고 편액을 내걸었다. 호수와 산에 올라 바라보는 아름다운 풍경은 새기지 않았다. 어떤 손님이 '원지'라는 이름을 이상하게 여겨서 이렇게 말해 주었다.
"원지란 원래 약초의 이름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소초(小草)라고도 한다. 옛날 중국 진나라 사람인 환온이 사안에게 '원지와 소초는 똑같은 사물인데, 왜 두 가지 이름으로 부르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환온이 '어떤 사람은 들어와 거처할 때는 원지(遠志)인데, 출사해 나가기만 하면 소초(小草)가 되네'라고 했다. 이 말에 사안은 부끄러운 빛을 띠었다.
나는 산에 거처할 때 본래 원지가 없었지만, 세상에 나아가서는 소초가 되어 버렸다. 이것이 나와 비슷하다. 또한 의학에서는 원지로써 사람의 심기를 다스려 정신의 혼탁함과 번잡함을 풀어준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심기를 다쳐 매번 약을 쓸 때마다 원지를 사용했다. 그래서 원지의 공적을 감히 잊지 못한다.
또한 미루고 헤아려 그 뜻을 넓혀 보면, 마음을 다스린다는 설은 선비들이 항상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몇 가지 뜻만으로도 서재의 이름을 '원지'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마음이 세속과 멀어서 삶이 절로 한가롭다
정사의 뒤편 서쪽 산에 때마침 원지가 스스로 자라 번번이 산 이슬을 맞고 푸른빛의 아름다운 자태를 띠니 그윽한 정취가 더욱 풍겨난다. 정사의 이름을 원지라고 한 것은 이런 사실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먼 것(遠)은 가까운 것이 쌓인 것이고, 뜻(志)은 마음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상하사방(上下四方)의 공간과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은 참으로 멀고도 멀다. 내 마음은 나아갈 곳을 얻었다. 그리고 나아갈 곳을 얻어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고,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어서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어서 잊어버릴 수 있다.
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집이 좁다는 사실을 잊는다는 뜻이다. 도연명은 자신의 시에서 "마음이 세속과 멀어서 거처하는 곳이 절로 한가롭다."고 했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누구와 뜻을 함께할 것인가.
유성룡, 『서애집』 '원지정사기(遠志精舍記)'2)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32세가 되던 1573년(선조 6년) 한없는 기쁨과 슬픔을 마주하게 되었다. 4월에 아들 위가 태어나고 6월에 이조 좌랑에 제수되는 기쁨이 채 가시기 전인 7월 13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당시 유성룡이 마주한 슬픔의 무게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서애집』 '연보(年譜)'에 전한다.
"관찰공이 6월부터 뇌후종이 생겨 병증이 날로 악화되었다. 선생(유성룡)은 밤낮없이 부친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병간호를 했다. 의대(衣帶)도 풀지 않고 잠 한숨 자지 않고 항상 환부(患部)를 입으로 빨아 고름을 뽑아냈다. 관찰공이 세상을 뜨자 너무나 슬퍼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아서, 보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유성룡은 벼슬을 내놓고 그해 8월 부친의 영구(靈柩)를 모시고 고향인 안동 하회마을로 돌아와 3년상을 치렀다.
3년상을 모두 마치고 상복을 벗자 선조 임금은 곧바로 홍문관 부교리의 벼슬을 내리고 유성룡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유성룡이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자 이조정랑에 제수했으나, 이마저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하회마을 북쪽 강 언덕 위에 5칸짜리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원지정사(遠志精舍)'다. 원지정사는 유성룡이 평소 독서도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웠는데, 그가 하회마을에 세운 최초의 건물이기도 하다. 유성룡은 훗날 병이 들어 요양할 때도 이곳에 머무를 만큼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이곳에는 서재로 사용하기 위한 정사(精舍)와 더불어 독서하고 학문을 연마하다가 싫증이 나면 자연을 벗 삼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연좌루(燕坐樓)가 있다.
연좌루는 원지정사의 건물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두 건물 모두 하회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부용대를 마주 보고 서 있다. 원지정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대청 1칸, 방 2칸으로 되어 있고 앞쪽으로는 반 칸 툇마루를 달았다. 연좌루는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기둥만 세우고 계단을 만들어 2층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2층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으로 확 트여 있어서 사방을 두루 바라볼 수 있다.
유성룡이 47세 되던 해 임금의 부름을 받고 가다가 도중에 사양하고 돌아온 다음 여러 번 불러도 다시 부임하지 않은 채 자신의 심정을 읊은 시가 있는데 시의 제목은 '연좌루의 가을 심정(燕坐樓秋思)'이다.
천고의 옛적 주역의 이치를 (千古羲文學)
3년 동안 가만히 앉아 생각했네. (三年燕坐心)
마음속에 푸른 벽이 우뚝 섰는데 (意中蒼壁立)
음미하는 옆으로 저문 강물이 깊네. (吟外暮江深)
정사나 누각에 앉아서 앞을 바라보면 하회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강물과 부용대의 자연 풍광이 확 들어오고, 눈을 더 먼 곳으로 옮기면 원지산(遠志山)이 다가온다. 유성룡이 서재 이름을 '원지정사'라고 지은 이유 역시 원지산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원지산과 관련성 외에도 유성룡은 원지정사라는 이름에 크게 세 가지 뜻을 담았다.
첫 번째는 원지(遠志), 곧 '원대한 뜻'이라는 말 그대로 유학자로서 곧은 기상과 올바른 품성을 갖고 살겠다는 뜻을 담았다. 두 번째는 들어와 앉아 있을 때 '원지(遠志)' 운운하다가도 세상 바깥으로 나가면 권력과 출세 앞에서 '소초(小草, 초라한 풀)'가 되고 마는 자신을 탓하는 뜻을 담았다. 세 번째는 도연명의 시를 빌어서 원지란 곧 '원지(遠地)'이기도 하다면서 세상의 온갖 욕망과 멀리하려는 자신의 뜻을 담았다.
원지정사와 연좌루는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하회마을)에 있으며, 1979년 중요민속자료 제85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ㅡ 지식백과
🙏
2024. 3. 24
원지정사(遠志精舍)에서...
조선선비의 매화(梅花)!
첫댓글 `매화`를 보면, 저절로 `선비`라는 단어가
연상될만큼 꽃과 향기가 아름답지요~~!
매화를 만나시러 안동까지 다녀오셨군요~~~!
원지정사의 자세한 설명과
우아한 매화의 자태를 보여주셔서
정말 감사히 감상했습니다.
맑은 하늘과 흰 구름
신선한 아침 기운을 품은 원지정사!
나뭇 가지 사이 사이로 들려오는 청아한 새소리가
어느 음악보다도 아름다웠습니다.
매화는 피고
새들은 자유롭게 날고...
선비의 뜨락을 호젓이 거닐면서
서애 유성룡 선생님의 뜻과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듯도 하였습니다.
매화는
초록사랑님께서 담으셔야 우아하겠지요.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