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진보를 자처하는 그가 보수성향 종합편성채널에 출연하고 보수주의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일까.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BBK 의혹과 관련한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1년간 복역하면서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주간조선은 두 쪽으로 날카롭게 대립한 정치의 한 진영에서 자신의 논리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정봉주씨의 태도 변화에 주목해 그를 만났다. 정봉주씨는 서울시 양천구 목동 SBS 사옥 1층에서 1시간가량 만났다. 그가 SBS에 출연한다고 해서 그곳에서 봤다. 정봉주 전 의원에게 되풀이해서 말하는 “진영논리 극복”의 이유부터 물었다.
“나는 이념적 색채가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상식론자에 더 가깝죠.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 같은 경우에는 상식으로 용납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왜 인간을 미워하겠습니까. 이 전 대통령을 공격한 것은 진영의 논리를 따른 게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였습니다. 그 사람을 공격하다 보니까 철저하게 이쪽 진영에 복종하는 사람이 된 거죠. 조금 더 법의 테두리 안에서 평등할 수 있도록 서로 노력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진보 진영의 논리와 가깝게 만든 겁니다. 강력한 진영논리주의자라고 해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30년 동안 함께 운동했던 친구들을 보면 가장 선명했던 친구들이 가끔 보수주의자가 되어 있더군요. 선명성을 주장하는 친구들은 중간에 휘거나 부러진 거죠. 그래서 진영논리에 복종하는 것보다는 힘 없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를 바라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겁니다.”
정봉주씨는 극단적 진영논리에 빠지면 진보 진영만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사회의 구조라고 분석했다. ‘보수 대 진보’라는 구도 자체가 보수 세력이 강할 수밖에 없는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가 마치 대등하다는 착시현상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해야만 진보가 정권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보수 진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때로는 보수 진영의 전략 중 좋은 것도 갖다쓰면서 좀더 유연하고 부드러운 진보가 돼 중간층을 공략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복지’를 들고나와 중간층을 공략한 것을 예로 들면서 “우리 후보는 왜 유세 때 군가를 쓰면 안 되나 생각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진보 진영이 정권을 잡으면 좋겠습니다. 감옥에서 다음 대선에서는 절대 지면 안 되겠다고 각오를 다졌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진보와 보수가 싸우면 진보가 이길 수가 없어요. 보수, 진보로 갈라놓으면 보수 진영은 한 200년 집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보수의 탈을 쓴 수구세력이 득세할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되면 아쉬운 건 진보 진영입니다. 때문에 진보 진영은 틀에 박힌 진영논리로 가지 않고 조금 더 변화된 모습, 진화된 모습으로 중도를 안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제 주장의 출발이죠. 진보 진영도 안을 들여다봤더니 맨날 우리끼리 ‘내가 더 선명하다’는 식으로 싸우다 보니까 점차 갈라지고 있습니다. 극단으로 미분되면서 오히려 입지가 축소되는 거죠. 양극단의 사람들이 목소리를 그렇게 냅니다. (극우든 극좌든) 이 사람들은 극단의 목소리를 내면 낼수록 자기들이 먹고살 구석이 있는 거죠.”
그는 인터뷰 내내 합리적 보수, 합리적 진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저의 주장은 합리적 진보와 합리적 보수가 말을 섞는 사회를 만들자는 겁니다. 진보도 잘못됐고 보수도 잘못됐다는 식의 양비론이라기보다는 수구적 보수, 꼴통적 진보, 둘이 잘못됐다는 거죠. 이 극단은 현실성도 없을 뿐 아니라 사회를 양갈래 치는데 앞장서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진보 진영 전체, 보수 진영 전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주장을 얘기하되 내 주장과 당신의 주장이 다를 뿐이고 틀리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죠.”
정 전 의원이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진영논리에 매몰되는 사람은 게으르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게으름’이라는 비판을 가한 이유를 물었다. “일단 상대방이 무슨 생각하는지 부지런히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걸 듣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니까) 게으른 거죠. 저는 새누리당 의원들을 만나면 ‘너는 목욕도 하지 말고 옷도 갈아입지 마라, 너는 너의 모습 있는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니까’라고 말해요. 자기 모습을 마냥 유지하는 게 보수인가요? 진정한 보수가 아니잖아요. 보수도 끊임없이 개혁하는데 그 방향과 경로가 다를 뿐인 거죠. 양쪽을 이해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보수가 벽을 치고 갈라놨어요. 진보가 그 패러다임에 매몰돼 엉겁결에 쫓아가는 겁니다.”
그는 보수 진영에서 극우주의자들을 쳐내는 것만큼 진보 진영에서는 종북주의자들을 잘라내야 한다고 말했다. 극단의 논리를 탈피하고 양쪽이 말을 섞기 위해서 양쪽이 해야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양쪽의 극단을 쳐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진보 진영에 종북주의자가 위장해 들어왔는데 이거 놔둘 수 없잖아요? 저는 종북주의자 반대합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들 때문에 진보 전체가 욕먹으면 극단적인 사람들은 쳐내야 하는 거죠. 보수 쪽도 그렇게 극단적 보수, 수구꼴통적 모습은 쳐내야 합니다.”
물론 정봉주 전 의원은 합리적 진보가 중도는 아니라고 했다. 진보의 가치, 진보의 핵심을 더 다지면서 보수의 목소리를 들어야지 중심 자체를 중간으로 옮기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같은 맥락에서 진정한 보수와 진보의 길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하지 않는 극우·극좌는 엉터리라는 주장도 폈다.
정봉주씨는 보수와 진보가 말을 섞기 위해 누가 먼저 손을 내밀 것이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 진영이 먼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보수 진영이 ‘가해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해자가 먼저 바꾸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약자가 먼저 화해를 청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강자가 사과하고 가해자가 바뀌려고 노력하면 우리는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 XX 위장한다’고 몰아가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언론, 특히 조중동이 가해자라고 봅니다. 언론으로서 역할을 방기하고 하나의 이념적 편향에 서서 그쪽 주장을 앞장서서 하려고 했던 모습은 언론으로서 돌아봐야 하는 문제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봉주씨는 지난 3월 채널A에 출연했고, 4월에는 봉화협동조합과 관련해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가 보수매체와 접촉했던 것은 중도층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일종의 외연 확대로 보인다. 정봉주씨는 진보 진영을 유연하게 탈바꿈시켜 중도층을 끌어들일 자신이 있다고 했다. 실제 채널A에 출연해 자신의 전화번호를 공개하며 비판할 것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는데 문자가 5000건이나 왔다고 한다. 이 중 1800건 정도가 격려문자였다고 한다. 보수채널의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이 격려문자를 보낸 것을 보고 중도층 공략의 가능성을 봤다고 했다.
“격려문자가 많았습니다. ‘나꼼수 때문에 당신 싫어했는데, 다시 봤다’ 거의 다 그런 내용이에요. 거기서 깨달았죠. ‘보수에 있는 분들이 스스로 보수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정말 보수가 뭔지 진보가 뭔지 몰랐구나’ ‘그냥 진보 진영이 잘난 척하는 모습이 싫어서 거기에 가 있던 분이구나’를 깨달은 거예요. 진보 진영 얼마나 똑똑합니까. 말 잘하죠. 남의 얘기 안 듣고, 자기 혼자 잘났다고 주장하죠. 다른 얘기하면 넌 틀렸다 그러죠. 그래서 진보가 좋아서 왔던 사람들이 이런 태도 때문에 많이 튕겨 나간 겁니다. 채널A의 ‘쾌도난마 80분’을 보고 정봉주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가졌다면, 실질적으로 진보의 가치를 잘 설명하면 충분히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다만 이제는 이분들에게 ‘보수는 잘못됐다’고 말하진 않을 겁니다. ‘우리와 다를 뿐이다’ ‘지금 우리의 가치가 조금 더 적절하다’라고 말할 겁니다.”
그는 진보 진영 내부에도 마초이즘(남성우월주의) 같은 구시대적 목소리가 많다는 지적도 했다. “삼겹살집에서 담배 피며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로는 진보 진영에 애정을 갖는 여성들을 끌어들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지자들 모임을 가지면 뒤풀이로 삼겹살집 대신 파스타집에 갈 것을 권유한다”고 했다.
정씨는 진보가 부드럽고 유연하게 바뀌면 자연스럽게 보수 진영도 바뀐다고 말했다. 그리고 진영논리가 정점에 오른 박근혜 정부에서는 진보가 바뀔 수 있는 호기도 맞고 있다고도 했다. “진보 진영이 조금 더 유연하게 중도 진영을 껴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중도층이 우리에 대해 귀를 열고 듣기 시작하면 보수 진영은 저절로 바뀌어야 합니다. ‘어? 가만있다 보니까 정봉주가 저 유연함으로 중도를 다 끌고 가네?’ 그러면 보수는 중도를 끌고 오기 위해서라도 바뀔 겁니다. 극단적 모습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하는 것이죠. 이게 진영논리가 가장 왕성한 박근혜 정부에서 필요한 모습입니다. 보수는 이기고 있으니까 몰라요. 그래서 지금이 오히려 우리는 진보 진영의 기회라고 보는 겁니다.”
그는 11월 9일부터 시작하는 대담형식의 강연회 만민공동회도 중도 진영을 끌어안으려는 노력 중의 하나라고 했다. 첫 번째 강사는 명진 스님인데 향후 보수 쪽 인사들도 강사로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이미 박형준 전 새누리당 의원이 강사로 나오기로 했고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전원책 변호사 등도 강사로 모시고 싶다고 했다. 정봉주씨는 이런 인사들을 “‘이념 보수’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는 ‘합리적 시장 보수’”라고 표현했다.
정봉주씨는 자신이 시도할 만민공동회가 노무현 정부 때 강조한 참여정치와 맥이 닿아 있다고 했다. 강사가 일방적으로 할 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참가자들이 참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만민공동회에서는 강의 후 몇 사람이 나서 3분 발언을 하면 참가자들이 3분 발언에 대해 투표로 지지 의사를 표시하고 여기서 표를 많이 얻은 사람들끼리 다시 토론을 벌여 최종 토론왕을 뽑는 방식으로 시민들의 발언을 유도할 계획이다. 이 만민공동회에는 보수든 진보든 할 말 있는 사람은 다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얘기다. 그는 만민공동회를 한 달에 한 번꼴로 전국을 돌면서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봉주씨는 인터뷰 막판 박근혜 대통령이프랑스 순방 때 프랑스어 연설을 한 것을 예로 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프랑스에 가서 프랑스어로 연설하니까 프랑스인들이 감동했잖아요?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 사람 말로 대하려고 노력을 하면 감동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하고 있는 말을 내 진영에만 던지지 말고 상대의 말로 하려는 노력을 하면 어떻다는 걸 직접 보여준 것 아닙니까. 프랑스에서는 보여주면서 왜 우리 국민이 같은 한국말로 하는 비판에는 귀를 닫고 있습니까. 말을 섞으려고 노력하면 좋겠어요. 보수는 진보의 어휘로, 진보는 보수의 어휘로 대화하자는 거죠.”
그는 ‘진영논리 극복’이라는 최근의 문제 제기가 정치 재개의 신호탄이냐는 질문에는 즉답을 피했다. 다만 정치를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한 왕도정치와, 권력을 잡기 위한 패도정치로 나누면 자신은 왕도정치에 전념할 뿐이라고 했다. 경북 봉화에서 농사를 지으며 협동조합 운동을 해온 그는 동네분들이 농산물을 파는 것을 도와주면서 만민공동회 활동에 주력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나꼼수 활동도 “필요하면 다시 할 수 있다”고도 했다. 나꼼수 같은 팟캐스트를 다시 시도해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할 수 있지만 과거처럼 무조건 비판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동감할 수 있는 비판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에게 “나꼼수 멤버들과 ‘진영논리 극복’ 같은 새로운 생각을 얘기해 봤느냐”고 묻자 “그런 어려운 얘기를 못 알아들을 인간들”이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