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예들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도 뒤죽박죽인 시중의 청나라역사를 밑을게 별반 없으니...
그 직책이나 이름 생몰연대도 얼마든 살짜기 뒤섞여 조작됐다 보면서...
구한말기 청과 조선에서 똑같은 배경에서 똑같은 직책을 가지고...똑같은 일을 했던...경친왕과 대원군...
얼굴까지 닮았습니다.
관모를 벗겨 놓고 보면 두 인물은 형재간... 아님, 이명동인(異名同人)일 겁니다.
재미있는게...
밑의 영록(경친왕?)여...그가 경친왕이든 영록이든 1836년 생이랍니다.
그의 생몰년대가 정확한것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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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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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1841년(헌종 7) 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1843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1846년 수릉천장도감(綬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뒤 종친부 유사당상·사복시제조·오위도총부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하에서 그들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난행을 일삼으면서, 한편으로 후사(後嗣)가 없는 철종의 유고시에 대비하여
조대비(趙大妃)와 가까이 지냈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命福 : 고종의 아명)이 조대비에 의해 왕위에 올랐고, 자신은 흥선대원군으로 진봉되었으며 조대비에게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서정(庶政)을 총괄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와의 동맹관계 및 김병학(金炳學)·김병국(金炳國) 등
안동김씨 일부 세력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집권 후 김병기(金炳冀) 등 일부 안동김씨 세력을 축출하기도 했지만,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권력층의 명문 양반가를 포섭하면서 양반지배층 내부에 존재하는 각 당파에 관직을 안배하여 세력균형 속에서 정권을 유지해나갔다. 이와 함께 세도정권기를 거치면서 실추된 왕족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종친(宗親)과 선파인(璿派人) 등 왕족을 집중적으로 발탁하여 재정·군사·경찰 등 권력의 핵심부분에 등용했다. 총명하고 재주 있는 중인계층을 선발하여 각 조(曹)에 집리(執吏)로 배치하고, 의정부에는 팔도도집리(八道都執吏)를 배속시켰다. 제도면에서는 권력체제의 골간인 중앙정치기구 개편에 착수했다. 1864년 1월 세도문벌세력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는 장으로 활용되던 비변사의 기구를 축소하여 중외(中外)의 군국사무(軍國事務)만을 관장하게 했다. 대신 의정부가 정부의 모든 사무를 주관하게 하고, 조두순(趙斗淳)과 같이 삼정문란(三政紊亂)을 수습해갈 수 있는 인물과 홍순목(洪淳穆) 같은 친대원군계 인물로 의정부를 구성했다. 이듬해 3월에는 정부와 비변사를 합치고 비국(備局)을 정부의 한 부서로 만들었으며, 1868년 축소된 비변사를 대신하여 군국사무를 전담할 군령기관으로 삼군부(三軍府)를 복설(復設)했다. 또한 훈련도감을 정비하여 세도문벌의 군사적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정지시키고 실질적인 군영으로 재건했으며, 국왕의 친위병인 용호영(龍虎營)도 정비하여 병조판서가 통할하게 했다. 또한 〈대전회통 大典會通〉·〈양전편고 兩銓便攷〉·〈육전조례 六典條例〉를 편찬 간행하는 등 법전 및 운영규칙을 정비했다. 한편, 유교질서의 재확립을 위해 이단사상을 탄압하여, 동학교조 최제우(崔濟愚)를 처형하고 천주교도를 박해했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경복궁 중건사업을 했으며,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거목(巨木)·거석(巨石)을 징발하는 한편 재원 마련을 위해 원납전(願納錢) 징수, 결두전(結頭錢) 부가, 성문세(城門稅) 부과, 당백전(當百錢) 주조 등을 했다. 이어 종묘·종친부·6조 이하의 각 관서와 도성까지 수축함으로써 한양의 면모를 일신했다. 그리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지방 양반들의 세력확장의 기반이자 각종 경제적 폐단의 온상이었던 서원 정리에 나섰다. 1864년 8월 서원 보유 토지의 면세를 축소하고 소속노비의 신분을 변정(辨正)하여 군포 수입을 늘렸으며, 이듬해 3월에는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했다. 1868년 서원에 정원 이외로 끼어든 자를 골라내고 서원 전결에 세금을 내도록 했으며, 수령이 서원의 장이 되어 사무를 주관하게 했다. 이어 1871년 3월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하더라도 1인 1원(院) 이외로 첩설(疊設)한 것은 모두 철폐하게 하여 47개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을 모두 없애버렸다.
서원의 철폐로 국가재정은 확충되었으나, 지방 양반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후일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대원군은 1862년(철종 13)에 발생한 임술농민항쟁의 원인을
삼정문란으로 파악하고 삼정을 개혁함으로써 농민의 불만을 수습하려 했다. 우선 전정(田政)에서는 조세지의 확보를 위해 진전(陳田)이나 누세결(漏稅結)을 색출했으며, 문제가 많은 일부 지역에서 양전(量田)을 시행하여 새로운 양안(量案)을 만들고 수세결도 늘렸다. 군정(軍政)에서는 전주민에게 균일하게 세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를 시행했다. 호포제는 양반도 호포세를 내는 것으로 양반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결국 시행됨으로써 상민은 부담액이 줄었고 신분적 평등의식도 고취되었다. 환곡문제는 1862년 삼정이정책에서 결정되었던 파환귀결(罷還歸結)이라는 근본적 개혁안을 채택하지 않고,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던 허류곡(虛留穀) 120여 만 석을 탕감하고 재정확보의 차원에서 호조별비곡(戶曹別備穀)·병인별비곡(丙寅別備穀) 등 새로운 환곡을 마련했다. 환곡의 운영방법을 개선하기 위해 일부 사창제(社倉制)를 도입하여 관리들의 간여를 금지하고 민간에게 운영을 맡겼으나, 고리대화한 환곡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될 수 없었다. 그밖에 국가재정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포량미(砲粮米)를 신설하고, 도성의 문세(門稅)를 징수했으며, 궁방(宮房)이나 포구 주위의 유력자들이 불법으로 부과하던 각종 사세(私稅)를 혁파하고 이를 중앙정부의 재정에 편입시켰다. 또한 경복궁 중건과 병인양요에 소요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당백전을 주조하고 청나라 화폐인 청국소전(淸國小錢)을 강제로 유통시켰는데, 이는 물가를 폭등시킴으로써 상민의 생활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토호의 무단(武斷)을 철저하게 탄압했으며, 궁방전(宮房田)도 세금을 내게 했다. 또 민폐가 많던
도장(導掌)·궁차(宮差)의 파견을 금지하고, 신설 궁방에 토지 지급을 폐지하는 등 궁방에 대한 억제정책도 시행했다. 반대세력의 억제를 방지하기 위해 수령의 구임(久任)을 강조하는 한편, 수령에 대한 고과(考課)를 엄격히 하고 수령 재임시의 부정을 살피기 위해 해유문기(解由文記)의 작성도 철저하게 했다. 또한 향리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여 조세횡령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근무연한에 따라 서리들을 입역(立役)하게 했다.
1866년 8월 천주교도 박해를 구실로 쳐들어온 프랑스 군대를 격파한 병인양요를 겪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대원군은 외국인에 대해 더욱 적개심을 가졌다. 그러한 가운데 1868년 4월 E.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침입하여 군아(郡衙)를 습격하고, 이어 가동(伽洞)에 있던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일어났다
(→ 남연군 분묘 도굴사건). 이로써 대원군의 외국인 배척사상은 굳어지게 되었다. 1871년 4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 함대가 쳐들어와 덕진진(德津鎭)과 광성보(廣城堡)를 점령하자,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조선정부가 외교교섭에 응하지 않고 전투가 장기화되자 미국 함대는 그해 5월 철수했다. 일본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후 근대적 조약 체결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왜양일체(倭洋一體)라는 입장에서 이를 거절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이 일단 저지되었으나, 이후 더욱 강화된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은 세계사에 자주적으로 합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세도를 봉쇄하기 위해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고종의 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민비는 척족을 규합하고 대원군 반대세력을 결집하여 대원군 축출을 추진했다. 이에 1873년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한 상소를 계기로 11월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자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나 양주에 은거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계 복귀를 꾀했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가져온 〈조선책략 朝鮮策略〉의 반포를 계기로 이듬해 전국 유생들의 척사상소운동(斥邪上疏運動)이 전개되었는데, 그때 승지 안기영(安驥永) 등이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재선(載先)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누설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에 흥선대원군이 관련되었으나, 국왕의 아버지라 하여 불문에 붙여졌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고종에게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자, 이 기회에 정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즉 대원군은 궁궐에서 도망쳐나간 민비가 죽었다고 공포한 후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별기군(別技軍)을 폐지하고 5군영을 복설했으며,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복설하는 등 반개화정책을 폈다. 그러나 곧 흥선대원군은 민씨정권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청나라 톈진[天津]으로 납치되었고, 이어 바오딩부[保定府]로 옮겨져 유폐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이홍장(李鴻章)의 밀의에 의해 1885년 8월 서울로 돌아왔는데, 운현궁에 반감금상태로 있었다. 1894년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은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민씨정권을 무너뜨린 후, 그를 앞세우고 개화파를 중심으로 새 내각을 만들어 갑오개혁을 추진하게 했다. 그때 그는 일본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기 주장을 펴다가 이노우에에 의해 정계 은퇴를 강요당했다. 그후 1895년 8월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주도한
을미사변 때 일본군과 함께 궁성으로 들어가 고종을 만나고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게 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고종이 궁성을 빠져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 친러파 정권이 들어서자 대원군은 다시 양주로 은거했다.
대원군은 서화에 능했으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그는 10년간의 집권기를 통해 왕권강화를 꾀하면서 체제의 내적 개혁으로 봉건제 해체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해서는 위정척사적 입장에서 국력을 모아 강력하게 대응했다. 그의 개혁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모두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후 조선사회는 더욱 급격히 해체되었고 외세의 침략도 더욱 심화됨으로써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게 되었다. 1907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첫댓글 길쭉한거만 닮았군요 대원군의 눈은 봉안 이고 청나라 경친 왕은 녹안이군요 녹안은 봉안에 비하면 한참 떨어집니다 그런데 대원군의 복식이 차이나식 이군요
여타의 대워눈 사진들 보십시요...
봉안이라기 좀 어려운 사진들도 있습니다...정권쟁패의 승패때마다 무지하게 얼굴이 바뀌는 스타일일듯 합니다.
대원군이나 경친왕이나 말년 관상이 비천합니다 말년에는 자중했으면 그렇게 자식복 없지 않았을 텐데 양쪽 모두 관상대로 살았습니다
위의 경친왕(아님 영록?)의 눈매 보십시여...
눈 위의 검은 라인이 눈섭이라 착각들 하실수 있으나...
그건 밑의 대원군과 같은 눈윗주름이 늙어 더 패여서 나타난 그림자고...눈섶은 그 한 참 위에 하얕게 새서 표시가 않 남도 참고하십시여.
눈 웃 주름이 더 깊게 패이면서...
일반적으론 늙을수록 축 처지는 눈꺼플이...대원군(경친왕?)의 경우엔 더 말려 올라가 동그래 진 경우가 아닐지 의심해 봅니다.
쌍꺼풀이 커지면 눈도 더 동그래지는 경우입니다.
홍진영 선생님... 혹시, 서양인이세요??? 동양인의 얼굴을 구별 못하시는 것을 보니까...
두 사람이 똑같은 인물인가요???
두 인물은 형제지간(兄弟之間), 아니면... 이명동인(異名同人)이라고요??? 얼굴 모습이 서로 비슷하면 모두 그런가요???
정권 다툼의 승패 때마다 무지하게 얼굴이 바뀌는 스타일이라고요??? 무슨 귀신인가요? 아니면, 인간 카멜레온인가요???
전체적 얼굴상을 보십시여...
누구나 죽음 임박해선 급격히 쭈글쭈글해 지는현상이지...전혀 다른 얼굴같진 않습니다.
저는 저 경친와 얼굴 보자 마자 대원군이 연상됐으니...각자 입맞차인지 싶습니다.
맨 밑에서 두번째의 대원군 노년기 사진보단 오히려 경왕 노년 모습이 더 대원군 얼굴 닮았다 전 보입니다.
각자 "입맛" 차이라고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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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유독 기록화나 지도 같은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겁니다.
한자 나부랭이 해석은... 의도한 자의 목적대로 백만가지 이상의 해석을 통한 말장난질이 가능합니다.
허나 그림은 확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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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영 선생님이 이렇게 주장하셨는데요...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에 관한 글에서...
사진도 그림인데, 보는 사람마다 입맛대로 사진을 해석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확연하다는 말인지요???
(하하하)란 댓글 꼭 필요하신가 봅니다...?
웃기니까요...
모택동 과 김대중 도 비슷 합니다 외모 그리고 인생역정 그리고 성향 까지도 비슷 합니다
그러게여...저도 모택동 사진 볼 때 마다...낯익다 했는데...김대중씨와 좀 닮았습니다...^. .^
허나, 김대중씬 무혈 민주운동가로 엄청 투옥을 당했다 풀려났다 했고...
모택동은 치밀한 무장혁명가로서...승승장구했던 자이니...많이 다르다 보이며...
일단,활동 지역과 생몰연대가 너무 크게 차이가 나오니...
두 인물은 한 인물로 가정지어보긴 어렵다 사료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