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의 누드에서 시작된 'Playboy'잡지의 신화-5]
마릴린 먼로는 자신을 향한 논란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했다. 그녀는 친한 기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털어놓음으로써 주도권을 잡기로 작정했다. 달력 속의 여자가 자신이 맞으며, 이를 부인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요, 제가 포즈를 취했어요. 그때 저는 배가 고팠거든요.” 대중은 하나같이 그녀의 솔직한 고백을 지지했다.
톰 켈리가 촬영한 그 사진은 곧 수천 개의 이발소와 술집, 주유소의 벽에 걸렸다. 이 사진은 훗날 거대한 섹스 산업 왕국의 시작을 알리는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다.
1953년 가을, 잡지 창간을 꿈꾸던 청년 휴 헤프너(Hugh Hefner)는 광고 전문 잡지에서 중서부의 한 지역 업체가 이 사진의 판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게 된다. 그는 곧장 시카고 교외로 차를 몰고 가, 다른 누드 사진들과 함께 해당 사진의 판권을 단돈 500달러에 사들였다. 사진 속에서 당대 최고의 스타 마릴린 먼로는 붉은 벨벳 천 위에 누워 수줍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먼로는 사진 게재에 대한 어떠한 추가 보상도 받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헤프너의 수백만 달러짜리 제국은 바로 이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청교도 집안에서 자란 헤프너는 개방적인 성을 추구하는 확고한 개종자이자, 성적 자유를 위한 투사가 되었다. 그는 이 대의를 추구함에 있어 매우 진지하고 열정적이었으나, 주변에서는 그의 방식에 냉혹한 면이 있다고 느끼기도 했다. 반면, 의도치 않게 대중의 화제가 된 먼로는 이 상황을 겸손한 유머로 넘겼다.
톰 켈리와 촬영할 당시 "몸에 뭐라도 걸치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재치 있게 답했다.
“그럼요, 라디오가 켜져 있었지요.”
1953년 가을, 27세의 헤프너는 아주 빠듯한 자금으로 잡지를 시작했다. 성공을 확신하지 못했던 그는 창간호에 자신의 이름조차 넣지 않았고, 발행일자도 표시하지 않았다. 초기 판매가 부진할 경우 다음 달까지 가판대에 오래 머물 수 있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전 재산을 쏟아부은 그는 실패에 대한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잡지의 제호 역시 처음부터 'Playboy'는 아니었다. 그는 원래 ‘Stag Party'라는 이름을 원했으나, 기존 잡지 '스태그' 측의 법적 조치 경고를 받고 이름을 변경하게 되었다.
헤프너는 창간호 70,000부를 인쇄하며 최소 30,000부는 팔릴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먼로의 누드 사진에 대한 입소문 덕분에 창간호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53,000부가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초기에는 불안한 마음에 직접 가판대를 돌며 잡지 진열 상태를 확인하던 헤프너였지만, 과거 잡지사 판촉 부서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노련하게 사업을 궤도에 올렸다. 두 번째 호부터는 자신감을 얻어 발행인란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고, 창간 1년 만인 1954년 12월, 발행 부수는 100,000부에 도달했다. 1955년 초에는 자본금이 250,000달러에 이르렀으며, 시카고의 한 투자 그룹으로부터 100만 달러의 인수 제의를 받을 만큼 거대한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참고 서적: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1950년대 현대 미국의 탄생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