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복(衣服)은 변화와 발전은 그 배경이 되는
사회의 정치, 경제적 상황에 밀접한 영향을 받는다.
의복이 그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적
변화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우리의 의복이
사회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 정리해봤다.
1940년대 해방을 맞이한 후 70년, 우리의 의상은
시대의 변화만큼이나 숨 가쁘게 달라졌다.
'의상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다'는 말처럼
시대마다 특징이 두드러졌다.
해방 직후에는 일본이 남겨놓은 왜곡된 복식의 흔적이 여전히 이어졌고,
전쟁이 있던 시기에는 전쟁 물자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전쟁 후에는 사회 재건 분위기에 맞춰 실용적인 옷이 등장했다.
또,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1970~1980년대에는 옷도 춘추전국 시대를 맞았다.
1990년대 이후로는 무엇이라고 딱 부러지게 꼽을 수 없는
개성 있는 패션이 거리를 휩쓸고 있다.
각 시대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한 패션을 다시 한 번 짚어봤다.
◇'유관순 열사'와 '몸뻬'의 공존 (1940년대)
1940년대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도 우리의 복식 속에 일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물론 대세는 '유관순 열사' 스타일의 한복이었지만
여성들은 일본 군국주의가 물려준 간편 작업복
몸뻬와 남자들이 입다 만 흰색 셔츠를,
남자들은 바지저고리에 오버코트나 망토를 입었다.
(왼쪽부터) 1940년대 남녀 한복 스타일, 몸뻬 바지.
광복 후 귀국선을 타고 돌아온 해외동포들은 이 복식을 크게 바꿔놓았다.
중절모와 감청색 양복, 야자수 남방, 그리고 구두를 신은
'마카오 신사'들이 여성들 눈길을 사로잡았다.
서울 을지로 입구에 '미라보 라사' 같은 맞춤점이 생겨났다.
멋쟁이들은 으레 새털 달린 중절모를 썼고
가슴주머니에는 아리랑 담배가 꽂혀 있었다.
여성들 사이엔 파머머리라는 듣도 보도 못한 머리가 대 유행했다.
◇구제품, 밀수품, 그리고 나일론 (1950년대)
1950년대 초반은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주된 옷의 공급처가 '미군부대'였다.
몰래 빼 온 군복을 검은색으로 염색해 입었다.
이 영향으로 염색집도 생겨났다.
군용담요로는 코트도 만들었다.
담요 코트에 찍혀 있던 'USA' 마크는 염색해도 없어지지 않아
당시 이화여대에는 '유에스에이'라는 별명을 가진학생들이 여럿 탄생했다.
또 군복 밑단을 좁게 고친 '홀태바지'와
배급받은 낡은 옷을 뒤집어 입는 '우라까이 패션'도 등장했다.
[좌]군용 담요 코트 (등록문화재 제616호),
[우]<로마의 휴일> 스타일의 옷을 입은 엄앵란.
이 시기에는 구호품과 더불어 밀수품도 증가했다.
이 밀수품 중 마카오 복지와 비로드(벨벳) 옷감은
당시 남녀 멋쟁이의 상징이었다.
특히 비로드 치마 한감의 가격은 대학등록금과 맞먹을 만큼 비쌌다.
1956년 크게 히트한 영화 <자유부인>에서 주인공이 입은
비로드 소재가 선망의 대상이 되어
비로드 옷감으로 만든 한복과 양장이 유행하기도 했다.
전쟁을 거치면서 오래 입을 수 있는 질긴 옷을 선호하게 되면서
미군에서 흘러나온 나일론 소재 낙하산으로 옷감을 만들어 입기 시작했다.
나일론은 한마디로 혁명이었다.
도무지 구멍 나거나 찢어지지 않는 신비한 옷감이었기 때문이다.
50년대 초 패션을 이끌었던 양공주들은
속이 훤히 비치는 낙하산지로 만든 블라우스를 입었다.
1954년 태창방적이 나일론을 자체 생산하면서
나일론은 와이셔츠, 팬티, 양말까지 점령했다.
나일론의 보급은 섬유산업 활성화의 계기가 됐다.
1956년에는 노라노 여사가 한국 최초로 패션쇼를 개최하며
한국 현대 패션의 개화를 알리는 사건이 됐다.
이외에도 1950년대 중반에는 영화 <로마의 휴일> 영향으로
오드리 헵번의 스타일이 유행했다.
치맛단을 부풀린 플레어 스커트와 숏 커트,
몸에 꼭 끼는 맘보 바지가 여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1959년부터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길거리 여성들이
모두 임신부처럼보이는' 펑퍼짐한 색(sack) 드레스가 유행을 탔다.
당시 신문에 난 재건복 스타일과 재건복을 입고 결혼하는 부부, 재건복 홍보 리플릿.
◇군사정변과 미니스커트 (1960년대)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이 일어나며 의복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군사정권은 '의상 간소화 운동'을 펼쳤다.
농촌에서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짧은 치마 입기 운동을 벌였다.
타이트, 혹은 넓은 플레어 치마 대신 '세미'라 불리는 적당한 치마폭이 유행했다.
남성들도 '재건복'으로 통칭된 작업복 스타일 잠바와 콤비를 입고 다녔다.
한복은 의례복으로 전락했다.
<새엄마> 포스터 속 후카시 머리, 윤복희의 미니스커트와 광고 연출된 사진(아래),
<맨발의 청춘> 속 가죽점퍼를 입은 신성일.
1963년에는 영화 <새엄마>의 주인공 머리를 본뜬 '후카시'
혹은 '바가지' 헤어스타일(과장되게 부풀린 머리)이 유행했다.
이로 인해 후카시 가발이 대인기를 끌었고,
결국 중요한 수출산업으로 성장했다.
또 이듬해에 나온 영화 <맨발의 청춘>은
남성들 사이에 가죽 잠바를 유행시키기도 했다.
때마침 이어진 월남 파병은 '월남치마'라는 색다른 패션을 낳았다.
1967년은 우리나라 의복 역사의 한 획을 그은 해다.
바로 가수 윤복희씨가 그해 1월 귀국해 몇 개월 후
패션쇼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난 것.
그리고 앨범 재킷 사진에서도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이후 미니스커트는 들판의 불길처럼 전국을 휩쓸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윤씨가 비행기에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내렸다'는 얘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영상은 1996년 기업 광고로 연출한 것인데
마치 실제인 것처럼 이야기가 전달됐다.
◇강압적 정치 분위기 속 패션으로 피어난 자유 (1970년대)
1972년 10월 유신으로 군부체제가 시작됐다.
억압받는 정치 상황과 긴급조치와 휴교령으로
얼룩진 그 속에서 패션은 오히려 더욱 다양하게 피어났다.
드라마 빛과 그림자 제작발표회에 1970년대 옷을 재현해 입고 나온 배우들.
1970년대 초반 명동 거리 패션은 판탈롱,
미니스커트, 핫팬츠가 유행했다.
판탈롱은 바지 밑단이 워낙 넓어
"명동거리는 청소부가 필요 없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았다.
1971년 럭키화학에서 만든 인조가죽은
핫팬츠의 폭풍을 몰고 왔고,
무릎길이의 롱부츠를 유행시켰다.
여기에 한국전쟁 이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가
그들만의 청년 문화를 형성하며 청바지와 장발도 시대의 유행을 이끌었다.
하지만 1973년 3월, 미니스커트와 장발을 단속하는
'경범죄 처벌법'이 발효돼 청년문화를 억압했다.
당시 경찰들은 오른손엔 가위, 왼손엔 자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당시 신문에 경찰들이 미니스커트와 장발을 단속하는 모습이 실렸다.
1970년대에는 패션의 춘추전국 시대라 할 만큼
다양한 스타일이 유행했다.
스커트 길이는 미니·미디·맥시로 다양해졌고,
바지 또한 스트레이트·통 넓은 판탈롱·배기·
고고 바지·핫팬츠 등 각양각색의 스타일이 공존했다.
여기에 맘보바지나 색(sack) 드레스 같은
복고풍이 되돌아왔고, 한편으로는 시스룩 같은 최첨단 패션이 등장했다.
◇영 패션과 캐주얼 웨어 (1980년대)
1980년대는 제5공화국과 제6공화국의 군사 정부 아래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경제가 안정적인
성장을 이룩하고 수출이 증대된 시기다.
GNP가 상승함에 따라 일반적이 소비욕구도
증가했고 패션에 대한 요구 역시 다양화, 고급화 됐다.
'교복 자율화 조치' 후 한달, 당시 신문에 나온 학생들의 모습(왼), 스포츠 웨어를 외출복으로 입고 다닌다는 당시 기사.
1980년대의 가장 큰 변화는 영 패션의 등장이다.
1983년 문교부의 교복 자율화 실시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옷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주니어복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를 얻으며 캐주얼 웨어의 비약적 발전이 일어났다.
한편으로는 86 아시안 게임, 88 서울 올림픽 등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의 개최로 스포츠 웨어가
패션의 큰 흐름으로 등장했다.
이런 이유로 1980년대에는 캐주얼 웨어와
스포츠 웨어를 일상복으로 입는 경우가 보편화 됐다.
또 이 시기의 여성들 사이에서는
앤드로지너스 스타일이 유행했다.
앤드로지너스 스타일이란 간단히 말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함께 입는 것을 말한다.
패드로 어깨를 강조한 정장스타일이 그 대표적인 예다.
1985년 이후에는 GNP가 2000달러를 넘어서면서 정부의
개방정책에 따라 외국 디자이너 브랜드의 국내도입이 활발해졌다.
이에 따라 패션의 고급화가 일어나고,
이 때부터 세계와 같은 패션을 소비하기 시작했다.
◇강남에선 서태지, 강북에선 복고, 백화점에선 명품 (1990년대)
·16 이후 첫 민간인 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는
개방화와 국제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1993년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 타결로
외국 상품의 수입이 개방됐고,
1996년엔 유통시장이 개방되며 세계적
브랜드 상품들이 국내 시장으로 들어왔다.
외국의 고가 브랜드들이 백화점에서
본격 영업을 시작하면서 '명품'이 점차 대중화됐다.
하지만 1990년대의 패션에서 가장 혁신적인
아이콘은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청소년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무대 협찬 의상이라 상표를 안 떼고 입고 나온 상의가
그대로 유행이 됐고, 헐렁한 힙합 바지,
스노보드룩을 연상시키는 점퍼, 바닥까지 끌리는
벨트와 자기 사이즈보다 큰 워커 등도 큰 인기를 누렸다.
1997년 12월 25일 유행되고 있는 힙팝패션으로 차려입은 거리의 젊은이들.
서태지의 패션이 강남에서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면,
강북에서는 복고풍이 한 흐름을 이어갔다.
데님과 셔츠를 매치한 스타일과 롤러스케이트장에서
유행했던 청청 코디가 그 예다.
이런 패션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1990년대 후반엔 IMF로 의류 업계 업체들이
줄줄이 도산하며 패션업계가 잠시 주춤하는 듯했지만
비슷한 시기에 생긴 동대문 패션타운이
활성화되며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대문 패션타운은 중저가
의류 시장이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밖에도 패션이 다원화되며 1994년에는
배꼽티가 유행해 사회적 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1999년에는 사이버룩의 영향으로 광채 나는
메탈릭과 가죽 소재들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한·일 월드컵과 온라인 시장 (2000년대)
2000년대에 들어서서는 새천년에 대한 기대감이 패션에 반영됐다.
연두색, 오렌지색 같은 화려한 색상과 과장된 장식,
펑키한 디테일을 추구하는 맥시멀리즘이 하나의 주류로 등장했다.
우리나라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붉은 색 계열의 옷이 트렌드로 작용했고,
축구 유니폼도 패션 아이콘으로 인기를 끌었다.
특히, 당시에는 월드컵에서 응원단들이 착용한
붉은악마 의상과 그 위에 쓰인 전통무늬가 폭팔적인 인기를 얻었다.
(왼쪽부터) 한·일 월드컵 당시 모습, 맥시멀리즘 의상, 온라인 쇼핑.
중·후반부터는 인터넷을 통한 의류 구매라는 현상이 보편화 됐다.
온라인 구매는 파격적 가격과 손쉬운 구매 등의
강점을 내세워 요지부동으로 보였던 오프라인 시장을 뒤흔들었다.
또, 인터넷의 발달은 해외 트렌드들이 국내에 실시간으로 영향을 미쳤다.
후반에 들어서서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스키니 팬츠와
레깅스가 폭발적 인기를 끌었고,
이는 현재까지도 연령층을 넓혀가며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